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26
26화.
26화
“난 연락 안 온다는 데 계란빵을 걸게.”
신영이 어이그, 쯔쯔 혀를 찼다.
나 같으면 기분도 꿀꿀한데 눈 호강이나 하자 그러겠다. 진짜 넌 고딩 때나 지금이나 아주 굴러들어온 남자를 뻥뻥 잘도 차 버리지. 말로만 별이니 만화니. 내가 답답해 미쳐요.
어제 성민이 앞에서 안소니는 저 하늘의 빛나는 별이라고 했던가.
성민이 취했으니 대충 들어 넘겼지 앞으로 얼마나 놀려 댈까. 나이 서른에 웬 여고생 감성이야.
아오, 못살아. 못살아.
가흔은 의자 등받이에 두었던 쿠션을 끌어안았다.
뭐 하냐.
“어. 아무것도 아니…….”
너 ‘아오, 못살아.’라고 중얼거리는 거 다 들렸거든 안소니 생각했지 얼굴 빨개졌겠다
“아냐. 얼굴이 왜 빨개져. 내 볼이 원숭이 궁뎅이야 ”
지지배야. 너 그럼 고등학교 때 볼이 원숭이 궁둥짝이었네. 맨날 얼굴 시뻘개졌어. 내가 모르는 척해 줬다만, 너 안소니 선배 생각할 때마다 얼굴 빨개졌다고. 나는 네가 승준이 생각하면서 얼굴 빨개지는 건 못 봤다. 암튼, 너 안소니 연락 안 오면 먼저 꼭 전화해. 아이고. 나 엄마가 밖에서 소리 질러. 나와 밥 먹으라나 봐. 해장국 끓여 달라 했거든.
“캬아, 해장국! 맛있겠다.”
올래
“아니. 아니.”
신영이 보일 리도 없건만 가흔은 손까지 내저으며 거절했다. 성격 급한 신영의 엄마가 ‘신영이! 밥 먹어!’라고 부르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얼른 가. 엄마 또 부르신다.”
응, 응. 바이.
“응.”
가흔이 휴대폰을 내려놓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문자 창을 띄우고는 잠시 고민했다.
‘선배님, 어젠 취해서 죄송했어요. 하실 말씀은 뭔가요 ’
문자를 보내 볼까.
가흔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게 너무 세차게 저어 머리가 살짝 울렸다.
명백히 쓸데없는 문자. 괜히 들이대는 것 같이 보일 텐데. 안소니는 여전히 그런 여자들 질색하겠지. 화이트보드에 붉은색 마커로 썼던 열일곱 살의 맹세가 떠오른다.
‘민지후를 절대 좋아하지 않겠습니다.’
가흔은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려 뒤집어 두고는 빗질을 마저 하고 머리를 하나로 높게 질끈 묶고서 일어섰다.
운동을 하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서 잊어버리자.
나가기 전에 깔깔한 속을 해장할 거리가 있나 찬장을 뒤졌더니 라면도 똑 떨어졌다. 가흔은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한 컵 따라 마시고 배를 쓱쓱 문질렀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목욕 용품을 챙겨 집을 서둘러 나왔다. 타타타탁 길고 긴 계단을 경쾌하게 내려가고, 빌라 현관문을 밀어젖혔다. 차가운 가을 공기를 들이키며 힘차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잊지 마. 절대.’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가흔은 움칫 걸음을 멈춘다. 물에 젖은 음성으로,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었다. 이마에 닿는 숨이 뜨겁고 서러웠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처음으로 취했던 지후는 잊었을 목소리, ‘약속, 잊지 마.’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찡하다.
가흔은 머리를 털어내면서 걸음 속도를 올렸다. 쌩쌩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야트막한 동네 뒷산을 올라갔다. 선캡을 쓰고 검은 안경에 흰 마스크, 꽃무늬 장갑에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반가이 인사했다.
누구더라. 아, 누구시더라.
가흔은 반사적으로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
“오랜만이야.”
아주머니가 마스크를 내리고 물을 마셨다. 이제야 얼굴이 인식 가능한 정도로 보였다. 작년에 아들이 중2, 고2라며 수양을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고 했던 아주머니다. 올해는 중3 고3이구나.
