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a Mercenary Unit from Bankruptcy RAW novel - Chapter 11
제 10 장. 슈틸나울트 또는 외계인
토너먼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니오 용병대는 귀환을 준비했다. 단체 경기는 용병대가 직접 출전한 게 아니라 의뢰로 움직였으니 굳이 결승전까지 볼 필요가 없었다.
용병들이 천막을 해체해 상자에 담고 병장기 등을 수레에 실었다. 운송용 수레와 보급용 수레를 구분하고 일부 수레에 짐을 조금 과적하더라도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들은 곧 달릴 것을 기대하며 투레질을 하고 발굽으로 바닥을 긁었다.
“이거랑 이거는 부상자용으로 쓴다. 말 타기 힘든 녀석들을 태워.”
승용으로 전환한 수레는 부상자가 타야 했다. 그렇기에 충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온갖 방책을 썼다. 바닥에 침낭, 깃발 등 쓸 수 있는 천이란 천은 모조리 까는 건 기본이고 누비 갑옷까지 동원해서 차곡차곡 쌓았다.
지현의 업무는 현금 관리였다. 지현은 오늘까지 땅과 건물을 빌린 값을 정산하고 식자재를 구매했다. 운반 같은 잡역에서 인부를 고용할 것 없이 용병들이 알아서 해결한 덕에 상당한 비용을 절감했다.
지현은 출발 전에 다시 한 번 장부와 현금이 들어맞는지 확인하고 상자에 자물쇠를 채웠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준비는 새벽 일찍 시작했지만 해가 머리 위를 지나갈 때가 돼서야 끝났다. 발데마르는 출발할 때와 달리 이곳저곳 불려 다니느라 준비를 지휘하지 못했다.
발데마르는 ‘귀찮은 홍보 활동’으로 일축했지만 그가 한 일은 모두 훨씬 무거운 정치 외교 업무였다. 다시 한 번 권력 중심부에 ‘최강’이란 인식을 박아 넣은 이상 꼭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홍보 활동도 겸하기는 했다. 고위 귀족들에게 꼬박꼬박 얼굴을 알리고 니오의 이름을 각인시켰으니까.
그 과정에서 니오 용병대는 특정 제후를 편애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제국에 위협이 되지도 않는다는 걸 각 제후들에게 알려야 했다. 알릴뿐만 아니라 그들을 납득시켜야 했다.
권력자의 견제만큼 피로한 일도 드물었다. 강한 무력은 강한 견제를 동반했다. 니오 용병대에게 향하는 것이 언제나 선망 또는 질시인 건 아니었다. 보다 크고 어두운 것들이 항상 끼어 있었다.
이번 니오 용병대의 부상에는 새로운 인물도 끼어 있었다. 바로 지현이었다. 니오 용병대 신임 재무관의 소문은 이미 대리인에서 군소영주에게, 군소영주로부터 대영주까지 전해졌다. 그 소문에는 지현이 하이티리히 국왕인 빌프레트의 의뢰조차 거절했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혹자는 그를 두고 뻣뻣하며 건방지다고 평가했다. 또 누군가는 국왕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신념과 원칙이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대다수는 함부로 평가하는 대신 그저 궁금해했다.
아무튼 지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명 인사가 되었다. 지현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는 많았다. 그럼에도 당장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두고 지켜볼 것이다.
“지현 양. 돌아갈 때는 직접 말을 모시겠슴까?”
“그러고 싶긴 한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어요.”
“한 번 해 보시는 것도 좋슴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대오를 맞춰 가는 거라 오히려 더 쉬울 검다.”
“그럴까요?”
“슈바르츠 녀석은 훈련도 된 놈이고 전투 주행이 아니라 앞 말 따라 걷는 것뿐이니 훨씬 쉬울 검다.”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슈바르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슈바르츠는 기분 좋다는 듯이 코를 리하르트의 가슴에 비볐다.
“지현 양이 이것저것 조작할 것도 없슴다. 혹시 실수로 애한테 엉뚱한 지시를 내리더라도 주변 말들이 얌전하면 슈바르츠도 대충 눈치 까고 알아서 잘 갈 검다. 혹시라도 애가 놀라거나 해서 엉뚱하게 튄다고 해도 저희가 옆에 있으니 문제 없슴다.”
“그, 그럼 한 번 해 볼게요.”
“잘 생각하셨슴다.”
“좋아요. 그럼 수고하세요.”
출발 직전이었다. 용병들이 슬슬 모여들어 대오를 갖췄다.
지현은 고개를 돌려 인스부르크의 성벽을 다시 보았다. 고작 며칠의 짧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한 달이 넘게 지난 것처럼 느꼈다. 지현은 짧은 시간 사이 너무 많은 사건을 겪은 탓이라 생각했다.
“대장이 오면 바로 출발할 검다. 지현 양은 제 뒤에 서시면 될 검다.”
“돌아갈 때는 말을 타고 가시게요?”
“몸도 거의 다 나았는데 대장이 호들갑 떠는 검다. 멍도 거의 사라졌구 아프지도 않슴다. 지금은 부상자가 많아서 수레에 태울 사람을 하나라도 줄이는 편이 좋으니 전 말 타고 가는 게 좋슴다.”
“다행이네요.”
“헷, 별거 아님다. 다음부터는 저도 같이 싸울 검다.”
리하르트의 말에 지현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현은 바로 표정을 풀고 웃으며 “건강하면 좋지요.” 하고 대답했다.
발데마르가 돌아오고 출발을 위해 용병들이 집결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사이 힐다가 지현을 불렀다. 힐다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수레에 걸터앉아 있었다.
“힐다 씨, 무슨 일이에요?”
“지현 양은 괜찮아요?”
“네?”
“끄응, 이번엔 내가 먼저 시작했네.”
“앗.”
“혹시 모르니까 지현 양도 각오를 굳히는 게 좋을 거예요.”
“네에.”
힐다는 가진 천을 최대한 모아서 수레 바닥에 깔았다. 보는 지현이 다 소름 돋는 광경이었다. 힐다는 끝으로 ‘차라리 적이면 패 죽이기라도 하지.’라며 중얼거리고는 최대한 푹신하게 만든 바닥 위에 드러누웠다.
지현은 더 말하지 않고 자신의 말로 돌아갔다. 발데마르는 지현을 확인하고 출발 지시를 내렸다. 하인리히와 키르스텐이 발데마르의 바로 뒤를 걸었고 그 다음이 리하르트와 지현이었다.
지현은 발데마르와 함께 바우그에 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과 감정을 느꼈다. 발데마르의 거대한 가슴과 두꺼운 팔이 옆과 뒤를 받쳐 주지 않고 휑하니 비어 있으니 온몸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을 휘감은 찬 공기, 말이 걸을 때마다 쿵쿵 울리는 진동, 등을 떠밀듯 불어오는 바람. 그 모든 것이 새로웠다. 먼 산의 그림자를 향하는 여행은 도시 앞에서 하는 간단한 산책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지현은 저도 모르게 슈바르츠의 목을 쓰다듬었다. 승마가 새로운 취미로 삼을 것 같았다.
즐거우면서도 무난한 주행이었다. 마음속을 꽉 막고 있던 것까지 시원하게 뚫는 기분이었다.
지현은 말을 타면서 한결 상쾌한 머리로 다양한 생각을 했다. 대체로 용병대의 개선안이었다. 개중에는 지현의 영역이 아닌 것도 있었다.
갑옷이었다. 지현은 이번에 다친 사람들을 살피며 이곳의 군인이 주로 어디를 다치는지 알게 됐다.
지현 자신은 장인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현이 하려는 건 당장 개선 방법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이걸 토대로 다른 용병들과 상의하면 분명 더 좋은 의견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
발데마르의 팔 아래 난 시커먼 멍도 떠올랐다. 발데마르 말마따나 거기는 철판을 붙일 수 없었다. 지현이 생각하기에도 팔이 움직이는 관절 안쪽에 그런 단단하게 고정되는 걸 붙일 순 없어 보였다.
‘대장장이들은 뭘 알지도 몰라.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역시 갑옷의 개선이 필요하겠어. 가능하다면 방패도.’
발데마르 이외의 용병들이 주로 다친 부위는 관절 부위, 정강이와 팔뚝이었다. 모두 갑옷의 빈틈이거나 갑옷이 닿지 않는 신체 말단이었다. 방패벽이 왜 상하단을 다 가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일부는 갑옷과 투구를 뚫고 들어오는 충격에 다쳤지만 예외적인 소수였다. 그런 사람은 서른 명이 넘는 부상자 중에 고작해야 네 명 정도였다.
발데마르나 힐다는 철로 만든 각반 형태의 보호대를 착용하지만 이것도 가격이 만만찮아서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 철로 만든 건 뭐든 비싸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격까지 닿자 지현의 머리는 다시 고속으로 회전했다. 돈 굴리는 거야 말로 지현의 전문 분야 아니겠는가? 상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단 있다면 거기서부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본부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이 많은 여행이었다. 중간 휴식 시간마다 힐다의 상태도 보고 부상병들에게 의견도 구하고 간부 용병에게 많은 걸 질문하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산의 초입부터는 지현도 말에서 내려 수레에 올랐다. 아직 험지를 주행하는 연습을 한 적이 없으니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마침내 본부에 들어섰을 때, 용병들이 가장 먼저 찾은 건 목욕탕과 뜨거운 물이었다. 안 그래도 전령이 먼저 와서 곧 부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했기에 본부에 남아 있던 400여 명의 용병들은 미리 동료를 맞이할 준비를 해 놓았다.
그들은 연병장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동료들이 들어서자 그들에게서 고삐를 받아 말을 마구간으로 옮겼다. 수레에서 짐을 내려 창고로 옮기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하인리히, 힐다, 인원 파악하고 자유 시간 줘. 불만 생기지 않게 목욕 순서 잘 정하고.”
“예!”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오 법관. 엄청나게 오랜만인 것 같군.”
법관이 나와서 발데마르를 맞이했다. 발데마르는 할 말이 많다면 본채로 이동했다. 지현도 함께였다.
“지현 양이 또 새로운 걸 생각하셨네. 그, 업무 재해 보상? 이라고 하셨던가. 각 단어를 이렇게 이어 놓으니 낯설군. 아무튼 용병대의 법을 바꾸는 일이니 법관과 먼저 상의해 보시오. 얼개가 만들어지면 내게 보이고.”
“네. 고마워요, 발데마르 씨.”
“험, 그럼 수고하시오. 욘, 아드니와 토마스에게 내가 없는 동안 작성한 보고서 정리해 놓고 기다리라고 전해라.”
발데마르도 열흘 넘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지 못해 뻐근하기 그지없었다. 지현과 법관에게 일임한 그는 부하들에게 간단한 보고 업무만 지시하고 곧장 본채의 목욕탕을 찾았다.
“업무 재해 보상이라는 건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용병에게 보상금을 지불하는 제도를 말씀하시는 것이겠군요.”
“역시 법관 씨는 한 번에 알아들을 줄 알았어요. 지금도 물론 보상금은 있지만 성문화되어 있지도 않고 체계도 없어요. 니오 용병대 군율에도 ‘적절한 보상을 지불한다.’라고만 적혀 있더라고요.”
“맞습니다. 똑같은 사망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죽었는지에 따라 차등으로 지급하는 게 관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장에서 도주하다 사망할 경우에는 보상도 받을 수 없지요.”
“물론 니오인의 관습과 전통을 무시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차등으로 지급하는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평등이나 모순을 해소하고 싶은 거예요.”
“알겠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명시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더군다나 보상금을 받더라도 치료비가 더 크거나 애초에 치료가 불가능한 영구 장애를 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일도 줄이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변화할 기회가 없었던 거지 다들 한 번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마침 용병대가 변혁의 급물살을 맞이했으니 지금 바로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이 부분은 생각해야 할 게 많으니 당장 움직이긴 어렵고 좀 더 길게 보고 계획을 짜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저도 함께 고심해 보겠습니다. 그보다 지현 양.”
“네?”
“행정병 아디슬이 지현 양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지현은 법관에게 인사하고 발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지현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전에 혹시라도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이 우선이었다. 발데마르처럼 뒤로 미루고 목욕부터 하고 싶기도 했지만 지현의 성격에 그건 무리였다.
“아디슬 씨. 제가 없던 도중 작성한 장부를 보여 주시겠어요?”
“지현 재무관님. 그게, 그게…….”
지현의 미소에 금이 갔다. 아디슬의 태도가 이상했다. 지현은 다른 무엇보다 가장 먼저 ‘공포’가 떠올랐다. 아직 들은 게 없는데도 알 것 같았다. 육감이란 무서웠다.
“오늘 아침에 확인해 보니, 그, 그게, 장부의 차변과 현금이 맞지 않습니다.”
쾅! 지현은 순간 벼락이 친 줄 알았다. 아니, 분명히 쳤다. 지현의 심장 위로 정확하게!
지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언가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오만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일단…….”
“예!”
“원장이랑 전표를 꺼내 오세요. 보조 장부도.”
“알겠습니다.”
“저는 잠시.”
지시를 내린 지현은 일단 화장실로 향했다. 머릿속으로는 보편적인 해결 과정을 생각하며.
동시에 그보다 복잡한 무언가가 들끓었다. 아직 감정의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훨씬 원초적인 파도였다.
‘쉬질 못하게 하네.’
예상했던 일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종종 봤다. 회계 업무에서 실수는 사무원들이 한 번씩 거치고 가는 홍역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닥치니 눈앞이 캄캄했다.
지현은 깊게 심호흡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깨끗한 새 물로 세수하고 손을 씻고 준비도 했다.
토너먼트가 용병의 전장이라면 지금부터는 지현의 전장이었다. 하필이면 컨디션도 최악이고 지현이 없던 사이 발생한 사안이라 알아야 할 정보가 많아 힘들지만, 그런 악조건도 이겨 내야 했다.
지현은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마침 아디슬이 금고와 전표를 꺼내 다시 한 번 살피는 중이었다.
“순서대로 파악해 봐요. 마지막으로 현금이랑 장부랑 비교해 본 게 언제지요?”
“나흘 전입니다. 그때는 제대로 들어맞았습니다. 그리고 이틀 전에 지출이 있어서 어제 장부를 또 작성했습니다.”
“그럼 이틀 전에 있었던 지출에서 기입을 실수했던 게?”
“아닙니다! 몇 번이나 맞춰 봐도 기입한 내용들끼리는 다 들어맞습니다.”
“지금부터 확인해 볼 거예요. 보조 장부도 꺼내세요.”
‘울고 싶은 건 나라고.’
억울하다는 듯이 물기 가득한 아디슬의 목소리에 지현은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다른 감정들과 함께 차곡차곡 접어서 구석에 몰아넣었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다.
아디슬의 증언은 중요한 몇 가지 정보를 제공했다. 이틀 전에 발생한 지출에서 무언가 잘못 기입했거나 빼먹은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 공금을 쓰는 일 자체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수입과 지출의 형태가 지현이 살던 세계에 비해 매우 단순하므로 차근차근 살펴보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디슬은 장부 세 권이랑 금고를 들고 왔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이들이 이 소식을 알리며 몇몇 용병들이 구경하러 왔다.
지현은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가장 먼저 총계정원장을 들었다. 각 항목을 대강 훑어본 다음 아디슬에게 현금 현황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아디슬은 금고를 열어 금화와 은화를 종류별로 세었다. 수치는 정확히 일치했다.
여기까진 예상한 일이었다. 용병대에서 어떤 일에 쓰는 현금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무조건 제니 동전이었다. 그 이상의 화폐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면 받아 주기도 어려웠다.
동전을 세는 일에 다른 용병들도 동원됐다. 용병들은 동전을 열 개씩 묶어서 수를 세어 지현에게 알렸다. 지현은 원장 끄트머리의 현금을 확인했다. 82제니가 비었다.
애매한 액수였다. 개인에겐 꽤 큰돈이지만 용병대 전체로 보면 사용 출처 불명의 가지급금으로 처리하고 나중에 찾아도 괜찮을 정도의 소액이었다. 못 찾더라도 용병대 운용에 장애가 될 액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용병대는 ‘회계’라는 시스템 자체가 익숙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현이 단 하나의 제니 동전이라도 철저하게 추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본 운용의 신뢰를 잃기 쉬웠다.
가지급금도 분명 회계의 한 부분이지만 이들에게 그걸 납득시키는 건 어려웠다. 따라서 지현은 그 방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 두고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지현은 다음으로 보조 장부를 들었다. 용병대의 보조 장부는 현금의 출납이 발생한 순간을 단식부기로 기록하였기에 두서없으면서도 가장 원초적인 기록이었다.
아디슬은 보조 장부에 어디의 누가 얼마를 무슨 용도로 받아 갔다는 글을 급하게 휘갈겨 적어 놓았다. 그 기록들 밑으로는 또다시 얼마를 받아 간 누가 얼마를 거스름돈으로 받아 왔다고 기록해 놓았다.
지현은 보조 장부 우측의 합과 차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다음으로 전표를 들었다. 제일 두툼한 장부였다.
전표의 중간을 펼치니 영수증들이 펄럭였다. 붙일 방법이 없어서 페이지 뒤에 그냥 끼워 넣기에 생기는 일이었다.
이 영수증들은 각 상회에서 공식 발행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상회마다 영수증이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다 보니 지현은 용병대에게 구매를 할 때마다 판매자로부터 지출 증명서를 받아 내도록 지시했고 여기 끼워 놓은 영수증은 그 결과물이었다. 시킨 일은 잘하는 용병들이었다.
지현은 영수증을 꺼내서 보조 장부의 기록과 대조했다. 전표를 작성할 때 영수증을 누락하거나 하면 그대로 총계정원장까지 틀릴 수 있었다. 지현은 그쪽 가능성에 무게를 높게 두었다. 82제니는 식자재를 샀을 때 딱 소비하기 좋은 액수로 보였다.
하지만 보조 장부의 기록과 영수증의 기록은 정확하게 일치했다.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
지현은 결국 마지막까지 생각하기 싫었던 도난의 가능성까지 떠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누가? 대체 왜?
금고는 누구든 접근하기 쉬웠다. 아디슬의 허가를 받지 않은 누군가가 금고를 열고 돈을 슬쩍하는 건 그야 말로 손바닥 뒤집기였다.
하지만 고작 82제니를 훔치려고? 그건 신병 월급의 반 정도 되는 액수였다. 본부의 용병들은 전원이 베테랑이라 월급이 신병의 세 배는 되었고 그럼 자기 주급보다 적은 액수를 훔쳤다는 얘기가 된다.
영리한 도둑이라면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소액씩 자주 훔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머리가 있다면 지현이 하는 일도 이해할 것이었다. 지현이 만들어 놓은 회계 체계는 누가 훔쳐 가도 눈치채기 힘든 과거의 체계와 전혀 달랐다. 철저하고 또 예리한 관리 체계였다.
‘이해가 안 돼.’
지현은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짜증이 치솟았다. 어쩌면 아디슬이 바빠서 보조 장부 기입도 빼먹고 마침 그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영수증도 제출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말이다.
만약 그런 아주 낮은 확률의 기입 실수도 아니고 영수증 누락도 아니라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도난이건 아니건 누군가가 아디슬에게 보고하지 않고 금고의 돈을 가져간 것이다.
악독한 씨앗이 지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용병들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의혹을 먹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려고 했다.
“지현 재무관님? 저,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좀 더 철저히 찾아봐야겠어요. 아디슬 씨, 이틀 전 지출 항목을 보니 여러 사람이 여러 번 시내를 오갔던데 정확히 설명하세요. 그리고 여기 영수증에 이름 남긴 사람 전부 호출하세요.”
“지현 양, 조금 쉬고 하시는 게 좋겠어요.”
“돌아오시고 쉬지도 못하고 있잖습니까?”
“용병대에서 돈이 사라졌어요!”
휴식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지현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모습에 용병들이 움찔 놀랐다.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지금 제가 쉴 수 있는 상황 같아요?”
“죄송합니다, 재무관님.”
아디슬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지현에게 사과했다. 다른 용병들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지현은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안색을 고쳤다. 다른 용병들은 좋은 마음에 도우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순간 감정을 참지 못하고 터뜨려 버린 거다.
그들이 지현에게 휴식을 권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지현은 지금 피로에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서 혼절하기 직전이었으니까.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폭발한 것만 해도 이미 지현의 체력이 한계라는 증거였다.
“미안해요, 여러분. 여러분 탓도 아닌데.”
“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너 횡설수설한다.”
“아무튼 지현 양 탓은 아닌 겁니다.”
“그, 저희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다면 저희에게 맡기시고 좀 쉬시는 게…….”
“지금은 쉴 수 없어요. 이걸 어떻게든 처리해야…….”
“지현 양?”
지현이 다시 장부를 검증하려고 들추는데 하인리히가 들어왔다. 그는 막 목욕을 마쳤는지 평소의 말총머리가 아니라 축축한 머리카락을 그대로 내린 모습이었다.
“지현 양,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지금쯤 쉬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일이 좀 있어요.”
“아디슬, 장부를 정리하고 돈을 금고에 넣어서 봉해라. 지현 양, 일어나시지요.”
