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ay away from my family RAW novel - Chapter 11
11화>
정리하지 않은 화구며 물감 자국으로 어지러운 화방 안은 온통 파베의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세 제자와 함께 왕국을 여행하던 파베.
드래곤과 대결하던 파베.
오아카의 초콜릿을 먹으며 즐거워하던 파베.
립시산(山)으로 홀로 떠나던 파베.
저도 잊고 지냈던 수많은 모습을 보자 기분이 묘하면서도 떨떠름했다.
도대체 150년도 넘은 시절의 모습을 어떻게 화폭에 담은 걸까.
복잡한 기분으로 여러 정물이 들어찬 방 안을 살피던 중,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상자가 잔뜩 쌓여 있는 구석에서 웬 까치집 같은 것이 위아래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저건 뭐…… 엥?”
“어, 왈라이카 님 오셨어…… 응?”
그녀와 까치집이 동시에 의문성을 흘렸다.
높이 쌓인 상자 위로 안경 쓴 녹색 눈이 드러났다.
그녀가 까치집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화가로 보이는 남자의 연갈색 더벅머리였다.
“우와, 왈라이카 님이 작업실에 라니아 님 말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꼬마니이…… 으갸갹!”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살갑게 인사하던 남자가 상자에 걸려 시끄럽게 넘어졌다.
파베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로도 힘겹게 고개를 들며 웃어 보이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사 하나 빠진 놈이로군.’
코끝에서 대롱거리는 안경을 고쳐 쓴 남자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왈라이카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놈의 상자 좀 치우고 살랬잖아.”
“아하하, 치워야겠다 생각은 하는데 도통 짬이 안 나서요.”
더벅머리를 긁적인 남자가 여기저기 쌓인 방해물들을 헤치며 겨우 둘의 앞까지 왔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다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꼬마님. 저는 왈라이카 님의 후원을 받고 있는 화가, 그란트 밀리어드라고 합니다.”
파베는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왈라이카에게 물었다.
“어찌 인사하는 게 좋겠느냐?”
“일단은 먼저 짰던 설정대로 가자.”
설정대로라면 딸 노릇을 하라는 것이겠지.
파베는 둥글게 눈을 휘었다. 아이 같은 웃음을 입가에 걸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밀리어드 씨.”
원래대로라면 제자놈의 딸이라는 소개까지 해야겠지만, 아직 그것까진 무리였다.
때문에 남은 소개는 왈라이카가 대신하게 되었다.
“내 딸이야. 나랑 많이 닮았지?”
“예?”
왈라이카의 부연을 들은 그란트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정도는 약하지만 경악에 휩싸인 건 파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얼른 마법으로 항의했다.
“염병할 놈아, 내가 어딜 봐서 너랑 닮았단 거냐!”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부녀지간인데 닮았다는 설정 좀 쓰면 안 돼?”
물론 왈라이카는 매우 뻔뻔했다.
심지어 더 뻔뻔한 소리까지 늘어놓았다.
“그리고 지금 싸부랑 나 꽤 비슷하게 생겼어. 둘 다 까만 머리에 금색 눈이잖아. 물론 난 한쪽이 흑안이긴 하지만.”
“하…….”
이 몸의 진짜 주인인 위나델이 듣는다면 황당해서 말을 잃을 소리였다.
그녀는 무어라 더 쏘아 주려 했다.
만약 그란트 쪽에서 말을 걸지 않았다면 갖가지 참신한 악담을 퍼부었을 것이다.
“맙소사, 왈라이카 님의 딸이라니……. 그러니까, 진짜 딸 맞아요? 생물학적으로 왈라이카 님의 피를 이은 친딸?”
“당연하지. 내가 피도 안 섞인 인간 꼬마를 딸이라고 데리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아, 물론 그렇죠. 맙소사, 신이시여. 세상에 이런 일이…….”