“네, 더 좋아 보이세요. 아드님들은 잘 지내죠 ”
“아이고, 말도 마. 내가 마음을 덜려고 산을 오른다니까. 올해는 부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잘하겠죠.”
“아가씨는 약국한다고 했지 ”
“네, 월급 약사요.”
“우리 아들도 전문직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고. 큰애는 이과거든. 원래도 수학, 과학을 좋아했어. 근데 이과 수학이랑 과학은 왜 그렇게 범위가 많아. 과중반이라고 들어가니 과학은 네 과목이나 2까지 해야 하니까 더 많고.”
아주머니가 콧등에 솟은 땀을 닦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좀 양이 많아요. 그래도 좋아한다니 잘하겠죠.”
가흔은 웃으며 응원을 했다.
아주머니와 헤어져 주민 공원에 들어서며 가흔은 이과 수학과 과학을 혼자 공부했다는 안소니를 떠올렸다.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가로젓고 죄 비슷비슷한 등산복 차림인 동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 사이에 섞여 스카이 워킹을 했다. 주민 체련 단련장이라 이름 붙이고 몇 가지 가져다 놓은 운동 기구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이다. 오늘은 운이 좋아 차지할 수 있었다. 두 발을 각각 발판에 올리고 앞뒤로 힘차게 흔들면 허공을 걷는 것만 같았다. 슝슝 끼익 끼익, 다리를 앞뒤로 힘차게 움직일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타타타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찬바람이 닿는다. 막 사우나를 마치고 나온 가흔은 발갛게 반쯤 익은 얼굴을 식히며 머리로 드라이어 바람을 윙윙 불어 넣었다.
잠깐 들떴었다. 승준에게 결별 통보를 받고 처음으로 비참함과 외로움에 젖어 밤을 보내지 않아서 좋았다.
정가흔,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 주고, 아아, 짧게 감탄하며 멋진 약사님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해 주던 안소니를 떠올린다. 조금은 으쓱해진다.
그래,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할 것 같던 정가흔이 멋진 약사님이 되었어.
불쑥 나타난 민지후는 가흔에게는 여전히 만화 같은 존재였다.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잠시 아무도 모르게 홀로 꾸는 꿈. 그런 이유로 실재성을 가진 안소니는 가흔의 꿈에 침범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가흔은 민지후의 삶 속에 모조리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녀는 민지후의 마음에 위험한 침입은 할 수 없는 존재니까…….
가흔은 탈의실에서 옷을 느리게 입고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핸드폰을 살폈다.
부재 중 전화 한 통, 스팸 메시지 세 통.
가흔은 핸드폰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고 탈의실을 나섰다. 급수대를 지나치다가 누군가가 조심성 없이 잔뜩 흘려 놓은 물을 제대로 밟아 새 양말이 흠뻑 젖었다. 가흔은 망설이다 선 채로 양말을 벗어 버렸다.
띠링,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부재중 전화의 주인공이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동창.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이지만 활짝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도 멸시를 품고 있는 아이였다.
[가흔아, 나 다인이야. 통화 안 되네 전화 부탁해.]메시지를 보고서 가흔은 맨발에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차가운 바람이 쓰윽 아직 습기가 남은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두피에 오소소 소름이 인다.
‘박다인’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순간 달칵 스위치가 켜졌다. 조심조심 움직였는데, 이별의 스위치는 여지없이 켜지고 만다. 전류가 통하는 꼬챙이로 툭, 가슴 한구석이 건드려진 것만 같다. 불쾌한 통증을 숨기려 가흔은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이별을 상기 시키는 온, 오프 버튼은 외부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내부에서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뢰처럼 곳곳에 묻힌 버튼을 피해 가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미리 버튼을 모조리 눌러 버릴 순 없을까.
가흔은 짧게 숨을 뱉어 냈다.
한꺼번에 오라고. 드문드문 때리다 말고 때리다 말고.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소나기처럼 맞고 싶어.
