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27
27화.
27화
“응 뭐가 ”
너 설마 몰라 모르는 건 아니지
“응, 알아. ……알지.”
차마 모른다는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돈 많은 동아줄이 서병원이었구나. 서병원과 저울질을 했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괜찮아 하긴 괜찮다니. 말도 안 되는 거 아냐 원일 오빠도 엄청나게 배신감 느낀다더라. 원일 오빠 아버지가 서병원 원장님이랑 친분 있어. 전공이 다르긴 하지만, 동문이니까. 원한다면 서병원 원장님한테 원일 오빠 아버지께서 귀띔하실 수도 있대.
다인은 평소에도 우아한 가식을 단어 사이사이마다 바르며 가흔을 위하는 척 속을 뒤집었다. 이번엔 숫제 바닥에 엎어진 가흔을 가차 없이 까문질렀다.
세상에 웬일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흔이 너가 아등바등 약사하면서 번 돈 승준이 밑으로 들어간 거 다 알아. 겨우 레지던트 끝나 가고 이제 의사 사모님 소리 듣나 했더니. 승준이가 너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버린 놈인 거 서병원 원장님이 알면, 절대로…….
“다인아.”
가흔은 맞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발목에 붙은 차가운 플라타너스 잎을 떨쳐 내려 발끝을 세워 탁탁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굴렀다.
“원일 선생님한테 꼭 전해 줘. 나 그 셰프가 하는 프렌치 식당에서 밥 사 달라고. 풀코스 사 준다고 했잖아. 먹어 보고 싶어. 꼭 사 달라 그래.”
……가흔아
“밥이나 사라고. 그걸로 충분해. 내가 2인분 다 먹어 줄 테니까.”
가흔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바람이 세게도 불더니 모래알이 눈에 들어와 박힌 것 같다. 아파, 아파라. 주르륵 눈물이 뺨으로 굴렀다. 핸드폰을 쥔 손이 저려 왔다. 내려다보니 팔이 떨리고 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툭툭 불거진 채로 팔을 떨며 손이 저리도록, 핸드폰만을 움켜쥐고 있었다.
꽉 움켜쥔 손 안에서 핸드폰이 차랑차랑 멜로디를 울렸다. 흐린 눈으로 보니, 민지후다. 투둑 눈물이 액정 위로 떨어진다. 우는 채로 통화를 할 수 없어 가흔은 꾹꾹 울음을 삼켰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눈앞이 다시 부옇게 흐려졌다. 가흔은 벨이 울리는 채로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손등으로 눈을 꾹 누르고, 발을 끌다시피 걸어가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다리로 하나씩 계단을 밟아 오르는 동안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멜로디가 끊어지기 직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선배님.”
감기 걸렸어
가흔은 목소리를 다듬었다. 애써 높은 톤으로 답하였다.
“아니요. 좀 피곤해요. 계속 잠을 설쳤더니.”
그럼 다음에 볼까
“전화로 말씀하세요.”
설렘도 기대도 끊고 싶어, 가흔은 먼저 용건을 물었다.
“할 말……, 혹시 동생 문제예요 ”
맞아.
“네.”
예상대로 동생 이야기였다. 하아, 가흔은 맥없는 숨을 내쉬었다. 무얼 달리 기대했었나.
미국에서 온 지 세 달쯤 착한 애야. 다리를 다친 뒤에 마음을 못 잡아서. 본가에서 나와서 내가 데리고 있는데, 나도 집에 너무 늦게 들어가니까.
“네.”
501호, 가흔은 현관 비밀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어디 다녀오는 길
“네.”
계단을 오른 뒤라 어쩔 수 없이 가빠진 숨을 쉬면서 답했다.
“원룸 빌라 사는데, 펜트하우스 5층이에요. 계단 열심히 올라 도착이요.”
응.
현관을 열자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자그마한 방 안에 햇살이 가득 들이치고 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옥탑의 단점은, 맘껏 열어 둘 수 있는 바람이 통하는 창, 이불을 잘 말릴 수 있는 햇빛으로 충분히 상쇄되었다. 신발을 벗어 한쪽으로 밀어 두고, 행어에 가방을 걸었다. 좁은 원룸은 조금만 흐트러져도 방 전체가 창고처럼 되어 버린다. 엄마와 함께 살던 단칸방 시절부터 아주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다.