지현은 다시 한 번 울컥하고 입 밖으로 해방해 달라는 감정들의 아우성을 들었다. 하지만 어금니로 입안을 짓씹으며 참아 냈다. 그리고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중대한 문제예요. 그럴 수 없어요. 아디슬 씨, 장부 그대로 두세요.”
두 사람의 신경전에 아디슬만 진땀을 뺐다. 하인리히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는 지현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지현이 펼쳐 놓은 장부를 보고 지현을 다시 바라보았다.
“문제가 뭔지는 알겠습니다.”
“어떻게요?”
“지현 양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걸 보면 단순 장부 오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건은 대장에게 알리고 해결책을 찾는 게 맞겠습니다. 일단 일어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인리히의 말에 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현은 하인리히를 교육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용병대에 지현을 빼면 그를 교육할 사람은 없었다.
“하인리히 씨, 장부 기입은 언제 배우셨어요? 원래 알고 있던 거예요?”
“지현 양이 일하는 걸 보고 조금 공부했습니다. 행정병들 교육하는 모습도 봤고.”
“그게 가능해요?”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터라 아직 잘 알지는 못하지만 형태와 논리는 이해했습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라고요.”
“아무튼 계속 여기 있으실 겁니까? 단순 오기가 아니라면 장부만 봐서는 문제를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현은 침음을 삼켰다. 사실 지현도 이 자리에 있어 봤자 해결이 어렵다는 건 이해했다.
다음 방법으로 당일 지출 내역을 확인하고 혹여 영수증 자체를 잘못 떼어 온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건 해당 상회까지 가서 검증해야 하므로 하루 이틀 안에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얼레? 니들 왜 여기 모여 있냐? 지현 양 본 사람?”
문밖에서 또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리하르트였다.
“지현 양? 왜 여기 계시는 검까?”
“일하는 중이에요. 리하르트 씨는 무슨 일이세요?”
“힐다 누님이 찾슴다. 지현 양이 방에 없다고. 그보다 발데마르 대장이 방금 전에 토너먼트 다녀온 전원한테 정리 마무리 짓고 이틀 간 휴가라고 지시했슴다. 지현 양도 포함임다.”
“그렇게 손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지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늘 하루 쉬면 그만큼 원인을 찾아내기 어려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더 앉아 있기 힘든 건 분명했다. 지현은 결국 아디슬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일어났다.
“힐다 씨는 절 왜 찾았어요?”
“저도 모르겠슴다. 지현 양도 힘들 텐데 쉬고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방에 없어서 그런 모양임다.”
“그런가요. 그리고 하인리히 씨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요. 단식부기도 아니고 장부가 한두 개도 아닌데 그렇게 몇 번 본 것 정도로 알 수는 없다고요.”
“지현 양만 괜찮으시다면 저도 이참에 제대로 배워 보고 싶습니다.”
지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책상에서 일어났지만 머리는 일에서 떠나지 못했다. 지금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일단 기록만 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추측하는 원인이야 여러 가지지만 그중 진짜 원인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진실로 휴식이 필요했다.
“지현 양! 어디 있었던 거예요.”
“조금, 일이 있었어요.”
힐다를 비롯해 지현과 친분이 있는 용병들이 모두 지현의 방에 모여 있었다. 거기에 하인리히와 리하르트까지 끼자 방이 미어터졌다.
“일이라고요? 방금 돌아왔잖아요. 조금 뒤로 미뤄요.”
“미룰 수 없는 일이었어요. 게다가, 아직 끝내지도 못했고.”
지현은 그렇게 말하며 방 한구석에 있는 상자를 보았다. 지현의 사환인 에이자와 폴카가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그걸 본 지현은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있는 돈도 장부와 액수를 확인하고 본부의 금고로 옮겨야 했다. 장부야 굳이 옮겨 적지 않더라도 그냥 날짜별로 끼워 넣으면 되지만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안 그래도 몸이 으슬으슬 쑤시고 나른했다. 여기에 스트레스를 받으니 몸살이 심해지고 편두통까지 생겼다. 아랫배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두근거리고 뜨거웠다.
이 정도로 심한 건 전문가 생활을 하면서도 몇 번 못 겪어 본 상황이었다. 진통제 한 알만 있었으면 더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 때려치우고 드러눕고 싶었다. 소리 지르고 울고 싶기도 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쉬어야겠어요.”
“어, 그래요. 어이, 다 나가. 푹 쉬세요.”
힐다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방에서 나간 후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지현은 잠깐 텅 빈 방을 보다가 침대에 엎드렸다. 번잡함이 뇌를 때린다고 생각했는데 방이 비니 심장도 빈 것 같았다.
‘죽겠네, 진짜…….’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고통스럽단 말인가? 고작 82제니?
용병대에 자신이 쌓아 놓은 게 얼마나 많은가? 당장 지현이 없었다면 오늘까지 용병대가 존속했을지도 모르는데 고작 푼돈 때문에 전전긍긍 앓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렇게 생각하며 털어 내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지현은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두 팔을 파닥파닥 놀려 침대를 두들겼다. 역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일단 발데마르 씨한테 알리고, 또…….’
일하는 것만 빼고 뭐든 하고 싶었다. 밖에 나가 하인리히와 뜀박질을 하든지 리하르트와 말을 타든지 힐다와 시시덕거리며 놀든지. 그런데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그냥 아프고 나른했다.
‘회계사…….’
지현은 당장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용병들의 미숙한 업무 처리가 문제일까? 아니다. 사람이 문제라는 건 맞지만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회계사가 없는 게 문제인 것이다.
애초에 회계 업무는 지현의 분야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며 낮은 난이도의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고 업무 특성상 회계 장부와 재무제표를 볼 줄 알아야 했기에 기억이 또렷한 것뿐, 지현의 직업은 어디까지나 경영지도사였다.
제 업무도 아닌 일에 체력과 시간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니 힘든 거다! 지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어도 앞으로 생길 문제는 막아야 했다.
지현은 곧장 법관을 찾았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편지를 여러 장 써서 용병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지현의 지시에 군말 없이 말을 타고 흩어졌다.
“발데마르 씨!”
“음? 들어오시오.”
발데마르는 마침 청동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지현이 노크하자 깜짝 놀라며 손바닥만 한 면도칼을 내려놓았다.
지현은 방에 들어가서 얼굴의 왼쪽엔 거뭇한 면도 자국이 있고 오른쪽은 까슬까슬하게 짧은 수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발데마르를 보고 살짝 웃었다. 웃으니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지현 양. 안 그래도 만나 볼 생각이었소. 하인리히 말로는 무슨 문제가…….”
“회계사를 고용해야겠어요.”
“응?”
“일종의 보조 재무관이에요. 행정병만으로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지금부터 교육시켜도 전문가를 만들려면 최소한 3년이 넘게 걸려요. 그것도 제가 강의에만 집중했을 때 얘기고요. 차라리 이미 훈련된 사람을 고용하는 게 낫겠어요.”
“그, 그렇구려. 하지만 인건비는 어떡하오?”
“용병대에 그 정도 여유는 있어요. 본토랑 연계한 사업까지 진행하려면 이쪽도 그럴 듯한 시스템을 갖춰야 하니까 빨리 고용해야 해요.”
“알겠소. 그럼 한 사람에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알려 주…….”
“최소한 두 명은 필요해요.”
“비용이 만만찮겠구려.”
발데마르는 침음을 삼켰다. 당장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도 알고 지현이 하는 일이 얼마나 방대한지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현은 지난 두 달 반 동안 학대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알겠소. 지현 양에게 일임하겠소. 내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니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 필요한 만큼 쓰시오.”
“고마워요.”
당장 회계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노릇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현은 편지에 작은 장치를 더했다. 돌아올 답장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하지만 지현 양, 일단 좀 쉬시구려. 지금 쉬지도 못하고 있잖소.”
발데마르의 말에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이 나가자 발데마르는 미간을 주물렀다. 가만 두면 지현이 또 혼자 일어나서 일을 시작할 거란 사실을 그도 알았다. 서로 안 지 고작 두 달 조금 넘었다곤 하지만 자는 시간 빼고 하루 대부분을 붙어살았다. 지현의 성격 정도는 대강 파악했다.
발데마르는 잠시 혼자 고민하다가 하인리히와 아디슬을 불렀다. 당장 필요한 건 지현이 쉴 시간이었다.
“작전 목표는 두 가지다. 사라진 돈의 출처를 찾는 것, 지현 양이 모르게 처리하는 것.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움직여!”
발데마르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리히에게 전해 듣기만 했을 때는 무슨 문제인지 정확히 몰랐으나 자세한 내용을 듣고 나니 과연 보통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발데마르가 직접 장부를 쓰고 관리할 때도 돈이 이상하게 비거나 기록보다 더 많은 경우는 왕왕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대체 언제 어떻게 빠진 건지 알 방도가 아예 없었다. 반면 지금은 최소한 어디서 빠지지 않은 건지는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 대단했다.
“일단 그날 나갔다 온 녀석들을 불러 봐라. 현금은 네가 직접 꺼내 줬지?”
“예, 그렇습니다.”
“거스름돈을 받은 것도 당연히 너고.”
“예, 그렇습니다.”
중간에 누군가 거스름돈을 덜 주거나 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아예 영수증까지 조작해서 남겨 먹는 거라면 모를까 영수증과 선후 금액이 일치하는 이상 빼먹는 일은 불가능했다.
“내 머리로는 도통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아디슬, 짐작하는 거라도 있더냐?”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저도 도저히 무엇인지…….”
“널 책망하려는 게 아니다. 누구든 실수하는 법이야. 단지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어 고치고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러니 계속 생각해라.”
“예.”
“하인리히. 네 생각은?”
“최악의 가정이지만…….”
“그래. 그건 너도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하지만 고작 80제니 남짓이다. 여기 있는 녀석들 중에 고작 그 돈 갖겠다고 공금에 손을 댈 녀석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저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막혔습니다.”
“끄응. 당장 해결 못 하면 그냥 내 지갑에서 82제니 꺼내서 채우고 돈을 잘못 센 거였다고 하면…….”
“지현 양이라면 단박에 눈치챌 겁니다. 그리고 두 배로 화낼 겁니다.”
“이크, 역시 그렇지?”
발데마르가 찔끔 물러났다. 지금까지 돈이 비면 보통 그런 식으로 해결했다. 가공의 항목을 만들어 거기에 사용했다고 처리하거나 지휘관들의 사비로 채워 넣는 거다. 하지만 지현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잠시 그렇게 추론을 하고 있을 때 당일 외출했던 용병들이 차례로 발데마르의 방을 찾았다. 하지만 할 질문이 많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나갔는지는 장부를 보면 알 수 있었고 다녀온 사람들은 이미 영수증과 거스름돈을 다 제출했다. 무턱대고 돈이 사라졌는데 혹시 아는 거 있냐고 물으면 도둑으로 의심하는 꼴이라 그렇게 직접 묻기도 어려웠다.
“다음.”
“저희는 외벽 보수용 목재랑 장작을 사 왔습니다.”
외출한 사람들은 주로 병장 급 한 명과 휘하 용병 네댓 명이었다. 그런 조가 일곱 조나 움직였다.
구매한 상품은 식료품과 건물 보수에 쓸 자재였다. 식료품은 한 번에 여러 종류를 묶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상회별로 돌아다니며 부족한 재고를 채우는 식이라 많은 사람이 여러 번 움직여야 했다. 어떤 조는 밀을 사고 어떤 조는 고기를 사는 식이었다.
“다음.”
“대장님.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평시 점검이야. 내가 열흘 넘게 자릴 비웠으니 당연히 그사이 너희가 뭘 했는지 점검해야지.”
“그건 아디슬한테 여쭈어 보시면 알 수 있는 게…….”
“너희 얼굴 보고 싶어서 불렀다. 넌 뭐였지? 고기였나?”
“예. 저희는 고기랑 콩이었습니다.”
“그걸 다 짊어지고 오다니 힘도 좋구나. 수고했다. 다음.”
“저희는…….”
발데마르는 저녁이 될 때까지 부하들을 대면하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역시 이런 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뭘 샀는지 들어서 무슨 소용인가. 영수증이랑 증언이 다른 사람이라도 나오길 기대했단 말인가?
“응?”
발데마르는 무의식중에 기록한 내용을 쭉 살펴본 다음 뭔가 이상한 걸 찾았다. 본부에 남아 있던 사람은 400명이나 됐다. 당연히 하루하루 소비하는 식재료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보존식이 아니고서야 오래 보관할 수도 없으니 사흘이나 나흘 먹을 분량만 구매해 왔고, 그때마다 그걸 보충하러 부지런히 도시를 오가야 했다. 그런데 분명 재고가 떨어졌을 텐데 보충한 기록이 없는 항목도 있었다.
“아디슬.”
“예, 대장님.”
“그제보다 더 전에 식료품 사러 언제 나갔었냐? 사흘 전에도 나갔었나?”
“아닙니다. 닷새 전이었습니다.”
“그럼 닷새 전에 산 건 그제도 보충해야 했겠네.”
“일부 곡물이나 보존식을 빼면 그랬을 겁니다.”
“식자재 창고 가서 청어 재고 좀 확인해 봐라.”
“생 청어 말씀이십니까?”
“그럼 말린 청어나 훈제 청어겠더냐. 어서 가서 확인해 봐.”
“예, 알겠습니다!”
발데마르는 다시 한 번 항목을 확인했다. 청어는 대구와 함께 대륙 전체에서 가장 흔하게 먹는 생선이었다.
니오인들은 특히 청어를 좋아해서 말려서 들고 다닐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절여 먹고 재워 먹고 구워 먹고 끓여 먹고, 아무튼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먹었다. 그만큼 소비가 빨랐다.
그런데 닷새 전에는 샀으면서 이틀 전에는 안 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날이 추워도 생선을 닷새나 보관할 수 있을 만큼 샀을 리도 없었다.
“대장님.”
“재고는?”
“잔뜩 남아 있었습니다. 모레까진 먹을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드니랑 토마스 불러.”
“예, 알겠습니다!”
* * *
지현은 식사도 거르고 저녁이 될 때까지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팔이 저리면 자세를 바꾸고 또 졸다가 일어나서 멍하니 있기를 반복했다.
머리에서 생각이 사라졌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통증이 줄어들었다. 지현은 그제야 배가 고픈 걸 느꼈다.
‘후, 먹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지현은 비척비척 일어났다. 이미 배식 시간은 지났지만 아궁이에 잔불이라도 남아 있으면 간단하게 죽이라도 만들어 먹을 셈이었다. 그런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지현 양.”
“옛?”
발데마르를 필두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힐다랑 리하르트가 한 용병의 좌우 어깨를 붙들고 들어왔다. 그 옆으로 아디슬, 하인리히, 에이자, 폴카가 차례로 들어왔다. 방 안에 못 들어온 또 다른 백부장 아드니와 토마스가 밖에 서서 기다렸다.
“어, 무슨 일이세요?”
“문제를 해결했소.”
“네?”
“약간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구려. 일단 이 녀석은 카를이라고, 토마스 백부대의 병장이라오.”
“헤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카를 씨.”
카를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을 내리깔고 주변만 살폈다. 카를은 지현에게 정식으로 이름을 대고 자기소개를 한 적도 없었다. 토마스 백부대는 지현과 접점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현의 앞에 끌려온 것이다. 대장인 발데마르부터 백부장 넷이 몰려와서 그를 끌고 오니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저, 그래서 무슨 일인지?”
“지현 양. 사라진 돈이 정확히 82제니 맞소?”
“예? 네, 맞아요.”
“일단 오해가 없게 결론부터 말하겠소. 그 돈은 사라진 것도 아니고 누가 훔쳐 간 것도 아니라오.”
“하아.”
지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카를을 끌고 왔을 때부터 대강 어떤 사태인지는 짐작했다. 그런 와중에 카를이 도둑질한 건 아니라는 답변은 지현의 가슴에 진 덩어리를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역시 금고가 문제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지현 양의 말을 좀 더 새겨들었어야 했소.”
“아무튼 카를 씨, 직접 말씀해 보시겠어요? 아디슬 씨한테 말하지 않고 금고에서 직접 돈을 꺼낸 거 맞죠?”
“예에, 그건 맞습니다만…….”
“다만은 뭐냐, 다만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토마스 대장한테도 보고했고요.”
사건 개요는 단순했다. 식료품 재고를 조사한 아드니가 토마스에게 보충이 필요하다고 알렸다. 토마스는 아드니와 상의하여 구매할 품목을 정했고 휘하 병장 여섯 명을 불러서 각자에게 무엇을 사 올지 지시했다.
병장들은 아디슬에게 가서 목적을 말하고 돈을 받았다. 아디슬은 혼자였으니 지령을 확인하고 필요한 금액을 꺼내 주고 그걸 또 보조 장부에 기입하는 데 시간이 한참 필요했다.
그 와중에 기다리지 못한 카를이 그냥 금고에서 돈을 꺼내 가 버린 것이다. 도시까지 이동 시간과 시장에서 양질의 상품은 빠르게 사라진다는 걸 감안했을 때 카를은 자신이 잘했다고 믿었다.
그렇게 처리했으면 늦게라도 아디슬에게 알렸어야 했다. 그러지도 않았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지현도 무슨 일인지 이해했다. 지현이 받은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더 타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여기서 카를을 혼낸들 기분이 나아지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더 나빠질 것 같았다.
그렇기에 지현은 꼭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그사이 기다리는 이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카를 씨. 카를 씨에게 어떤 악의가 있었거나 한 것도 아니고 용병대를 위해서 한 일이란 것도 알아요.”
“예,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방식이 잘못됐어요. 우린 이제 전과 달라요. 한 푼의 돈도 허투루 쓸 수 없어요. 카를 씨가 헛돈을 썼다는 뜻이 아니에요. 주머니에서 새는 돈이 없게 하려면 재무 담당자들이 자금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해하겠어요?”
“예에, 저도 보고를 제대로 안 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현금의 출납은 무조건 재무 담당자를 거치세요. 발데마르 씨, 저, 아디슬 씨 당장은 이렇게 세 사람이지만 앞으로 늘어날 거예요. 백부장 여러분들도 재무 관련자가 아니라면 공금을 직접 출납하실 수 없어요. 아시겠지요?”
“어이, 다 알겠더냐?”
“예, 알겠습니다!”
힐다를 위시한 백부장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지현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했다.
“만일 우리들이 바빠서 직접 금고에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번 같은 상황을 말하는 거예요. 그럴 때는 허가를 먼저 구하고 금고에서 돈을 꺼내 가세요. 최소한 아디슬 씨에게 돈을 꺼내 간다고 미리 말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혼란이 오진 않았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지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당장 필요한 건 다 말한 것 같았다.
“자자, 다 해결된 것 같으니 그만 해산하자. 카를, 지현 양이 따로 말한 것도 없고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니 벌하진 않을 거다. 그래도 앞으로는 실수하지 마라.”
“네, 감사합니다!”
카를은 종종걸음으로 지현의 방에서 나와 토마스와 함께 빠져나갔다. 아드니도 사건이 해결된 기미가 보이자 아디슬을 데리고 떠났다. 다른 이들은 지현의 눈치를 보며 떠날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발데마르 씨.”
“왜 그러시오?”
“카를 씨가 보고하지 않은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아, 재고를 조사해 보았소. 청어를 구매한 기록이 없는데 재고가 넉넉하더구려.”
“재고 조사. 아!”
지현은 자신이 뭘 잊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제조업이나 유통업이 아니라 재고 조사를 소홀히 했다. 지현이 일일이 관리하기 힘들었기에 뒤로 미뤘던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식료품 재고 조사 같은 건 생활에 중요한 요소니 용병대에서도 당연하게 해 왔다. 간부들을 믿고 맡겼다면 됐을 일이었다.
“과연 그러네요. 앞으로는 니오 본토에서 대량으로 무장도 들여올 테니 그 전에 재고 조사를 철저하게 해 놓아야겠어요. 행정병도 확충하고요.”
“보조 재무관을 고용하고도 행정병이 더 필요하오?”
“물론이에요. 지금 고용하려는 회계사도 용병대 규모를 생각하면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사람들이에요.”
회계사를 고용하고 나면 그들을 회계팀으로 운용하고 기존의 행정병들은 회계 보조 및 재무팀으로 운용할 생각이었다. 행정병들은 현금 및 상품 재고의 출납과 기입을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
지현의 머릿속에 완성된 시스템의 예상도가 있었다. 일단 시스템을 만들고 나면 지현도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말을 마친 지현은 갑자기 뱃속이 오그라드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꾸르르르륵. 다른 통증이 아니라 허기였다.
“크흠, 지현 양. 설마 아침 식사 이후 아무 것도 드시지 않았소?”
“네에. 이미 배식 시간은 지났지만 부엌에서 잔불로 죽이라도 만들어 먹어야…….”
“말도 안 되는 소릴! 따라오시오.”
“예?”
발데마르가 지현을 이끌었다. 하인리히와 리하르트가 그를 뒤따랐다. 힐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지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주방으로 들어선 발데마르는 먼저 손을 씻고 솥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려 있던 허브를 꺼내 물에 넣고 우렸다.
“발데마르 씨, 요리도 할 줄 아셨어요?”
“본부 간부 중에 제대로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은 대장이랑 하인리히 정도예요.”
