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70
69. 임무 유형, 복합 (2)
* * *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뒤,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내렸다.
앞을 보자, 폐허가 된 투기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감싸고 있던 모래는 남김없이 파헤쳐져 있었고, 모래 안쪽으로 드러난 땅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균열이 새겨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위에 수패왕이 쓰러져 있었다.
구구콘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크…… 르…….”
수패왕은 숨을 몰아쉬고 있다.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얼마 못 버티고 죽겠지.
수패왕의 가슴이 천천히 들썩거렸다.
쿨럭. 짙은 빛깔의 검은색 피가 그의 입에서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4성 수준에 걸맞지 않은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큰 기술을 쓴 다음에는 으레 있었던 심한 부작용도 이제는 견딜 만한 정도로 완화되었다.
뛰어넘는다.
나는 그 의미가 7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만약 내가 7성으로 진급해서 영웅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해도, 픽 미 업의 룰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여전히 게임에 속박되어 있을 것이다.
“네 걱정이나 해.”
키아드니가 어금니를 드러낸 채 웃었다.
그리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여신상의 신성력 수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광휘의 축복이 최대치로 강화됩니다!] [혼돈의 심층 전 구역의 디버프가 영구적으로 해제되었습니다!] [적용 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30% 증가]여신상은 눈부신 섬광을 발하더니, 빛이 되어 흩어졌다.
나는 호흡을 한번 몰아쉰 다음, 검자루를 길게 쥐었다.
[현재 진화도 : 064 / 100]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필드를 가로막은 장벽을 해제한 것일 뿐,
혼돈의 알을 격퇴해야 하는 메인 임무가 남아 있었다.
‘흑룡혈은…….’
나는 왼손을 살폈다.
파지직. 검붉은 번개가 한번 튀었으나 한결 강도가 약해졌다.
방금 같은 필살기는 이제 사용할 수 없겠지.
‘상관없어.’
몸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각인을 완전히 쓸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수패왕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다, 투기장 구석에서 번쩍이고 있는 차원의 틈으로 들어갔다.
“…….”
눈을 뜨자, 익숙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곧 여기가 루세트 호의 갑판 위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조종사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루세트 호가 급하강했다.
눈앞에 검은 것이 닥쳐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후우웅! 콰직!
새까맣고 길쭉한 것이 루세트 호의 갑판을 쓸고 지나갔다.
강철제의 기둥이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가 난간 너머로 떨어졌다.
내 바로 옆에서 같이 엎드려 있던 제나가 싱긋 웃었다.
“늦지 않았네요, 오빠.”
“빨리 온다고 했잖아. 그래서 지금 상황은…….”
루세트 호가 빙글빙글 돌면서 틈새를 빠져나갔다.
“그다지 좋진 않네.”
[혼돈의 심층(7단계)] [적용 버프 – 영웅의 모든 능력치 30% 증가]타오니어 함대는 숲의 안쪽으로 진입한 것 같다.
방금 갑판 위를 쓸고 지나간 것은 혼돈의 알의 촉수였다.
마침내 놈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것이다.
촉수 길이가 수백 미터라, 본체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지만.
‘몇 명 남았지?’
나는 시야 왼쪽에 떠올라 있는 공격대의 상태창을 훑었다.
사망자는 100명가량. 전투 속행이 힘든 중상자는 50명. 따라서 현재 남은 전력은 250명 정도였다. 5대의 비공정들은 나란히 소파나 중파 상태를 입었지만, 추락한 것은 아직 한 기도 없었다. 비공정이 모두 무사한 것은 호재라고 볼 수 있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마도 엔진이 한계에 다다라, 비공정의 전류 방벽은 해제된 상태였다.
나는 벨트 뒤쪽의 단검을 뽑아 던졌다.
단검의 날이 배의 밑창을 뚫고 들어오려던 하피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촉수를 피해가던 루세트 호의 앞에 키메라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입에 불길이 머금어졌다.
화아아아악!
갑판 위에 쏟아지던 불길을 투명한 막이 막아냈다.
카티오의 마법 방벽이었다.
“얘네들은 진짜 끝이 없네!”
카티오가 이를 악물었다.
숲에서는 여전히 비행형 몬스터들이 날아오르고 있다.
[Danger!] [어둠 차원문이 생성됩니다!]우우우웅.
