Pharmacy RAW novel - Chapter 11
11화.
11화
안소니 가흔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걸어오는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남자가 가흔과 몇 발 거리로 좁혀졌을 때였다. 남자의 앞을 갑자기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안소니 선배님, 선물이에요. 받아 주세요. 제 친구가 드리는 거예요.”
새빨개진 여자애가 큰 소리로 구령을 붙이듯 말하며 쇼핑백과 자판기 코코아를 내밀었다.
오오, 예. 예. 예!
복도에 환호성과 쑥덕거림과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신영이 손을 들어 가흔의 귀에 붙이고는 빠르게 중계하듯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진 않았다. 손으로 가리면 뭐 하나, 평소에도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흥분감 때문에 안소니 귀에도 들릴 만큼 크다.
“안소니 선배가 코코아를 좋아해. 핫초코도 아니고 꼭 점심 먹은 후에는 자판기 코코아를 먹는다더라. 뼛속까지 귀족인데 또 서민적이야. 완전.”
이 상황이 몹시 당혹스러운 듯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키는 컸지만 눈처럼 하얀 볼에는 소년 같은 순수함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선이 가늘고 긴 팔을 들어 손등과 손목 사이 부근을 이마에 대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잠시 그대로였다. 이내 기름한 손가락으로 이마에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키가 작은 여학생과 눈이라도 맞출 듯 상체를 약간 낮추고는 물었다.
“무슨, 내기라도 한 거야 ”
여자애가 얼굴도 들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짓궂은 친구들이네.”
“친구가 선배 많이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
여자애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자가 후우, 숨을 내쉬었다. 생김새와 꼭 닮아 우아하고 가느다란 숨이다.
“나 원래 선물 안 받는데. 내가 받으면 네가 이기는 내기야 ”
“네.”
남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여자애와 손이 닿지 않도록 신경 쓰며 코코아를 건네받고, 봉투 손잡이를 쥐었다.
“고마워. 친구에게 전해 줘.”
남자가 말을 하는 동안 시장터 같던 복도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숨을 죽인 관객들의 귓속을 파고들어 가슴을 울리고, 남자의 외모는 모든 이의 눈을 부시게 했으며 남자의 매너는 일시에 모든 이를 닥치고 무릎 꿇게 만들었다. 얼마나 사려 깊고 다정하고 침착한 말투와 태도인지 남자가 말이 끝난 후에도 비아냥 섞인 야유는 일체 없었다. 여자애들은 “끼아아, 멋져!”라고 노골적으로 소리 지르고 방방 뛰었다. 남자들은 박수를 치거나 낮게 웃었다. 야유의 대상이던 여자애는 순식간에 용기와 파이팅 넘치는 용자가 되었다.
“와아, 매너 끝내주지 않냐 ”
신영도 얼굴이 다 붉어져서 찬양하였다.
가흔은 피식 웃었다. 남자의 눈을 내내 보고 있었다. 곤혹스러움과 냉소, 짜증이 서린 눈빛이었다.
“그렇지 않아 ”
“가자. 점심시간 끝나겠어.”
가흔은 신영을 독촉하며 사람들을 헤쳐 나갔다.
“안소니, 오늘 진짜 멋지다. 역시. 역시. 역시. 그대는 안소니. 오오, 나는 캔디가 되면 안 되겠소오.”
가흔이 호들갑 떠는 신영을 끄집어 당겼다.
“아냐. 속지 마. 정치인 아들이네, 뭐.”
“응 ”
“안소니 쳇, 절대 아니거든. 겁나 재수 없는데 아버지가 국회의원이지 자기가 정치인이야 ”
가흔이 신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 무슨 소리야.”
절대 들렸을 리 없는데 우연치고는 좀 찝찝하게도 안소니가 걸음을 멈추고 가흔을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안소니가 한 걸음 가흔에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좋다더니 신영은 거리가 불쑥 좁혀지자 으악,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갑자기 숨듯이 뒤로 빠졌다. 워낙 아이들이 안소니를 에워싸고 몰려 있다 보니 가흔과 안소니가 원 대열의 중심에 서게 된 모양새였다.