“취미라고 하셨슴다. 어렸을 때는 아부지한테 배웠고 커서는 일레디온 제국에서 요리를 배웠다고 하심다. 같이 사냥이라도 나갈라 치면 척척 요리해 주시곤 했는데 기가 막힘다.”
“뒤에 떠들지 말고 좀 도와라. 너희도 나눠 줄게.”
“넵! 맡겨만 주십셔!”
허브를 우려낸 물의 일부는 밀가루와 버터를 섞어서 반죽하고 얇게 펼쳤다. 남은 물에는 말린 청어의 껍질을 넣어 다시 끓이며 국물을 냈다. 그사이 옆에서 하인리히는 돼지고기를 큼직하게 썰고 각기 다른 종류의 허브와 소금을 쳐서 간을 맞췄다.
“아버지께서는 농부셨소. 어머니와 결혼한 뒤로는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으셔도 됐지만 당신께서는 꿋꿋이 밭을 일구셨소. 삶이 무엇인지 알려면 땅과 물을 알아야 한다 하셨지…….”
발데마르는 힐다가 잘게 다져 놓은 양파를 잘 우러난 청어 국물에 넣었다. 거기에 소금을 살짝 친 뒤 호밀 전분을 넣었다. 국물이 걸쭉하게 바뀌었다.
리하르트는 철판에 버터를 바르고 하인리히가 간을 한 고기를 올려서 구웠다. 하인리히는 큼직한 고기를 리하르트에게 넘기고 더 잘게 썬 고기를 다른 철판에다 볶았다. 볶은 고기는 발데마르가 끓이는 스튜에 들어갔다.
냄새가 퍼지자 잘 준비를 하던 용병 몇 명이 식당을 찾았다. 원래 잠들기 직전은 출출한 법인데 갑자기 주방에서 고소한 향기까지 퍼지니 참을 수 없었다.
발데마르는 고기를 굽고 돼지기름이 남은 철판 위에 큼직하게 썬 양파를 얹었다. 돼지기름으로 튀기자 양파의 매운 맛은 날아가고 향긋하고 달달한 향이 남았다.
“후, 아버지께서 해 주시던 요리만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요리가 나왔구려.”
발데마르는 뒷정리를 힐다와 리하르트에게 맡기고 완성된 요리를 접시로 옮겼다. 그사이 하인리히는 얇게 편 반죽을 구웠다.
순식간에 정찬이 완성됐다. 부드러운 빵과 스튜, 고기에 반찬으로 양파 튀김까지 있었다.
“헤헷, 대장님. 웬일로 요리를 직접 다 하시고.”
“저희도 조금…….”
“힐다, 리하르트. 정리는 이 녀석들에게 넘기고 너희도 먹어라. 너희는 정리를 마치고 나오면 나눠 주마. 넉넉하게 만들었으니 못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앗싸, 감사함미다!”
나중에 합류한 네 사람은 발데마르의 허가가 떨어지자 요리하는 데 쓴 기구를 들고 물가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사이 지현과 네 사람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지현은 스튜를 한 숟갈 떠먹고는 깜짝 놀랐다. 향이 풍부한데다 간이 딱 적절하게 되어 입 안에서 혀로 굴리는 데 조금의 거슬림이 없었다. 더군다나 전분 덕분에 찰기가 있으면서도 고소한 맛이 살아 있어 목구멍으로 삼키자 그 향기가 그대로 비강을 보듬었다.
지현이 토끼눈을 하자 발데마르가 껄껄 웃었다. 요리가 가장 즐거워질 때는 함께 맛있게 먹을 때라고 했던 부친의 말이 정말로 옳았다.
“역-씨! 대장 요리가 제일 맛있슴다.”
“아직 멀었어, 이놈아. 도시에서 난다 긴다 하는 요리사들 음식을 먹어 봐야지. 하지만 역시 맛있구먼.”
“베겐도르프 정도쯤 되면 요리사도 다른 도시보다 좋은 편이에요. 대장 정도면 거기 요리사들만큼 잘하는 수준이라니까요. 역시 일레디온에서 배운 덕인가?”
발데마르는 두툼한 고기 조각을 하나 덥석 들어서 뜯어 먹고는 호쾌하게 웃었다. 하인리히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힐다도 기분 좋게 빵을 뜯어 먹었다.
“요리가 취미시면서 평소에는 왜 요리를 안 하세요?”
“일단 이런 요리는 병영식하고 다르기 때문이라오. 지금은 지현 양이 시장해 보여서 제법 빨리 요리되는 것만 만들었지만 제대로 요리를 하면 한참이 걸린다오. 그런데 평소 식사 시간에 요리를 한다면 600명을 먹여야 하는데 이렇게 해선 그리 되지 않소.”
“아아.”
“대량으로 만들려면 그만큼 맛이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소. 더군다나 요리의 종류도 제한된다오. 그래서 지금처럼 몇 명이서 조촐하게 즐길 때 정도나 직접 요리한다오. 사냥을 나가거나 생일이 돌아온 녀석을 축하해 줄 때 정도지.”
“이해했어요. 과연 여러 사람이 먹으려면 별수 없겠네요.”
“게다가 나 혼자 먹자고 끼니마다 요리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오, 크하하.”
마지막 말에 지현도 소리 죽여 웃었다. 지현 또한 자취를 했던 터라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이해했다.
가끔 제대로 요리해 보자고 결심하면 장도 보고 준비도 하고 요리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맛있게 먹고 나면 다음에는 그냥 식당을 가자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주방을 치울 때 특히 그런 생각이 컸다.
더군다나 바쁘게 일하고 돌아오면 요리를 할 체력과 기력이 아예 안 남았다. 발데마르도 매일 격하게 훈련하니 그런 마음이 클 것이었다.
“고마워요, 발데마르 씨.”
“커험. 뭘 이 정도를 가지고. 말 나온 김에 지현 양, 이번 토너먼트에서 번 돈이 꽤 큰 걸로 기억하는데.”
“예.”
“이 정도 전공이면 그야말로 승전이라고 해도 좋지 않겠소?”
“물론 그렇지요. 승전 축하연을 열고 싶으신가 봐요?”
“크흠. 예산이 되겠소?”
지현은 방긋 웃었다. 발데마르가 굳이 연회를 열려는 이유를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정말 부하 사랑이 극진한 사람이었다.
“물론이죠.”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마침 문제도 해결된 터라 지현은 당장 더 바랄 게 없었다. 한창 즐거이 식사하고 접시가 바닥을 보일 무렵 발데마르가 헛기침했다.
“지현 양.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은 종종 생길 것이오.”
“네?”
“단단히 경고했다만 사람의 습관이나 기질이 쉽게 바뀌지는 않소. 특히 이 녀석들은 군인이라오. 전장에서 현장 지휘관의 판단으로 먼저 조치하고 나중에 보고하는 일은 흔하다오.”
“그러다 보니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소. 물론 차차 바꿔 나갈 것이오. 이미 전투 이외의 부문에서 지부장들이 지닌 재량권도 상당히 줄였으니까.”
“그러네요.”
지현은 대답하며 손을 멈췄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지금과 달리 당황하지 않을까? 자신할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지현 양이 지금처럼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이오. 지현 양이 모든 걸 책임질 수는 없소. 오히려 최종 책임자는 바로 나, 대장 발데마르라오.”
“그렇, 지요.”
지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참았다. 어느새 ‘우리 용병대’라고 부르지만 또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스스로도 인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고마워요, 발데마르 씨.”
“별말씀을.”
한 번 겪었으니 최소한 앞으로 같은 일이 생겼을 때는 스트레스 받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생각처럼 되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대범하려고 노력이라도 할 것이다. 선례가 남았으니 다음에는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추적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금고 관리는 좀 더 철저히 해야겠어요. 하는 김에 재고 관리도요.”
“동감이라오. 크하하.”
저녁의 작은 파티가 끝났다. 지현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올랐다.
* * *
한 기업의 체제를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고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개념을 합치는 일이었다. 어렵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기존에는 보급 물자가 아니었던 걸 앞으로는 보급 물자로 취급하려니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현이 마주한 게 그런 일이었다.
어제 니오 본토로부터 전령이 찾아왔다. 제식 갑주와 무기의 샘플이 완성되어서 대장장이 대표가 직접 들고 온다는 것이었다.
샘플을 받으면 용병들이 직접 검증하고 발주를 넣어야 했다. 지현은 발주할 때 얼마만큼의 양을 주문해야 하는지부터 고민했다.
당장 용병들에게 사비로 구매한 갑주와 무구를 벗고 새 것만 입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힐다만 하더라도 제식 갑옷보다 방어력이 뛰어난 걸 입고 있었다.
반면에 평범한 사슬 갑옷을 이용하는 이들은 제식 갑옷으로 갈아탈 기회였다. 또 연간 새로 모집한 용병에게 줄 갑옷의 수량과 쓸 수 없는 수준으로 파손되어 교체하게 될 갑옷의 수량도 예측해야 했다.
오래된 장부를 뒤적이고 용병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고민했지만 바로 답이 나오진 않았다. 한 번에 너무 적게 주문하면 당장 필요할 때 무장을 갖추지 못할 테고 너무 많이 주문하면 관리 부담이 커질 것이었다. 정확한 수를 예측할 필요까진 없었지만 ‘적당히’란 건 어디서나 어려운 일이었다.
‘통합 관리니까 부대마다 100벌 정도는 더 있어도 여유가 좀 있지 않을까. 차라리 각 부대에 전령을 보내서 당장 교체할 인원을 파악하고 거기에 여유분을 추가 구매하는 식으로…….’
회계 장부를 행정병이 작성하니 사업 쪽으로 고민할 시간이 생겼다. 결국 업무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외부에서 회계사를 영입하면 그때부터는 아예 회계에서 손을 떼고 부대 경영과 자금 집행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외계인의 정보도 좀 더 활발하게 수집할 수 있으리라.
“지현 양, 전령이 왔슴다.”
“네? 무슨 전령이요?”
“수송대가 내일 오전 즈음에 도착할 거라고 함다. 근데 함께 오는 사람이 제 아부지심다!”
“리하르트 씨의 아버지요?”
지현은 문득 리하르트가 대장장이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걸 기억했다. 또 힐다와 남매 사이니 리하르트의 부친은 힐다의 부친이기도 했다.
“힐다 씨도 들었어요?”
“넵, 안 그래도 어머님도 함께 오신다고 하셔서 그리 전했슴다.”
“힐다 씨가 좋아하겠네요.”
“힐다 누님이 을마나 호들갑을 떠는지 지현 양도 보셨어야 함다.”
지현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 상봉이라니 기쁠 만도 했다. 힐다는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한 건 재작년이었다고 했다. 2년 만에 만나는 거다.
그리 생각하자 지현은 어찌할 도리도 없이 갑자기 목이 메었다. 힐다와 비교하면 고작 세 달도 안 된 시간이지만 힐다와 달리 지현은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물이 늘었다.
“지현 양?”
“크흠.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 아님다. 제가 괜히 호들갑을 떨어서.”
“가족이 오는 거잖아요.”
억누르려고 했지만 목소리에서도 물기가 묻어 나왔다. 지현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크게 하고 손으로 눈을 주물렀다.
“지현 양, 아디슬이 이번에 오는 수송대 식대 문제로……. 지현 양?”
마침 다른 용병이 아디슬의 말을 전하러 왔다가 눈시울이 벌게진 지현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곧장 리하르트의 목덜미를 팔뚝으로 조르며 끌고 나갔다.
“야, 지현 양한테 뭔 짓 했냐?”
“아, 아무 것도.”
“네 입으로 말할래, 아니면 거실에서 말하게 해 줄까?”
거실에는 용병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한복판에 리하르트를 던져 놓고 지현이 울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리하르트를 다져 놓을 것이었다.
“이번 수송대로 오는 대장장이가 아부지라서 그거 말했을 뿐인데.”
“으이고, 이 멍청이가.”
그는 리하르트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거실과 마찬가지로 몇몇 용병들이 식탁에 앉아서 물에 희석한 맥주를 마시며 대화 중이었다.
리하르트를 끌고 온 용병, 하도르는 그를 앉히고 맥주를 한 잔씩 꺼내 왔다. 그는 일단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켜고 탄식을 내뱉었다.
“야,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봐라. 니 가족 와서 기쁜 건 알겠는데 지현 양 고향이 어디냐?”
“어딘지도 모르지…….”
“그래. 듣자 하니 이 대륙도 아니고 옆 대륙도 아니고 애초에 보통 방법으로는 갈 수도 없는 곳이라더라. 그래서 가끔 침울해 있기도 하고 그러잖아. 근데 거따 대고 아버지 온다고 방방 뛰면 참 기분 좋겠다.”
“방방 뛰진 않았어.”
“아무튼.”
“뭔데? 무슨 일인데 리하르트?”
“병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하도르가 타박하고 있자니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처음에는 리하르트를 성토하더니 이내 서로 자기 말을 하느라 대화는 중구난방이 됐다.
“애초에 아버지 오는 게 그리 좋냐?”
“저놈은 아버지가 좋기라도 하지. 난 어렸을 때 맞은 기억밖에 없어. 오죽하면 니오 용병대로 들어온 게 집에서 도망치느라 그랬다니까.”
“다른 용병대는 본토나 그 근처에서 활동하니 말이지. 난 저놈이 힐다 대장이랑 사이좋은 게 가장 신기해. 난 내 누나랑 잠잘 때 빼곤 항상 싸웠는데.”
“아, 흔히 있는 일이지. 나도 내 남동생이랑 죽어라고 싸웠는데 부모님은 항상 그놈 편만 들어줘서 서러웠다.”
“너랑 싸웠다니 남동생이 불쌍하구먼. 그 주먹으로 패면 애가 안 불쌍하냐?”
“어, 안 그래도 철들 무렵부턴 안 때렸다. 아무튼 부모님은 아들내미만 사랑하고 나는 어디 시집보낼 궁리만 해서 이리로 왔지. 그때 입단 시험 합격 못 했으면 진짜 내가 무슨 짓 저질렀을지 모르겠다.”
“네 몸으로 합격 못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얼마 전엔 홀름이랑 팔씨름해서 이겼잖아.”
“걔가 유난히 약한 거야. 걔 약간 하인리히 대장 과잖아. 몸보단 머리 쓰는 게.”
“그거 하인리히한테 말하면 엄청 슬퍼할 걸.”
“부모님들 관심사는 항상 똑같지 않냐. 가업 물려받아라, 좋은 사람 찾아서 결혼해라…….”
“가업도 이을 가업이 있는 사람한테나 물려받으라고 하지. 우리 집은 소작 지었다. 먹고 살기도 힘드니 빨리 독립해서 나가라고 하더라.”
“아, 미안.”
“됐어. 용병 생활 마음에 들어.”
“이렇게 생각하니 지현 양도 부모님이랑 많이 친했나 보네.”
“글쎄다. 고향 생각나는 게 꼭 부모님 때문만은 아니잖아. 친구도 있고, 고향 음식이나 뭐든 그리울 건 많으니까.”
주제가 한참 빙글빙글 돌다 다시 지현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지현의 고향을 상상하며 – 실제와 완전히 동떨어진 상상이었지만 – 지현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지현 양이면 부모님이랑도 사이가 좋았을 거 같아.”
“왜?”
“지현 양 능력 봐. 저런 일 하려면 교육도 많이 받았을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러려면 부모가 얼마나 신경 써야 할 게 많냐? 리하르트도 봐. 어렸을 때부터 제 아버지한테 배운 게 많으니까 아버지랑 친하잖아.”
“그 발상에는 좀 이견이 많은데. 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검술 배웠지만 오히려 사이는 죽어라 나빴다. 성깔이고 가르치는 방식이고 오죽 지랄 맞아야지. 또 쉬지도 않아요. 쉬면 뒤쳐진다고.”
“내 생각에 지현 양은 엄청, 어어어엄청 높은 귀족 집안 영애였을 거야. 능력도 그렇고 태도에서 기품이 묻어 나오는 걸 보면 틀림없어. 그런데 우리랑 이렇게 궁상맞게 사니까 고향이 그리운 게 분명해.”
“엄청난 귀족이면 얼마나?”
“글쎄. 막 왕족이었거나 선제후 집안이었던 거 아니야? 그도 그럴게, 지현 양 엄청 어리잖아. 근데 저렇게 똑똑하려면 엄청 어릴 때부터 엄청 많이 배웠어야 하잖아.”
지현이 평소에 들려준 이야기의 단편만으로 추론하다 보니 엉뚱한 상상까지 나왔다. 지현이 들었다면 어이없어 할지 웃을지 모를 얘기였다.
“지현 양 별로 안 어려. 어려 보이는 거지.”
“어?”
“정확한 나이는 못 들었는데 전에 지현 양보고 스무 살이냐고 물었더니 깔깔 웃더라. 그렇게 어려 보이냐고. 그보단 훨씬 많다던데.”
“고건 몰랐네.”
“얼굴이 유난히 동안인 사람이 가끔 있긴 하지. 발데마르 대장도 얼굴만 떼 놓고 보면 꽤 동안이잖아.”
“몸집이 너무 커서 별로 그렇게 못 느끼지만.”
“무슨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지 근데.”
“지현 양이 어, 향수병이던가?”
“아, 그래. 그거 큰일인데.”
“흐음.”
다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며 고심했다. 이윽고 한 용병이 리하르트의 등허리를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윽!”
리하르트는 펄쩍 뛰며 따갑고 간지러운 등을 긁으려고 했지만 손이 닿질 않았다. 그렇게 팔딱거리는 리하르트를 향해 그 용병이 말했다.
“니가 저지른 일이니까 니가 해결해야지.”
“뭘 어떻게! 그보다 등 좀 긁어 줘.”
“거 향수병 치료에는 먹는 게 최고야.”
“그거라면 며칠 전에 대장이 요리해 줘서 맛있게 먹었는데.”
“뭐? 난 왜 안 불렀어?”
“지금 그게 중요하냐. 어이, 잘 들어. 물론 대장이 한 요리는 맛있는데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건 향수병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지현 양의 고향 요리야.”
“지현 양보고 고향 요리를 만들게 시키라고? 더 악화되지 않을까?”
“아니. 치료는 못 해도 꽤 도움은 될 거야. 너희 나 여기 오기 전에 있던 부대 알지? 거기 귀족들은 라카프인을 노예로 많이 쓰는데 그 노예들은 향수병에 걸리면 고향 요리를 먹는다더라.”
“그거 신빙성이 있는 거야?”
“일단 해 보면 알겠지. 지현 양도 오랜만에 고향 요리 먹으면 최소한 기분은 좋아지지 않을까?”
“끄응, 알았어. 지현 양한테 물어 볼게.”
“넌지시 물어, 넌지시. 대놓고 ‘고향 요리 뭠까?’라는 식으로 말하면 지현 양 또 울라.”
“내가 그 정도 머리도 없는 거 같냐?”
리하르트는 동료들의 성화에 시달리며 지현을 찾았다. 넌지시 묻는다곤 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짐작이 안 갔다.
한편 지현은 자기 업무에 열중이었다. 아디슬이 물어보려고 했던 건 수송대의 숙식 문제였다. 수송대 숙식비는 용병대 유지비에서 지원하기로 정했는데 관련 비용을 얼마나 어떻게 낼 것인지 물어본 것이다.
지현은 수송대로 오는 사람과 말의 숫자를 듣고 여유 자금에서 추경 예산을 편성해 집행했다. 식비 같은 문제는 지난 세 달의 경험이 있어 순식간에 계산하고 정할 수 있었다. 어려운 문제는 다른 쪽이었다.
지현은 아디슬에게 지시를 내리고 원래 문제로 돌아와 추가 자금원 확보를 고민했다. 병장기 일체를 발주하려면 선금으로 상당한 현금을 써야 했다.
갑주를 포함한 병장기 한 세트의 가격은 수천 제니에 달했고 그런 걸 또 수백 벌이나 주문해야 했다. 어쩌면 수천 벌이나.
선금으로 단 1할만 지급하더라도 천 벌이면 20만 제니 가까이 들었다. 게다가 고민할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니 동전은 하이틸란트와 그 영방 국가에서만 통용되니 송금에는 환전이 필수였다. 그나마 금화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통한다는 게 다행이었다.
배송의 문제도 있다. 본부로만 보내면 될 게 아니라 각 부대로 배송을 해야 하는데 목적지 확인 절차가 까다로웠다. 전화는 고사하고 전신도 없는 세계다. 정보 전달은 오직 인편이었다. 당연히 느리고 단절의 위험이 컸다.
한창 고민하는 와중에 리하르트가 찾아왔다. 리하르트는 문밖에서 흘긋 지현의 동태를 염탐하였다. 차분하게 일하는 지현을 보고 리하르트가 문을 두들겨 자신을 알렸다. 지현은 깃펜을 내려놓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씨? 또 무슨 일이세요?”
“지현 양이 진정되셨는지 보러 왔슴다.”
“이젠 괜찮아요. 고마워요.”
“다행임다. 저기, 지현 양.”
“예, 말씀하세요.”
“오늘 일은 언제쯤 끝날 것 같슴까?”
“음, 금방 끝날 일은 아니에요. 퇴근 시간은 평소랑 같을 거예요. 왜요?”
