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9
9화.
9화
‘의대 가고 싶었어. 마지막 순간까지.’
의외의 답에 놀라서 빤히 쳐다보았다. ‘어, 어. 그러니까.’라고 들리지도 않게 말하는데, 안소니가 가흔의 뺨을 툭, 검지로 찌르듯이 두드렸다.
‘……법대 갔지만.’
의대가 가고 싶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이과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던 선배의 교재를 읽어 보며 잠이 들었다가, 둘리……. 누군가가 부르는 꿈을 꾸다가 잠이 깨어서는 아빠였을까, 선배였을까 고민하기 전에 다시 깊이 잠이 들었다.
그래, 그런 날도 견뎠는데. 이쯤이야.
가흔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씩씩하게 간이침대로 올라갔다. 비꺽, 소리가 정겹다.
그날도 자그마한 이 공간에 들어와 허리를 펴고 눕자 포근한 안도감에 절로 눈이 감겼다. 침대 옆에 작은 스탠드를 켜고 참고서를 손에 쥐고 읽다가 얼굴을 덮은 채로 잠이 들었다. 가흔은 손바닥 두개를 책처럼 만들어 눈을 가렸다.
잠을 자자. 나쁜 건 모두, 근심도 걱정도 사라지는 주문을…….
깜박 거짓말처럼 편안하게 잠이 들었나 보다. 무슨 꿈이었나, 가흔은 웃고 있었다. 째르릉 울리는 약국 전화벨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이 시간에 누굴까. 시계를 확인하니 잠이 든 건 고작 10여 분도 안 되었다. 가흔이 까슬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문, 문 좀 열어 주세요.
“누, 구 세영이 ”
네.
세영은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었다.
“왜 그래 아파 혹시 지금 증상 있어 ”
아뇨, 저 아니고. 누가 아파서. 저 지금 앞에 있어요.
가흔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뒷문으로 걸어갔다. 띠리릭,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자 세영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세영이 어깨에 팔을 두르게 한 남자는 툭 떨어진 고개 때문에 정수리만 보였다. 얼핏 봐도 키가 크고 벌어진 어깨에 운동선수처럼 건장한 체격이었다. 가뜩이나 몸이 여린 세영이 힘에 부쳐 이마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세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남자에게 말했다.
“약사 선생님이야. 다행이다. 역시, 아직 계셨구나.”
“저……, 안녕하세요.”
남자가 몸을 바로 세우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흔이 다가서다가 짤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어멋!”
세영의 어깨가 온통 핏자국이다.
“얘가 좀 다쳤어요. 이건 코피.”
손에 티슈를 쥐고 코를 막고 있는데도 세영의 어깨에도 많이 묻힌 모양이었다. 이제 얼추 지혈이 되었는지 코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가흔이 바싹 다가가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남자를 부축했다. 술 냄새가 확 끼쳤다. 몸만 봐선 성인 남자 같았는데, 얼굴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다. 코피뿐 아니라 터진 입가 때문에 얼굴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찢어진 바지에도 피가 배어 있었다. 얼핏 봐도 무릎과 종아리에 찰과상이 깊어 보였다.
“누구 세영이 너 아는 사람이야 ”
“우리 학교 앤데. 같은 학년이요…….”
“근데 왜 이래, 폭행이야 ”
터진 입가나 부어오른 콧대를 보며 가흔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것 같아요.”
“학생, 일단 부모님한테 연락하고…….”
세영이 고개를 저었다.
응
묻는 눈을 보며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남자애가 딱 잘라 거부했다.
“부모님 한국 안 계세요. 그리고 별거 아니에요.”
그래도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망설이는 가흔의 마음을 읽었는지 남자애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폭행 아니고, 시비가 붙어서 도망치다가 넘어졌어요.”
“쌤, 일단 찢어진 상처라도 치료만 좀 해 주세요.”
세영이 가흔을 보며 부탁했다.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요 ”
“조금, 다리가…….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남자애는 부상으로 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 하고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가흔에게 인사했다.
“일단 들어와서 좀 봐요.”
“고맙습니다.”