함대의 위쪽에 여러 개의 검은 구멍이 나란히 생겨났다.
그리고 구멍으로부터 몬스터들이 쏟아져 내렸다.
위아래에서는 몬스터들이,
앞에서는 수 미터 크기의 촉수가 끊임없이 몰아쳤다.
우오오오오오오.
[자이언트 Lv.64]거대한 손바닥이 빠르게 비공정으로 접근해왔다.
한 번 더 가속을 한 루세트 호가 손가락의 틈으로 빠져나갔다.
‘대형 몬스터까지 나타났군.’
투기장에서 버프를 얻지 못했다면 진즉에 전멸했겠지.
나는 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나와 에디스만 들어와 있는 개인용 채널을 열었다.
“현재 상황은? 다른 오브젝트는 찾았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에디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상?”
나는 공대창을 다시 살폈다.
‘……이런.’
왜 몰랐지.
에디스는 당연히 무사할 거란 생각에 상태창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공대창을 확대해 2파티의 상태를 보았다.
리더인 에디스의 이름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빈사.’
좋지 않다.
“에디스의 상태는 어떻지?”
베닉은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루세트 호의 뒤를 보았다.
함대의 맨 끝, 만신창이가 된 캐피탈리즘 호가 주춤거리며 날아오고 있다.
고강도 합금으로 보강되어 있던 외갑판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옆면의 뚫린 구멍에서는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집중 공격을 받았던 건가.’
다른 비공정들이 포격을 가하고 있지만, 몬스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캐피탈리즘 호로 모여들고 있었다.
우리가 투기장에서 싸우는 동안, 놈들은 공격대의 기함인 캐피탈리즘 호를 집중적으로 노렸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싸움 중간부터 에디스의 보고가 들려오지 않았다.
“배를 버려. 생존자를 데리고 티어 호로 갈아타라.”
나는 캐피탈리즘 호를 자세히 살폈다.
갑판 위, 흐릿한 차원문이 일렁이고 있다.
다른 비공정으로 향하는 통로.
선원을 비롯한 영웅들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에디스의 차례는…… 맨 마지막인가.’
멍청한 녀석이.
대장이 가장 뒤에 들어가서 뭐하겠다는 거냐.
“베닉, 에디스를 데려와. 강제로라도 들어가게 해라.”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상 정도는 어떻지? 물약은 몇 개나 남았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나는 카티오를 바라보았다.
카티오는 한창 몬스터들의 공세를 막느라 바쁜 와중이었다.
전류 방벽이 해제된 이상, 마법 방어막이 없으면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비공정을 추락시킬 것이다.
다른 비공정도 마법사들이 전류 방벽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차원문을 새로 만들 수는…… 없나.’
[현재 진화도 : 072 / 100]우오오오오.
백 미터에 이르는 그림자 거인이 거대한 손을 휘둘러왔다.
그러나 어디선가 뻗어 나온 촉수가 거인을 옭아매더니, 놈을 질질 끌고 갔다.
곧이어 무언가를 씹어먹는 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비공정 ‘캐피탈리즘 호’가 대파되었습니다!]마침내 캐피탈리즘 호의 방어선이 뚫렸다.
몬스터 수백 마리가 일제히 갑판과 선체에 달라붙었다.
[‘시라드(★★★★)’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니달(★★★)’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위드니(★★★★)’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이딘(★★★)’이 여신의 품으로…….]미처 대피하지 못한 영웅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
지금 차원문을 만든다고 해도, 너무 늦다.
앞으로 나아가는 비공정들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대열에서 이탈한 캐피탈리즘 호가 저 뒤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하.’
나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파지직. 검붉은 번개가 다시 한번 튀었다.
나는 갑판 위의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현재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도 안 갈 생각이냐?”
“이미 늦었소.”
벨키스트가 팔짱을 꼈다.
제나는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알았다. 나 혼자라도…….”
아니.
나는 미련을 눌러 없앴다.
이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결코, 정답이…… 아니었다.
‘젠장.’
나는 눈을 감았다.
치지지직.
귀에서 잡음이 울려 퍼졌다.
에디스 전용의 지휘용 채널이었다.
“…….”
[‘에디스(★★★★)’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투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콰아아앙!
캐피탈리즘 호가 눈부신 섬광과 함께 불타올랐다.
