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643)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외전 124화
약혼식 (2)
“어, 음.”
거대한 추를 단 듯 마음이 무거웠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자~ 어서요 강우 씨!”
눈을 반짝이며 보채는 한설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이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질 수 없었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임자. 우리에게 이런 종이 쪼가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우리의 사랑은━ 그 벅차고 설레는 감정은!!! 고작해야 이런 종이 쪼가리에 담을 수 없잖아!!”
그렇다.
그녀를 향한 이 무한한 사랑을, 이 아득한 감정을 어찌 단순한 텍스트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루에 20번.
셋이 다 합쳐 60번이라고 말하는 게 당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과연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문장들이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숭고한 행동을 대변할 수 있을까?”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진정한 【사랑】이란 건 이딴 종이 쪼가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에잇.”
“끼에에에에에엑!!!”
한설아가 인주를 묻힌 강우의 엄지를 잡아 계약서에 꾸욱 눌렀다.
강우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한설아는 성공적으로 인주가 잔뜩 묻은 강우의 엄지를 계약서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이, 임자….”
브루투스에게 칼을 찔린 카이사르처럼 부릅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후. 이것으로 강우 씨는 이 계약서에 있는 내용을 매일 따라주셔야 해요!”
“안 돼에에에에에!!!”
한설아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린 강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호호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리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고, 차연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잘들 논다 아주.”
“아니 왜 여기서 초를 치는 거야. 재밌었구만.”
바닥에 주저앉았던 강우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혼전 계약서라는 건 법정 공방을 할 때나 의미 있는 거지 무슨 신격을 건 맹세처럼 직접적인 강제력은 없었다.
말만 계약서지 진짜 그냥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의미.
아마 이번 계약서 자체도 약혼식의 흥을 위해 임자가 가벼운 장난을 친 것이리라.
“…예?”
“응?”
“강우 씨는… 이게, 장난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한설아는 떨리는 눈빛으로 뒷걸음질 쳤다.
큰 충격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흐윽!! 너무해요, 강우 씨!!! 저와의 결혼은 그냥 장난에 불과하셨던 거군요!!”
“어? 어어?”
장난이 아니었다고?
“아니, 임자.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뭔데요!”
“난 언제나 임자한테 진심이지.”
“…정말이죠?”
한설아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러면━”
어째서인지,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신격에 걸고 맹세해 주세요.”
“예?”
잘 못 들었습니다?
“강우 씨의 신격에 걸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해 주세요.”
“…….”
덜덜덜.
강우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계약서라면 몰라도 신격에 걸고 한 맹세에는 진짜 강제력이 담겨 있었다.
‘이대로라면━’
꿀꺽.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폈다.
여기 적힌 내용을 매일 실천한다면.
“터진다.”
뭐가 터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터짐.
“강우 씨? 어서 맹세해 주세요.”
“어, 그러니까….”
강우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그리고,
“푸훕!”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한설아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임자?”
“하하하하! 농담이에요, 강우 씨!”
그녀는 꺄르르 웃으며 강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제가 강우 씨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할 리가 없잖아요.”
언제 침울했냐는 듯 방긋 미소를 지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강우는 와락 표정을 구기며 그녀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간질였다.
“꺄하핫! 간지러워요!”
“어디서 이런 못된 거 배웠어?”
“후훗. 강우 씨한테요.”
“아니.”
그러면 할 말이 없잖아.
“뭐… 어쨌든.”
짧은 소란이 끝났다.
가구를 치운 넓은 거실에는 낮에 에키드나가 사둔 꽃이나 장식들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약혼식, 시작해 보자.”
사회도, 주례도, 하객도 없는 그들만의 약혼식이었지만.
모두의 입가에는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함에 가득 찬 미소가 걸려 있었다.
-쾅!
“흐응! 진행은 내가 맡을게!”
그때, 자신의 방 안에 나올 타이밍을 재고 있던 에키드나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외쳤다.
그녀의 옷차림은 다른 연인들과 똑같이 웨딩드레스 차림이었다.
“아니. 그거 나중에 성룡 되면 입자 했잖아.”
“흐응! 어차피 그때 가면 몸이 커져서 또 구해야 하는걸!”
에키드나는 허리에 척 손을 올리며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산 옷이니 한 번쯤은 나도 입어보고 싶어!”
“끄응. 그래, 맘대로 해라.”
결국 약혼식의 진행을 맡은 진행자가 웨딩드레스 차림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기괴한 광경 속에서 약혼식이 시작됐다.
“그럼 처음으로! 강우가 준비한 선물을 줄 거야!”
어느새 마이크까지 꺼내든 에키드나가 강우를 가리키며 외쳤다.
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다가갔다.
‘드디어.’
이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품속에 준비해둔 세 개의 반지 케이스를 옷 위로 만졌다.
쿵쿵.
거칠게 뛰는 심장.
가장 먼저 한설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우선, 연인에게 부드럽게 다가가는 겁니다.
5시간 전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약혼식이 시작하기 5시간 전.
-쿠웅!
“그럼 지금부터━”
날카롭게 눈을 뜬 강우가 테이블을 거칠게 주먹으로 내려찍으며 말을 이었다.
“긴급 프러포즈 대책 회의를 시행한다!!!”
“아… 예, 알겠습니다, 형님.”
“호오, 프러포즈라.”
테이블에 앉은 김시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고, 발록은 붉은 근육을 부풀어 올리며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차연주가 한설아와 리리스를 데리고 밖에 나가 있는 사이.
강우는 이번 약혼식에서 그녀들에게 어떻게 프러포즈를 해야 할지 상의하기 위해 긴급 요청을 둘에게 보냈다.