“그러믄 오랜만에 슈바르츠나 부르시지 않으시렴까? 고 녀석 지현 양이 요즘 안 찾으니까 삐져서는 제 말도 잘 안 듣고 막 그럼다.”
“어머.”
월경 중에는 말을 탈 수 없었고 그 와중에 쉬지도 않았다. 자연히 컨디션이 악화일로를 걸었다. 엊그제나 되어서야 체력을 회복했기에 그동안 말을 타는 건 고사하고 호신술 훈련도 뺐다.
“그러네요. 오늘은 조금 일찍 마치고 쉴까요.”
“좋슴다! 대장도 흔쾌히 허락하실 검다.”
리하르트가 신경 쓰는 모습을 보고 지현이 웃었다. 역시 이곳 사람들은 마음 씀씀이가 좋다. 지현이 보여 준 게 있기에 특별히 취급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현은 이런 사람들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현 양, 엉? 넌 왜 여깄냐?”
“아, 힐다 씨. 무슨 일이세요?”
“토마스가 도시에 사람 보내서 식자재를 사와야 한다는데 이거 수송대 지원 예산에서 빼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 식료품 예산에서 빼는 거예요? 리하르트 넌?”
“저는 지현 양이 퇴근하고 시간 좀 있나 물어보러 왔슴다.”
“왜? 지현 양 꼬시려고?”
“아님다! 그냥 그런 게 있슴다.”
“어쭈?”
“힐다 씨, 그거라면 수송대 접객용 식단이 필요한 거일 테니 수송대 지원 예산에서 빼면 돼요. 아디슬 씨한테 지시해 놨으니 찾아가세요.”
이야기가 만담으로 흐르기 전에 지현이 제지했다. 업무 시간에는 안 된다.
“알겠어요. 그런 거라면 그쪽은 제가 직접 갈 건데 지현 양도 같이 갈래요?”
“힐다 씨가 직접 갈 필요까지 있을까요?”
“수송대로 오는 분이 오는 분인지라 직접 챙기고 싶네요. 리하르트, 너도 갈 거지?”
“넷슴다.”
“좋아. 그리고 아드니가 수송대 쪽으로도 애들 몇 명을 마중 보낸다고 했어요. 대장한테도 말해 놨고.”
“알겠어요. 힐다 씨는 그쪽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예상외네요.”
“왜요? 아, 아아. 리하르트 요 촉새가 떠들었지요?”
“네. 후후.”
“여기서 맞이할 거예요. 사람마다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이 있잖아요?”
“그렇지요.”
리하르트는 힐다와 떠나려고 했으나 한 가지 발상이 퍼뜩 머리를 치고 지나갔기에 멈췄다. 마침 힐다가 말한 게 기회였다.
“지현 양.”
“네?”
“지현 양은 식료품 사러 안 가실 검까? 슈바르츠 타고 연병장이나 도는 것보단 도시 바람 좀 쐬는 게 좋지 않겠슴까?”
“음, 굳이 제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여기서 해야 할 일도 있고.”
“지현 양이 하시는 일이야 큰 그림 짜는 거니 하루 이틀에 끝날 일도 아니잖슴까.”
“어…….”
리하르트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지현이 깜짝 놀라자 리하르트가 배시시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인리히가 그랬슴다. 지현 양이 하는 일은 원래 그냥 돈만 만지는 게 아니라 뭔가 더 크고 추측하기 어려운 거라고.”
“그렇군요. 하인리히 씨가…….”
‘어쩌면 하인리히 씨는 군인이 아니라 경영인이 돼야 할지도 모르겠네.’
지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그리고 당장 해야 하는 업무가 무엇인가 고민했다. 예산 편성과 집행은 지현이 직접 해야 했다. 발데마르에게 맡기기엔 아직 발데마르의 이해도가 낮았다.
그 이외의 일은 직접 할 필요가 없거나 당장 할 필요가 없었다. 리하르트와 하인리히의 말마따나 ‘경영자로서 지현’의 일은 큰 그림을 그려서 용병대에 비전을 제시하고 성과를 달성하는 거니까.
물론 지현은 아직 매니지먼트로 전환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회계와 재무에서 할 일이 많았지만 당장의 업무는 꽤나 분담했다.
지현이 흔들리는 걸 본 리하르트는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지현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바라며.
“뭐시냐, 지현 양이 직접 식료품점을 방문한 적은 없지 않슴까. 직접 보시면 거, 어쩌면 지현 양한테 익숙한 물건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슴까?”
“저한테 익숙한 거, 아…….”
“헤, 힐다 누님! 그렇지 않슴까? 지현 양이 전에 고향 요리도 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슴까? 마아침 며칠 전에 대장이 요리했으니 다음은 지현 양 차례, 어떻슴까?”
“응? 아, 그러네. 전에 지현 양이 고향 얘기 해 주면서 한 상 대접해 준다면서요. 이번 기회에 한 번 어때요?”
사정을 모르는 힐다가 해맑게 맞장구 쳤다. 리하르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리하르트야 찔리는 게 있지만 힐다에게는 없었다. 그런 만큼 자연스럽게 지현을 움직일 것이었다.
“으음, 확실히 그렇게 말했던 적도 있긴 하지만.”
지현은 지현대로 또 고향 생각에 가슴 아래쪽이 쿡쿡 쑤시는 중이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데마르 품에서 펑펑 울었던 때와 달리 지금은 상당히 가라앉았지만 완전히 떨쳐 내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향 요리라도 먹으면 힘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이 정도로 하고 내려가 볼까요?”
“좋은 생각이심다!”
“니가 왜 호들갑이야?”
“아무튼 가서 준비해 놓겠슴다. 슈바르츠 녀석도 좋아할 검다.”
리하르트가 횅하니 떠났다. 힐다는 그런 리하르트의 등을 보며 ‘이상한 녀석.’이라고 중얼거렸다. 지현은 쿡쿡 웃고는 서류를 정리했다. 나머진 아디슬에게 전해 주고 도시로 내려가면 됐다.
점심 식사도 아직 안 했는데 퇴근하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편 아디슬은 예산 관련 현안을 정리하는 와중에 현금 인출 역할까지 하는 중이라 죽을 맛이었다. 지현이 서류를 전달하고 떠나니 뒤에서 죽어 가는 소리가 났다.
‘미안해요, 아디슬 씨.’
상급자로서 절대 하고 싶지 않은 행위 순위를 작성한다면 단연코 TOP 10에 들어갈 일이었다. 상급자에게 당하기 싫은 행위로도 같은 순위일 것이었다.
발데마르 역시 수송대 접객 문제로 머리를 쓰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지현이 보고하니 리하르트의 말마따나 흔쾌히 승낙했다. 지현은 홀가분하게 본채를 나섰다.
봄이 다가오니 고향에서 입고 온 두꺼운 외투보다는 여기서 산 가벼운 외투가 어울리는 날씨였다. 지현은 햇살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브로치를 움직여 코트 앞섶을 고정했다.
“지현 양, 여기 왔슴다.”
리하르트가 슈바르츠를 몰고 왔다. 슈바르츠는 보자마자 지현의 가슴을 코로 퍽 밀었다. 반가움의 표시인 동시에 그동안 내버려둔 것에 대한 작은 항의였다. 지현은 슈바르츠의 머리를 얼싸 안고 턱과 이마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며칠 못 봤지? 여기 당근.”
슈바르츠는 지현이 내민 당근을 쏙 물고는 우적우적 씹으며 몸을 돌렸다. 오르내리기 편하게 옆구리를 지현에게 내준 모양새였다. 지현은 웃으며 고삐와 안장을 잡고 등자에 발을 올렸다.
“지현 양, 먼저 나와 있었네요. 애들도 곧 나오니 잠깐 기다리세요.”
힐다는 지현에게 인사하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잠시 뒤 힐다와 리하르트를 포함해 열한 명의 사람들이 대열을 이루고 섰다. 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지현을 둘러싸는 모양새로 섰다.
베겐도르프 시내에 들어간 일행은 일단 사무실에서 식사를 하고 거리로 나갔다. 지현은 ‘식료품점’이라는 이름을 듣고 고향에 있는 식자재 마트 등을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주 거대한 재래시장에 가까웠다.
정주 상인들이 장사를 하려면 특별한 ‘권리’가 있어야 했다. 시장 마을이란 권한을 부여 받은 장소에서만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꽤나 합리적인 구조였다. 지배자들은 정해진 구역만 돌보면 되니 관리가 용이하고 세금을 걷기도 편했다. 상인들은 모여 있으면 보호받기 쉬웠고 관련 업종이 밀집해 있으니 상승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수송대는 열다섯 사람이라고 했으니 우리 측에서 접대할 간부를 합쳐서 서른 명이 먹을 분량을 사면 되겠어요.”
“평소처럼 대량 구매가 아니니 좀 더 질 좋은 걸 구할 수 있지요. 지현 양이 예산도 꽤 넉넉하게 준 편이고.”
“그래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아.”
용병대는 식료품점으로 간단히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시장 마을’이라고 했다. 이름 그대로 도시 안에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시장 마을은 도시 안에 존재할 때도 있고 여러 도시를 잇는 길목에 중개 거점처럼 존재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는 근거리에 있는 도시 전체를 상대로 장사하기 때문에 규모도 더 거대했다.
“읍!”
문제가 생겼다. 시장 마을에 다가갈수록 풍겨 오는 악취와 소음에 지현이 신음을 흘렸다.
대로변은 시장을 위시한 도시 귀족들이 관리해 청결을 유지했지만 시장 마을은 아니었다. 온갖 부산물이 뒤섞여 내는 악취에 상인들이 목청이 터져라 질러 대는 소음이 뒤섞여 감각을 유린했다.
“지현 양? 아, 냄새가 좀 심하죠?”
“뭐, 전쟁터에 비하면 여긴 향긋할 지경이지만.”
지현은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막았다. 구역질이 절로 나올 정도의 냄새였다. 며칠간 푹 썩힌 음식물 쓰레기를 코 밑에 들이대도 이런 냄새가 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산 재료로 요리해도 되는 거야?’
지현의 경악은 끝이 날 줄 몰랐다. 길의 좌우로 아주 작게 파인 홈 – 아마도 하수도 역할을 하는 그곳을 통해 검붉은 액체가 끝을 모르고 흘렀다. 그 작은 홈은 흐르는 액체를 다 감당하지 못해 오물이 길까지 침범했다.
하필 식사 후라 지현은 구역질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여기까지 와서 약한 모습 보이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후각이 빠르게 마비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렇게 오물이 넘치는 곳에 식자재를 그대로 전시할 정도로 사람들이 개념 없진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식료품을 전시하는 대신 가게 앞에 나와서 소리 지르며 호객 행위를 하였다.
니오 용병대는 지현을 감싸듯 서서 길을 열었다. 그들의 체구와 외모가 원체 인상 깊은지라 사람들은 알아서 설설 길을 피해 주었다.
“좋아, 이제 흩어지자. 너희는 곡물류. 호밀은 됐고 밀가루랑 완두콩을 많이 사라.”
“예, 알겠습니다.”
먼저 세 사람이 떠났다. 힐다는 곧장 다음 세 사람에게 청과를 사 오라고 지시했다.
“리하르트, 너는 저 둘이랑 향신료를 사 와. 겨자 따윈 필요 없어. 후추다 후추.”
“넷슴다!”
힐다는 가장 큼직한 돈 꾸러미를 리하르트에게 넘겨주며 지시했다. 리하르트는 작전에 임하는 장교처럼 대답하고 시장 안으로 사라졌다.
“자, 우리는 고기를 사러 가요. 일단 다 산 다음 지현 양이 필요한 걸 사요. 얻어먹는 건 나니까 재료는 내가 살게요.”
남은 일행은 푸줏간을 찾았다. 힐다가 용병대 단골 푸줏간으로 안내했다.
푸줏간은 특히 냄새가 독했다. 시장에 적응했다고 생각한 지현은 푸줏간 앞에서 순간 머리가 핑 돌아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힐다가 지현을 부축했다.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푸줏간 안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풍기는 냄새 때문에 걱정한 것과 달리 안은 깨끗했다. 고기를 정형하는 장소는 벽 너머에 있는지 응접실에는 고기가 아예 없었다.
다른 가게들은 밖에 판매대를 놓지 않았을 뿐 점내는 공판장이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는데 여긴 제법 깔끔한 가게 형태였다. 고기를 내놓는 대신 점원이 나와 자기네 푸줏간은 절대 고기의 품질과 양을 속이지 않으며 혹시라도 의심하는 손님은 직접 고기를 보고 살 수 있다며 접객했다.
응접실에는 지현 일행 말고도 손님이 많았다. 값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면 고객은 더 기분 좋게 영업하는 쪽을 찾기 마련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수완이 좋은 경영자인 건 분명했다.
“다음은 니오에서 오신 손님. 무슨 고기를 찾으십니까?”
“돼지고기, 염장하지 않은 생고기로. 50파운드. 당연하지만 하이티리히 파운드로 세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바로 대령합죠. 생각하는 요리가 있습니까?”
“부위는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금방 내오겠습니다!”
“아, 저기.”
“넵, 말씀만 하십시오.”
지현이 부르자 들어가려던 점원이 우뚝 멈췄다. 지현은 뭐라고 말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목적을 말했다.
“삼겹살만 따로 구할 수 있을까요?”
“삼겹살, 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없나요?”
“물론 있긴 합니다만, 기름이 필요하시다면…….”
“아니요. 삼겹살이 필요한 거예요. 살코기랑 비계 다 붙어 있는 걸로.”
다행히 번역 능력이 제대로 작동했다. 상대는 삼겹살이 어느 부위인지 제대로 알아듣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이틸란트에는 삼겹살을 먹는 문화가 없는 건지 지현의 의도를 착각하였다.
점원은 그제야 지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힐다와 지현을 번갈아 보던 그는 혼란이 온 건지 눈을 여러 차례 깜빡였다.
보다 못한 힐다가 지현의 앞을 가리고 섰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허리에 찬 도끼가 움직이며 절그럭 소리를 냈다.
“삼겹살 없어?”
“아, 아닙니다! 있습니다. 당연히 있습죠.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3, 아니 4파운드면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메츠거! 메츠거, 그 돼지 배 부분을 기름만 떼지 말고 통으로 썰어 봐.”
점원이 안으로 들어가며 외치는 소리는 밖의 소음과 뒤섞이며 사그라졌다. 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1 하이틸란트 파운드는 지현 세계의 중량 단위로 셌을 때 400그램과 500그램 사이 정도였다. 4파운드면 대여섯 사람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부위별로 고기를 먹는 문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각각의 고기 요리는 항상 특정한 부위만 써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돼지 뱃살이요? 그걸 먹는 줄은 몰랐네요. 부어스트라도 만들게요?”
“하하, 아니에요. 삼겹살을 바로 구워 먹을 거예요. 힐다 씨도 삼겹살은 안 먹어 봤나 봐요?”
“당연하죠. 보통은 라드를 추출할 때나 쓴다고요. 남쪽이나 동쪽에 가면 다른 잡 부위랑 섞어서 부어스트를 만들거나 식초에 섞어서 끓여 먹긴 한다고 들었는데 먹어 본 적은 없네요.”
“이번 기회에 새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요. 맛있다고요.”
“기대할게요.”
“후후.”
지현도 식자재 구매를 할 때마다 목록을 살폈고 여기서 이것저것 먹은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구할 수 있는 식료품과 없는 식료품은 알았다.
문제는 그중에 있는지 없는지 애매한 것도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재료가 없으면 요리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재료를 구할 수 있거나 대체재가 있는 요리를 생각했고 그 결론은 ‘쌈’이었다.
여전히 핵심 재료 몇 개가 부족하고 돼지고기 자체의 맛도 다르니 그 맛을 완전히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제법 익숙한 맛은 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럼 또 필요한 재료는 뭐뭐 있어요? 나도 식자재야 많이 알진 못하지만 일단 들어 놓으면 다른 녀석들이랑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일단 채소가 필요하겠어요. 혹시 여기에 상추가 있을까요? 없으면 양배추도 괜찮아요.”
“상추? 약초로 쓰니까 꽤 있어요.”
“다행이네요.”
이곳 사람들은 상추를 다른 허브와 같은 용도로 사용했다. 말려서 약을 만들 때 넣든지 요리할 때 잘게 쪼개서 뿌리는 거다. 그러다 보니 다른 채소와 달리 약재상에서 취급했다.
고기는 밧줄로 묶어 네 덩이나 나왔다. 각각의 덩어리가 적어도 5킬로그램은 했다. 힐다와 다른 용병이 그걸 한 손에 하나씩 들었다. 힐다는 다른 고기값과 지현이 산 삼겹살을 따로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자, 그럼 다음은 약재상으로 가 보자고. 상추 다음으로 필요한 건요?”
“일단 마늘이 있으면 좋겠어요.”
“마늘? 갈수록 무슨 요리인지 모르겠네요. 그 끔찍한 걸 넣다니.”
“마늘도 구할 수 있지요?”
“확신할 수 없어요. 우리도 그렇고 이 지역에선 마늘을 잘 안 먹으니까. 여기 녀석들이 남부 사람들 욕할 때 쓰는 말도 ‘마늘 냄새 나는 놈들’일 정도예요.”
“마늘은 꼭 있었으면 하는데.”
“또 다른 건?”
“기름이 필요해요.”
“기름이요? 버터? 라드?”
“아니요. 식물 기름이요. 여기 참깨도 있나요?”
“참깨?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에요.”
‘에효, 기름장은 그냥 올리브기름으로 해야겠다. 무슨 맛이 나려나.’
청과상으로 이동했던 이들이 중간에 합류했다. 힐다는 그들에게 고기를 넘기고 먼저 사무실로 보냈다.
상추는 손쉽게 구했으나 마늘은 청과상과 약재상을 여섯 곳이나 들른 다음에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나마 구한 것도 다른 채소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서 힐다가 눈살을 찌푸릴 지경이었다.
“요놈이 그렇게 비싸다니, 말도 안 돼요.”
“먹어 본 적도 없나요?”
“동쪽에서 먹어 본 적은 있었어요. 한 알 까서 먹으니까 혀도 아리고 배도 아파서 다들 피했어요. 솔직히 지현 양이라고 해도 그걸 요리에 넣는 건 말리고 싶네요.”
마늘을 좋아해서 요리에도 넣고 고기랑 구워 먹기도 하고 생으로도 쏙쏙 잘 먹는 지현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현의 고향 친구 중에도 생마늘은 도저히 못 먹는 이가 있었으니 이해는 했다.
“힐다 씨는 생으로 먹어서 그래요. 조금만 익히면 매운 맛은 사라지고 단맛이랑 향만 남아서 얼마나 맛있는데요.”
“흐으응.”
힐다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지현이 쥔 마늘 뭉치를 보았다. 지현은 싱긋 웃었다.
“구해야 할 건 다 구했네요. 원래는 다른 걸 만들고 싶었는데 여기선 재료를 못 구하니 아쉬운 대로 이걸로 해야겠어요.”
‘쌈장만큼은 여기서 죽었다 깨도 못 구하지.’
정말 이거 하나면 압살할 수 있겠다 싶은 재료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매콤하면서도 달아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통하는 양념이었지만 구할 도리가 없었다.
고추도 찾아봤지만 그게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그런 재료가 상당히 많았다.
그나마 한 상인은 ‘깨’의 존재는 알았다. 술탄국에서 재배하는 작물인데 그 지역에서 전량을 소모할뿐더러 이쪽 대륙 사람들은 먹지도 않으니 수입도 없다고 했다. 의뢰를 한다면 다음 수입 때 구해 줄 순 있지만 가격이 만만찮을 거라고 했다.
지현은 사양했다. 그 정도로 절실한 건 아니었다. 차라리 김치를 그렇게라도 구할 수 있다면 받아먹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무만 있으면 좋겠는데.”
“무야 있지요. 대륙 전체에 꽤 흔해요.”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하지만 지현이 본 것은 상상하던 하얗고 길쭉한 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뻘겋고 동그란 모양이었다.
지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라고?
“찾으시던 게 아닌가요?”
상인이 헤헤 웃으며 물었다. 지현은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소량만 구매했다. 같은 품종이 아니더라도 맛은 비슷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번역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다. 이곳에 아예 없는 개념이 아닌 이상 자신의 ‘의도’를 단어로 전달하는 능력이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상 이건 지현이 알던 ‘무’와 동치 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었다.
반대로 유사한 기능을 지녔어도 구체적인 부분이 전혀 다르다면 번역이 안 됐다. 예를 들어 찜질방처럼. 아무튼 신기한 능력이었다.
“이걸로 필요한 건 다 샀네요.”
“저녁 먹기 전에는 본부에 돌아갈 수 있겠어요. 그럼 저녁은 지현 양이 만드는 걸로?”
“양이 많지 않으니 초대할 사람들은 신중히 골라야겠어요.”
지현은 일단 꼭 초대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했다. 발데마르, 힐다, 하인리히, 리하르트는 빼놓을 수 없었다. 여기에 요즘 고생이 많은 아디슬도 초대할 생각이었고 사이가 서먹한 백부장들도 가능하면 초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을 무턱대고 늘리면 먹을 게 부족했다. 고기의 양을 생각하면 함께 먹을 사람은 지현을 빼고 일곱 명 정도가 한계였다. 니오 용병대의 먹성을 생각하면 그것도 무리하게 늘린 수였다.