[비공정 ‘캐피탈리즘 호’가 폭발했습니다!]비상용의 자폭 스위치를 누른 것 같다.
근처에 모여있던 몬스터들이 깡그리 소멸했다.
[현재 진화도 : 082 / 100]멀지 않은 곳.
거대한 알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아직, 아직이다.’
쩌적. 쩌저저적.
알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촉수들이 거세게 움직였다.
나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에디스가 죽으면서, 공격대의 지휘권은 나에게 넘어온 상황이었다.
“1파티의 한이다. 비공정의 함장들은 들어. 모여있지 말고 흩어져라. 최대한 산개해서 피해를 줄여. 여기서부턴 시간 싸움이야.”
쩌저적.
알의 중간에 커다란 금이 새겨졌다.
그 사이로 검은 눈알이 드러났다.
[현재 진화도 : 085 / 100]검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브젝트는 없었다.’
결국, 이 필드에서 여신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투기장에 있었던 한 개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 여신상의 역할은 저주를 해제하고 영웅들을 강화시키는 것.
그리고, 여신상의 역할은 그뿐만이 아닌 듯하다.
[혼돈의 심층(최종 단계)에 돌입하셨습니다!] [광휘의 섬광이 눈부시게 빛납니다!] [‘1파티’의 영웅들에게 여신의 축복이 내립니다!]어느 순간, 비공정은 알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마지막이군. 준비해라.”
50층의 최종 페이즈.
나는 검을 늘어뜨렸다.
베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들이 우리한테 못 오게 해.”
우우웅.
세 대의 비공정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그 포문은 바깥쪽의 몬스터들에게 향해 있었다.
‘여신의 축복?’
나는 검면을 내려보았다.
빛에 휩싸인 비프로스트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웃기는군.’
장난질을 치다니.
어쨌든,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나는 앞을 보았다.
여전히 검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현재 진화도 : 091 / 100]펑! 퍼퍼퍼펑!
함대가 바깥 구역의 몬스터들에게 포화를 퍼붓고 있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나 죽는 수만큼, 어디선가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함대로 돌격해왔다.
‘오래는 못 버텨.’
탄약이 무한정이라고 해도 대포와 발리스타의 내구도에는 한계가 있다.
벌써 몇몇 대포의 포구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사격 불가. 임무 초기부터 포격을 연발한 나머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잠시 재정비를 거치며 수리를 거칠 만도 하건만, 함대는 포격을 쉬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1파티에게 달라붙지 않게 하라는 나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진화도 : 092 / 100]쩌적.
알의 겉껍질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로부터 거대한 균열이 위아래로 퍼져나갔다.
‘마지막은 간단하군.’
나는 오른손의 검을 굳게 쥐었다.
비프로스트의 검날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힘을 내려줄 테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건가.
우르르르르.
숲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숲의 나무들이 지진에 휩쓸려 일제히 박살 났고, 뒤엎어진 땅이 솟구치며 가라앉았다.
[현재 진화도 : 093 / 100]콰직.
수 마리의 대형 몬스터를 한입에 집어삼킨 알이 부르르 떨렸다.
“잘 들어, 정비사. 지금부터 루세트 호는 최대 속력으로 알에 접근한다.”
알의 근처에 퍼져 있던 촉수들이 일제히 물결쳤다.
“우리가 처리 못하면 전멸이야. 너랑 말장난할 시간은 없다. 그래서 돼? 안 돼? 빨리 말해!”
쿵!
나는 갑판을 세게 밟았다.
비공정 뒤쪽의 추진체가 불을 뿜었다.
고속 항행. 루세트 호가 알의 근처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촉수들이 비공정 쪽으로 휘어지며 다가왔다.
[비공정 ‘루세트 호’가 중파되었습니다!]쿠웅!
일순간 진동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가늘고 긴 촉수 끝이 비공정의 옆면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이 정도는 괜찮아! 무시해.”
루세트 호는 다가오는 촉수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회전하며 점차 알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갑판 위가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렸다. 나는 난간을 굳게 잡고 버텼다. 위아래가 뒤집히고 좌우가 바뀌었지만, 모두들 균형을 잡은 채, 잘 버티고 있었다.
“우리한테 맡겨라.”
캉!
선체를 때리려던 촉수가 투명한 막에 의해 튕겨 나갔다.
카티오의 마법 장벽.
파아앙!
