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과연 그 말이 사실인 듯싶다.
두바이로 향하는 여정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는데,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니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폭룡을 만나지 않나.
다른 나라의 S랭크 헌터들과 드잡이질을 하지 않나.
‘지옥의 계단’에서 죽을 뻔한 경험은 또 어떻고.
하나하나 따져 보니 ‘고생’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수확도 확실했지.’
한국의 이레귤러(외 1인) 팀은 ‘지옥의 계단’에서 상위권 성적을 기록했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WHPO의 영계 탐사 대표팀에 선정되었다.
대표팀에 합류했다는 건 곧 상위 3팀 안에 들었다는 의미이니, 이 정도면 ‘국위선양’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프랑코에게 얻은 정보는 앞으로의 일에 커다란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녀석이 암흑 물질을 보내온다면 그걸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많다.
띠띠띠.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면서, 예전에 누나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큰 집으로 이사를 했으니 그만큼 방도 많았고, 나와 누나는 많은 방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궁리했었다.
드레스 룸.
누나가 사용하는 공부방.
디바이스를 점검하기 위한 세팅룸 등등.
거의 대부분은 누나와 의견이 일치했는데, 딱 하나 다른 게 있었다.
-게스트 룸?
-응.
-게스트 룸이 굳이 있어야 할까? 여기에 손님이 누가 온다고.
그러자 누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전적이 너무 화려하지 않아?
-…….
지난날의 과오(?)를 생각해 보니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암시장에 있던 비수를 데려와서 ‘당분간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었고, 패닉에 빠진 진 박사를 데려와 보살펴야 했지.
나야 전부 아는 사람들이지만, 누나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누나가 너그러운 사람이라 다행이지, 문전 박대를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야. 언제 또 우리 이쁜 해선이가 모르는 사람을 데려올지 모르잖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분간 같이 있어야 할 것 같다면서.
-누나 지금 말투는 되게 상냥하거든?
-응. 그런데?
-근데 눈빛은 욕을 하고 있어.
-호호. 아니거든?
누나는 내가 무안할 정도로 ‘게스트 룸’을 손수 꾸며 놓았다.
우리가 쓰는 침대와 똑같은 브랜드의 커튼까지 쳐 놓고, 계절별로 침구류를 구매해 서랍장에 고이 넣어 놓았다.
이쯤 되면 게스트가 오지 않으면 서운해할 정도로.
누나는 게스트 룸을 꾸민 뒤 손을 탁탁 털며 아주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앞으로 언제든 불청객을 데리고 와도 좋다’라고.
‘그리고 나는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지.
띠리리리.
짧은 회상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무거운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다시는 데려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불청객’과 함께.
“해선이 왔니?! 어머…….”
소리가 제법 요란스러운 걸 보니 급하게 나온 모양이다.
남동생이 두바이에 갔다가 2주 만에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반가운 얼굴도 잠시, 누나의 서글서글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그럼 그렇지.”
잠시 혼란에 빠졌던 누나가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익숙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우리 해선이가 ‘또’ 손님을 데려왔네? 반가워요. 해선이 누나예요. 이름은 천송화.”
‘또’라는 말에 악센트가 들어가 있는 건 기분 탓일까?
내 옆에 있는 불청객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첸입니다. 잠시 신세 지겠습니다.”
“어머. 한국분이 아니시구나?”
“아.”
누나가 통역기가 없는 걸 깜빡했군.
진 박사의 디바이스를 차고 있는 내가 대신 전달해 줘야 하는 상황이다.
“이 친구 이름은 첸이야. 이렇게 민폐를 끼치게 돼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네.”
“호호. 예의가 바른 친구네.”
나는 적당히 살을 붙여서 번역해 주기로 했다.
어째 날이 갈수록 거짓말만 느는 것 같다.
“이날을 위해 게스트 룸을 준비했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묵어도 좋아요.”
“……얼마든지라고……?”
