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ay away from my family RAW novel - Chapter 16
16화>
“…….”
상사의 갑작스런 난입에 라니아의 암적색 눈썹이 꿈틀했다.
왈라이카는 ‘아니 이 고용주가, 서류는 얻다 팔아먹고 여길 기어 올라와?’라는 환청이라도 들은 기분이 되었다.
눈썹 모양 하나만으로 싸늘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 라니아가 물었다.
“결재는 다 끝내셨습니까?”
“그, 게. 아직 좀 남았는데…….”
“저를 향한 수장님의 배려가 이렇게 깊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기쁘게 밀린 휴가를 써야…….”
“자, 잠깐만 기다려! 이것만 말하고 내려갈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정말 밀린 휴가 폭탄이 쏟아질지도 모른다.
겁을 집어먹은 왈라이카가 다급하게 말했다.
“싸부지난150년동안대륙이어떻게굴러갔는지잘모르잖아?그공백을메우는교육을진행할예정이야.”
숨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말은 퍽 예사로운 내용이었다. 파베는 이걸 굳이 제자 입으로 꼭 말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내딸로서의태도도어느정도연습시키려고.”
“딸로서의 태도?”
“응. 딸로서의 태도!”
드디어 숨을 쉬며 말의 템포를 회복한 왈라이카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떠들었다.
“날 아빠라고 부르는 거 말이야.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어?”
“…….”
제자의 유치한 행동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판단이 어려웠다. 파베는 그저 금색 눈으로 왈라이카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응은 그녀 옆에서 나왔다.
“용건 다 끝나셨습니까?”
“응. 이제 바로 내려갈,”
“여기, 받으십시오.”
라니아가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종이를 내밀었다.
휴가 신청서라고 적힌 글씨가 아주 큼지막했다.
“이, 이게 뭐야? 휴가 신청서라니, 난 이 휴가 반대…….”
“반려할 생각 하지 마십시오. 저번에 휴가계 내면 무조건 보내 주겠다고 하셨던 말씀 녹취해 놓았습니다.”
“…….”
왈라이카의 얼굴이 희게 말라붙었다.
라니아는 사무적인 미소를 띤 채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제가 분명 일에 집중하라 말씀드렸는데 상황은 어떻게 알고 올라오신 겁니까?”
“그, 그게…….”
“방마다 깔린 방음 마법까지 뚫고 정황을 도청하고 계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이런 제기랄.”
낭패한 표정을 지은 왈라이카가 낮은 욕을 뇌까렸다.
그리고 위나델 앞에서 상스러운 말을 쓴다며 사부에게 몹시 혼났다.
결국 스승을 놀리러 왔다가 놀린 것 이상으로 너덜너덜해진 제자는 휴가 신청서를 들고 비척비척 방 밖으로 사라졌다.
라니아가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파베 님 덕분에 수장님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을. 나야말로 모자란 제자놈을 곁에서 도와주니 고맙다.”
두 여자 사이에서 같은 적을 둔 동맹 같은 전우애가 흐르기 시작했다.
의식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위나델은 어쩐지 시조님의 제자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남은 옷들을 입어 보고 난 후에는 지난 150년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교육받는 시간을 가졌다.
라니아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특별히 궁금한 점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파베가 냉큼 질문했다.
“크로슈는 어쩌다 그렇게 타락한 거냐?”
위나델의 기억만으로는 크로슈가 왜 저리 무도한 가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라니아가 대답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지난 150년간 대륙의 마법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겠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야 고마운 일이다.”
그리하여 시작된 라니아의 이야기는 파베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대마법사가 정리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지난 150년 동안 실용 마법은 발전했지만 전반적인 마법 수준은 오히려 퇴보했다?”
“예. 100년 이상 된 과거다 보니 저로서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만, 가끔 수장님이 ‘덕분에 사업 몸집을 불리기는 좋았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왈라이카 님의 서재에 이전 세대 사료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어느 정도 흐름을 읽을 수 있기도 했고요.”
역대 최고의 대마법사였던 파베 크로슈가 죽은 후 왕국의 마법은 점점 쇠퇴했다.
그녀 사후 대마법사가 고작 둘밖에 나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마지막 대마법사가 60년 전에 생을 마감해서, 현재 대륙에 ‘인간’ 대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란다.
“마법의 맥이 약해지니 그 자리를 메울 능력이 필요해졌고, 정령사의 능력이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물을 부리고 바람을 일으키는 정령사들의 능력은 마법사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모든 가문 구성원이 정령을 다룰 줄 아는 크로슈의 입지가 크게 좋아진 건 필연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크로슈는 역사가 짧은 가문이었다. 시조였던 파베가 가문을 세운 지 몇 년 되지 않아 생을 마감한 탓에 가풍이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초대 가주였던 알리데론-파베는 가문을 세우긴 했으되 가주 자리에 앉진 않았다-과 아들 대까지는 그럭저럭 깨끗한 가문 정신을 이었으나 그 뒤가 문제였다.
물밑 정치로 형을 수렁에 빠뜨린 차남이 3대 가주 자리에 오르면서 가문의 성격이 변질한 것이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3대 가주 아타도르는 ‘능력’을 가문의 최고의 가치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마법이 쇠퇴하고 정령사의 입지가 부상하는 당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죠.”