그녀의 뻔뻔한 제자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계속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가엽게도, 어리숙한 화가는 왈라이카의 말을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올해 들은 소식 중 가장 충격적이네요. 왈라이카 님에게 딸…….”
“뭐, 놀랄 만해. 나도 나에게 딸이 생길 줄은 몰랐거든.”
“이제 와서 솔직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왈라이카 님이 고자일 줄 알았거든요? 용의 피가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해서 성욕과 생식 활동에 치명적인 결함이…….”
“……너 후원 끊기고 싶냐?”
왈라이카의 굵고 까만 눈썹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보기에는 어리숙해도 제 밥줄이 걸린 사안에는 빠릿빠릿한 그란트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언제 후원자의 속을 긁었느냐는 듯 비굴한 미소를 띄우고서 다른 소리를 했다.
“아무튼, 따님이 생기셨다니 매우 경하드립니다. 왈라이카 님을 닮아서 그런지 따님의 전신에서 기품이 우러납니다.”
“그래?”
“예. 이렇게 보니까 정말 왈라이카 님과 많이 닮았네요. 일단 다른 색이 하나도 섞이지 않게 정순한 흑발이 매우 비슷합니다. 염료를 들이부은 것처럼 새카만데도 뻣뻣한 느낌 없이 고아한 광택을 내는 게 마치 밤의 여신이 드리운 머리채 같습니다.”
이거 마법으로 색 바꾼 건데?
시키지도 않은 아부를 줄줄이 쏟아 내는 모습이 첫인상과 영 딴판이었다. 파베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우유를 먹인 것처럼 희고 고운 피부나 강단 있어 보이는 입매도 비슷하네요. 왈라이카 님과 달리 부드러운 눈꼬리는 아무래도 엄마 되시는 분을 닮은 거겠지요? 그래도 눈동자는 아빠를 빼다 박았네요. 좀처럼 보기 힘든 금색 홍채가…….”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비위 맞추는 말을 줄줄 쏟아내던 그란트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대충 흘리고 있던 파베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화가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뚫어져라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흘려 냈다.
“그 눈, 왈라이카 님을 닮은 게 아니네요.”
물감 묻은 손이 화각(畫角)을 잡듯 파베의 앞을 느리게 오갔다.
“분명 눈매도 다르고, 눈썹 색도 다른데…….”
어두운 녹색 눈동자에 환희를 닮은 빛이 언뜻 비쳤다.
그란트는 마침내 묵은 숙원을 이룬 노인처럼 절제된 포만감이 어린 얼굴로 말했다.
“꼬마님의 눈은, 제가 매일 그리는 분을 닮았어요.”
“…….”
이 녀석, 보기보다 예리한데?
계속해서 파베의 황금색 눈을 바라보는 그란트의 표정은 곧 죽어도 여한이 없어 보이도록 흡족했다.
묘하게 뚱해진 얼굴로 스승을 고쳐 안은 왈라이카가 말했다.
“그만 봐. 내 딸 얼굴 닳겠다.”
“정말이지 놀랍네요. 왈라이카 님에게 어쩌다 딸이 생겼는지 알겠어요.”
표정을 환기한 그란트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떠들었다.
“아마 상대 여자분이 이런 눈을 가지셨던 모양인데 그렇다면 안 넘어갈 수가 없었겠죠. 초상화 주인을 향한 왈라이카 님의 집착을 생각한다면, 아마 생물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도 마법으로 세워서-”
“너 진짜 후원 끊는다?”
왈라이카가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말의 내용보다도 용의 권능이 담긴 음성 자체에 강력한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란트가 입을 다물며 석상처럼 굳었다.
“할 말 안 할 말 가려 가면서 하자. 애 앞에서 그게 무슨 낯 뜨거운 소리야?”
기세를 삭인 왈라이카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뻣뻣해졌던 몸을 푼 그란트가 얼른 사과했다.
“죄, 송합니다.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됐어. 하여간, 뭔가에 흥분하면 생각나는 대로 뇌 필터 없이 떠들어대는 버릇 하고는.”