커다란 파공성이 터지더니, 강철 화살이 촉수 한중간을 뚫고 지나갔다.
제나는 뒤집힌 갑판 위에서 거꾸로 선 채 장궁을 연사하고 있었다. 촉수 자체를 처리할 수는 없었지만, 궤도를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우오오오오오!
순간, 루세트 호가 밀려났다.
대기가 떨릴 정도의 포효.
쩌적. 쩌저저저적.
바스러진 겉껍질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쾅!
숲 아래에서 솟구친 촉수가 비공정의 후미를 관통했다.
[비공정 ‘루세트 호’가 대파되었습니다!]‘마도 엔진이…….’
루세트 호의 1/3에 해당하는 부분이 박살 났다.
하필이면 엔진이 있는 부분.
추진력을 잃은 루세트 호가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카티오가 손을 내저었다.
연푸른 빛깔의 마력이 비공정 전체를 거미줄처럼 옭아맸다.
우우우웅.
곤두박질치던 루세트 호가 공중에서 멈춰섰다.
“다시 가라!”
대답이 없다.
나는 서둘러 조종실로 들어갔다.
정비복을 입은 소녀가 피를 흘리며 조종대 위에 엎어져 있었다.
비공정이 흔들리면서 머리를 잘못 부딪친 것 같다.
‘기절한 건가.’
하지만, 현재 비공정 조종을 위해 뺄만한 인력이 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띠링!] [마스터, ‘한(★★★★)’이 루세트 호의 수동 조종을 요청합니다!]암케나의 조작창에 알림이 떠올랐다.
전술 도구로 함대의 대열을 정렬하던 암케나는 급하게 시점을 돌린 후 화면 속의 루세트 호를 살폈다.
[비공정을 수동으로 운행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루세트 호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 앞에서 일곱 개의 촉수가 덮쳐오고 있었다.
기이잉!
루세트 호가 다섯 바퀴를 연속으로 돌면서 촉수들을 피했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솜씨.
‘일단 운전이나 해.’
나한테 줄 군마 조각상도 준비해두고.
파아앙!
루세트 호가 초고속으로 나아갔다.
[‘카티오(★★★★)’가 마력 폭주 상태에 돌입합니다.] [Tips/마력 폭주는 마법사가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할 시 걸리는 상태이상입니다.]“윽!”
카티오의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다.
마도 엔진의 역할을 자기 몸으로 대신하고 있다.
아무리 실력 있는 마학자라고 해도,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없겠지.
[현재 진화도 : 095 / 100]반쯤 바스러진 알 너머에서 놈의 형체가 흐릿하게 드러났다.
“제나.”
“갑니닷!”
파파팡! 팡! 파팡!
강철 화살에 꿰뚫린 촉수들이 흐느적거리며 물러났다.
“벨키스트.”
“준비됐소.”
“키샤샤.”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까지는 이제 30m.
까맣고, 거대한 절벽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고했어. 마무리는 우리 셋이서 한다.”
“오빠, 저도…….”
“아니, 넌 비공정을 지켜줘. 퇴로는 있어야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던 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나는 검을 굳게 쥐었다.
바로 앞에서 촉수가 덮쳐오고 있었다.
[고유 스킬, 수화(초월형) 발동!] [‘키샤샤(★★★★)’가 변신합니다!]한번 더 수화.
초월형으로 변신한 키샤샤가 주먹으로 촉수를 후려쳤다.
투캉!
키샤샤의 주먹이 부딪힌 곳에서 충격파가 퍼져나가더니 촉수 전체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크아앙!”
키샤샤가 울부짖더니 난간을 뛰어넘었다.
뒤이어 흔들리는 촉수 위를 그대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기다리느라 진이 다 빠졌군.”
벨키스트가 뱃머리 쪽으로 나섰다.
[고유 스킬, ‘백룡각’ 발동!]벨키스트의 머리에서 하얀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 힘은 아직 한 번밖에 쓰지 못하오. 그래도 길 정도는 뚫어드릴 수 있지.”
우우우웅!
벨키스트의 검이 천천히 흔들렸다.
“먼저 가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간 너머의 하늘로 뛰어내렸다.
곧장 중력의 영향을 받은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는 공중에서 자세를 바꿔 비프로스트를 투척했다.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간 비프로스트의 검날이 촉수 한중간에 꽂혔다.
