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안 그래도 자글자글한 눈가에 작은 주름이 하나 더 생겼다.
좀처럼 협회에서는 볼 수 없는 온화한 모습.
WHPO 총재는 손주와의 영상 통화에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다음 주에 무슨 날이 있는지 알지? 늦지 않게 와야 한다.] [당연하지. 다음 주에 만나!]짧지만 행복했던 영상 통화가 끝났다.
마치 화면이 손주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래더 총재가 천천히 핸드폰 액정을 쓰다듬었다.
“야옹.”
등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총재가 몸을 움찔한다.
그리고 잠깐 동안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행복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야옹.”
한쪽은 흰색.
나머지 한쪽은 검은색 털로 뒤덮인 고양이가 총재를 향해 울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장난스럽게 느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묘한 목소리.
“……그런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야옹.”
방에는 래더 총재와 고양이 한 마리뿐.
그러나 총재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이.
언뜻 보기에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래더 총재는 실제로 고양이와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야옹.”
셉티뭄(séptĭmum).
서열 7위의 마인이 바로, 이 고양이의 정체였기 때문이다.
[킥킥. 이미 뒤져 버린 놈을 추모해 봐야 뭐 할 건데? 해마다 죽은 날을 챙기면 양심의 가책이 줄어들기라도 하나?]“……그만!”
넓은 방 안에 총재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흑백의 털을 가진 셉티뭄이 가볍게 뛰어올라 총재의 책상 앞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썩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남은 식구라도 지키려면 힘을 내야지.]뿌득.
총재는 당장이라도 이 자그마한 고양이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서져라 이를 가는 것뿐이었다.
인간은 마인 앞에서 무력하다.
그는 그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절감했다.
과거 ‘초월급’이라 불렸던 불세출의 헌터.
오웬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뒤로 말이다.
마인은 전 세계가 칭송하던 천재 헌터의 목을 간단히 꺾어 버렸다.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틀듯 말이다.
그리고 죽은 오웬의 아버지가 바로, 고양이에게 절규하고 있는 래더 총재였다.
아들의 죽음과 압도적인 힘 앞에서 래더 총재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셉티뭄은 그가 폐인이 되는 길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쩍쩍 마른 입 안에 달콤한 음료수를 넣어 주듯, 일말의 희망을 보여 준 것이다.
[우리의 말을 따르면 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 주겠다. 설령 인간계가 멸망하더라도 말이야.]“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내 아들을 죽여 놓고?!”
래더가 비통하게 외쳤지만, 셉티뭄은 아주 간단한 논리로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
[잘 생각해. 어차피 우리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건 당장이 아니야. 모든 인류를 말살시킬 생각도 없고. 있는 시간만이라도 행복하게 지내는 게 낫잖아?]자신의 자식을 죽여 놓고 ‘행복’을 논하는 모습에 래더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대로 불나방처럼 셉티뭄에게 달려들어 버릴까?
그러기엔 힘이 없었고, 자신에겐 손주들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총재와 셉티뭄의 악연이 시작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 * *
“사일리아는 파이브 사이더스가 아니지?”
“어떻게 알았어?”
“남의 말 되게 안 듣게 생겼잖아. 나라도 영입 안 하겠다.”
“큭큭.”
너무 의외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 말이어서 그런 건지.
내 말에 잉센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겠군. 이대로 우리끼리만 마물의 정보를 공유할지. 아니면 공개적으로 터트릴지.”
“그 결과에 따라 여왕님에게 갈지 말지를 결정하게 되겠네.”
“맞아.”
역시 잉센과는 말이 척척 통한다.
마물의 출현을 공론화할 거라면 사일리아에게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다.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지랄 발광을 떨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탐사 방향을 수정하려면 그녀의 동의는 필수다.
팀은 서로 다르지만, 탐사대는 하나의 공동체니까.
하지만 마물의 정체를 비밀로 한다면, 굳이 그녀에게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마물이 나타난 장소는 여기서 멀어?”
“그건 나도 잘 몰라. 나도 단편적인 정보만 얻었던 거라.”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어떻게 정찰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한 게 많을 거다.
하지만 잉센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의 명석한 두뇌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어쩐지 ‘위잉’ 하는 기계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모두에게 말하는 게 좋겠어. 설령 탐사대 일정을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이런 표현은 정말 나쁘지만, 탐사대 헌터는 정예 중의 정예로 구성되어 있어. 평범한 헌터 한두 명이 죽는 것과는 리스크가 천지 차이야.”
“잉센.”
“응?”
“아직 나를 잘 모르나 본데. 난 그딴 식으로 목숨을 저울질하는 걸 제일 싫어해.”
내가 제법 이를 드러냈지만, 평화주의자 잉센은 되려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정말 나쁜 표현이라고 한 거야. 하지만 나는 리더고, 여러 가지를 감안할 수밖에 없어.”
나도 안다.
이건 돈이 안 되는 가난한 동네의 주민을 버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아무래도 각성을 한 날의 기억이 나를 예민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좋아.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으로 하지. 사일리아가 너처럼 내 말을 철석같이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네.”
잉센이 그 부분까지는 미처 몰랐다는 듯 쓰게 웃었다.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 모두 내 경험으로만 나온 이야기다.