‘그럼 토마스 씨랑 아드니 씨로 할까. 저번 카를 씨 사건도 있으니.’
힐다와 하인리히를 빼면 다른 백부장 모두와 서먹했지만 토마스와 아드니는 특히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발데마르가 자신의 대리 역할을 자주 맡기기에 업무 범위는 많이 겹치지만 정작 만나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지현은 주로 발데마르와 직접 소통하니 그런 것이었다. 발데마르가 대리를 맡겼을 때는 지현도 발데마르와 함께 움직이기 마련이니까.
초대할 사람을 다 고른 지현은 어떻게 해야 삼겹살을 맛있게 구울지나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본부로 돌아와서 지현은 아디슬이 처리한 일을 검토한 후 곧바로 식사 준비를 했다. 우선 마늘을 까서 깨끗하게 씻고 편으로 썰었다. 소금은 올리브기름에 살짝 적셔서 기름장을 만들었는데 참기름과 다른 풍미 때문에 낯설지만 나쁜 맛은 아니었다.
무를 씻어서 칼로 잘라 보니 놀랍게도 속은 뿌연 흰색이었다. 지현은 끄트머리를 잘라서 작은 조각을 입에 넣어 보았다. 은은한 단맛이 딱 자신이 바라던 무였다.
‘세상 신기하네.’
“지현 양이 요리한다고 해서 도우러 왔소. 다른 녀석들이 부러워하더구려.”
한창 밑 준비를 하는데 발데마르가 찾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도와줄 일이 거의 없었다. 고기를 썰고 상추를 씻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럼 고기 좀 썰어 주시겠어요? 아, 그 방향 말고. 이렇게 썰어야 해요.”
“그러면 비곗덩어리랑 고기가 같이 있잖소?”
“그게 중요한 거예요.”
“흐응? 알겠소.”
발데마르는 날카롭게 벼린 식칼로 통 삼겹살을 썰었다. 지현은 그 옆에서 상추를 새로 받아 온 깨끗한 물에 씻고 꼭지를 따냈다. 지현의 고향에서 보던 것처럼 넓고 부들부들한 것이 아니라 조금 두껍고 폭이 좁았지만 맛은 같았다. 끝으로 무와 양파를 원형으로 썰어 놓으면 모든 준비는 끝났다.
“준비가 간단하니 좋구려.”
“되도록 간단한 걸로 했어요. 저, 사실 요리는 그리 잘하지 못해서요. 헤헷.”
“괜찮소. 지현 양의 고향 요리라고 하니 조금 낯설어도 다들 이해할 것이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냥 삼겹살을 불판에 구워서 상추에 싸 먹는 게 전부인지라 지현은 이걸 요리라고 불러도 좋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선 외국인도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많이 소개했으니 그걸 믿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대장님, 저녁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어, 그래라. 우린 이만 비키마.”
“식사 맛있게 하십쇼.”
“그래. 너희도.”
식당에서 같이 먹으면 다른 병사들이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 지현의 작은 파티는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지현과 발데마르가 밑 준비를 하는 사이 하인리히와 리하르트가 자리를 만들었다.
땅을 파서 숯을 묻고 불을 지핀 다음 지지대를 세웠다. 그 위에 주철로 만든 불판을 올리는 걸로 고기를 구울 준비가 끝났다.
물론 이걸로 모든 준비가 끝난 건 아니었다. 불판의 옆으로 넓은 상을 놓았다. 굳이 주방에서 고기를 굽지 않고 이곳에서 구우려는 이유를 니오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현의 지시는 잘 따랐다.
지현은 불판 앞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가지런히 자른 고기와 마늘, 무와 양파가 놓였다.
“다 준비된 것이오?”
“네. 이제 시작해도 좋겠어요.”
“시작이라고 하셔도 말임다, 정작 고기가 전혀 준비가 안 됐슴다.”
“다 익은 고기를 먹기만 하는 게 요리를 즐기는 방법의 전부는 아니에요.”
지현은 그렇게 말하며 나무집게로 삼겹살 한 점을 들었다. 분홍빛 살코기에 하얀 지방이 박혀 있는 게 고향에서 보던 것과 꼭 닮았다. 지현은 그것을 불판에 올렸다.
이미 강한 숯불이 불판을 충분히 달궈 놨다. 지현이 고기를 올리자 곧장 치이익-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솟았다. 고기가 익어 가는 소리에 허기져 있던 일행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버터는 바르지 않는 것이오?”
“평소에 여러분이 먹는 부위는 기름이 거의 없어서 기름을 미리 발라야 하지만 삼겹살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고기 자체에 기름이 충분하거든요.”
지현의 말마따나 고기에서 새어나오는 기름이 불판을 적셨다. 지현은 고기를 차례로 얹고 불판의 빈틈에 편으로 썬 마늘을 올렸다. 일행은 말은 안 해도 뜨악한 표정으로 마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더해 두껍게 썬 무와 양파도 불판 위에 안착했다. 지현은 시간이 좀 더 충분하고 적절한 도구가 있었다면 무를 얇게 썰어서 무쌈으로 만들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지만.
‘지금? 지금? 아니야. 좀 더 기다렸다가 한 번에 뒤집어야 해.’
친구들을 이끌고 고깃집에 가면 항상 최적의 순간을 잡아내는 지현이었다. 삼겹살과 목살 굽기라면 감히 말하노니 발데마르도 한 수 접어줘야 할 달인이었다.
숯은 조리용이라고 믿을 수 없이 강한 화력을 보여 주었다. 지현은 매의 눈으로 고기 표면을 보며 익은 정도를 가늠하고 단박에 뒤집었다. 황금처럼 빛나는 기름진 고기의 표면에 일행은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자, 오늘 제가 소개할 요리는 바로 ‘쌈’이에요.”
“썜?”
“강렬한 발음임다.”
“쌈이요, 쌈. 발음이 어려우면 억지로 할 필요 없어요. 아무튼 어떻게 먹는 건지를 보여 드릴 게요.”
이 세계에 젓가락은 고사하고 포크도 없었다. 고기 같은 건 손으로 집어 먹거나 꼬챙이로 찍어 먹었다. 그렇기에 지현은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 새가 된 심정으로 고기를 잘라 쌈을 만드는 것까지 자기 손으로 했다.
고기를 기름장에 찍어서 상추에 얹고 그 위에 잘 익은 마늘과 양파, 무 조각을 넣어서 꼭꼭 쌌다. 기념비가 될 만한 첫 시식은 발데마르의 몫이었다.
발데마르는 쌈을 받은 다음 미심쩍은 눈으로 그것을 보다가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며 꼭꼭 씹었다. 한 입, 두 입 씹는 사이 그는 인상을 쓴 얼굴을 펴고 이내 싱긋 웃으며 꿀떡 삼켰다.
“이거 참, 퍽이나 단순한 요리라 생각했더니 맛이 참 오묘하구려.”
지현은 발데마르의 평가를 기대하며 다음 쌈을 만들어 힐다에게 넘겨주었다. 힐다가 받아서 손에 쥐는 사이 발데마르가 평을 이어갔다.
“첫입에는 상추의 쓴맛이 지배적이었소. 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고기의 향이 입안에 가득 찼는데 후추는 물론이거니와 백리향이나 파슬리 같은 향신료를 쓰는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은 순수한 고기였음에도 비린 향과 잡내가 나질 않는구려. 굽는 솜씨도 물론 대단하지만…….”
“대장, 말이 너무 길어짐다.”
“아, 이거 미안하군. 너희도 어서 먹어 봐라.”
발데마르의 말에 집중하느라 지현의 손이 느려졌다. 리하르트의 지적에 지현이 화들짝 놀라며 다음 쌈을 만들었다.
발데마르가 지현의 옆자리로 와서 고기와 양파, 무 등을 자르는 걸 도왔다. 지현은 다 정리된 재료로 쌈을 조합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크흠, 계속하자면 우선 지현 양의 굽는 솜씨가 일품이라오. 뿐만 아니라 고기 선정도 놀랍소. 돼지의 뱃살은 기름이 너무 많아 비계만 떼어서 기름으로 쓰거나 숙성시켜서 겨울나기용 음식으로 쓰지 이렇게 살과 비계를 함께 직접 구워 먹는다는 건 기이하오. 그런데도 놀랍도록 고소한…….”
“이거 정말 맛있어요!”
이번에는 힐다가 발데마르의 말허리를 잘랐다. 쌈을 오물오물 씹던 힐다는 그걸 다 삼키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막 여러 가지 맛이 뒤섞인 듯 따로 노는 듯 동시에 나는데 구울 때 고기에 온갖 기술을 부렸을 때랑은 전혀 다른 맛이에요.”
“그래,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였다. 조리를 같이 한 게 아니라 따로 조리한 식재료를 묶어서 먹는다는 발상이 뛰어나구려. 재료 선정도 그렇고. 지현 양의 고향은 요리를 다루는 방법이 아주 독특한 것 같소.”
“여기 하인리히 씨랑 리하르트 씨도.”
“고맙습니다.”
“캬, 대장이 저리 극찬하는 게 무슨 맛인지 궁금함다.”
“이 소금과 기름을 섞은 조미료도 무척 신기하오. 고기 자체가 기름진데 거기에 기름을 더한 조미료를 쓴다는 게 기이했소만, 놀랄 만큼 맛있구려.”
이곳 사람들은 고기를 조리할 때부터 버터와 소금을 쓰기에 다 구운 고기를 소금에, 그것도 기름을 쳐서 찍어 먹는다는 발상이 필요치 않았다. 그런 만큼 기름장이 이들에게 신선했던 것이다.
“이 상추와 양파, 마늘을 같이 넣은 게 가장 큰 장점이었소. 향이 강한 양파와 마늘을 불에 익혀 향을 죽이고 생채소로 감싸는 것으로 서로의 맛을 중화시켰소. 고기의 잡내를 묶고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최적의 합의를 찾아낸 것 같구려.”
“어, 사실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물론 처음 이걸 만든 사람은 그랬을지 몰라도.”
“아무튼 놀라운 요리라오. 거의 조리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는 재료들을 섞는 것만으로도 이런 놀라운 맛을 내다니. 덕분에 내 요리 세계도 한층 넓어졌소.”
쌈 하나 싸서 준 걸로 듣기에는 너무 얼굴에 금칠을 했다. 지현은 기분이 좋은 수준을 넘어서서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아드니 씨, 토마스 씨. 여러분도 한 입 드셔 보세요. 한입에 털어 넣고 입 안에서 맛을 음미하시는 거예요.”
“아, 예. 감사합니다.”
토마스는 송구스럽다는 듯이 두 손으로 받아서 입 안에 쌈을 넣었다. 눈으로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맛에 대한 의심도 의심이거니와 지현의 의도 자체를 모르다 보니 저자세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바로 며칠 전에 그의 부대원이, 하필 그것도 중간 간부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발데마르에게 한 소리 들은 건 물론 지현의 신경질도 목격한 터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현은 지현대로 그동안 편향되었던 인간관계를 넓히자는 의미였으니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웠다. 또한 자신은 발데마르의 신임을 받는 상급 간부인데다 돈줄을 쥔 사람이니 다른 간부들이 거리감을 갖는 것도 이해하였다.
조심스러운 토마스에 비해 아드니는 담담했다. 아드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쌈을 받아서 고개를 가볍게 꾸벅이고 입에 넣었다.
지현은 그 얼굴에서 문득 키르스텐을 떠올렸다. 힐다와 비슷하게 생긴 키르스텐과 달리 아드니의 머리카락은 검었고 허리까지 올 만큼 길게 길러 한 갈래로 묶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아디슬 씨도, 여기 한 입.”
“가, 감사합니다.”
이중에 유일하게 아디슬만 간부가 아니었다. 그는 총사령관인 발데마르를 비롯해 상급 간부만 여섯 명이나 포진한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상이었다.
지현은 그를 쉬게 해 주려고 불렀는데 오히려 배탈이 날까 걱정할 판이었다. 어쩐지 회식 자리에 억지로 끌려 나온 신입사원 같은 모양이라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그나저나 마늘이 가장 놀랍소. 나야 마늘 향이 익숙하다지만 다른 녀석들은 마늘이라면 질색을 할 텐데 저리 잘 먹다니.”
“돼지기름에 충분히 익혀 주면 마늘의 매운맛은 사라지고 단맛이랑 특유의 고소하고 달달한 향만 남아요. 훨씬 먹기 좋고 다른 재료에 지나치게 강하거나 역한 맛이 있으면 그것도 잡아 줘요.”
“과연 그 말씀이 옳구려.”
“난 마늘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 이게 마늘 맛인가?”
마늘이라며 질겁하던 힐다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걸 본 지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전 마늘을 좋아해서 요리라면 어디든 넣어 먹었어요. 이렇게 큰 마늘 알을 구워 먹기도 하지만 다져서 국물에 넣기도 하고.”
“오, 누탈로 식이구려. 그쪽 사람들은 조리할 때 다진 마늘을 넣지. 그래서 북쪽 사람들은 마늘 냄새 난다고 놀리지만.”
지현은 마침 완성한 쌈을 자기 입에 넣었다. 자신의 것엔 특별히 마늘을 한 알 통째로 넣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인후까지 넘실대는 마늘의 고소하고 들큼한 향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 맛이었다. 바로 이 맛이 그리웠다. 마늘 한 알과 고기 한 점, 그것만으로 지현의 가슴에 응어리진 단단한 조각에 금이 갔다.
“그나저나 이 요리에 단점이라면 요 녀석 한 입 먹기 참 힘들다는 것이오. 고기만 충분하다면 밤새도록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겠소.”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 사람이 일곱 사람의 쌈을 하나하나 만드는 건 무리였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제가 시범을 보여 드렸으니까 이제부터는 각자 먹고 싶은 만큼 만들어 드세요. 만드는 건 쉬우니까요. 취향 것 마늘을 더 넣거나 양파를 더 올려도 좋고, 기름장에 푹 찍어 먹어도 되고 살짝 얹기만 해도 좋고요.”
지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리하르트가 재빨리 자신의 꼬챙이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올렸다. 그는 꼬챙이로 고기만 따로 조종하기 힘드니 상추 위에 고기를 얹고 그대로 기름장에 푹 찍어서 입에 집어넣었다.
“에구, 이건 좀 짰슴다.”
“욕심을 부리니까 맛있는 요리도 제대로 못 즐기는 거야.”
힐다는 그토록 피하던 마늘을 제 손으로 집어 쌈에 넣었다. 지현은 고기를 마저 구우면서 그들이 하는 걸 지켜보았다.
토마스는 마늘에 손도 안 대고 양파만 잔뜩 쌓아 올렸다. 아드니는 양파와 무를 조화롭게 넣었지만 마늘은 한 조각만 넣어 먹었다.
리하르트는 고기만 상추에 싸서 먹었고 발데마르와 힐다는 모든 재료를 적절히 섞어 먹었다. 하인리히는 재료를 모두 넣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주시하고 유달리 잘 익거나 큼직한 고기는 양보해 가며 쌈을 만들었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지현은 다음 고기를 구우며 아드니와 토마스에게 말을 걸었다.
지현은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요점을 잘 집어냈다. 언뜻 용병대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지현은 모르는 것이 많았다.
아드니와 토마스 모두 지현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긍정했다. 그들은 힐다나 하인리히처럼 적극적으로 지현의 지지대가 되진 않더라도 업무 분야에서 지현을 이해하고 또 받아들일 것이다.
“여러 모로 새로운 발상이 놀랍도록 뛰어난 발전을 만들어 낸다는 걸 깨닫는 식사였소.”
“과찬이에요. 발데마르 씨 말마따나 그냥 생각의 전환일 뿐인걸요.”
“새로운 생각! 그대가 이곳에 온 뒤부터 늘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지. 그대는 용병대 전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소한 곳에서도 내 작은 세계를 부수고 새로 만드는구려.”
‘우으, 슬슬 부끄러워지는데.’
당초 목적이었던 고향의 맛도 찾았고 서먹하던 두 백부장과도 어느 정도 안면을 텄다. 더 바랄 게 없이 훌륭한 식사였다.
“대장, 생각난 김에 내일 수송대 대접할 요리는 대장이 직접 하실 검까?”
“그래. 요리할 줄 아는 녀석들 불러다 지휘할 거다.”
“기대됨다.”
“넌 원래 명단에 없거든.”
“좀 봐주십셔, 힐다 누님.”
“됐다, 힐다. 이미 수송대에 가족이 있는 녀석들은 다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그거라면 업무 시간 외에 만나면 될 일을 굳이…….”
“나 힘들 것 없으니 괜찮다. 가족이 같이 있으면 화기애애하고 좋지 않더냐.”
“뭐, 그것도 그렇지요.”
“그대는 수송대로 오는 대장장이들과 나눌 말씀이 많으시겠소.”
“발데마르 씨도요. 저는 돈만 세면되지만 발데마르 씨는 직접 갑옷이랑 무기를 시험해 보셔야 하잖아요.”
“그도 그렇구려.”
식사가 끝나고 지현은 한결 나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내일 있을 일에 대한 고민마저도 싹 가셨다.
무슨 문제야 있겠는가? 조금쯤 여유를 두고 생각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을 테지.
* * *
수송대가 니오 용병대의 망루를 지나쳤다. 발데마르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본부에선 보기 드문 중무장한 모습이었다. 발데마르를 위시한 일백 정예병이 갑주와 무구를 모두 갖추고 서 있었다. 손에는 창이나 검, 손도끼 대신 상급 전사의 상징이기도 한 긴 자루의 전투 도끼를 들었다.
“천둥과 북풍의 이름으로! 가족을 환영하라! 니오 용병대!”
“하!”
일백 군인이 발데마르의 신호에 맞춰 발을 굴렸다. 그 일사불란한 동작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마차가 연병장에 멈췄다. 두툼한 털가죽 망토를 걸친 사내가 가장 먼저 내렸다. 호화스런 망토와 달리 얼굴에는 눈 주위까지 가리는 니오 특유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는 발데마르를 보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투구를 벗고 두 팔을 벌렸다. 발데마르 역시 투구를 벗으며 두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야를 발데마르! 형제여, 이게 얼마 만인가!”
“아직 그 칭호는 익숙지 않습니다, 야를 살비. 그저 잉게마르의 아들 발데마르라 불러 주시구려.”
“허허, 야를 뤼나께서 들으시면 안타까워하실 말씀이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들어갑시다. 먼 길 온 동포를 위해 만찬을 준비해 놓았소.”
“이를 말인가.”
본채의 주방은 분주했다. 시작할 때는 발데마르가 지시하며 요리했지만 발데마르가 접객을 위해 떠나고 나서는 하인리히가 주방을 지휘했다.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이 들어오기 직전 요리를 마무리하고 식당에 내놓을 수 있었다. 각자에게 요리가 할당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미리 식당에 완성된 요리를 잔뜩 쌓아 두고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집어 가는 식이었다.
“수고했다, 하인리히.”
“아닙니다.”
“그럼, 야를 살비. 우선 내 잔부터 한 잔 받으시오.”
발데마르가 술잔을 살비에게 건넸다. 그는 살비가 잔을 받자 잔 위에 통후추를 갈아서 뿌렸다. 살비는 후추 향을 맡고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정말 훌륭한 대접이오. 돌아가면 야를 스카티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겼군.”
좋은 분위기로 파티를 시작했다. 용병대원들은 가족을 찾아 식당을 누볐다. 수송대로 온 사람들도 자신의 가족을 찾아다녔다. 이윽고 식당은 가족 상봉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야를 살비! 이쪽이 바로 우리의 재무관 지현 양이라오.”
“오, 이런. 소문은 익히 들었네. 야를 발데마르가 얼마나 자랑을 해대는지 원. 도마르의 아들 살비라고 하오. 여러모로 어리숙하지만 감히 수르가르트를 다스리고 있다네.”
“수르가르트는 니오 전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와 그 인근 지역을 가리킨다오.”
“이지현입니다. 반갑습니다.”
발데마르가 귀엣말로 소개를 거들었다. 지현은 목례로 인사를 받고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살비는 발데마르에 버금가게 장대한 체구였다. 악수를 하는데 살비의 손이 지현의 손을 완전히 덮어 버릴 정도로 컸다.
“우리 왕께서도 지현 재무관에게 관심이 많으시네. 하긴 그분이 요즘 관심을 안 가지는 곳이 어딘지 궁금할 지경이야.”
“지도자가 여러 곳에 관심을 갖고 살피는 건 좋은 일이오.”
“그렇지. 그래. 흠, 아무튼. 만나서 반갑네. 평소였다면 내 선에서 이걸 관리했겠지만, 이번 건은 조금 어렵더군.”
“무슨 말씀이시지요?”
“건수가 너무 커졌네. 나도 니오에선 제법 목에 힘깨나 주는 제후인데 이번엔 힘 줬다간 목이 달아날 정도로 말이지. 지현 재무관이 실시한 일이 얼마나 거대한지 스스로는 이해하고 있기를 바라네.”
