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354)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355화
불편한 점심시간 (1)
나른한 오후.
최근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던 강우는 오래간만에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침대에 앉은 한설아의 무릎에 머리를 올린 그는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그녀의 손길을 즐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
“후훗. 기분 좋으세요?”
“응.”
한설아는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강우를 내려다보며 쿡쿡 웃었다.
‘귀여우셔라.’
그녀는 강우를 내려다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에르노어 대륙으로 넘어온 이후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낸 적은 처음.
최근 불안했던 가슴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강우 씨.’
한설아는 강우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몸을 전율시켰다.
‘강우 씨, 강우 씨, 강우 씨.’
뜨거운 열기가 가슴 속에서부터 끓어오른다.
강렬한 충동이 그녀를 부채질했다. 미칠 듯한 집착이 목을 태웠다.
강우를 소유하고 싶었다. 독점하고 싶었다.
세상에 그와 자신만 단 둘이 남고 싶었다.
“하아.”
열락에 찬 숨이 토해졌다.
한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불길을 억눌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담.’
스스로 생각해도 오싹한 상상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어떤 파국이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강우 씨는 우릴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걸.’
그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초를 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설아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행복에 찬 미소가 번졌다.
짜릿한 전율이 전신에 퍼졌다.
“헤, 헤헤헤.”
무심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이 상황이니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강우와는 이미 결혼을 약속했다.
약혼자 사이가 된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요.”
한설아는 방긋 웃었다.
그러다 살짝 표정을 굳힌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
“그런데 정말 충격이네요. 그 착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루시퍼의 권속이었을 줄은….”
“나도 깜짝 놀랐어.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말이야.”
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아는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괜찮을까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물음.
악신 루시퍼와 그를 섬기는 악마의 등장.
이제까지 악마의 손에 놀아나고 있던 제국.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예언의 악마.
마신의 시체를 제거해서 별의 수호를 되돌리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괜찮아.”
강우는 피식 웃었다.
예언의 악마의 정체가 자신이고, 이번에 등장한 악신 루시퍼가 가짜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신 바울리를 시작으로 악의 성좌, 루시퍼, 베히모스 등 실제 이번 여정에 장애물은 많았다.
알고 있는 것만이 이 정도였으니, 모르고 있는 것은 더욱 많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다.
만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국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승리할 것이다.
앞으로도.
“…강우 씨.”
확신에 찬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설아는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괜찮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마음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임자.”
강우는 누워있는 자세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무릎 사이에 코를 박고, 장난스럽게 배를 간질였다.
가느다란 허리에 붙은 뱃살이 몹시 부드럽다.
“꺄악!”
한설아의 몸이 펄떡 뛰었다.
짧은 비명을 지른 그녀는 이내 강우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정말, 강우 씨! 갑자기 뭐 하시는 거예요!”
말로는 질책하지만, 그녀의 입가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듯 활짝 올라가 있었다.
밝은 웃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강우 씨도 어떨 때 보면 어린애 같다니까요.”
한설아는 다시 돌려 누운 강우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래서 싫어?”
“아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단호히 답했다.
“사랑해요, 강우 씨.”
한설아는 허리를 구부려 가볍게 입을 맞췄다.
“흐흐흐.”
강우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소리가 흘렀다.
주변에서 보면 당장 죽창을 들고 찔러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뭔 상관인가.
‘이게 인생이지.’
점액질이 떨어지는 촉수에 둘러싸인 삶이 아니다.
붉고 칙칙한 하늘에 메마른 땅, 시도 때도 없이 싸우기만 하는 정신 나간 종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도 아니다.
강우는 벌어지는 입가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때, 한설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강우 씨, 오늘 오전에 시훈 씨에게 연락 왔어요.”
오전이라면 아이리스와 함께 제국 부흥을 위한 계획을 짜고 있을 때였다.
“오, 잘하고 있데?”
강우는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 씨와 합류해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해요.”
“반응은 어떻데?”
“후훗. 강우 씨도 어떤 반응일지 알고 계시잖아요.”
강우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의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김시훈에 대한 대륙인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좋을 수밖에 없지.’
혼란스러운 제국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영웅.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훌륭한 외모와 수백의 마물을 상대로 홀로 수도를 지켜낸 무력.
예의 바른 태도와 선량한 심성까지.
영웅의 자격을 나열한다면 열에 아홉은 들어맞는 김시훈의 스팩을 생각하면 반응이 좋지 않으려야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피델리오의 정체가 밝혀져 대륙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직후였다.
루시퍼에 대한 공포가 대륙을 집어삼키고 있다.
마음의 등대가 되어 줄 영웅의 존재를 갈망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금 트러블이 있긴 했다고 하더라고요.”