‘물론, 저 새끼들한테 별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마음만 같아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새끼들 말고 친한 남자가 없는걸.’
주륵.
왠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미친 아싸 오강우.
600편이 넘어갈 동안 동성 친구 하나 없는 고환 혐오자 오강우.
‘그래. 그래도 저 두 놈 다 애인이 있잖아?’
발록은 쿠로사키 유리에와 김시훈은 레이라와 잘 사귀고 있다.
그렇다면━
‘필시,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터!’
주먹을 굳게 움켜쥐며 강우(만 년 묵은 노총각/마왕/프러포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름)는 눈을 빛냈다.
“나느으으으은!!!! 너희를 믿는다!!!! 너희를 믿는 나를 믿어!!!!”
이번 프러포즈는 무조건 성공시킨다!!!
-쿠웅!!
“크하하하하하핫!! 이렇게 마왕님이 저를 의지해 주시다니. 이 발록!!! 눈물이 흐를 것 같습니다!!!!”
“그렇지, 발록!!! 이 믿음에 보답할 준비는 되어 있겠지!!!”
“이 발록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터질 듯한 근육과 뜨거운 심장을 가진 악마!!! 전투도, 사랑도 타오르는 열정으로 밀고 나가는 진정한 사나이입니다!!!”
쿵! 쿵! 쿵!
발록(뇌수까지 근육으로 찬 마초남/마왕 부하/프러포즈가 뭔지 모름)이 탄탄한 가슴을 거칠게 주먹으로 치며 호탕하게 외쳤다!
“크으으으으!! 그래!! 그거야 발록!!!! 그거라고!!!! 나는 널 믿고 있었어!!!!!”
“그래서 마왕님!!!!”
“말해봐라, 발로오오옥!!! 트루━블러드 마초의 프러포즈 방법을!!!”
“프러포즈가 뭡니까?”
“야 이 X발.”
그걸 모르면 어떻게 이 새끼야.
“하아. 정말 한심해서 못 봐주겠군. 프러포즈란 건 사랑하는 상대에게 결혼을 청하는 것이다, 발록.”
“호오. 혼약의 맹세, 뭐 이런 건가?”
김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강우를 돌아보았다.
“이 일은 저만 믿으십시오, 형님.”
“시, 시훈아…?”
자신감에 찬 그의 모습에 강우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씨익.
김시훈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전 이미 레이라씨에게 성공적으로 프러포즈를 했거든요.”
“오오오오오!!!! 겨, 경험자!!!!”
강우의 열렬한 반응에 김시훈(개잘생김/마왕 동생/프러포즈 성공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웅!
“크하하핫!! 혼약의 맹세라면 이미 저도 성공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도 저 애송이랑은 다르게 세 번이나!!”
“크윽!”
“세, 세 버어어어언!!!!”
세 번이면 제갈량도 최면 앱에 걸린 것마냥 유비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할 그런 숫자 아닌가!!!
“발록, 이 자식!!!! 난 널 믿고 있었다고!!!!! 단 한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어요, 내가!!!!
강우(방금 전 발록에게 욕 박음)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번쩍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크하핫!!! 제 말만 따르시면 됩니다, 마왕님!!!”
발록(프러포즈 전문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자아!!! 어서 그 방법을 말해 다오 발록!!!!”
“우선 혼약의 맹세를 할 여자에게 거침없이 다가갑니다!!! 박력 있게!!”
“그래!!! 그렇지!!! 박력 중요하지!!!!”
“그 다음 옷을 찢습니다!!!”
“뭘 찢는다고?!!!!”
“사나운 맹수처럼 옷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그거 맞아?!!!”
“그리고 연인에게 영원히 내 것이 되라 명하는 겁니다!!!”
“그거 아닌 것 같은데!!!!!”
“여기까지 해서 넘어오지 않았던 여자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그땐 힘으로━”
“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크허어어어어억!!!!!”
뻐어어어어억!!!!
발록의 사타구니를 거칠게 올려 찼다.
발록(프러포즈 전문가 아님)은 통한의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건 프러포즈가 아니잖아아아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발록을 두들겨 팼다.
이 쌀벌레만도 못한 뇌세포를 가지고 있는 놈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거만한 표정의 김시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역시 저 무식한 근육 돼지가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알 리가 없죠.”
김시훈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강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만 믿으십쇼, 형님.”
“시, 시훈아?”
“제가 레이라 씨에서 성공했던 프러포즈. 인터넷이란 방대한 지식의 보고(寶庫)에서 배운 프러포즈만 있다면 형님도 성공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 내 동생!!! 역시 동생이 최고야!!!”
와락!
김시훈을 끌어안았다.
김시훈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연인에게 부드럽게 다가가는 겁니다.”
* * *
“임자.”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다가간다.
상냥하게 손을 잡으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는다.
“강우 씨….”
한설아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는다.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임자의 어머니는… 범죄자야.”
김시훈에게 전수 받은 【비법】을 입에 담았다.
“예? 갑자기 그건 무슨.”
“왜냐하면━”
더없이 그윽한 목소리로.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말한다.
“한설아라는 ‘천사’를 하늘에서 훔쳐 오셨잖아.”
찡긋.
환하게 웃으며 윙크를 보냈다.
“…….”
“…….”
“…….”
“…….”
침묵이,
죽음보다도 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 성공? 성공한 건가?!’
강우는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
뭔가.
다들 표정이 이상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취객이 길바닥에 토해놓은 토사물을 밟은 것 같은 경멸과 환멸에 가득 찬 표정이다.
‘뭐지?’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시훈이가 무조건 성공할 거라 했는데!!!’
어째서 그의 연인들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띠링!
그때, 귓가를 울리는 방울 소리.
푸른 메시지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가 뒤지세요.]아니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