과연 사일리아는 내 이야기를 신뢰해 줄까?
“온다.”
예정보다 빠른 시간에 스틸 실드 헌터들이 복귀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긴 시간을 돌아다닌 데다, 폭염까지 내리쬐다 보니 얼굴에 지친 기색이 완연하다.
일행의 맨 앞에 선 사일리아 역시 썩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나와 잉센은 서로 얼굴을 마주치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사일리아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음? 넌 왜 여기 있어?
땅바닥을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서인지, 사일리아는 지근거리에 와서야 나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외의 일이 발생했다.
보자마자 구역을 이탈했네 어쩌네 하면서 트집을 잡을 줄 알았던 사일리아가, 어쩐지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같이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힘이 들어서 땅을 보고 걸은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을 뿐.
이어진 사일리아의 말에, 나와 잉센은 또다시 서로를 쳐다봐야만 했다.
“아무래도 마물을 만난 것 같아.”
* * *
의욕과 불만은 보통 비례하기 마련이다.
의욕이 높을수록 그에 상응하는 기대치가 높아지게 되고, 마음처럼 안 될 경우에는 그 짜증이 배가 된다.
오늘의 사일리아는 딱 그런 상태였다.
“헉, 헉.”
“휴.”
이따금씩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일리아는 짜증이 솟구쳤다.
정해진 시간도 지나지 않았고, 당초 목표했던 구역은 아직 반도 오지 못했는데.
왜 이리 앓는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선두에 선 사일리아는 뒤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의 힘든 표정을 보면 더 성질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발조로 출발하기 전, 사일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이레귤러의 표정을 살폈다.
폭염에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으나, 전날처럼 특별히 힘겨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심지어 자기들끼리 다투기라도 했는지, 비수가 무어라 말하자 첸이 검을 뽑아 들기도 했다.
사일리아에게는 그런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따위 오합지졸들보다 스틸 실드가 적응을 못 한다는 거야?’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일리아는 무조건 오늘의 목표치를 채우겠노라 마음먹었다.
“사일리아.”
우뚝.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스틸 실드의 헌터들은 앓는 소리를 할지언정 그녀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그것이 ‘S’랭커로서의 자존심인지, 사일리아의 개지랄이 무서워서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사일리아를 멈춰 세웠다는 건 헌터들의 상태가 한계의 한계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사일리아는 돌아보지 않았고, 헌터들도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의 대화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선발조를 끝낼 것인가.
억지로라도 이 모질이들을 끌고 갈 것인가.
이레귤러의 컨디션으로 추측하건대, 여기서 끝내면 분명히 우리보다 더 넓은 구역을 탐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일리아는 그 두 개의 선택지가 아닌 다른 결론을 내렸다.
“너넨 먼저 돌아가. 탐사는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
“그건…….”
그건 같은 헌터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동료를 방치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사일리아. 그럴 수는 없어. 아무리 너라도 이 영계를 혼자 돌아다니는 건 너무 위험해.”
“아. 시끄럽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넨 먼저 돌아가. 지금까지 온 거에 두 배는 더 가야 하는데 버틸 수 있어? 되돌아올 때는 또 어쩔 건데.”
“…….”
“누군가는 스틸 실드의 명예를 지켜 내야지. 또 그걸 모두가 할 필요는 없는 거고.”
평소의 사일리아라면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그녀는 이례적으로 스틸실드 헌터들을 ‘설득’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영계는 알 수 없는 변수가 가득한 곳이다.
탐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스틸 실드의 정예 자원을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가라고, 빨리. 지금 안 가면 몬스터가 아니라 나한테 죽는다.”
저렇게까지 나오는 이상에야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
스틸 실드의 ‘S’랭커들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무력감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 영계에서는 인간계에서 특별했던 그들도 좀처럼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정 네 뜻이 그렇다면 나이트 몇 명을 중간 위치에 배치해 놓을게. 최소한의 지원군이나 연락망은 있어야 할 테니.”
스틸 실드의 헌터 한 명이 사일리아에게 제안했고,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지원은 무슨.”
하지만 동료의 제안을 끝까지 거부하지는 못했다.
“얼마나 있다가 올 거야?”
“30분.”
“그렇게…… 오래?”
“30분도 줄인 거야. 기다리는 니들이 골로 갈까 봐.”
그녀의 말에 스틸 실드 헌터들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일리아의 화법이 오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지간한 헌터들은 벌써부터 에테르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30분 이상도 너끈히 가능하다는 말에 질려 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곳 영계에서까지 그녀는 손에 연결된 카테나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가진 에테르가 얼마나 많으면 저럴 수 있는지.
크고 작은 전투를 그녀와 함께 해 왔지만, 겪을수록 대단하게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사일리아!”
“아! 그만 좀 해! 더 할 이야기가 남았어?”
계속되는 부름에 사일리아가 버럭 성질을 내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적응 훈련 때 열심히 하든가.
사일리아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번만큼은 핀트를 잘못 잡았다.
방금 스틸 실드 헌터들이 그녀를 다급하게 부른 건, 생전 처음 보는 생명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기!”
“?”
사일리아가 동료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크르르…….
이곳 영계의 생명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추악한 생명체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