‘흡인.’
파지직!
나의 왼팔과 비프로스트에서 동시에 검붉은 번개가 튀었다.
그리고, 자기력의 영향을 받은 몸이 빨려가듯 검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한 번 더.’
촉수에 거꾸로 발을 디딘 나는 검을 뽑아서 재차 던졌다.
휘어지며 날아간 검이 다음 촉수에 꽂혔다.
[현재 진화도 : 096 / 100]영웅들의 사망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함대의 포화망이 뚫린 것이다. 나는 촉수와 촉수 사이를 거치면서 알에 점차 접근해 갔다. 내 옆에는 키샤샤가 네 발로 뛰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알이 신음을 내지르더니, 수십의 촉수들을 한 곳으로 뭉치게 했다.
그리고 일제히 우리에게 쏘아 보냈다.
마치 벽이 세워지듯, 촉수들이 몰려왔다.
뒤에서 투명한 기운이 나를 스쳐 갔다.
나를 비껴간 그것은 촉수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퍼퍼퍼펑!
수십의 촉수들이 폭죽이 터진 듯 갈가리 찢겨나갔다.
나는 검은 피를 쏟아내는 촉수 사이를 헤쳐나가 알의 꼭대기에 발을 디뎠다.
“…….”
아래를 보자, 발밑에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현재 진화도 : 097 / 100]‘……후.’
어지간히도 애먹게 하네.
“눈 깔아.”
푹.
나는 놈의 안구에 검날을 쑤셔 넣었다.
하지만 껍질을 뚫고 지나간 검날이 도중에 멈추었다.
강철도 베어 넘기는 비프로스트가 막히다니.
뭐, 그래도…….
“막타는 네가 쳐라.”
나는 픽 웃었다.
그리고.
“으랏차!”
콰직!
하늘에서 키샤샤가 떨어져 내리며 검자루를 발로 찍어눌렀다.
우오오오오!
눈부신 섬광과 함께, 꿰뚫린 눈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 순간,
[Destiny Break!]쨍그랑!
필드가 유리처럼 갈라졌다.
임무 조건을 충족했지만, 클리어 메시지 대신 낯익은 단어가 떠올라 있다.
루프형 임무였던 40층의 마지막에 돌입할 때 표시된 메시지였다.
“어라?”
하늘을 뒤덮었던 보랏빛 구름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제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우리는 루세트 호의 갑판 위로 되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란히 떠 있는 세 대의 비공정이 보였다.
“다 깬 거 아니었어? 독기의 벽을 뚫고, 몬스터 대군도 뚫고, 촉수들도 다 뚫어서 알에 여신의 축복이 깃든 검을 박았잖아. 그런데 왜……?”
카티오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드넓은 숲의 상공.
이곳은 우리가 처음 임무에 돌입했던 장소였다.
그러나 숲의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몬스터 군단 Lv.???] X 8325숲의 아래쪽에는 여전히 몬스터들이 바글거리고 있었고,
[현재 진화도 : 001 / 100]숲의 한중간.
알이 멀쩡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이 짓을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카티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왜 대기실로 돌아가지지 않은 거죠? 아까 알이랑 다 처리하지 않았어요?”
“이쪽도 처리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소.”
벨키스트가 말을 이었다.
“몬스터 숫자는 거기보다 적지 않나. 조금 쉬다 가면 되겠군.”
“아니, 휴식이고 뭐고…… 더 이상은 힘든데.”
제나가 울상을 지었다.
적들은 그대로인 반면, 우리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반절이 넘는 영웅들이 부상이나 사망으로 전투 불능 상태였고, 비공정들은 곳곳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익시드와 흑룡혈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했다.
적어도 이번 임무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1파티 멤버들의 형편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닉이 통신으로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힘들겠지. 아마 두 번은 못 싸울 것 같아.”
갑판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나는 부러진 기둥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후퇴는 못해. 임무에 그런 게 있겠냐.”
후퇴란 게 아예 없지는 않지만, 타이밍이 한참 늦었다.
“뒤를 봐라.”
아니야.
나는 중얼거리며 벨트에서 수통을 꺼냈다.
뚜껑을 따서 한 입 들이키자, 미지근한 물이 전신으로 퍼졌다.
‘놀래키기는.’
이대로 한 번 더 깨야 하는 줄 알고 쫄았잖냐.