“물론 알고 있지만, 니오라는 국가 전체가 움직일 정도로 큰일이었나요?”
“그렇게 커져 버렸지. 우리 왕께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어이쿠, 내가 너무 떠들었군. 미안하네. 여기는 라그나르에게 맡기겠네. 라그나르! 이쪽으로 오게!”
한창 리하르트와 대화하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팔짱을 낀 중년 여인과 함께 지현의 앞까지 다가왔다.
“대장장이 대표로 온 비야르니의 아들 라그나르입니다.”
“니오 용병대의 재무관인 이지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라그나르는 리하르트에게 연륜과 무게감을 더하면 완성될 중후한 멋이 있는 남성이었다. 리하르트와 똑같이 밝은 금발을 짧게 깎아 올백으로 넘겼고 동작에 여유가 있었다.
“이쪽은 제 아내인 탄드리입니다.”
“호릭의 딸 탄드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탄드리는 힐다가 몸집을 좀 더 키워 놓은 듯 훤칠하고 멋진 중년 여성이었다. 밝은 백금발을 길게 길러서 폭포수처럼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지현은 라그나르와 악수하고 그대로 손을 옮겨 탄드리에게 내밀었다 그대로 얼었다. 탄드리의 오른팔은 팔꿈치 아래가 나무로 만든 의수였다.
“놀라실 거 없이 악수하셔도 좋답니다.”
탄드리가 싱긋 웃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마치 손을 흔드는 것처럼 의수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현은 마주 웃으며 의수를 잡고 가볍게 흔든 뒤 놓았다.
“그럼 얘기들 나누시게.”
살비가 은근슬쩍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발데마르 또한 자리를 떴다. 최고 책임자인 이상 다른 용병의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했다. 발데마르와 살비가 사라지자 리하르트가 본격적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파티에 늦게 합류한 힐다가 큰 소리로 자신의 모친을 불렀다. 발데마르를 대신해 환영식의 병사들을 지휘했기에 늦은 것이었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무기랑 방패만 내려놓고 갑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뛰어 왔다.
“힐다!”
힐다는 달리던 그대로 탄드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탄드리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딸을 맞아 주었다.
“어이쿠, 이젠 우리 딸을 못 이기겠는데.”
“아직 멀었어요. 아, 지현 양.”
그제야 지현을 발견한 힐다는 헛기침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바로 섰다. 이미 한참 늦었지만. 지현은 굳이 웃음을 참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 새로운 모습이 남아 있네요.”
“뭐, 썩 부끄러운 모습은 아니죠?”
“물론이죠. 부끄러울 게 뭐 있겠어요.”
“아버지도 오랜만에 뵈어요.”
“그래, 힐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그나저나 리하르트, 힐다. 둘 다 재무관님이랑 퍽 친한 모양이구나.”
“어, 그게…….”
“지힌 재무관님. 실례가 아니라면 저희 아들딸과 어떤 사이이신지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탄드리의 질문에 리하르트가 딸꾹질을 했다. 힐다는 눈을 모로 뜨고 어깨를 으쓱였다.
“말할 것도 없이 소중한 친구들이에요.”
지현은 뜸을 들일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힐다와 리하르트가 숨을 몰아쉬었다. 탄드리는 더 짙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힐다, 리하르트. 좋은 인연을 만났구나.”
“헷, 지당한 말씀이심다.”
“좋은 인연이지요.”
다섯 사람은 한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힐다와 리하르트의 어렸을 적 이야기라든지, 대화 소재는 끊이질 않았다.
적당히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었을 무렵 발데마르도 다시 합류했다. 발데마르가 돌아오니 라그나르가 본론을 꺼냈다.
“지헨 양, 보내 주신 계획서는 잘 읽어 보았습니다. 대장장이들도 다들 의욕에 차 있습니다. 그동안 용병대에서 이렇게 대량의 갑주는 고사하고 한두 사람이라도 주문하면 다행인 일이었기에…….”
“앞으로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니오 용병대의 무장 일체는 모두 본토에서 주문하게 될 거예요. 대장장이 여러분이 고생해 주셔야 하지만.”
“고생이랄 게 있습니까? 고생은 일거리가 없어서 화로에 불을 지피는 대신 어망을 들고 바다로 나가는 게 고생입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이번 방문에는 견본을 가져오셨다고요?”
“아, 예. 견본뿐만 아니라 발데마르 경의 갑주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내 갑주 말이오?”
지현은 순간 대화를 놓쳤다. 발데마르의 갑주가 무엇인지 잊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탁월한 기억력으로 이내 브리건딘이라는 이름과 탁월한 방어력을 기억해 냈다.
“발데마르 씨의 갑주라면 서면으로 설명 드리고 제작이 가능한지 여쭈어 봤지요.”
“예. 글만 읽었을 때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여럿이 모이니 지혜가 생기더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일단 노하우만 쌓고 나면 오히려 브리건딘 쪽이 제작이 더 쉽습니다.”
“네?”
“그 말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저는 물론 대장장이 집회에서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작 면에서 브리건딘이 사슬 갑옷보다 제작 시간이나 공정을 단축하기 용이합니다.”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이 자리에서 다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나중에 견본과 함께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이거 고무되는 말이구려. 브리건딘을 만들 수 있다니.”
식탁에 깔린 음식도 바닥을 드러내고 사람들도 하나둘 포만감에 나른해졌다. 발데마르가 식당 중앙에 서서 파티의 끝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식당을 빠져나갔다. 가족들과 회포를 풀고 나면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업무에 착수해야 했다.
“내일부터는 진짜 업무예요. 다행히 골치 아픈 협상 따윈 필요 없으니 한결 편하겠지요.”
“의외로 골치 아픈 협상 따윌 해야 할지도 모르지.”
“응?”
발데마르와 지현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상대는 눈도 보이지 않을 만큼 커다란 망토와 두건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다면 니오 본토의 귀족이거나 용병대 관계자인 건 분명하지만 발데마르도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럴 필요가 뭐 있겠어요. 서로 상의해서 필요한 무장의 양을 헤아리고 발주하면 되는데.”
“미안하군. 조금 더 복잡해질 거라네.”
“네? 그보다, 누구시죠?”
“모습부터 드러내시지.”
발데마르가 상대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동시에 몸을 옆으로 움직여 그와 마주보는 한편 지현의 앞을 가렸다.
“이거, 실례했군. 모습을 감추고 싶어서 말이야. 내가 직접 멀리까지 나오면 의회에서 시끄럽게 굴다 보니 몰래 온 거였거든.”
“그대는…….”
“오랜만이야, 발데마르 경.”
남자가 두건을 벗었다. 두건 안에 감추었던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실크를 검게 물들인 듯 빛을 받아 부드럽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이었다.
드러난 피부는 울긋불긋한 기색이 전혀 없이 대리석처럼 하얗고 두 눈동자는 에메랄드를 조각한 것처럼 진하고 뚜렷한 녹색이었다. 목탄으로 그린 듯 짙은 눈썹과 매끈하게 날렵한 턱선은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그림에서 꺼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발데마르는 화들짝 놀라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크누트 왕, 우리의 군주여.”
“그대가 내게 팔찌를 받아 간 것도 벌써 5년 전인가. 그동안 용병대 운용에 정말 힘써 줬네.”
크누트는 발데마르의 어깨에 가볍게 손날을 올렸다 내렸다. 발데마르는 더 깊이 목례하고 고개를 들었다.
“헌데 크누트 왕이여. 몰래 나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제발, 발데마르. 그대마저 고리타분한 의원 노인네들처럼 말할 셈인가.”
“으음, 미안하오.”
“마냥 놀러 나온 건 아니네. 겸사겸사 왔다고 하지. 그리고 신임 재무관은…….”
지현이 보기에 크누트는 발데마르와 비슷한 연배거나 조금 더 어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발데마르와 유난히 친근해 보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발데마르가 소개했듯 크누트 왕이네.”
크누트가 손을 내밀었다. 지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지현입니다. 부족하지만 용병대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부족해? 지난 두 달 동안 발데마르에게서 받은 보고서에는 그대의 활약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네. 용병대 재정 악화는 나도 걱정하던 부분인데 잘 해결해 주고 있더군. 겸양이니 겸손은 내게 하찮은 것일세. 자신을 숨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누구나 능력만큼 대우 받는 법이지.”
“네에.”
“그럼에도 말이지.”
크누트가 한참 지현의 손을 흔들다 말끝을 흐렸다. 그는 지현의 손을 놓고 턱을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더 활약해 줘야겠어.”
“네?”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지. 업무 시간도 지났잖은가? 그만 가세, 발데마르.”
크누트가 발데마르를 이끌고 떠났다. 지현은 크누트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더 활약해 줘야겠다는 말은 평범하게 격려와 응원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무언가를 지현에게 요구할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겠다. 지현은 자신의 업무를 생각해 금전에 관계된 무언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직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지쳐 버렸다. 분명 내일 업무는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서 숫자를 정하고 예산만 나누는 간단한 일이었고, 오늘은 안락하고 화목한 파티만 즐겼을 텐데 말이다.
지현의 머리에 사는 작은 요정이 지현의 등줄기를 차가운 손길로 긁어내리며 속삭였다. ‘도망쳐’라고.
‘과민 반응이야. 그냥 응원이겠지.’
* * *
참여해야 할 사람이 많았기에 회의는 살라에서 하였다. 살라는 방의 구분이 없이 건물 전체가 하나의 방인 형태의 집이었다.
수십 명을 넘어서는 인원이 참여해야 하는 정치 군사 토론을 벌일 때나 쓰는 건물이었다. 그렇기에 지현도 아직 이곳에서 토론해 본 일은 없었다.
수송대 사람들은 크누트와 함께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함구령이 내려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살라에서 크누트가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도 수송대 인원 중에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니오 전역에서 모여 서로 모른다고는 하지만 거의 2주일을 함께 여행한 사이였다. 처음 만났더라도 얼굴을 텄을 테니 크누트의 존재를 몰랐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었다.
오히려 놀란 건 용병대 사람들이었다. 느닷없이 왕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상석에 앉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누트와 직접 만나고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발데마르와 몇몇 간부 정도였다. 대부분의 용병대원들은 크누트를 보고 ‘저 곱상한 샌님은 뉘셔?’라는 반응이었다. 왕인 걸 알고는 고개를 푹 숙였지만.
“그럼 시작하겠소.”
“일일이 내게 보고할 필요 없네. 자연스럽게 회의를 진행하게. 이 살라는 그대의 영토야, 발데마르.”
“알겠소.”
발데마르는 상석 대신 지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현의 옆으로는 용병대 백부장들과 베르세르크 전원이 참석했고 기병 훈련 부대의 장으로서 리하르트와 그의 동료 기병 병장들이 함께했다.
반대편에는 수송대 전원이 있었다. 이렇게 모이니 회의에 참여한 인원이 70명 가까이 됐다.
“우선 견본부터 보여 주시겠어요?”
“예.”
지현의 요청에 라그나르와 그의 동료 대장장이들이 포장을 열고 경번갑을 꺼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철판 여덟 장을 사슬에 연결해 복부만 가리고 나머진 보통 사슬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우선 주문하셨던 보급형 경번갑입니다. 사슬은 연철이 아닌 연강으로 만들어서 열처리를 가했고 요청대로 하나의 사슬이 각각 여섯 개의 사슬과 연결되게 만들었습니다. 방어 능력은 탁월하겠지만 무게가 조금 많이 나갑니다.”
발데마르는 갑옷을 받아서 직접 이곳저곳 살펴보고 힐다에게 넘겨주었다. 힐다는 그것을 펼쳐서 다른 베르세르크들과 돌려 보았다.
“기성품으로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었지만 크기를 완전히 단일하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마다 체구가 다른 법이니 각자 체구에 맞춰 입을 수 있도록 크게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라그나르는 그렇게 말하면 똑같이 생긴 갑옷을 하나 더 꺼냈다. 방금 전에 보여 줬던 것에 비하면 조금 더 큰 크기였다. 앞의 것이 하인리히가 입기에 딱 적당할 정도라면 이번 건 발데마르가 입었을 때 몸을 죌 정도의 크기였다.
“크흠. 발데마르 경은 신체가 조금 예외적인 분이라 발데마르 경을 기준으로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해하오.”
“그리고 이것은…….”
라그나르가 새로운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꺼내 보인 것은 코트였다. 하얗고 동그란 점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모양이 발데마르의 갑옷과 똑같았다.
“철해 인근에 정착한 동포들에게서 전해 받은 물건입니다. 아마 발데마르 경이 입고 있는 것과 동일한 원리로 제작한 갑옷일 겁니다.”
라그나르는 그것의 앞섶을 열고 내부를 보여 주었다. 안쪽도 평범한 코트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짧은 단검으로 재봉을 자르고 천을 들어내자 그 안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철판이 있었다.
“의복 안쪽에 철판을 고정한 갑옷입니다. 그쪽 동포들은 이것을 ‘쿠야크’라고 부르는데 양식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복 안쪽에 철판을 붙인 종류와 의복 바깥쪽에 철판을 붙인 것입니다. 양식은 다르지만 천에 철판을 고정한다는 원리는 같습니다.”
“신기하구려. 내 것은 외투 안쪽에 바로 철판이 위치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좀 더 오래된 방식으로 제작한 것 같습니다. 직접 보아도?”
“여기 있소.”
발데마르 또한 어제 귀띔을 들은 바가 있으니 자신의 갑옷을 준비해 왔다. 라그나르는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중앙에 펼쳐 놓았다.
“역시 이것은 초기 쿠야크입니다. 아마 할가라나 크라프를 통해 얻으신 것 같습니다만.”
“할가라였소. 거기선 브리건딘이라고 불렀소.”
“이렇게 외피와 철판만 있으면 내피로 마감할 필요가 없어 제작이 좀 더 쉽습니다. 대신 착용감이라든지 불편한 부분이 있을 테지요.”
“안쪽에 누비 갑주를 추가로 걸치면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오. 팔 부분도 많이 다르구려.”
“아무래도 아직 역사가 100년도 안 되는 갑옷이다 보니 다양한 유형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발데마르 경의 것은 겨드랑이와 팔꿈치까지 천이 내려오는군요.”
라그나르가 내놓은 것은 팔 부분이 상완까지만 존재했고 겨드랑이는 그냥 비워 놨지만 발데마르의 것은 평범한 반팔 옷처럼 팔꿈치까지 길었다. 외관만 봤을 때는 겨드랑이가 노출되지 않은 쪽이 방어가 뛰어나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입어 보면 정작 겨드랑이에는 철판이 없어 방어력은 똑같았다. 오히려 의복과 철판이 팔꿈치까지 이어지면 팔을 구부릴 때 불편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이 살펴보고 또 직접 제작해 보았을 때, 쿠야크 쪽이 사슬 갑옷이나 경번갑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구려.”
쉽게 설명하자면 철판을 만드는 게 사슬을 엮는 것보다 손이 훨씬 덜 갔다. 철판은 강재를 두들겨 펼치고 식기 전에 못을 박아 넣을 구멍을 뚫으면 바로 쿠야크에 쓸 수 있었다. 쉽고 단순하고 반복해서 만들기 편했다.
하지만 사슬은 철사를 뽑고 그걸 서로 엮어서 구부린 다음 대갈못을 박아 고정해야 했다. 방어력 강화를 위해 서로 엮는 사슬 둘 중 하나는 이음새 없이 매끈한 원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사슬의 크기와 촘촘한 정도를 생각하면 지극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당연히 사슬을 짜는 것보다 철판을 만드는 게 동일 시간 동안 훨씬 많은 양의 생산이 가능했다. 옷의 형태를 잡는 건 대장장이가 아니라 재단사에게 맡기니 분업이 더 효율적이기까지 했다.
“허면 이 사슬 갑옷을 만들 것 없이 그리 설명하고 바로 이걸로 넘어갔으면 됐지 않소?”
“경험이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쪽이 저희가 직접 시험 제작해 본 쿠야크의 견본입니다. 리하르트, 입어 봐라.”
라그나르가 또 하나의 갑옷을 꺼냈다. 그가 호명하자 리하르트가 회의장 중심에 서서 라그나르가 건넨 옷을 받아 입었다.
그런데 처음 팔을 옷에 넣어 등에 걸친 순간부터 리하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두 팔을 다 집어넣고 앞섶을 하나하나 버클로 잠갔다. 마지막으로 두꺼운 허리띠를 맸을 때 그는 불퉁한 표정으로 허리를 돌려 보거나 팔을 움직여 보았다.
“소감을 말해 봐라. 솔직하게.”
“음, 솔직하게 이거 꽤나 불편함다. 가슴이 갑갑하고 등허리의 철판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듬다.”
“리하르트가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시간이 없어 급하게 만든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형태의 갑옷을 처음 만들어 봤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입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다른 갑옷을 만들어 본 경험 덕분이었습니다.”
“즉, 만들 수는 있지만 당장은 아니다. 이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리하르트, 팔을 들어 보아라.”
리하르트는 부친의 말대로 팔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팔을 채 완전히 펴기도 전에 움찔 놀라며 팔을 접었다. 상완의 철판이 그의 살을 찔렀기 때문이다.
다들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터에 나갈 때 팔도 잘 안 움직이는 걸 입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리 고향을 돕고 싶다지만 고향 땅에 시체가 돼서 돌아갈 물건이 무슨 소용인가?
“시행착오가 많이 필요합니다. 직접 입고 움직이고 철판의 위치를 조정하고, 그런 일을 몇 번씩 반복해야 합니다. 당연하지만 상당한 재료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굳이 이 자리에서 그걸 말하는 이유가 있겠구려?”
라그나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크누트를 바라보았다. 크누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답변했다.
“대장장이들은 내게 3년의 기간을 약속했다. 3년 이내에 쿠야크를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수준으로 개발하기로. 그런데 그러려면 ‘예산’이 필요하지. 지현 재무관.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거기에 필요한 예산을 용병대에 보급형 경번갑을 판매한 돈으로 충당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정말 명석한 사람은 이래서 좋아.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네.”
“그 말씀은?”
“갑옷의 재료인 강재의 대부분을 수입해서 쓴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네.”
“하지만 크누트 왕이여. 니오의 철 생산량이 그걸 전부 감당할 수 있겠소? 우리끼리 쓰는 것도 부족해서 수입하는 것 아니었소?”
“철광을 개발해야지. 당연하지만 여기에도 상당한 예산이 필요할 거네.”
“혹시…….”
“아, 걱정 말게. 용병대보고 장사까지 하라고 시키진 않을 테니까. 니오는 원래부터 용병 이전에 무역으로 수익을 얻었어. 단지 그 품목에 갑옷을 추가할 뿐이야.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갑옷이 잘 팔리려면 뭐가 필요하겠나? 이름이네. 새로 지급된 갑옷을 입고 발데마르, 그대가 날뛰어 줘야겠네.”
발데마르와 니오 용병대가 판촉 활동을 겸하라는 말이었다. 발데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오는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느슨한 체제를 개혁하여 강한 국가로 성장할 것이다. 니오 용병대의 제식 무장은 그 발판이라고 생각해라. 방랑 상인이나 다름없던 무역도 정리할 것이다. 상인들은 나 국왕 크누트 1세의 이름을 받아 움직일 것이다.”
지금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크누트가 선언했다. 상공인들로 구성된 수송대 사람들은 그걸 듣고 활기를 띤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래를 약속하고 믿음을 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용병들의 가슴에도 불을 붙였다. 불씨 따위가 아니었다. 휘발유를 들이부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목숨을 팔아 돈을 벌어도 내일이 캄캄했던 나날이었다. 용병을 평생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목돈을 번 것 같지만 고향에 돌아가 정착하자니 막막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둠 너머에 무언가가 보였다. 손을 내밀면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남은 어둠은 가슴에 지핀 불로 몰아낼 것이었다.
단 한 사람, 지현만은 다른 이들처럼 몸을 들썩일 수 없었다. 크누트의 변화는 지현이 생각하기에 너무 급했다.
국가를 재정비하는 일은 사회 기간망과 전산화가 끝난 현대 사회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이쪽은 국왕이라는 강한 권력자가 있으니 의사 결정에 소요하는 시간 없이 더 대담한 일을 빠르게 할 수 있지만 그것도 뒤에서 받쳐 줄 게 있을 때 얘기였다.
니오는 농업 기반이 약하고 생산력은 얼추 되더라도 원자재를 수입해야 했다. 기존의 무역 체계에 얹어 가면서 장기적으로 수정해 나가면 모를까 그 체계까지 혁신하겠다면 난이도는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당연하지만 혁신은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럼 그 재화는 어디서 마련할까? 당장 무역으로 얻는 수익이 그걸 진행할 만큼 컸다면 애초에 니오 용병대를 설립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 결국 자금줄은 니오 용병대가 될 것이었다.
니오 용병대의 재정 건실성은 이제야 걸음마를 뗀 수준이었다. 아직 빚이 많고 써야 할 돈도 많았다.
그동안 비용 절감을 위해 용병대가 희생하던 부분들을 정상화해야 했다. 소소하게는 벽난로에 불을 덜 뗀다든지 배식을 줄이는 것부터 크게는 유지비가 많이 드는 기병 육성을 축소했던 것까지.