누나의 과도한 자상함에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마음이 고우신 분이군. 여러모로 너와는 다른 종족 같다.”
“칭찬 고맙네. 일단 짐 풀고 씻고 있어. 갈아입을 옷 줄 테니까.”
“옷도 준비해 놨단 말인가? 마리아도 그렇고, 네 주변에는 온통 과분한 사람들뿐이군.”
“다 지껄였으면 가자.”
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뒤 게스트 룸에 짐을 풀었다.
녀석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 건, 당연히 내가 좋아서가 아니다.
이사순 회장을 만날 때까지 며칠의 시간이 남아 있었고, 녀석은 당돌하게도 내게 ‘대련’을 청했다.
회장이 이야기했던 ‘호승심’.
그게 다시 녀석의 본능을 자극한 모양이다.
물론 대련만 하고 잠은 호텔에서 자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고도 없는 녀석을 혼자 내버려 두자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옥의 계단’에서 개고생을 한 것도, 한국까지 쫓아와 이사순 회장을 만나는 것도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정확히는, 내 ‘구라’에 의해서.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는 못 사나 봐.’
모처럼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절로 쓴 미소가 지어졌다.
누나에게는 또 미안하게 됐지만,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유하고 있는 에테르의 강함과 성질을 떠나, 비수와 대련을 하면 내 쪽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게 있다.
특히나 녀석이 펼치는 검무는 ‘환격’을 펼치지 않고서는 대응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움직임이었다.
근접 전투에서 ‘칼’을 사용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
내가 만약 녀석의 검무를 익힐 수 있다면 어떨까.
‘칼’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만큼 ‘백몽’의 검날은 짧다.
오죽하면 부러진 첸의 검보다 짧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내 움직임이 격투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늘리고자 하면 언제든지 늘릴 수 있다.
만에 하나, 녀석의 검무에 ‘환격’을 섞은 검술을 익힌다면?
‘근접전의 스폐셜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
녀석이 한평생 이룬 움직임을 금방 따라 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이전보다 훨씬 위력적인 공격을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촵촵촵.”
“…….”
“뭘 그렇게 보나.”
“아니, 너무…… 잘 먹어서.”
부리부리한 눈매나 턱선은 남자 같은데, 한편으로는 정말 선이 곱다.
특히나 저 가냘픈 손가락은 도저히 벼락검의 주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여리여리한 손으로 잡은 젓가락이 식탁 앞의 메뉴들을 종횡무진 돌아다닌다.
먹는 것만 보면 며칠 굶은 사람 같다.
“퍼스트 클래스 기내식도 이렇게는 안 먹은 것 같은데.”
“그것보다 이 음식들이 훨씬 맛있다.”
“오우. 누나, 얘가 지금 뭐라고 했는지 알아?”
첸의 극찬에 누나가 꺄르르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첸은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아버지와 한평생 수련만 했다고 했던가.’
산속에 틀어박혀 맨날 비무만 했다고 하니, 그 음식이 제대로 되었을 리는 없을 터.
어쩌면 첸에게 이런 가정식은 꽤나 진귀한(?) 체험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탁.
젓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첸이 나를 재촉한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어딜 나가?”
“대련해야지.”
“무슨 밥을 먹자마자 대련을 해?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해.”
“아니. 난 하루라도 빨리 네 기술을 배우고 싶다.”
“뭔 기술?”
“그…… 이상한 기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공격 말이다.”
아하.
요 앙큼한 것이 두바이에서부터 대련을 요청한 이유가 그거였군?
녀석은 아마도 ‘환격’을 익히고 싶은 모양이다.
“너도 내 검무를 익히고 싶다고 했으니, 서로 얻을 게 있겠지.”
“어……. 근데 네가 환격을 익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누나가 내온 차를 냉큼 받아 마시던 첸이, 돌연 눈을 빛낸다.
“왜? 내 자질이 의심스럽다, 그런 의미인가?”