아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몸에 밴 습관은 단정하고 예의가 발라 이렇게 술에 취하거나 몸싸움을 벌이는 일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남자아이가 부축하려는 세영을 말리고 걸음을 움직이는데 심하게 균형이 어긋났다.
“어머, 괜찮아 ”
넘어질 것 같아 가흔이 남학생을 붙잡았다. 아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통스러운 듯이 찡그렸다.
“다리, 많이 다쳤나 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병원 가야 해.”
“필요 없어요. 연고랑 밴드만 사서 갈게요.”
“이렇게 못 걸을 정도면 연고랑 밴드가 아냐. 병원 가야지.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요, 필요 없어요.”
뭐라 한마디 더 하려는데 세영이 또 고개를 저었다.
‘뭐야.’
가흔은 입으로만 중얼거리고는 남학생 앞으로 다가갔다.
“학생, 그럼 어디 다른 데 아픈 곳은 없어요 배는 머리는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지 않아 ”
남자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중얼거리듯 답하고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비교적 정확한 대답과는 달리 많이 취한 상태였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곧 바닥에 고꾸라져 잠이 들 기세였다.
어휴, 가흔과 세영이 부축하여 남학생을 일단 약국 의자에 앉혔다. 가흔이 우선 거즈에 식염수을 묻혀 얼굴을 닦아 내고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내일이면 얼굴에 멍 자국은 남겠지만 뼈가 상한 부분은 없어 보였다. 얼굴을 닦아 내자 조금 정신이 드는지 남자애는 미안한 기색으로 괜찮습니다, 약만 주세요, 제가 할게요, 죄송합니다를 번갈아 말했다.
가흔과 세영이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것 봐요, 학생. 캐릭터랑 지금 꼴이랑 너무 부조화야. 대체 어디서 이렇게 술 마시고 싸웠니 ”
남학생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무릎과 종아리에 상처는 깊긴 했지만 타박상과 찰과상 정도였다. 말한 대로 뛰다가 넘어졌거나 고의로 누군가가 밀었거나.
발목 움직임도 괜찮고, 염좌나 뼈에 이상은 아닌데. 이 정도로 그렇게 못 걸을까. 혹시 아픈데 참고 있나…….
가흔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처를 소독하는 동안에도 남자애는 입을 다문 채로 으으,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이야, 너 안 아파 ”
“아픈데, 괜찮습니다.”
취한 주제에 반쯤 졸면서 답은 꼬박꼬박 예쁘게도 했다.
가흔이 웃으며 물었다.
“아깐 넘 놀라서 이름도 못 들었다. 이름이 뭐야 ”
가흔이 아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남자애는 답을 하지 않고, 세영은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세영이 너 얘 이름 몰라 친구라며 ”
“친군 아니에요. 우리 학교 같은 학년인 것만 알아요.”
“어떻게 ”
“유명해요.”
“응 ”
세영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눈에 띄게 잘생겼잖아요.”
하긴 엉망으로 터지고 붓고 했는데도 준수해 보이니. 가흔이 귀티가 나는 남자애를 한 번 더 쳐다봤다.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깔고 있던 남자애가 세영의 말에 귓등이 붉어졌다.
가흔이 쿡 터지는 웃음을 물고서 말했다.
“세영이 넌 기본이 안 됐다. 잘생긴 유명한 남학생 이름을 모르니, 어떻게 ”
“얘가 얼마 전에 전학 왔거든요.”
세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애들이 뭐라고 하던데.” 하고 중얼거렸다.
“찬……, 유던가 ”
남자애가 고개를 들고서 세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찬우 ”
고개를 젓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찬후.”
세영이 “아하, 맞아. 찬후, 찬후…….” 이름을 두어 번 부르며 생긋 웃었다. 찬후, 하고 세영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눈을 맞추며 웃을 때마다 남자애의 귓등은 조금씩 더 붉어졌다.
기집애, 고단수네.
