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ay away from my family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음울하기 그지없던 왈라이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달력의 표시를 확인한 하프 드래곤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옥에서도 시곗바늘은 돌아가는구나. 내일모레면 라니아가 복귀한다니 너무 좋아. 너무 행복해…….”
‘라니아 복귀하면 전보다 일 더 늘어났다고 잔소리 엄청 할 것 같은데.’
수석 보좌관이 복귀한다고 해서 마냥 좋은 일만 있진 않을 터였다.
파베의 머릿속엔 이미 예지에 가까운 미래가 그려졌다.
라니아가 휴가 신청서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일 진행이 왜 이따위입니까!’라고 소리치고, 죄인처럼 쩔쩔매며 전보다 더 많은 일에 시달려야 할 제자.
아마 제자라고 가장 가능성 큰 그 현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저런 자그마한 행복의 가능성이라도 붙들며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거겠지.
그리하여 파베는 기뻐하는 왈리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틀 뒤에 제자가 맞이할 새로운 지옥을 미리 묵념하면서.
* * *
다음 날. 위나델은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힘들게 눈을 떴다.
분명 많이 잤는데 온몸이 찌뿌둥하고 머리까지 아팠다. 뇌가 콕콕 쑤시는 느낌이랄까.
‘몸살이라도 걸린 걸까…….’
그러고 보면 카텐디움의 크로슈 본가에 머물 때도 1년에 한두 번쯤은 심하게 앓곤 했다.
여기 와선 크게 아프질 않았는데, 어쩌면 이제 슬슬 아플 시기가 된 걸지도 몰라.
실상은 정신체를 혹사한 시조님이 몸을 움직여서 발생한 반동이었으나, 의식 내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던 위나델로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실을 설명해 줄 파베가 그간의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 버린 터라 더더욱 그랬다.
“일단…… 읏!”
몸을 일으키려 했더니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위나델은 몸을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그런 다음에야 제 이마에 얹혀 있는 물수건의 존재를 깨달았다.
“가주님, 일어나셨어요?”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대야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나히야였다. 다소 어두운 피부와 길쭉한 팔다리 때문에 늘씬한 흑표범 같은 인상을 주는 크로슈의 일원이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갈아 주며 말했다.
“피로가 많이 누적돼서 몸살이 난 것 같다고 의사가 그러더라고요.”
“아하…….”
“왈라이카 공은 일이 생겨서 저한테 간호 맡기고 외출하셨고요.”
물이라도 좀 마시라고 이른 나히야가 컵을 아래로 받쳐 대고 빨대를 물려 주었다.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위나델은 새 가솔의 얼굴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배는 안 고프신가요? 땀 많이 흘렸는데 찝찝하진 않으시고요?”
“배는 괜찮고…… 옷이 축축하긴 해요.”
“새 옷 가져다줄 테니까 갈아입으세요. 잠시만요.”
새 옷을 가져다준 나히야는 옷 벗고 입는 것도 도와줄지를 물었지만, 그건 좀 부끄러웠다. 위나델은 혼자 할 수 있다 대답하고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
얇은 여름용 잠옷을 완전히 벗어 옆에 내려놓는 순간, 천 자락 사이로 까맣고 길쭉한 것이 툭 떨어졌다.
어제 갖고 놀다가 주머니에 넣었던 왕세자의 선물이었다.
‘으, 칠칠치 못하게 선물받은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네…….’
그래도 부드러운 침대 시트 위에 떨어져서 다행이었다. 위나델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 녹음기를 확인했다.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금색 핀이 어긋나 있었다. 아이는 핀을 원래 상태로 되돌린 다음 다시 나히야를 불렀다.
점심을 먹으면서 나히야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가문이나 마법에 관련된 이야기였으나, 후반에 가선 왕세자에게 받은 선물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참, 여기 있던 인형은 못 보던 건데 왈라이카 공이 선물해 준 거예요?”
“아. 그건 선물받은 거예요. 왕세자님이……”
문장을 보여 주고 받은 선물을 자랑하다 나히야를 돌려보냈다.
어느새 저녁에 가까운 시간.
그제야 외출에서 돌아온 왈라이카가 대녀의 방을 찾았다.
“딸, 많이 아파?”
“이 정도면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왈라이카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직접 위나델의 상태를 살폈다. 발갛게 열꽃이 핀 뺨을 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무리를 했길래 전면에 잠깐 나선 정도로 애가 이렇게까지 아픈 거야?’
마음 같아서는 스승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싶었지만, 이미 아이 안에서 기절해 있을 터였다. 그는 속상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고서 위나델의 이마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곧 아이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이마가 시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
“좀 괜찮아?”
“네. 조금이 아니라 많이요.”
위나델이 맑게 웃었다.
“고마워요, 아빠.”