그랬다간 아무리 나라도 때려치웠을 것이다.
내 귀에 낯익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속삭이는 듯한 부드럽고 아늑한 여자의 음성.
별소리를 다 하네.
나는 수통을 끝까지 비웠다.
치직.
원격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듣거라, 용병들이여!”
숲 전체에 거대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나는, 그대들 모두에게 돈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 모두에게 직위를 내릴 정도로 명예롭지도 않느니라!”
울림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 내가 그대들 모두의 목숨을 고용하겠다!”
루세트 호의 뒤편.
셀 수도 없는 비공정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제각기 외양도, 깃발의 색과 문양도 다르지만, 비공정들은 뱃머리를 맞춘 채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비공정의 갑판 위, 백은빛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그 값은…….”
나는 그 아래를 보았다.
숲 바깥의 평원. 무수한 숫자의 용병들이 말을 타고 있다.
그 기병대의 선두에는 용병왕이라 불린 청년, 요슈가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 값은.’
“타오니어의 미래이니라!”
프리아가 검을 치켜들었다.
“전원 돌격! 제국민을 속이고 기만해왔던 악적들을 모두 소탕하라!”
뿌우우우.
요슈가 커다란 뿔나팔을 불었다.
[아군 NPC ‘메아리 용병단’이 필드에 합류합니다!] [아군 NPC ‘하얀 수염 용병단’이 필드에 합류합니다!] [아군 NPC ‘이리발톱 용병단’이 필드에 합류합니다!] [아군 NPC ‘팽이나물 용병단’이 필드에 합류합니다!] [아군 NPC ‘우린 좀 쎄 용병단’이 필드에 합류합니다!] [아군 NPC ‘너희 아빠 집 나갔어 용병단’이 필드에……]그리고 다시.
[인간 용병 Lv.??? X 15473]나는 앉은 채로 기둥에 등을 기댔다.
숲 전체를 채우고도 남을 숫자의 용병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말들이 일제히 질주하며 지축을 울렸다.
“저 알은 평화의 표식이 아니야. 저게 깨어나면 타오니어의 수만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할 거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목숨을 걸고 내달려!”
군마에 탄 요슈가 기병대의 제일 앞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1진은 나와 함께 숲 내부의 적들을 처리한다. 2진은 양측으로 빠져서 숲 외곽을 정리해. 앞에 무엇이 나타나든 멈추지 마! 고삐를 늦추지 마라!”
와아아아아!
무수한 인파가 내지르는 함성이 필드 전체를 뒤흔들었다.
숲 바깥쪽의 평원에서는 질주의 여파로 인한 흙먼지가 길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키아아아악!”
“크르르!”
숲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부터 트롤, 오크에 하피, 리자드맨에서 교단군의 병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쥔 채 기병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슈를 뒤따르는 무리는 끝이 없었다.
기병대는 평원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였다.
몬스터 쪽에서 뒤늦게 진을 짜 올렸으나,
콰지직!
말발굽에 짓밟힌 몬스터들이 일제히 묵사발이 났다.
최초의 격돌로 인한 사상자만 수백이었지만, 몬스터들은 시체도 남기지 못했다.
기병대의 1진은 몬스터의 방어진을 종이처럼 꿰뚫고 숲 안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뭘 하면 되죠?”
제나가 내 옆에서 뺨을 긁었다.
나는 한숨을 내쉰 뒤 답했다.
“뭐하긴. 엉덩이 빼고 구경이나 해야지.”
“수가 엄청나네요. 몬스터 쪽보다 두 배는 많은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도울 게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나설 차례는 끝났어.”
나는 뒤를 보았다.
백여 대에 가까운 비공정들이 하늘을 메우고 있다.
저 함대에 비하면 우리 공격대는 달 앞의 반딧불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함대의 기함 위에서, 프리아가 전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
많은 것이 바뀌었다.
첫 만남에서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였던 소녀가 이제는 숙녀가 돼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신분만 높았던, 철모르는 꼬맹이에 불과했다.
이상한 꿈을 핑계로 자기 세력을 만들겠다며 무모한 계획만 일삼았었지.
저 녀석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수백 명일 줄 알았는데.’
잠깐 시간 벌이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임무의 조력자 포지션이었던 아시니스 가문이 딱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건 수가 너무 많잖아.