안소니가 가흔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안녕 ”
안소니가 가흔을 향해 너무나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네 ”
가흔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데, 마치 눈이 마주치면 외국인들은 낯선 이에게도 인사한다는 ‘하이(Hi)’ 정도 내뱉은 것처럼 안소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다. 아무 의도가 없었다는 듯이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하고는 옆 친구에게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점심시간 끝나겠네. 서두르자.”
신호처럼 다들 빠르게 움직였다. 가흔도 마찬가지였다. 바쁘게 안소니를 스쳐 지나려는 순간 가흔의 목덜미로 뜨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소니의 코코아가 가흔의 블라우스 깃과 앞섶을 적시고 교복 재킷 위로 주르륵 쏟아졌다. 이미 식어 있어 그리 뜨겁진 않았지만, 교복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걸 어떡하지. 다치진 않았니 데이진 않았어 ”
안소니가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사죄를 했다.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가흔이 손으로 툭툭 교복을 털었다.
“아냐. 너무 미안해.”
안소니가 교복 바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재킷을 닦으려나 싶었는데 갑자기 목덜미로 손수건을 가져갔다. 가흔이 헉하고 숨을 멈추었다. 둘을 지켜보던 모든 여학생이 헉하고 숨을 멈추는 소리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의도한 박자같이 동시에 복도를 울렸다. 숨 멈추는 소리의 메아리 곡을 지휘한 안소니는 정작 아무것도 못 들었는지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가흔의 목덜미를 닦았다.
“발갛다. 덴 건 아닌지 양호실에 가 보자.”
아악, 여학생들의 신음 소리가 동시다발로 여기저기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발갛다, 발갛다, 발갛대 소리가 다시 메아리쳤다.
“아뇨! 멀쩡해요. 코코아 다 식은 거 아시잖아요 들고 있었으니까.”
‘너 미쳤냐, 왜 선배한테 신경질이야.’
신영이 말 대신 눈을 부라렸다. 신영이 가흔의 등을 툭 치고는 다시 쓱 숨어들었다.
피식, 안소니의 눈이 웃었다. 눈웃음 없는 냉소였다.
뭐야, 일부러 설마
가흔의 눈에서 메시지를 읽었는지 입가에도 비슷한 미소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이내 안소니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안소니가 재킷을 훌쩍 벗더니 가흔의 어깨에 걸쳤다. 복도를 에워싼 여학생들은 숫제 비명이다. 안소니가 가흔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흔의 볼에 소름이 쭉 돋았다.
“재킷, 이걸로 갈아입어.”
“필, 필요 없습니, 다. 재킷 멀쩡해요!”
“하긴, 가흔이 블라우스가 더 많이 젖었다.”
사려 깊은 눈매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수줍음을 담고서 안소니가 가흔을 부드럽게 관찰했다.
‘대체, 이름은 언제 외운 거야. 미친.’
가흔의 턱이 덜덜 떨렸다. 레이저 빔을 끊임없이 쏘고 있는 여자 선배들의 눈길로 사살되는 느낌이다.
“블라우스, 어떡하지 ”
안소니가 제 교복 남방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
“악! 아뇨! 블라우스 괜찮습니다!”
가흔이 비명을 지르듯이 답하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가흔아, 미안해. 나중에 천천히 재킷 돌려줘도 돼.”
돌아보니 안소니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고 홀딱 홀리는 눈웃음이다.
아, 이이이 미친. 미친, 미친. 싸이코.
가흔은 재킷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
코코아, 목덜미, 발갛다.
고등학교 입학 첫 주에 가흔에게 일어난 비극이었다. 음모와 질투, 무리 짓기와 왕따, 비어와 폭력이 횡횡하는 무시무시하고 스펙터클한 중학교 생활을 겪어 내면서, 가흔의 생활신조 중 하나는 ‘묻혀 가자’가 되었다. 정글에서 동물들이 보호색을 쓰는 이유가 달리 있지 않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환경에 적응하여 제 모습을 배경에 동화시킨 종만 살아남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쁜 가정 환경을 상쇄하기 위해선 특별히 조심해야 했다. 더 음울해 보여도 안 되고, 더 발랑 까져도 안 되고, 더 심각해서도 더 까불어서도 안 된다. 절묘한 지점으로 균형감을 유지해야, 가흔은 ‘흔한 학생’으로 분류되어 무리에서 이탈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묻혀 가자’, 그 다짐과 노력을 안소니가 보기 좋게 박살 냈다.