정령사로서의 자질이 가문 내 권력의 척도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능력이 우수한 자는 존귀해졌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는 은근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기조가 몇 대를 이어진 끝에 작금의 사태까지 불러일으켰다는 라니아의 말은 파베를 침통하게 납득시켰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사람들은 나를 정령사로 기억하던데.”
“크로슈가 어느 정도 개입해서 만든 이미지일 겁니다. 가문의 시조가 쇠퇴해 가는 마법의 대가였다는 것보다는 저들같이 정령의 힘을 부리는 대정령사였다는 편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에 좋으니까요.”
“하.”
파베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품은 사람이었다.
마나를 배열하고, 술식을 전개하여 마법이라는 법칙을 구현하는 일련의 과정에 긍지를 느낀다는 의미다.
그리고 마법을 펼치는 과정에 긍지를 느끼는 성향은, 안타깝게도 그만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발현되는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쉽게 말하자면…….
“감히 정령사 따위가 마법사를 상대로 위상을 들먹여?”
파베가 정령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령의 힘을 ‘빌려서’ 쓰는 정령사 주제에, 수련으로 마나를 쌓고 직접 술식을 설계하여 마법을 전개하는 마법사를 무시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정령사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정령에게서 비롯된 것.
정령술에도 나름의 조예가 필요하긴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직접 구현하는 마법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 파베의 지론이었다.
‘염병할 후손놈들, 같은 피를 이은 가족을 죽이려 드는 걸로도 모자라 나를 정령사 따위로 만들었겠다?’
크로슈를 심판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입술을 비죽거린 파베가 불만스레 물었다.
“왈라이카는 그놈들이 사부의 이름에 먹칠을 해대는데도 아무 조치가 없었단 말이냐?”
“마땅찮게 여기긴 하셨습니다만, 어쨌든 파베 님의 후손들 아닙니까. 함부로 손을 쓰기도 곤란해하는 눈치셨습니다.”
“끄응.”
150년 동안 사부가 그리웠노라 중얼거리던 제자를 떠올리자 마냥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 그냥 아까 생각했던 대로 당사자를 족치면 그만이었다. 파베는 위나델의 외양에 맞지 않는 스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그 뒤로도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문화, 대륙의 정세, 이종족들의 동향 등등.
두어 시간 만에 다 듣기엔 광범위한 내용이라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하지만, 대마법사의 통찰력이란 그런 얕은 정보에서도 제법 깊은 흐름을 읽어 냈다. 파베는 사유에 사유를 거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첫날이니 이 정도까지 하죠. 같은 층에 수장님의 서재가 있으니 지난 150년간의 정보를 훑어보시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고맙다.”
“당분간 파베 님 곁에 계속 대기할 예정이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하문해 주십시오. 시키실 것도 무엇이든 지시해 주시고요.”
깍듯한 라니아에게 빙긋 웃어 보인 파베가 잠시 내면을 관조했다.
왈라이카가 내려간 다음부터 조금씩 흐려지던 위나델의 의식은 이제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 의식에 대한 문제도 정리해야 하는데…….’
한 몸에 두 영혼이 머무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처음에도 확인했듯 그녀를 강제하는 술식의 흔적은 없었지만, 이 상태로 계속 지내는 것은 위나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을 다 해결하고 나면 아무래도…….’
가문을 징벌한 이후의 일을 생각하던 그 순간이었다.
문이 다시 한번 벌컥 열렸다.
그리고 어쩐지 점심보다 훨씬 초췌해진 왈라이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했다…….”
고작 이 높이를 올라오는 게 힘들었을 리도 없건만, 서류를 처리하는 과정이 꽤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라고 파베는 생각했으나 라니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빨리했다면 두 시간 전에 해치울 수 있는 양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분량은 절대 아니었어.’
게다가 저 힘들어하는 표정이라니. 왈라이카는 반룡이었다. 인간을 한참 초월한 체력의 소유자가 손에 익은 서류 결재 정도로 저렇게 힘들어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엄살이겠군.’
상사의 상태를 짐작한 라니아가 과장된 태도를 지적하려 했을 때였다.
왈라이카가 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스승에게 내밀었다.
“서류 결재하는 김에 크로슈 관련 계획 정리도 대충 끝냈어. 여기 읽어 봐…….”
“계획 정리까지 끝냈다고?”
어제 하루를 통으로 놀아서 내일이나 모레쯤에야 받을 줄 알았다.
놀라는 스승에게 정리 자료를 넘긴 왈라이카가 몸을 돌렸다.
차가운 수석 보좌관을 붙잡고서 ‘싸부 일까지 열심히 했으니까 휴가만은 참아 달라’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파베는 혼자 간절한 제자와 콧방귀도 뀌지 않는 라니아의 모습을 힐끗 보았다가 받은 자료로 눈길을 돌렸다.
면피용이라고 정리를 허투루 한 건 아닌 모양인지 종이 넉 장에 내용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흐음…….”
빠르게 일독을 마친 파베의 얼굴에 가벼운 놀람이 스쳤다.
‘제 딸이 되라고 하길래 사부 놀려먹으려는 속셈으로 이유를 끼워 맞춘 수작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게 계획의 핵심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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