지원군을 데려오랬더니 군단을 끌고 왔다.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용병계의 유명인사인 요슈에게 받을 빚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 빚이 이런 대부대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저 꼬마의 능력이라 이건가.’
용병단은 돈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
아마 저들을 설득시키기까지 프리아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넘어왔을 것이다.
‘알고 싶군.’
각기 다른 수백 개의 용병단을 어떤 방법으로 통합시켰는지.
무슨 수로 이 돈이 걸리지 않은 전장에 그들의 목숨을 걸게 했는지.
갑판 위, 다부지게 서 있는 프리아에게서는 조금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알던 황녀님이랑은 다른 사람 같네요.”
제나가 눈이 부신 듯 프리아를 올려보았다.
나는 픽 웃었다.
“연기하는 거지. 속으로는 떨려서 죽을 맛일걸.”
프리아는 검도 마법도, 전술에도 재능이 없었지만, 한 가지 잘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타오니어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었다.
타오니어가 멸망하기 전에는 그녀의 역할을 대신해줄 황자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놈이 몬스터 쪽으로 넘어간 지금, 무대는 완성됐다.
마치 타오니어의 시나리오 자체가 그녀를 위해 짜여진 것만 같았다.
‘별거 없어.’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폼을 잔뜩 잡아주면 된다.
내 말이 무조건 옳다.
너희는 닥치고 따라오면 된다.
이게 통한다면…….
“돌겨어어억!”
단 한 명을 위해,
수만, 수십만의 인간이 웃으며 목숨을 내던진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의 내전이겠네.”
마력 물약으로 목을 축이던 카티오가 중얼거렸다.
카티오도 타오니어의 정세에 대해 여러모로 배웠다.
제국이란 집단이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황자를 주축으로 하는 제국과 교단, 그리고 황녀를 내세우는 용병단들이 싸우는 거구나. 꼴을 보면, 용병이라 부르기도 뭐하지만.”
“그렇겠지. 이제 시작일 거다.”
그전까지는 도망치기에 급급했는데, 이제는 세력의 균형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용병단 함대가 진격을 시작했다.
비공정들의 옆면에서 동시에 포문이 열렸다.
콰콰콰콰콰쾅!
압도적인 화력.
하늘이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포화에 휘말린 수십, 수백의 비행형 몬스터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지상에서는 기병대가,
하늘에서는 함대가 프리아의 길을 뚫고 있었다.
‘이제 하나 남았군.’
프리아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녀는 백은빛 드레스를 입고, 관을 쓰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복장.
투명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했다.
“…….”
프리아의 입술이 달싹이고 있다.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기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난간의 위.
어느새 나타난 참새가 부리를 오므렸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키샤샤의 시선은 황녀를 향해 있다.
“…….”
할기온은 먼눈으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프리아는 작은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 안에서 형형색색의 구슬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의 정수, 땅의 그릇, 바다의 잔.’
프리아가 꺼낸 것은 우리가 각종 임무에서 개고생을 하며 모았던 ‘열쇠’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예전 황제가 찢어진 차원을 꿰맬 때 사용했지만, 후손 중에서 적합한 후계자가 나오지 않자 전 대륙에 흩뿌려졌다고 한다.
프리아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그녀의 속삭임을 읽을 수 있었다.
‘제발.’
프리아의 얼굴에 긴장과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금방 사라져, 표정은 다시 굳건하게 변했다.
“여기서 선언하겠다!”
프리아가 오른손의 검을 알에게 겨누었다.
“이제부터 나, 프리아시스 알 라그나는 몸과 영혼을 여신에게 걸어, 그대들의 미래를 되찾아 주겠노라!”
프리아가 왼손의 주머니를 내던졌다.
세 개의 열쇠 조각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우우우우웅!
열쇠 조각들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빛의 구슬로 바뀌었다.
뒤이어 빛의 구슬은 프리아가 들고 있던 검으로 날아가 한곳에 뭉치며 휘몰아쳤다.
[차원검 ‘루스라다’가 각성합니다!] [특수 NPC ‘프리아시스 알 라그나’의 칭호가 ‘황금의 계승자’로 변경되었습니다!]일개 장식에 불과했던 프리아의 검이 황금빛 섬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단순히 반짝인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프리아의 검끝에 머무른 황금색 휘광은 필드 전역을 비추며 눈부시게 타올랐다.
“…….”