‘발갛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방과 후부터 가흔의 교실 뒷문에 불이 났다. 가흔은 쳐다보면 시선을 낮춰서 피해야 하는 여자 선배들한테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두들겨 맞거나 머리채를 잡히거나, 집단 폭행으로 입술이 터지고 다리를 절룩거리고 교복이 찢어지는 상상을 했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들 가흔과 안소니가 무슨 사이인지 살피는 탐색이 먼저였다. 혹여 이사장 아들과 친분 있는 아이를 건드렸다가 골치 아파지긴 싫어 조심한다는 것을 가흔은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안소니 선배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야 ”
팔짱을 끼고서 송설희 선배가 물었다. 송설희와 똑같이 팔짱을 낀 선배들이 가흔을 둘러쌌다. 설희의 눈을 보는 순간 가흔은 아니요, 라는 답을 순식간에 바꿨다.
“아주 조금이요.”
틀린 말은 아니다. 아는 사이이지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친하지는 않아요.”
“알아.”
송설희가 비웃으며 답했다. 네까짓 게 어떻게 친하겠어, 하는 투였다.
“안소니 선배가 매너 좋고 착하고 그렇지만, 접근하긴 좀 벽이 높잖아 ”
“네, 네.”
“그래서 말인데, 네가 뭘 좀 알아다 주면 좋겠어.”
“네 ”
“우리 학년 장미, 알지 ”
“아, 네.”
송설희와 쌍벽을 이룬다는 라이벌 홍장미 선배 이야기였다. 홍장미 아버지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한다고 했다. 딸만 아니면 벌써 데뷔시켰을 거라고 할 만큼 홍장미는 얼굴도 조막만 하고, 몸매는 올록볼록 볼륨감이 넘치고, 똑같은 교복 차림을 하고서도 탁월하게 예뻤다. 홍장미의 본명은 홍정미였지만 다들 붉은 장미, 홍장미라고 불렀다.
“걔가 안소니랑 사귄다더라. 사귀는 거 아니면 나한테 P사 핸드백 사 준다고 했어.”
가흔은 입을 떡 벌렸다. 역시, 신분이 다른 공주님들이라 그런지 스케일도 다르다 싶었다.
“그런데, 소식통에 의하면 안소니는 중립이고 홍장미가 들이대는 중이라던데, 애매해. 조만간 안소니 선배가 딱 잘라 거절을 해야 정리되는 거거든 ”
“네.”
가흔이 끄덕끄덕했다. 속으로는 어쩌라고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니까 말야.”
송설희가 얼굴을 바싹 붙였다.
“네가, 증거를 잡아 와.”
“네 제가요 어떻게요 ”
설희가 짧게 웃었다. 설희가 거느린 무리들이 메아리처럼 따라 웃었다. 하하 호호 턱을 반 직각 정도 비틀어 올리고는 과시적으로 내뱉는 신경질적인 웃음이었다.
“후배님, 사진을 찍든 동영상 촬영을 하든, 녹음을 하든 자필 서명을 받든. 방법은 많지 아, 안소니 선배 사진은 많을수록 좋아. 넘기면 알바비 두둑하게 줄게. 사진 찍기를 질색하는 사람이라서 도촬도 몇 개 안 돌아. 그 얼굴인데 왜 사진 찍히는 게 싫은가 몰라. 사진 찍는 것만은 알짤 없이 용서가 없네. 무서워서 아무도 사진은 못 찍어. 그러니까, 가흔 후배.”
설희가 바싹 얼어 버려 나무처럼 굳은 가흔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서 잘 해 봐. 베스트 컷으로 사진 부탁해. 셀카면 더 좋겠네. 안소니 선배는 셀카는 절대 안 찍는 사람이라니까.”
송설희가 캔디의 악녀, 이라이저처럼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