분위기상 당장 말을 꺼낼 수는 없지만 크누트와 독대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몸집을 불릴 때가 아니라 내실을 다질 때였다.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야 수입원을 다변화하고 경제 규모를 성장시키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현은 국가의 행정은 모른다. 용병대의 경영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지금 용병대에 필요한 건 경영 정상화와 용병대원의 케어라고 생각했다.
“흠, 그렇다면 3년 뒤 장비를 교체할 때 재고품은 외부에 판매하는 걸로 처리하는 것이오?”
“예. 그렇게 해야겠지요.”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새 장비를 개발하더라도 바로 교체는 어려울 거예요. 지금 도입하는 것도 원래는 전군의 장비를 교체하려는 게 아니라 신병에게 지급하고 교체 희망자에 한해서 교체할 생각이었으니까요.”
니오 용병대는 돈을 잘 버는 편이었다. 그래도 갑옷은 턱 하니 사겠다고 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월급으로 갑옷을 사려면 최소한 두어 달 월급을 통째로 털어야 했다. 전장에서 갑옷을 전리품으로 얻거나 포로의 몸값으로 목돈을 벌지 않는 이상 갑옷 교체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입는 갑옷이 노후했더라도 새것으로 덥석 교체할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지현은 그것까지 감안해서 주문 수량을 고민했는데 크누트의 한 마디에 전 용병대원이 신형 갑옷으로 교체할 판이었다.
당연하지만 용병대에는 그럴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용병 개인에게서 돈을 걷자니 그건 강매였다. 그 돈을 지불할 수 없는 병사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현 재무관의 생각도 옳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다른 부대는 지현 재무관의 말대로 교체보다는 여분의 갑옷을 군수품으로 관리하는 식으로 가게. 대신 본부 부대는 앞으로 의뢰를 받을 때 신형 갑주로 무장하고 출격하게. 발데마르, 자네도 예외는 아닐세. 대외 홍보는 중요한 일이야.”
“지현 양, 본부 부대원 전원을 신형 갑주로 무장시킬 수 있겠소?”
‘비용이 으윽…….’
크누트의 명령이 있는 만큼 갑옷 교체는 용병대의 대외 홍보 행사로 봐야 했다. 그렇기에 지현은 장비 일체를 용병대 예산으로 지급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각 부대에 배치하게 될 초도 물량도 비용은 용병대 이름으로 지불해야 했다. 그 갑주를 병사가 구매했을 때 비로소 수입이 발생했다.
지현은 머릿속으로 바쁘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처음에는 각 부대에 100벌씩 배치하고 추가 주문을 받으려고 했다. 본부에 600벌이나 놓는다면 각 부대에 배치할 양을 줄여야 했다. 그래도 예산을 초과할 위험이 있었다.
“라그나르 씨. 이쪽 갑주는 예상 가격이 얼마나 되나요?”
“일전에 보내드린 그 가격보다 생산단가를 더 낮출 수 있었습니다. 용병대원들에겐 원가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기타 보호구를 다 합쳐 한 벌에 1,640제니면 됩니다.”
‘상상 이상으로 저렴해!’
하이틸란트에서 통상 6연쇄 사슬 갑옷에 열처리까지 요구하면 가격이 1,800제니까지 훌쩍 뛰었다. 거기에 철판을 덧대야 하니 2,000제니가 넘는다 하더라도 용납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서면으로 서로 상의할 때 이미 염가로 제공해 주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지현은 상인들이 으레 말하는 ‘밑지고 장사하는 거예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이들은 원가에 갑주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각 부대에 100벌씩 배치하고 본부에 600벌을 배치하면 1,500벌 남짓이니까 대략 가격은 으으, 250만? 그 정도 되겠네. 용병대에 바로 출금해도 되는 현금 한도를 30만 정도로 잡아 놨으니까 착수금으로 25만을 주면……. 아니지, 배송 비용을 빼먹었네.’
지현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지현은 이내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각 부대에 100벌, 본부에 600벌을 주문해서 총 1,500벌을 주문하겠어요. 검과 활은 각 부대에 사람을 파견해서 필요 수량을 확실하게 전해 듣고 여유분까지 추가로 주문할 게요.”
“감사합니다!”
라그나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직공들도 마찬가지였다. 용병대의 주문은 그들의 생활에 숨통을 트여 줄 것이었다.
“선불로 25만 제니어치 금화를 드릴 거예요. 돌아가실 때 갖고 가세요.”
“알겠습니다.”
“제품은 언제 받아 볼 수 있을까요?”
“본토로 돌아가 바로 생산에 착수한다면 왕복 이동 시간을 합쳐서 두 달 정도 걸릴 겁니다.”
“한 달 만에 천 벌 이상을 만들 수 있다고요?”
지현은 장인이 아니기에 갑주 한 벌을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다른 용병들도 놀라는 걸 보니 이곳 기준으로도 상당한 속도인 게 분명했다.
“하하하.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크누트 전하 덕분입니다.”
“내 얼굴에 금칠하기는.”
‘뭘 어떻게 했기에?’
“놀라지 말게. 그냥 흩어져 있던 장인들을 모으고 분업화를 좀 시켰을 뿐이니까. 인력을 효율적으로 다루면 생산력은 자연히 늘어나는 법이지.”
크누트의 말에서 지현은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이질감인지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모호한 감정이었다. 이곳에서 보면 이질적인데 자신에겐 익숙했다.
지현은 퍼뜩 크누트를 바라보았다. 크누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데마르가 둘 사이에 눈빛이 오가는 걸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은 곧 시선을 뗐다.
“그럼 협의는 끝난 것 같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실무자들끼리 나누게. 나는 먼저 일어날 테니.”
“예, 전하.”
크누트가 떠나고 라그나르는 브리건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직접 착용하고 있는 발데마르에게 물어보며 어디를 어떻게 고치는 편이 나은지, 지금 있는 걸 그대로 복제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인지 따위를 찾는 일이었다.
“일단 겨드랑이 쪽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오. 이쪽은 철판 없이 천만 있으니 여기를 당하면 일격에 쓰러질 수도 있겠더군. 신형은 아예 겨드랑이가 비어 있고.”
“그쪽만 사슬을 꿰어서 방어력을 높이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아니면 사슬 보호구를 따로 만들어서 착용하는 것도 좋겠지. 그 편이 만들기도 편하고 정비도 편할 테니.”
“좋은 생각입니다. 기록해 두겠습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찾은 단점이라면 찌르기에는 강하지만 베기에 약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베기에? 왜 그렇지?”
“천에 직접 철판이 붙어 있는 형태다 보니 날카로운 것에 베였을 때 천이 잘리면서 철판과 함께 떨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흠, 실전에서 겪은 일은 없지만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겉감의 소재를 잘 고르고 여러 겹을 겹쳐 만든다면 베기에 저항할 수 있을 테니 개선하기도 쉽겠네.”
“그렇습니다. 질긴 아마포에 능직으로 짜고 거기에 목면을 덧대어 누비면 어느 정도 베이는 걸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자세한 건 실험으로 시행착오를 거쳐야겠지만.”
“역시 가장 큰 장점은 유지 보수가 쉽다는 건데 안감을 덧대어 버리면 그게 어렵지 않겠나?”
“네? 유지 보수를 어떻게 하시기에?”
“당연히 철판을 뽑아낸다네. 안쪽도 면을 누비면 그러기 불편하지 않은가?”
“어, 발데마르 경. 철판이 휘거나 부서졌을 때 교체하는 게 아니라 평시에 철판을 떼어 낸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이렇게.”
발데마르는 즉석에서 자신의 갑옷에서 못을 뽑아 철판을 떼었다. 그걸 본 대장장이들이 일제히 뒤집어졌다.
“발데마르 경, 그, 그 갑옷은 원래 철판을 완전히 망실했을 때만 거기 천을 수선하고 새 철판을 붙이는 겁니다. 일단 보통 사람은 그걸 손으로 뽑지 못합니다. 대장장이들도 장비로 뽑아야 하는 건데…….”
“허허, 그런가? 난 지금까지 정비가 쉬워서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연철로 만든 대갈못을 망치로 때려 박아서 고정한 겁니다. 원래 사람 손으로 빠지면 안 됩니다. 손으로 뺄 수 있으면 적한테 맞을 때도 빠질 만큼 느슨하게 고정됐단 뜻입니다. 단지 발데마르 경이 지나치게, 독보적일 뿐입니다. 세상에 저게 손으로…….”
“크흠. 이거 민망하군.”
발데마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걸 본 힐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웃으며 지현의 어깨를 찔렀다.
“저기 봐요. 저 곰탱이가 또 사람 아닌 걸 드러내고 있네, 지현 양?”
“아, 네? 네, 힐다 씨. 무슨 일이에요?”
“지현 양. 무슨 일 있어요? 회의 끝나자마자 갑자기 넋이 나갔네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발데마르 씨는 역시 힘이 세네요.”
“힘이 센 게 아니라 사람이 아닌 거예요, 저건. 사람의 힘이 아니라니까요.”
지현은 어딘지 얼이 빠진 듯이 웃었다. 자극에 그저 반응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현 양.”
“네.”
“힘든 일 있으면 혼자 앓지 말고 나눠요. 대장도 나도, 하인리히나 리하르트 녀석도 모두 지현 양의 말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우리뿐만 아니라 용병대 누구라도.”
“고마워요. 지금은 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많은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냥, 걱정된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혹시나 싶어서 한 말이에요.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야 해요.”
“네. 고마워요, 힐다 씨.”
지현이 비로소 바로 웃었다. 힐다는 그런 지현의 머리를 쓰다듬고 발데마르 옆으로 가서 말을 거들었다.
* * *
니오인들은 갑옷과 무기를 놓고 난상 토론을 오랫동안 계속했다. 사람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살라에서 나왔다.
지현은 무기를 알지 못하니 대화에서 거의 소외됐다. 틈틈이 하인리히가 훈련에 도움이 될 거라고 옆에서 가르쳐 주고 발데마르가 조언해 주었지만 전체 흐름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식사 도중에도 지현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결심한 지현은 크누트를 찾았다.
“누군가?”
“지현 재무관입니다. 크누트 전하. 드릴…….”
“들어오게.”
왕이라면서 입구에 경계나 경호를 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지현은 직접 문을 두들기고 용건을 말했다. 지현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크누트는 지현을 안으로 들였다.
크누트가 머무는 곳은 발데마르의 방이었다. 지현에게는 꽤나 익숙한 장소였다. 그럼에도 책상 앞에 크누트가 앉아 있으니 지현은 갑자기 모든 게 낯설다고 느꼈다.
“무슨 일로 날 찾았나?”
“저, 전하.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맞춰 보겠네. 흐음, 예를 들자면 이런 게 아닐까? 무슨 지구에서 오셨어요?”
“당신도 역시…….”
“맞아. 반가워.”
크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머리카락이 촛불을 받아 붉은색으로 번들거렸다.
“같은 지구 출신은 아니겠지만, 뭐 어때? 같은 외계 출신이니까.”
지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책상 앞에 서 있던 크누트가 빛살처럼 달려와 지현의 팔을 붙잡았다.
“많이 놀랐지?”
“예, 정말…….”
“일단 좀 앉지. 몸에 힘이 풀린 거 같은데.”
크누트가 지현을 의자까지 부축했다. 지현은 의자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방랑자, 똑같은 이방인이.
일단 찾기는 했지만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간신히 정리한 머릿속이 도로 엉망이 됐다.
“좋아. 같은 외계인이란 건 알겠고, 그럼 다음은 뭘 할까? 오리엔테이션? 워크숍? 서로의 동질감을 좀 더 키워 나가기 위한 자기소개? 난 자기소개가 마음에 드는데.”
발데마르 앞에서도 제법 가벼운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모습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방정맞은 오랜 친구처럼 크누트는 재잘재잘 떠들었다. 지현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물었다.
“당신은, 여기 언제부터?”
“나? 한 10년은 된 것 같군. 그쪽은 이제 석 달 남짓이던가?”
지현의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10년? 10년이라고?
지현도 각오는 했다. 집에 돌아갈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하루 이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걸릴지를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런 지현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10년이란 숫자는 너무 무거웠다.
“내가 왕이 된 것도 대충 그 정도쯤 됐네. 정확한 햇수는 본토의 의원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여기 오고 딱 1년 만에 왕이 됐거든.”
“고향 생각은, 안 들어요?”
“고향 생각? 글쎄. 안 들어. 전혀. 아니, 잠깐. 보드카를 못 마실 때 가끔 생각이 나. 하지만 날 봐. 난 왕이라고. 화려한 궁전도 없고 휘황찬란한 연회도 없지만, 아무튼 왕이야. 돌로 지은 움막에 살아도 40만 명의 생사여탈권을 쥔 왕이란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지.”
“지금에 만족한다는 말인가요?”
“만족 못 할 게 뭐 있어?”
크누트의 말에 지현은 안도했다. 크누트는 돌아가지 못한 게 아니라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이곳에 안주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현은 그런 생각을 멀리 치워 버렸다. 희망을 꺾고 싶지 않았다.
“지현. 너도 꽤 발전한 곳에서 온 거 맞지? 최소한 여기보다 사회과학 기술이 발달한 건 분명해. 회계학 같은 건 꽤나 미래 기술이니까.”
“네. 그런 편이에요.”
“하지만 나만큼은 아닐 거야. 나는 말이지, 기계가 사람을 대체한 곳에서 왔어. 빌어먹을 자본가 놈들이 싸구려 로봇으로 인민들을 갈아치우는 곳에서 말이야.”
크누트는 그렇게 말하며 킬킬 웃었다. 지현은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이미지를 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난 그리 잘사는 놈은 아니었거든. 그렇다고 부모가 날 사랑했냐면, 한 놈은 얼굴도 못 봤고 다른 한 놈은 살아 있는 보드카 절임이었지. 그런 것들이랑 살다 보면 여기가.”
크누트가 자신의 가슴을 쿡 찔렀다. 지현은 자신의 가슴을 옥죈 듯이 아픔을 느꼈다.
“여기가 점차 메말라 버려. 그에 비해 여기는 내가 만족스럽지 못할 게 없어. 모두가 날 우러러봐. 모두가 날 필요로 하지. 재밌는 일이야. 너도 마찬가지일 걸.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해야 충족되는 게 있지. 내 얘기만 너무 했군. 듣고 싶어. 넌 어디서 왔지? 어떻게 살았어?”
“나는…….”
한참 떠들던 크누트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지현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누트와 지현은 입장이 많이 달랐다. 지현은 어느 정도 가산이 있는 부모 밑에서 학대받지 않고 자랐다. 수도에 살아서 불편한 일도 거의 없었고 고등 교육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이수했다.
교육을 마친 이후에 구직도 쉬웠다. 자격증도 있었고 마침 정부에서 기업 활성화를 위해 경영지도사를 대거 활용했으니까.
학업 성취나 자격증처럼 지현의 노력이 빛을 발했지만 지현의 삶은 거의 모든 게 안정적인 가정과 사회의 지원을 받았기에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운도 따랐다. 시대가 지현을 도와준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지현은 크누트에게 완벽하게 이입할 수 없었다. 둘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건 어려웠다. 단지 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만 있었다.
“잘살았군.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해. 좋은 부모, 좋은 환경. 모두가 꿈꾸지만 그걸 손에 쥐고 태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지.”
지현은 자신의 책임도 아닌데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많은 일상의 불편을 겪으며 그런 사실을 체화했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여전히 생각일 뿐이었다.
지현이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도 모든 걸 알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지현은 그런 논리로 자신의 고통을 덜지 못했다.
“그나저나 그쪽은 그렇게까지 발달한 세계는 아니었나 봐. 대충 불기력으로 26세기 중엽? 그 정도쯤 되었겠군.”
“기독력으로 2017년이었어요.”
“재밌는 일이야. 이 무한한 우주 어디를 가건 붓다와 예수는 나온다니까. 이름과 종교의 형태는 다르더라도 항상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나타나지. 여기서는 태양을 섬기는 이상한 형태로 발달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 그걸 지표로 삼을 수 있어.”
“그렇군요. 크누트 씨는…….”
“아, 맞아!”
크누트가 갑자기 지현의 말을 끊었다. 그의 외침에 지현은 움찔하고 놀랐다.
“내 이름 말이야, 본명은 달라. 아 그렇다고 본명으로 불러 달라는 말은 아니야. 그냥 같은 처지니까 알리고 싶었을 뿐이야. 오해는 하지 말고.”
“그럼 본명은 뭔가요?”
“블라디미르. 재밌지? 발데마르랑 같은 이름이야. 발데마르를 내 나라 식으로 읽으면 블라디미르가 되거든.”
크누트는 발데마르와 많은 의미에서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발데마르와 같은 이름이란 건 아이러니였다.
“그렇군요.”
“계속 크누트라고 불러 줘. 이젠 니오인으로 살 거니까. 비슷하게 생겨서 다행이지 뭐야. 이 동네가 원체 느슨해서 흉내 내기도 쉽고.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였지?”
“아니, 크누트 씨는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치고는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혹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경험이 여러 번인가요?”
“뭐? 하하하,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한 번도 아주 낮은 확률이라고.”
“그, 그렇지요?”
“꼭 내가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전에 살던 세계에는 꽤 많은 외계인이 있었거든. 평소에도 흥미가 많아서 귀 기울이던 편이어서 잘 아는 것뿐이야. 나도 항상 다른 세계에 가고 싶었지. 그리고 짜잔, 지금 난 여기 있어.”
크누트의 답변은 지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아는 게 많다면 혹시 돌아가는 방법도 알지 않을까?
크누트는 지현의 세계보다 더 과학 기술이 발전한 세계에서 왔다. 더군다나 평소에 그쪽에 관심이 많았다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테니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오랜만에 얘기해서 즐거웠어. 여기서 딱 두 가지 불만이 있다면 보드카가 없다는 거랑 기억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다는 거였거든. 아, 미안. 방금 만난 사이인데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었지?”
“아니요. 괜찮아요. 같은 처지인 사람이니까요. 서로 기댈 수도 있지요.”
“고마워. 지현은 착한 사람이구나.”
크누트가 씩 웃었다.
“하지만 착하기만 해서는 안 돼. 발데마르가 엄청난 순둥이여서 다행히 무사했던 거지 조금만 냉정한 놈을 만났어도 고생했을 거야. 어쩌면 살아남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발데마르도 평소에나 착하지 전투에 나서면 자비가 없어.”
“그렇군요.”
“특히나 경영 같은 건 말이야, 물론 지현은 전문가니까 내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사람이 냉철하게 잘라 내야 할 때가 많더라고. 나라를 다스려 보니 확실히 알겠어. 이거다 할 때는 망설이면 안 돼. 가로막는 건 치워 버리며 전진해야 한단 말이지.”
“국가 체제 변화도 그런 건가요?”
“맞아! 내가 10년 동안 준비한 야심찬 계획이었어. 아, 정말 지현이 와 줘서 살았단 말이야. 뭘 해 보려고 해도 이게 없어서 안 돼, 저게 없어서 안 돼. 공장 분업화도 시스템은 다 갖췄는데 그걸로 돈을 만들 수 없어서 못 하고 있었거든. 대량생산이 꼭 돈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 갑옷 발주 건은 고마워.”
“네……. 하지만 너무 급한 거 아닌가요?”
“변혁은 빠를수록 좋아. 단박에 바꾸지 못하면 어중간하게 실패할 거야.”
크누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현은 자신의 말로 그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물론 크누트의 방식도 옳은 부분이 있었다. 장기 정책은 중간 예산 변화나 부처 간의 다툼으로 변질되는 일이 왕왕 있었다.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수정해 결국 계획을 성공시키는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난항을 겪다 좌초되는 일도 많았다.
잘되더라도 과정 자체에서 문제가 터질 수도 있었다. 지현의 걱정은 역시 중간에 희생될 이들이었다. 높은 확률로 지현이 몸담고 있는 용병대가 희생자 1호에 오를 것이었고.
“아무튼 그런 이야기는 됐어. 모든 게 잘되고 있잖아. 용병대는 더 좋은 장비를 갖고 본토의 장인들은 돈을 벌지. 그리고 그 돈을 쓰면 돈이 나라 안을 누비는 거야. 경제의 선순환이라고. 나도 아주 못 배운 놈은 아니야.”
확실히 전보다 건전해지는 건 맞았다. 지현의 계획도 저것과 일치했고. 단지 ‘시간’이 문제였다.
단기간에 막대한 자금이 본토로 움직였다. 그 재원을 마련할 용병대가 괴로울 것이었다.
본토는 본토대로 유입된 자본 때문에 통화량 팽창으로 인한 가치 하락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양극화를 가속할 여지도 있었다.
역사가 증명하듯 계층 불화와 같은 사회 불안은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혼란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아무튼 뭐냐, 같은 처지끼리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 친해진 기념으로 뭐든 도와주고 싶은데 부탁할 거 있어?”
“혹시.”
크누트가 먼저 운을 뗐다. 지현은 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크누트라면 혹시라도 알지 않을까 기대를 가지며 망설임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고향에 돌아갈 방법이 있나요?”
지현의 말에 크누트가 싱긋 웃었다. 그걸 본 지현은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없어. 포기해.”
“네?”