지상과 공중에서 싸우던 용병들이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잊은 채 프리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함성으로 변하는 데에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와아아아!”
“황녀님이 가실 길을 뚫어라!”
용병단의 공세가 한층 격렬해졌다.
몬스터들의 거센 반격으로 용병 측에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은 거리낌 없이 진격을 이어갔다.
“효과 한번 죽이는구려.”
벨키스트가 이죽거렸다.
“하늘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거로군.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게는 신처럼 보이겠소. 뭐, 그동안 뒤치다꺼리를 해온 보람이 있군.”
벨키스트는 팔짱을 끼더니 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 기분 나쁜 살덩이를 우리 황녀님이 처리해주신다는 것인가.”
용병단의 함대가 알 부근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비행형 몬스터들은 포화망에 벌집이 되어 떨어졌고, 대형 몬스터들도 별수를 쓰지 못했다.
애초에 타오니어 함대와는 화력 자체가 다르니까. 물량 차이가 너무 나잖냐.
‘우리도 좀 보강해야겠는데.’
50층부터는 상급 요일 던전을 뚫을 수 있다.
자원 수급률이 훨씬 좋아지겠지.
앞으로는 중형 함대를 굴려야만 한다.
하지만 임무 도중 크나큰 손실이 있었다.
‘에디스가…….’
아직은 그녀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저은 뒤,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프리아는 황금빛 검을 치켜든 채 알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할기온이 날개를 다듬으며 말했다.
파편 시리즈에는 일반적인 마법이나 물리 속성이 통하지 않는다.
처음 놈들과 임무에서 마주친 이후, 나도 니플헤임의 영웅들에게 대처법을 만들어주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다.
“물러나라!”
프리아가 검을 옆으로 내젓자, 비공정으로 달라붙던 촉수들이 절로 물러났다.
우리가 맞설 때와는 반응이 천지 차이. 촉수는 빛의 검을 피해 가는 것처럼 꾸물거렸다.
용병단의 함대는 거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점차 알에게 접근해갔다.
“그러고 보니…… 그 황자 쪽의 적들이 안 나오네요.”
제나가 필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말대로, 투기장에서 나갔던 황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됐으면 나타나서 수작을 부릴 법도 한데.
“뭐, 안 나오면 좋은 거죠! 어쨌든 잘 돼서 다행이네요.”
제나는 싱긋 웃더니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거운데.”
“지쳐서 그래요. 좀 봐줘.”
미소를 띠고 있던 제나의 표정이 씁쓸하게 바뀌었다.
에디스를 생각하고 있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았다.
알의 바로 앞, 황녀가 검을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검 끝에서 피어난 황금빛 섬광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더 이상은…… 보고 있지 않겠다. 너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프리아가 천천히 검을 내리그었다.
차원검의 휘광이 알의 가장 위에서 맨 아래까지를 일직선으로 뚫고 지나갔다.
알이 터지는 폭발음도, 살점이 찢기는 피륙음도 나지 않았다.
우우웅.
높이만 백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알이 찬란한 섬광에 휩싸였다.
뒤이어 불이 꺼지듯 픽, 무수한 빛의 입자를 남긴 채 소멸했다.
‘칼질 한 번에 골로 가는군.’
정확히는 돌려보낸 거겠지만.
그와 동시에 빛이 눈앞을 휘감았다.
필드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는 용병들도, 도망치는 몬스터들도 석고상처럼 굳었다.
프리아는 나를 돌아보려던 채로 정지해 있었다.
[마스터, 50층을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픽 미 업의 고수 반열에 접어드셨네요! 친구에게! 가족에게! 인터넷에! 자랑, 자랑, 자랑!] [저의 도움이 필요할 날도 얼마 안 남았네요. 아쉽습니다! 모쪼록 여신의 가호가 마스터와 함께하길!] [※추가 컨텐츠는 도움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끝났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길었다.
‘일단…….’
돌아가면 잠부터 자기로 하자.
피곤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프리아와 못다 한 얘기는 다음 층에서 지겹도록 하게 될 것이다.
근처에 있던 영웅들이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귀환의 신호.
나도 복귀를 준비했다.
“……?”
돌아가기 직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누군가 서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놈이 황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
이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는다.
멈춰 있는 세계 속에서, 검붉은 외투를 걸친 황자는 프리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 눈길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