“고맙긴 뭘. 너도 마법 조금만 더 배우면 이 정도야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거야.”
부녀는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라니아가 복귀한다는 화제로 대화할 때는 둘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물론 라니아가 복귀하는 건 내일의 문제였고, 오늘은 오늘의 일이 산적해 있었다. 왈라이카는 딸과 대화하는 중에도 십여 마리의 전령새에 시달려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위나델이 말했다.
“전 이제 괜찮으니까 가서 볼일 보세요.”
“아냐, 괜찮아. 내일이면 라니아도 오니까 조금쯤은……”
“그럼 내일 언니 온 다음 같이 있어 주세요. 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왈라이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관 중 한 명이 보낸 전령새를 확인하며 무슨 험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바로 떠나진 않고 수건에 냉기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아픈 딸을 혼자 두고 가기 싫다는 기색을 온몸으로 팍팍 풍기며 미적거리던 중, 별안간 왈라이카의 입가가 비죽 올라갔다.
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투로 외쳤다.
“아, 그래. 할배들!”
“네에……?”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실피드 할배 부르면 되겠네!”
조금 무리해서 용언을 쓴 왈라이카가 실피드를 불러왔다. 저 대신 애 간호 좀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
졸지에 불려와 간병령으로 전락한 실피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와, 진짜…… 저 반쪽짜리 용가리가 정령왕을 아주 물로 보지? 내가 지 부하야? 어?]“죄송해요, 실피드 님. 괜히 저 때문에…….”
위나델이 자기는 괜찮으니 그냥 가셔도 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실피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널찍한 아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 너랑 같이 있기 싫다는 뜻 아니야. 그냥 저 건방진 반쪽짜리 도마뱀이 짜증 난다는 거지.]“제가 죄송해요.”
곧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머물며 열기를 씻어 주었다. 위나델은 침대에 누운 채로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실피드 님.”
[그래. 앞으로도 네 대부 같은 건 닮지 말고 지금처럼 예의 바르게 자라도록 해라.]“풋.”
아빠를 ‘것’으로 칭하는 말에 살짝 웃음이 났다.
위나델은 입을 가리며 소리 낮춰 쿡쿡거렸다. 얼마 후에야 웃음기를 겨우 가라앉힌 다음, 조명이 켜진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나는 사람 아닌데?]“아, 그러네요. 그럼 좋은 사람들이랑, 정령왕님이랑, 하프 드래곤이랑…….”
[하프 드래곤은 빼.]“헤헤, 싫어요. 아빠도 정말 좋은 분인걸요. ……부하분들한테 화낼 땐 좀 무섭지만.”
[그게 왈라이카의 본질이지.]말로는 계속해서 아빠를 힐난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긴 세월 쌓인 애정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다는 걸 안다.
위나델은 대부를 더 옹호하는 대신 엷게 웃었다.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곧 잠이 들 것 같았다.
그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소녀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실피드에게 물었다.
“실피드 님.”
[왜.]“파베 님이랑은,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하셨죠?”
[어. 과장 좀 보태면 걔 태어났을 때부터 알던 사이지.]정령왕의 입가에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웃음이 옅게 피어났다.
[지금에야 질색하지만, 저래 봬도 어릴 땐 나를 꽤 따랐어. 아, 그때가 귀엽고 좋았는데.]“헤에.”
파베 님은 정령왕과 관련된 화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시조님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다. 아이는 졸음기 어린 눈을 반짝이며 불쑥 뱉었다.
“멋있어요.”
생뚱맞은 찬사에 정령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어눌해진 대답이 진심을 가득 담고 돌아온다.
“파베 님도, 실피드 님도, 다른 정령왕님들도…… 오래전부터 알면서 서로를 아끼는 관계란 건 참 멋있는 것 같아요…….”
소녀의 목소리에는 아이다운 선망과 부러움이 가득했다.
실피드는 아까보다 조금 더 그윽해진 시선으로 위나델을 굽어보았다. 은실이 고인 정수리에 바람으로 된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그렇게 부러워할 일 아닌 것 같은데.]“네?”
[아까 네가 그랬잖아. 네 곁에는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그럼 너도 이미 멋있는 거 아냐?]“…….”
아이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린 소녀의 속마음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입매를 고쳐 웃은 실피드가 나직하게 일렀다.
[물론 넌 아직 어리니까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어른이 돼. 그땐 분명 제법 멋있는 사람이 돼 있을 거야.]“…….”
청량한 손이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이윽고 나지막하고 장난스럽게 떨어지는 속삭임.
[위나델라 크로슈, 너 나랑 계속 아는 사이 할래?]“…….”
[네 반쪽짜리 도마뱀 대부가 너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혹시 네 안에서 파베 크로슈가 사라진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