찬후가 학교에서도 많이 힘들어 해. 세영이한테 들으니 공부방이 있다고. 같은 학교 친구도 있으니…….
가흔은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꼼짝도 하기 싫지만 일어서서 방바닥에 나뒹굴어진 쿠션을 향해 몸을 구부렸다. 아침에 들떠 껴안았던 쿠션이다. 화장대와 책상을 겸하여 사용하는 폭이 좁고 긴 테이블에 앞에 둔 의자 위치를 바로 잡고, 그 위에 쿠션을 반듯하게 놓았다.
피식, 힘없는 웃음이 입술 사이로 흘렀다. 몸이 천근 같다. 이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다. 의자에 앉아 비스듬히 세워 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다. 우연한 만남과 약간의 설렘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화 속의 안소니는 안소니로 남기를.
“약국 안에 만들어 둔 공부방은 찬후가 올 곳은 아니에요. 형편이 몹시 어려운 아이들, 꼭 저 같은 애들…….”
가흔은 불쑥 치받는 덩어리를 꾹 눌러 삼켰다.
선배는 알잖아요. 늘 배가 고팠고 함부로 괴롭힘을 당하고, 급식비도 참고서도 살 돈이 없었던 나를. 안소니가 동정했던 정가흔을.
“그런 애들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 하나둘 오게 했던 거예요. 정작 저는 해 주는 것도 별로 없고요. 애들끼리 모여서 같이 문제지나 풀고 서로 채점해 주는 수준이에요. 미안해요, 선배님.”
도저히 안 되겠어
“아무래도, 위화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 그렇구나.
“네,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수화기 너머 아무런 답이 없다. 서운하겠지.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지후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서도 흔공부방에 찬후를 선뜻 받기에는 너무 버겁다.
찬후를 어루만지던 지후의 손이 떠오른다. 부드럽고 따뜻하겠지. 아무것도 아닌, 정가흔에게도 친절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형이 있는데 찬후는 굳이 흔공부방이 아니라도 잘 지낼 수 있을 테다.
민지후만 생각하면 독서실 부스에 있던 나무결 책상이, 하얀 벽에 붙어 있던 푸른 불빛을 내던 산소발생기가, 고소한 토스트가 떠오른다. 고개를 기울인 안소니, 공부에만 열중하던 성실한 고등학생이 어제 일인 듯 선명하고, 안소니의 아메리카노향이 코끝을 스치는 것만 같다.
……가흔아.
지후의 부름에 퉁, 가슴이 울렁인다. 울렁이는 제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아 가흔은 답하지 않는다.
잠깐 얼굴 보고 이야기해.
“다음에요. 어디 나갈 만한 기운이 없어요.”
궁전빌라. 맞지
“네 ”
기다려. 10분이면 도착해.
“네 ”
뚝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서 가흔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거울을 보았다. 10분 후다닥 일어나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을 찬물로 씻었다. 로션을 채 다 펴 바르기도 전에 핸드폰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어이없어. 5분 남짓 지났을 뿐인데.
가흔은 행어 앞으로 다가가 옷들을 주르륵 손으로 넘겼다.
뭘 입어야 하나. 화장은, 아…… 정말.
행어와 옷장을 종종거리며 오가다가 멈춰 서서 가흔은 마른세수를 했다.
몇십 분씩 기다리게 하고 꾸미는 건 그럴 만한 사이일 때나 하는 일이다. 약국에서 더한 모습도 보였는데. 고등학교 때는 더 초라했었는데. 뭘 꾸밀 일이 있을까. 맨발에 운동화만 신고서 가흔은 5층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안녕.”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승용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지후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13년 전에도 늘 그랬듯이……. 심장과 다른 겉모습을 만드는 일도 그래서 익숙하다.
“굿모닝이에요.”