“트러블?”
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중간에 무기를 든 시민들이 시훈 씨를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대요.”
“…….”
가늘게 눈을 떴다.
강우는 한설아의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몸을 일으켰다.
“한 번이 아니었겠지?”
“아…. 예. 맞아요. 이제까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세 번 정도 있었다고 해요.”
한설아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냐는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쯧.”
강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도시를 순회하는 중에 김시훈이 습격받는 것.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으니 입맛이 쓰다.
“루시퍼와… 연관된 일일까요?”
한설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김시훈을 습격한 사람들은 악신 루시퍼의 세력과는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왜 시훈 씨를….”
“시훈이가 구한 게 힘없는 제국민만이 아니니까.”
김시훈은 수도로 쏟아지는 마물만을 죽인 게 아니다.
파티장에서 날뛰고 있는 마물들 또한 그의 손으로 직접 처리했다.
피델리오를 주축으로 부패한 귀족들이 제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귀족들을 지킨 김시훈에 대한 반발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으로 치면 국회의사당에 괴물이 날뛰고 있는데 중간에 누가 나타나서 구해준 격인가.’
제국 상황이 좋았다면 그런 김시훈의 행동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추앙받았겠지만, 아쉽게도 현재 제국민들에게 있어서 귀족들은 악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려나.’
악마는 차라리 애초에 그런 생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
귀족은 그런 것도 아니다.
‘차라리 같이 죽자는 생각을 해도 이상하지 않지.’
악마에게 죽으나, 굶어 죽으나 죽는 건 똑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평소 증오하던 놈들도 같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빨리 적폐들을 정리해야지 이거 원.’
이대로라면 종말의 위기가 닥칠 때 다 같이 죽자며 악마 쪽에 붙는 인간들이 우후죽순 생길 것이다.
혼란스러운 제국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 그렇군요.”
한설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일단 대부분은 시훈이에게 호의적이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일이 성공 해야… 이곳에서 나갈 수도 있고요.”
한설아는 가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왜? 여기가 맘에 안 들어?”
강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강우 파티에 대한 대우는 최상급.
5성짜리 호텔에 온 것처럼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한설아는 강우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킁킁. 냄새를 맡았다.
“…역시.”
아까 강우와 키스를 했을 느낀 기묘한 위화감.
“오늘도… 그 황녀랑 같이 있으셨나 보네요.”
그녀는 침대 시트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부욱. 침대 시트가 뜯어진 것도 모자라 막대한 성력(聖力)에 재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어?’
뭐야.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강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한설아의 눈빛이 스산한 빛으로 빛났다.
“최근 들어서… 그 황녀랑 자주 있으시네요? 전과 달리 그 황녀도 강우 씨에게 건방지게 굴지 않고요.”
“아… 그게, 음.”
강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아이리스 사이에 있던 일을 그녀에게 설명하긴 어렵다.
“…….”
한설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까 전에 느낀 강렬한 충동이, 다시금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 황녀랑 아무 일도 없으셨죠, 강우 씨?”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실 일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임자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아닙니다.
“흐응. 그런데 왜 최근 들어 그 황녀가 부쩍 겸손해진 걸까요? 뭔가 강우 씨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하하하.
너무 건방을 떨어서 조금 겁을 줬더니 그렇게 됐습니다.
“…내일도 아이리스 씨랑 같이 있으실 생각이신가요?”
요즘 좀 일이 많아서요.
피델리오가 싸놓은 똥을 치우기 위해 정신이 없습니다.
“…….”
한설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강우 씨가 바쁘신데 어쩔 수 없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
한설아의 등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열두 장의 날개가 만들어졌다.
“오늘처럼 강우 씨랑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아서 쓸쓸하지만… 그래도 저,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참을 수 없으신 것 같은데요.
“하아.”
열기를 띤 한숨.
그녀는 강우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강우 씨.”
왜 그 말을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세요.
“어, 응. 나도 사랑해, 임자.”
강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설아는 방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등 뒤에 돋아났던 열두 장의 날개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있었다.
“전 그럼 점심 준비하러 갈게요. 누워서 조금만 더 쉬고 계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황성에서 나오는 으리으리한 진수성찬도 좋았지만, 역시 한설아표 김치찌개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
강우는 입가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응, 고마워 임….”
-달칵.
그때,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렸다.
“저… 강우 님.”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아이리스였다.
그녀는 살짝 달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같이 점심 식사하시지 않으실래요?”
“…….”
순간, 방 안의 온도가 한겨울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오늘은 설아랑 같이….”
“아뇨.”
한설아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같이 식사해요, 아이리스 씨.”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