“환격은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격투 도중에 염동력을 발생시켜 상대에게 환술을 익히는…… 아이씨.”
말로 해 봐야 더 헷갈리기만 하지.
나는 쥐고 있는 찻잔을 녀석에게 뿌리는 시늉을 했다.
환격의 기능을 이용해서.
움찔.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인 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찻잔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반응이 무색하게, 찻잔은 여전히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이런 원리야. 너도 대만에서 헌터 자격을 땄으니 헌터의 타입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제아무리 뛰어난 나이트라 하더라도, 에스퍼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하면 이 환격을 배울 수 없어.”
“그런 건가.”
첸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딱히 풀이 죽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뭐랄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흔들.
“어?”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쥐고 있는 찻잔이 아주 미묘하게 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실체가 아닌, 가상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마치 내가 방금 전에 보여 주었던, 환격과 비슷한.
“이걸 한다고? 곧바로?”
“뭔가 된 것 같지?”
첸이 내 반응을 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보스 몹을 잡을 때도 저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다.
“벼락검의 발동 원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가진 에테르를 전기의 형태로 변환시킬 수 있다면, 나 또한 에스퍼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듣고 보니…… 그렇네?”
확실히 이 녀석은 강정현과 같은 과다.
이를테면, ‘천재’ 과라고 해야 할까.
육철완과 함께 녀석의 전투 장면을 보면서 센스가 남다르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환격의 개념을 이토록 쉽게 터득할 줄이야.
“매일 밤마다 잠들기 전에 너를 떠올렸다.”
“그딴 오해 받기 쉬운 소리는 그만두는 게 어때.”
“네 환격이라는 기술에 쥐어 터질 뻔한 건 나에게 큰 충격이었지. 대만 어디에서도 나와 호각인 헌터를 찾을 수가 없었거든.”
“그건 네 나라의…….”
헌터들이 너무 허접하지 않느냐, 는 말은 매너상 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같이 밤새워 궁리한 보람이 있었군.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뭘 참을 수가 없는데?”
“지금 당장 대련을 하러 나가자! 환격의 오의를 깨달은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어!”
“아니,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데? 나 지금 이 주 만에 집에 왔다고!”
“나는 돌아갈 집도 없다.”
“…….”
와.
이걸 이렇게 훅 들어오네.
녀석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좋다. 간다. 간다고.”
나는 질끈 눈을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가만. 너 그러고 보니까 칼도 없잖아. 그 부러진 칼로 대련하려고?”
“칼은 부러지지 않는다. 내 마음속의 신념만 꺾이지 않는다면.”
“무협지 노친네들이 할 법한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어떻게 할 건데?”
우웅.
백문이 불여일견.
첸이 부러진 칼에 에테르를 불어넣자, 푸르스름한 기운이 본연의 모습까지 뻗어 있었다.
아, 쟤 검기를 쓸 줄 아는 놈이었지 참.
“첸. 집 안에서는 무기를 사용하면 안 돼요!”
목욕을 하고 나온 누나가 기겁을 하며 첸을 타이른다.
첸이 움찔하더니 급하게 검기를 거두어들였다.
요 녀석 봐라.
내가 뭐라고 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누나 말에는 꼼짝을 못 하네?
“좋아. 그렇게 원하니 소화도 시킬 겸 나가자. 실은 나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게 있거든.”
“검무 말인가?”
“검무도 물론 배우고 싶지. 근데 그거 말고도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
이건 정말이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혼자만의 작은 ‘변화’였다.
실전에서 바로 활용하기에는 리스크가 있어 마음 한켠에 접어놓은 변화.
첸과 대련을 하러 나가는 김에, 그것도 확인해 볼 요량이다.
“시작하자. 나중에 힘들다고 후회하지 말고.”
“너나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마라.”
부우웅.
스윽.
서로를 향한 도발과 함께, 우리는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