가흔이 피식 웃고는 찰과상에 붙일 재생폼 포장을 벗겼다. 응급 치료를 마치면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부모님이 한국에 있는지 없는지 꾸중이 두려워서 거짓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미성년자 학생을 이런 상태로 보호자 없이 내보낼 순 없었다.
“찬후, 너 지금 집에 혼자 있니 ”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흔이 재생폼 가위질을 하며 물었다.
“…….”
답 없이 고개만 숙인 찬후에게 말했다.
“나 여기서 너 혼자 못 보내거든.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세영이 데려다줘야 해. 너는 일단 보호자 누구라도 여기 약국으로 와서 데려가라 할 거야. 부모님 안 계시면 담임 선생님한테라도 전화할 거고, 정 버티면 이 근처 지구대에 도움 요청할 거야.”
가흔이 찬후의 무릎, 정강이, 얼굴에 재생폼을 붙이며 말했다.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찬후를 깨끗하게 무시하고는 가흔이 수화기를 들었다.
“고집부리면, 세영이 담임한테라도 전화할 거야. 아님, 지구대로 전화 걸까 ”
찬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 돼요. 절대.”
찬후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리는 세영을 뿌리치고는 절뚝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너, 여기에서 지금 나가면, 나 경찰서에 음주폭행사건으로 신고한다. 지구대 번호 단축으로 저장되어 있거든 ”
가흔이 수화기를 들고서 찬후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찬후가 반항적인 어투로 되받아쳤다.
“맘대로 하세요.”
세영이 찬후 팔을 붙잡는 동안 가흔은 단축 버튼을 눌렀다.
“네, 여기 흔약국인데요. 지금 폭행당한 고등학생이…….”
“그만해요!”
찬후가 절뚝이는 다리로 엎어질 듯이 달려들어 가흔의 손을 붙잡았다. 억지로 수화기를 뺏으려고 하자 가흔이 아무렇지도 않게 응대했다.
“이대로 끊으면 순경이 바로 출두할걸 그러든가.”
찬후가 가흔을 잡았던 손을 풀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 말아요. 하지 말라고!”
“소리도 다 들릴 테고.”
가흔은 찬후를 차분히 응시하면서 수화기를 향해 말했다.
“아뇨, 아직은요. 이대로 내보내긴 불안해서요. 좀 다쳤거든요. 그건 모르겠어요. 보호자 연락처를 말하지 않네요. 네, 끊지만 말아 주세요.”
“쌤.”
세영이 보호하듯이 찬후를 막아섰다.
“제가 알아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얘, 나쁜 애 아니에요.”
“알아 ”
“네……. 얘 아버지 누군지 알아요.”
세영이 찬후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내더니 눈앞에 내밀었다.
“걸어. 빨리. 누구한테든, 오라고 하라고. 기사 아저씨든 누구든!”
찬후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핸드폰을 쥐었다.
“잠시만요, 아직은요.”
가흔이 수화기 너머 경찰에게 차분히 말했다.
“찬후야, 쌤 고집 장난 아냐. 전화해.”
찬후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더니, “얼른, 응 ”이라는 세영의 재촉에 숨을 몰아쉬고는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형.”
가흔이 쳐다보자 찬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 목소리로 하는 대화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자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 약국인데 위치가…….”
가흔이 지구대 통화를 마무리하고는 까닥까닥 핸드폰을 달라고 손짓했다. 찬후가 순순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약국 약사예요. 찬후 친형이신가요 ”
네, 그렇습니다. 찬후, 무슨 일인가요 혹시 많이 다쳤습니까
형이라니, 고작해야 대학 신입생 정도 아닌가 싶었던 가흔의 예상과 다르게 핸드폰 너머 남자는 차분한 반응이나 어투로 미루어 보아 찬후와 터울이 좀 되는 사회인 같았다.
“일단 오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치료할 수 있는 부분은 했는데, 혼자 보내긴 그러네요.”
가흔은 아까부터 맘에 걸리던 찬후의 다리를 흘끗 보았다.
“병원에도 안 가겠다고 하고. 보호자 연락도 거부하고. 경찰서 보낸다 하니까 겨우 형한테 전화 걸었어요.”
죄송합니다. 주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