“모닝이라기엔 해가 너무 높이 떠 있는걸.”
지후가 조금 웃는다.
“10분이라더니.”
“과속했어.”
“모범생이 설마. 궁전빌라는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
“그날 밤에 세영이가 말하더라. 찬후가 약사님은 매일 약국에서 지내냐 물으니, 저어기로 가면 궁전빌라 나오는데 거기가 약사님 집이라고. 대체 저기가 어디냐고 하니 **동이라던데. 나더러 데려다주라 압력 넣는 건가 잠시 고민했어. 룸미러로 눈이 마주치니 웃더라. 다음에 데려다주세요. 오늘은 약국에서 벌써 잠들었을 거예요. 그러더라.”
가흔이 피시식 웃었다.
“세영이가 깜찍해요.”
“찬후가 세영이 좋아하더라.”
“좋아하지 말라 그래요. 우리 예쁜 세영이 상처받아.”
“정가흔.”
“네 ”
“너, 오버야.”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시니컬하고 냉정한 눈빛이다. 정가흔만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던 눈빛은 여전하다.
“죄송해요.”
“뭐가.”
“찬후에 대해 오버도 죄송하고, 못 받아 줘서 죄송하고.”
“그러게. 네가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 운운할 때는 뭐라도 해 줄 거라 기대했는데 말야.”
“이사장님께는 갚을게요.”
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돈으로 아버지에게 민경국 변호사님 돈 많아. 무지막지하게.”
“그래도 찬후로 갚고 싶진 않아요.”
“냉정하네.”
“……이사장님께는 너무 죄송해요. 정말 은혜 갚아야 하는데.”
지후가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솔직히 장학금에 대한 은혜라면, 이미 충분히 갚고 있잖아.”
“네 ”
“공부방.”
“아……. 공부방……. 그건 돈 별로 안 들어요. 저는 장학금 못 줘요. 애들 배고파하는데 맛있는 간식도 잘 못 사 줘요.”
가흔의 귓등이 붉어졌다.
정말 별거 아닌데.
“공부방이 더 훌륭해.”
“아니에요. 아무것도. 창고에 책상이랑 보드만 있어요.”
지후가 말없이 가흔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머쓱해져서 가흔은 시선이 닿는 뺨을 손등으로 쓱 문질렀다.
붉어지지 마. 제발.
“이따금 생각했어. 정가흔은 지금쯤 약사가 되었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지내나.”
“난 선배님 뭐 하는지 알았는데. 어디 다니는지도 알고. 실제로 보니까 홈페이지 사진보다 훨씬 더 멋진 변호사님. 번쩍번쩍 눈부셨어요. 지금도 눈부셔요. 고등학생 안소니보다 백배는 멋있어요. 정말이에요. 막 심장도 뛰고 그래요.”
가흔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지만 안소니는 웃지 않았다.
“정가흔은 멋진 약사가 되었으리라 믿었어.”
“그저 그런 동네 약사입니다.”
“생각보다 더 멋진 약사님. 대단해. 네가 눈부셔.”
정말 눈이 부시다는 듯이 지후가 가늘게 만든 눈 위로 손을 올리며 웃었다.
“농담 말아요.”
“농담 아닌 진심.”
가흔이 손을 저었다.
“말도 안 돼요. 낡은 약국에서 혼자 동동거리며 일하는 월급 약사.”
승준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가흔은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정림에 대해, 아이들에 대해 무모한 책임감에 얽매여 내내 그렇게 살며 그 공간에서 한 해 두 해 나이 먹어 갈 거라고 했던가.
“정가흔.”
조용한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널 늘 과대평가했어. 수학도 더 잘할 거라 생각했고, 과학도 더 잘할 거라 생각했지. 영어, 국어 독해력이 그렇게 형편없을지 상상도 못 했어.”
“맞아요. 그러셨죠.”
교재를 풀며 받았던 구박과 무안함을 기억한다. ‘더 잘할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라는 그 말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었더랬다.
“마찬가지로, 가끔씩 정가흔 약사는 어떤 모습일까 떠올릴 때마다 한껏 높이 기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