다인이가 무슨 일로 가흔을 찾는지 짐작하는 바가 있다. 다인의 약혼자는 승준이 의국 선배이다. 권승준이 죽도록 부러워하던 모든 것을 다 가진 선배였다. 아버지는 의학계 인맥이 튼튼한 본교 의대 교수였고, 어머니는 L그룹 방계 집안이었다. 미대 강사로 있는 누나는 T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식품 회사의 장남과 최근 결혼식을 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선배가 하나 가지지 못한 건 승준의 탁월한 성적과 의사로서 가진 본능적 재능이었다. 선배는 승준을 의도적으로 괴롭혔고, 승준은 그런 선배를 가소로워했다. 다인과 승준의 선배 커플, 그들은 가흔의 실연을 확인하고 싶어 하겠지.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내장부터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라 속이 긁힌 듯 아린다.
왜 내가 부끄러워야 하나. 수치스러워야 하나.
부지런히 걸어 집으로 가자. 창을 활짝 열고 대청소를 해야지. 옥상 데크 물청소를 하고 이불과 깔개를 전부다 빨고 햇빛에 널어야지. 냉장고에 있는 음식 재료를 모조리 꺼내어 조리를 하고 칸마다 깨끗하게 닦아야지.
가흔은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우고서 오로지 걷는 일에만 열중했다.
가흔이 살고 있는 동네 큰길 보도블록은 지난여름 아스팔트가 이글이글 녹을 만큼 더운 날에 새로이 교체되었다. 보도블록을 볼 때마다 종아리까지 스며들던 훅한 열기와 깨어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 빛나던 모래알이 떠오른다.
가흔은 새로운 보도블록의 패턴을 좋아했다. 동그라미와 사각, 청록과 붉은색이 번갈아 들어 있어 꼭 동화 속 성으로 통하는 비밀의 길 같았다. 블록의 패턴을 따라 땅따먹기를 하듯이 큰 걸음으로 성큼 건너가기도 했다. 비밀의 길이 끝나고 비탈이 진 울퉁불퉁한 이면도로를 지났다. 가흔이 살고 있는 자그마한 원룸 빌라 건물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이었다.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무시할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피할 것까진 없지.
어머, 가흔아
“응.”
가흔은 가쁜 숨을 고르며 걸음 속도를 늦췄다.
너 주말인데 뭐 해
“주말은 어제였고, 신영이랑 약대 친구랑 같이 포차 갔었어.”
아, 그렇구나, 오늘은 오늘 일요일인데 뭐 해
“그냥. 똑같지, 뭐.”
시간 되면 오늘 만날까 원일 오빠가 전에 같이 밥이나 먹자 했잖아. 차일피일 미루니까 아무래도 마음의 빚 같아서 말야.
얘는 뻔하게 보이는 말을 꼭 돌려서 한다. 성가셔라.
“그래, 원일 선배님이 비싼 밥 사 준다고 하셨지 어디더라.”
맞아, 전에 너 병원 왔다가 ‘셰프의 냉장고’ 넋을 잃고 봤잖니. 원일 오빠가 그거 보고 그 셰프가 하는 프렌치 식당 가자고.
“기억나. 그래, 나야 너무 좋지.”
응, 그럼 승준이한테는 네가 연락할 거지
“아니.”
왜
“우리 헤어졌어.”
어머, 언제
“좀 됐어.”
세상에. 그럼 원일 오빠가 하던 말이 정말이었나 봐. 난 쓸데없는 루머 만들지 말라고 퉁박 줬는데. 정말 세상에, 어쩜.
다인의 목소리에 흥분감이 배어 있다. 타인에 대한 가십거리는 언제나 재미있는 법이니까. 가흔은 덤덤히 받아쳤다.
“무슨 루머. 나랑 헤어졌다는 것도 루머가 되니 ”
어머, 얘. 그건 아니고.
다인이 호호호 끊어 발음하듯이 웃었다.
서병원 때문이지. Y대 의대 출신 중 제일 잘나가니까. Y대 대학 병원에서 스카웃도 엄청난 연봉으로 해 가고. 서병원장이 충청도에 있는 의대 인수했잖아. 이제 좀 있음 번듯한 대학 병원도 되는 거고, 미국이랑 유럽 쪽 진출도…….
“잠시만, 다인아. 너 지금 강남에 있는 서병원 말하는 거야 ”
응.
가흔은 빌라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고지대 빌라 입구는 언제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스스스스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를 굴렀다. 양말을 신고 있지 않은 발목에 갈변하여 말라비틀어진 플라타너스 잎이 부딪혔다.
가흔아, 너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