잘못한 학생 같은 표정을 지은 그란트가 앞으로는 더 주의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더 주의해 봤자 기본이 바닥이라 기대가 안 간다.’라고 포기한 듯이 중얼거린 왈라이카가 어투를 바꾸었다.
“아무튼. 며칠 전에 있는 줄도 몰랐던 딸이 생겨서, 너한테도 보여 주려고 왔어.”
“몹시 영광입니다.”
“딸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데 바로 가능하지?”
“물론이죠. 저야 숯 하나만 있어도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짐짓 너스레를 떠는 그란트를 보자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화구를 살 돈이 없었던 꼬마는 하얀 바위에다 부서진 숯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화랑 유리창 너머로 훔쳐본 초상화 속의 파베 크로슈를.
뒤에 사람이 선 줄도 모르고 스승을 그리다가, 검댕이 묻은 얼굴로 저를 돌아보던 꼬마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게 맘이 너그러워졌다.
왈라이카가 아까보다 더 누그러진 음성으로 일렀다.
“그럼 당장 시작하자.”
“예, 잠시만요. 앉으실 자리를 좀 만들고.”
헤헤 웃은 그란트가 근처에 쌓인 상자며 널브러진 이젤, 캔버스, 팔레트 따위를 열심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정리라기보단 뒷일 생각 없이 한곳에 몰아 쌓는 짓이었지만.
어쨌든 몇 분이 지나자 그럭저럭 세 사람이 앉을 공간이 만들어졌다.
여러 구석에 나동그라져 있던 의자를 두 개 가져온 그가 이젤을 세우며 말했다.
“거기 두 분 앉으세요.”
자신은 대충 당긴 상자에 걸터앉은 그란트가, 또 다른 상자 위에 물감이며 팔레트 등을 올려놓고서 연필을 들었다.
다행히 아까보다 속이 나아진 파베는 단정한 표정과 자세로 화가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너무 의식하지 말고 편하게 계셔도 돼요. 저는 한번 본 건 잘 잊지 않거든요.”
예의 어리숙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천재(天才)가 절로 배어나는 장인이 거기 있었다.
“완성까지 보여 드리려면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을 것 같으니까 지금은 도안과 밑색까지만 할게요. 30분쯤 걸려요.”
연필을 쥔 손이 슥슥 캔버스를 누비기 시작했다.
제 일에 온전히 몰두한 예술가란 공기를 압도하는 아우라가 있었다. 파베는 즐거운 기분으로 그 모습을 감상했다.
“쟤 하는 짓은 어벙해도 그림 하나는 잘 그려. 기대해도 괜찮을걸?”
“여기 걸린 그림들만으로도 실력은 보증된 셈이었다.”
파베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폭에 담긴 제 모습이 민망한 것과 별개로, 그림 하나하나마다 뛰어난 화재(畫才)가 엿보였다.
한참 밑그림을 그리던 그란트가 연필을 내려놓더니 붓과 팔레트를 집어 들었다.
팔레트에 몇 가지 색을 짜내고 섞고서 대담하게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그리고 있는 것 맞겠지?’
너무 막힘 없는 손길이라 백지에다 아무렇게나 색을 칠하는 꼬마 아이 같았다.
물론 여기 걸린 그림들을 보자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얼마간 채색에 몰두하던 그란트가 큰 붓을 내려놓았다.
가장 가는 세필을 집어 들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려지는지가 궁금하여 마법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상대가 보여 주지 않는 미완작을 훔쳐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꾹 참았다.
화가는 붓을 씻고 또 새 물감을 묻혀 가며 지난한 작업을 반복했다.
이윽고 턱을 문지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붓질을 두어 번 더 한 후에 허리를 폈다.
“대충 됐습니다.”
“봐도 돼?”
“조금 부끄럽지만, 보여 드리기로 했으니까.”
쑥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긁적인 그란트가 이젤을 돌려 세웠다.
드디어 그림을 확인한 파베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