“돌아갈 방법은 없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불가능에 한없이 가깝지. 서로 다른 평행 우주를 넘어온 것만 해도 수억 분의 1의 확률이었어. 다시 돌아가는 것도 그만한 확률을 뚫어야 해. 그렇게 낮은 확률을 뚫었어도 본래 자기 세계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지.”
“하지만…….”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람이 있었지? 원래 세계에도.”
“네. 그 사람은…….”
“고슬로또에 두 번 연속으로 당첨된 거야. 몹시 드물지만 없진 않잖아? 그래서 지현은 복권에 두 번 연달아 당첨될 자신 있어?”
“그건…….”
우연에 기대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지현은 맥이 탁 풀렸다. 의자에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크누트가 그런 지현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받아들여. 운명과 싸울 순 없어.”
지현은 아무런 말도 않았다. 크누트는 그런 지현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당장 받아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겠지. 일단 쉬어.”
지현은 비척비척 일어나 발데마르의 방을 떠났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었다.
자고 일어나서도 지현은 여전히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짚으로 채운 침대, 나무로 만든 벽, 면이 거친 책상, 뻣뻣하고 두꺼운 종이, 벽에 걸려 있는 방패까지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현으로부터 현실감을 빼앗아 갔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설령 무엇이 떠오르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돌아갈 방법도 없는데.
용병대에 정착하고 용병대를 정상화하려고 했던 그 모든 노력은 전부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방법을 찾아내려면 재력, 무력,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긴 여정은 결과물을 보기도 전에 어젯밤 지현에게 작별을 고했다. 끝이다. 끝난 것이다.
“지현 재무관님?”
“네, 아디슬 씨.”
“저기, 편지가 왔습니다. 모두 셋인데 하나는 방금 도착했습니다.”
“나머지 둘은요?”
“바쁘셔서 미처 드리질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이리 주세요.”
편지를 받았지만 봉투의 인장을 자를 칼이 없었다. 지현은 별생각 없이 허리띠 주머니에 매달린 단검을 뽑았다.
오랜만에 빛을 본 칼날이 번뜩였다. 몸통에는 ‘까마귀를 마주 보아라’라는 글귀가 있었다. 발데마르에게서 받은 물건이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지현의 사고가 현실로 돌아왔다. 죽음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던 대화가 기억났다.
희망이 꺾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현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죽지 않는 한 희망은 꺾이지 않는다.
“지현 재무관님?”
“일단, 편지부터 읽어 볼게요.”
지현은 첫 번째 편지를 뜯었다. 제국 은행의 마인데르트로부터 온 편지였다.
[친애하는 니오 용병대 재무관 지현 양에게.지현 양의 편지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보조 재무관을 구하신다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습니다만, 지현 양께서 동봉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제국 은행 어느 지부에도 없었습니다. ‘복식부기’라는 것은 저도 남쪽에서 들리는 풍문으로만 접해 보았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국 은행에는 재무를 보는 많은 명석한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잘 가르친다면…….]
지현은 거기까지 읽고 편지를 덮었다.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마주친 게 다시 한 번 희망을 꺾어 버리는 소식이었다.
지현에게 한 달 동안 속성으로 교육 받은, 아직 혼자서 일하는 것도 어려운 용병대 행정병들이 하이틸란트의 이름 있는 재무관보다 나은 상황이었다. 설마 국내 교역망을 확보한 정주 상인들과 은행원들이 복식부기도 모를 줄이야! 농담으로도 못 쓸 말이었다.
‘아니, 아니야. 아직 편지는 두 장이나 더 있어.’
지현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다음 편지를 뜯었다. 이번에는 베겐도르프 상인 조합에서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마인데르트의 것과 대동소이했다.
베겐도르프 내에는 물론이고 그들과 연줄이 있는 어떤 지역의 재무관도 지현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현은 대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정주 상인으로서 상회를 유지하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돈 챙겨서 도망치고 싶어지네.’
지현은 마음을 접고 마지막 편지를 뜯었다. 이번에도 없다고 하면 행정병을 늘리고 회계 장부뿐만 아니라 재무제표 작성까지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편지지는 부들부들한 고급 양피지였다. 보통 양피지는 두껍고 어딘가 손상이 있더라도 그냥 꿰매 쓰는데 비해 이건 최고급 중에 최고급만 선별한 건지 얇고 가볍고 평평하기까지 했다.
‘아, 버디어 콤파니아의 콘타 씨구나.’
니오 본토로 지현의 주문에 따라 온갖 상품을 배달해 주고 있는 상회였다. 현재로서는 니오 용병대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회였다.
[천신과 이윤의 이름으로, 친애하는 지현 재무관과 니오 용병대로 보냅니다.우리는 지현 재무관께서 주문하신 인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한 가지 흠은 지현 재무관께서 보내신 시험 중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라는 것은 우리가 쓰지 않기에 약간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뿐입니다. 재무상태표는 시산표와 기능이 유사하고 순이익은 손익원장으로 구하였으니 같은 체계에 형태만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육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지현 재무관의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성 제오르지오의 수호를 받는 버디아 콤파니아가. 행운을 빕니다.]
지현은 편지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짧은 내용이지만 지현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다 담겨 있었다.
“아디슬 씨.”
“넵, 재무관님.”
“잠시 법관 씨에게 다녀올게요. 자리를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지현은 콘타의 편지를 쥐고 법관을 찾았다. 법관은 마침 발데마르와 함께 있었다.
“아, 발데마르 씨. 그건 뭔가요?”
지현은 발데마르가 쥐고 있는 검은 금속 덩어리를 보고 물었다. 발데마르가 싱긋 웃으며 그걸 펼쳐 보였다. 발데마르의 신체에 꼭 맞도록 만든 니오 용병대의 신형 갑옷이었다.
“주문을 넣기도 전에 내 전용 갑주를 이미 만들었다고 하오. 비용도 크누트 왕이 내주었다고 하니 앞으로는 이걸 입고 다녀야겠소.”
“홍보용으로는 그만이겠네요.”
“그나저나 지현 양은 무슨 일로?”
“버디어 콤파니아에서 답장이 왔어요. 회계사무원을 구했어요. 며칠 직무 교육만 하고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숙련된 사람들로요.”
“그거 좋은 소식이구려. 다만 비용이 조금 걱정인데…….”
“더 큰 수익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그 부분은 지현 양에게 이미 전권을 위임했으니 내가 더 말하진 않겠소. 믿고 맡기겠소.”
“고마워요.”
발데마르는 누비 갑옷 위에 신형 경번갑을 입고 버클을 채웠다. 몸 여기저기를 뒤틀며 움직여 보았지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애초에 철판이 거의 없고 대부분 유연한 사슬이라 방해될 게 없었다.
“그럼 나는 수송대를 배웅하고 오겠소.”
“네. 다녀오세요.”
발데마르를 전송하고 지현은 법관에게 편지 대필을 부탁했다. 요청할 인원은 예산이 빠듯한 탓에 세 명밖에 안 됐다.
한 사람당 월급으로 400제니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 데나리오 금화 한 닢을 지불해야 했다. 힐다 같은 본부 백부장 한 명을 추가로 고용한 거나 다름없는 비용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저렴한 편이었다.
콘타가 니오 용병대의 사정을 봐 주었기에 연봉이 낮으면서도 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 준 것이다. 미리 콘타에게 은혜를 입힌 것이 도움이 되었다.
지현은 편지를 손이 비는 용병에게 맡겼다. 콘타가 편지를 받고 사람을 모아서 이곳으로 보내는 데 못 해도 몇 주나 걸릴 것이었다. 그사이 신입 회계사무원의 직무 교육안을 만들어 놔야겠다고 다짐하는 지현이었다.
한편 발데마르가 지휘하는 50명의 용병들은 수송대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산을 내려갔다. 수송대의 가족들로만 구성된 배웅 부대는 경계보다는 자신의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 사기진작을 위해 발데마르가 지시한 일이었다.
“힐다, 리하르트. 너희는 용병이 천성에 맞아 다행이구나. 특히 힐다는 탄드리와 꼭 닮았어.”
“엄마 딸이니까요.”
“무리하지만 말거라. 다치는 일도 없게 조심하고.”
라그나르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로 힐다의 흉터를 쓸었다. 힐다는 간지러워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피했다.
“가업은 걱정하지 마라. 라그문트가 잇기로 했다.”
“예? 오빠가요?”
“형님이 말임까?”
“그래. 그 녀석은 날 닮아서 전장이랑은 영 어울리지 않았어. 나이도 벌써 서른을 앞두고 있으니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본토로 돌아오겠다고 하는구나.”
“형님이 그런…….”
“원래 라그문트는 철이랑 불을 좋아했어. 어렸을 때야 집에 돈이 없어서 용병이 되긴 했지만 이젠 그만둘 때가 된 거지. 다른 가족들은 전사가 대장장이가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겠다만, 나는 대장장이도 충분히 명예롭다고 생각한다.”
“어떤 용맹한 전사도 칼과 방패 없이 싸울 순 없는 법이지. 대장장이는 존경 받아 마땅해.”
“고마워, 탄드리.”
니오의 문화에서 니오 용병대원이 된다는 건 왕의 근위병이 되는 것만큼이나 명예로운 일이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실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아직 젊은데 은퇴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힐다. 무리해서 집에 돈을 보낼 필요 없다.”
“네, 아버지.”
“사실 너희가 보낸 돈들의 대부분은 모아 놓았단다.”
“예?”
“내 의견이었단다.”
“하지만 엄마…….”
“엄마도 모아 놓은 돈이 꽤 많아. 난 대대로 야를을 섬긴 후스카를 집안이야. 라그나르도 대장장이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밭을 소작 주고 있으니 돈이 부족하진 않아. 너희 손 벌릴 거 없다. 너희는 너희 미래를 생각해야지.”
“네에.”
“안심하렴. 돈 때문에 너희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알았지?”
“알겠어요.”
“알겠슴다.”
다른 가족들의 대화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강이 중요하다, 명예롭게 살아라, 돈 버는 것도 좋지만 너희 자신도 생각해라.
발데마르는 홀로 말을 몰며 그런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본토를 방문했던 것도 꽤 오래 전이었다. 한 번쯤은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크누트가 말을 몰아 발데마르의 옆으로 왔다.
“새 갑옷이 퍽 어울리는군, 발데마르.”
“깜짝 선물은 정말 감사하오.”
“그냥 선물이 아니야. 그걸 입고 활약해 줘야지. 앞으로는 의뢰를 끝내면 의뢰인한테 한 번씩 물어봐. 니오 용병대와 똑같은 무장으로 가신과 사병을 무장시키고 싶진 않은지.”
“허허, 꼭 그러하겠소.”
“그리고 지현 말인데.”
“지현 양에게 무언가 지시할 것이라도?”
“아니. 그건 아니야.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그대가 잘 돌봐 주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발데마르가 침음을 삼켰다. 발데마르는 크누트와 지현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몰랐다. 지현이 발데마르 앞에서 주눅 들거나 절망한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었으니 발데마르는 크누트가 말하는 바를 퍼뜩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현이 향수병으로 고생한다는 건 이미 본부의 태반이 아는 사실이었다. 발데마르는 그걸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슈틸나울트란 말이지. 그냥 외국인도 아니고.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처참한 기분이겠어?”
“이해했소.”
“여기 정착해서 살아야 하니까 잘 달래. 혹시라도 하이틸란트나 일레디온 같은 곳에 가 버리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모시고. 다시 말하지만 그냥 외국인이 아니야. 하물며 스랄 따위도 아니고.”
“그야 말할 것도 아니잖소!”
니오의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가 나오자 발데마르가 펄쩍 뛰었다. 본토에선 원래 니오인이 아닌 사람들 대부분이 노예고 아직도 사고가 굳은 이들은 외국인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잘하란 말이야. 나도 본토 쪽을 단속할 테니까.”
“알겠소. 걱정 마시오.”
“그리고 지현이 외로워할 거 같으니까 되도록 고향 생각 안 나게 잘 배려하고.”
“그건 어려운 주문이오. 생각이란 걸 어떻게 막는단 말이오?”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 좋은 방법도 있고 나쁜 방법도 있지. 나는 좋은 방법을 말하는 거고.”
“그럼 지혜를 빌리고 싶소.”
“일단 지현 주변을 사람들로 꽉 채워. 그건 이미 하고 있으니까 문제없겠지? 그리고 고향 생각이 날 만한 것들을 주변에서 치워 버려.”
“치우라니?”
“말 그대로야. 눈에 보이면 더 생각나는 법이니까 눈에 안 보이게 하라고.”
“얼마 있지도 않은 고향 물건을 없애란 말씀이오?”
“어차피 돌아갈 수 없어. 괴로워하느니 그게 나을 거야.”
“으음…….”
언젠가 돌아갈 거라면 고향의 물건은 큰 힘이 되었다. 발데마르도 일레디온에서 근위병으로 복무한 첫 몇 달간은 향수병으로 괴로웠지만, 고향을 떠나며 받은 친지들의 선물이 그를 달랬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면? 볼수록 고통이 커질 수도 있다는 말은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그럴 수는 없소.”
“당연하지! 갑자기 고향 물건 없애겠다고 하면 욕먹고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천천히 포섭해, 천천히. 스스로 버리고 현실에 적응할 수 있게.”
“알겠소. 내 한 번 지현 양께 넌지시 물어 보겠소.”
“좋아. 그리고 지현이랑 지금 가장 가깝게 지내는 게 누구지?”
“힐다가 가장 가깝소.”
“연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냐는 거라고. 그 힐다라는 친구랑 사귈 것처럼 보여? 가능성이 있어?”
“모르겠소. 난 그런 분야는 완전히 까막눈이라. 누구든 서로 마음에 들면 그렇게 되지 아니하겠소?”
“‘누구든’이 되겠어? 정착시키는 데에는 이유를 만드는 게 최고야. 괜찮은 남자를 찾아서 맺어 주려고 노력이라도 해 봐.”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중매쟁이가 되란 말씀이오? 터무니없소.”
“쯧. 미련한 친구 같으니. 마지막으로 지현이 헛된 곳에 힘 낭비하지 않게 해. 슈틸나울트를 몇 명이나 찾아 봤자 소용없으니까 그런 걸로 더 괴로워하지 않게.”
“으음, 지현 양의 개인 활동까지 제약하라는 말이오?”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이게 다 지현을 위해서야.”
“나는 잘 모르겠소. 노력은 해 보겠소.”
두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말을 몰았다. 산을 거의 내려왔을 무렵 크누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용병대가 좀 안정되면 본토에 한 번 들러. 법관이랑 지현도 데리고.”
“그러하겠소.”
“좋아. 어쩌면 그대도 용병대장에선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와야 할지도 몰라. 장담하고 대장군으로 만들어 주지.”
“그 또한 고려하겠소.”
“고려만 할 게 아니라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지. 그대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왕한테 존경이 없군. 아무튼 다음에 보자고.”
산을 내려온 용병대는 수송대를 배웅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힐다와 리하르트는 부모와 포옹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인원 파악!”
발데마르의 지시에 병사들이 대오를 갖추고 섰다. 힐다가 사람들의 얼굴과 인수를 확인하고 문제없다고 알렸다.
“좋아, 귀환한다.”
“대장님, 후방에서 기수가 접근 중입니다.”
“응?”
막 출발하려는 순간 후위의 병사가 발데마르를 불렀다. 발데마르가 고개를 쳐들고 돌아보니 그의 말대로 말을 탄 사람이 산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용병대 거처가 있는 산은 통행로로는 잘 이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 말을 탄 사람이라면 산을 넘는 것보다 우회하는 편이 훨씬 빠르기에 굳이 산길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벌목공이나 사냥꾼이라면 혼자 말을 몰 리도 없었다. 결국 목적지가 니오 용병대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렇기에 발데마르는 출발을 지시하는 대신 잠시 기다렸다. 수송대는 점점 멀어지고 기수는 점점 다가왔다.
“린다로군.”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오자 발데마르는 상대가 누군지 곧장 알아보았다. 사무소에서 근무 중인 용병대원이었다.
“발데마르 대장님. 마침 잘됐습니다.”
“사무소에 편지라도 왔더냐?”
“아니요. 의뢰입니다.”
“평소처럼 주말에 모아서 보내면 될 일을. 좀 큰 건이더냐?”
“쫀쫀한 사냥 따위가 아닙니다. 제대로 거물이 걸렸어요.”
“흐응?”
린다가 발데마르에게 편지를 건넸다. 봉인을 보니 꽤 지체 높은 가문의 것이었다. 봉인 옆에는 천신교의 상징도 인장으로 찍어 놨다.
“너도 같이 가자. 의뢰인한테 들은 걸 설명해야지.”
“알겠습니다.”
본부로 돌아온 발데마르는 갑옷을 벗고 사무실에 지현과 법관 등 간부진을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먼저 편지를 뜯어서 내용을 읽어 보았다.
광택이 이는 고급 종이에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시작부터 종교 수사가 나오는 걸 본 발데마르는 집게손가락으로 미간을 주물렀다.
의뢰인 본인이 종교인인 건지 종교인에게 대필을 맡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글들은 직유와 은유를 많이 쓰다 보니 읽는 게 피로했다.
“발데마르 씨, 부르셨나요?”
“지현 양, 법관. 필요한 사람은 다 모였구려.”
편지의 중간까지 읽었을 무렵 지현이 들어왔다. 그 뒤로 법관이 따라 들어오는 걸 본 발데마르가 화색을 하며 반겼다.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의뢰인과 편지의 작성자가 누구인지만 겨우 파악했다. 람부르크 백작 부인이 의뢰했고 편지는 성 카타리나 수도회로부터 온 것이었다.
“다 모였으니 린다, 네가 설명해 봐라.”
“예. 람부르크 백작 부인과 성 카타리나 수도회로부터 의뢰입니다. 요구하는 병력은 100명이고 목표는 파데슈타트 성의 방어입니다.”
“파데슈타트 성은 기마 행군을 한다면 이틀거리입니다.”
“가깝군. 하지만 편지에 따르면 먼저 카타리나 수도원에 들러 줬으면 한다고 하는구나.”
“제가 읽어봐도?”
“여기 있네.”
법관이 편지를 받았다. 그는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훑어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겠나?”
“요지는 알겠습니다. 카타리나 원장수녀님께서 직접 작성하셨군요.”
“그래, 그럼 요지가 뭔지 알려 주게.”
“하이네 파데슈타트 백작이 급사했는데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백작 부인께서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영지를 가승계했는데 하이네 백작의 동생인 헬무트 파데슈타트 백작이 백작 부인에게 페데를 걸었습니다.”
하이틸란트 제국에서 페데라는 건 명예, 재산 따위를 침해당했을 때 가하는 사적 제재를 뜻했다. 니오의 결투와 같은 이치로 작동하는 관습이었지만 페데의 범위는 결투보다 훨씬 넓었다. 페데는 개인 간의 전투가 아니라 영지 또는 국가 간의 전쟁까지 포함했다.
“단독 결투를 피하기 위해 백작 부인은 아들과 함께 카타리나 수도회로 몸을 숨겼고 라이네 대주교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대주교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사이 백작 부인과 소공자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헬무트 백작은 출병했고, 이건 다분히 정치적인 움직임이군요.”
“무슨 말인가?”
“라이네 대주교는 홀슈타인 가문 쪽과 연이 닿아 있습니다. 반면에 파데슈타트는 바벤베르크 가문을 섬겼지요. 헬무트 백작은 가문의 원래 기조와는 생각이 다른 모양입니다.”
“선을 바꿨다는 말인가?”
“추측은 가능합니다. 형제에 비해 작은 영지만 승계한 사람이 결투에 능한 기사와 사병 수백을 모은 걸 보면.”
“그래서 형수를 배반하고 조카의 땅을 빼앗겠다는 건가? 용납할 수 없이 한심한 놈이군.”
“이미 고등법원에 제소하는 파발을 보냈고 황제인 바벤베르크 가문도 지지자를 잃을 수는 없으니 분명 중재에 들어갈 겁니다. 라이네 대주교는 미적거리지만 그때가 되면 체니츠 대주교가 움직일 테니 종교 쪽도 문제없을 겁니다. 관건은 시간입니다. 과연 지원이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아주 좋군.”
“그럼 의뢰는 받아들이실 겁니까?”
“카타리나 원장수녀와 의리도 있고 개인적으로 헬무트란 놈도 마음에 안 드는군.”
“법관 씨, 저도 편지를.”
“여기 있습니다.”
지현도 편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 의뢰가 어째서 정당한지, 왜 자신들을 도와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전체 페이지의 절반을 할애했다.
지현은 개인적 친분보다는 이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 명의 사람이 필요하고 얼마나 위험한 전장이며 얼마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지.
그런 내용은 편지 끄트머리에 있었다. 적의 정확한 군세는 알 수 없으나 그 수가 200에 가깝고 대부분 보병이란 사실과 아군은 사병과 징병된 군대를 합쳐 80여 명이 있다는 것이었다.
길면 한 달을 싸워야 하니 의뢰비용은 10만 제니를 약속했다. 한 달이 넘어가면 추가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는 약속도 있었다.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2만 제니를 착수금으로 지급하겠다는 글도 있었다.
후한 조건이었다. 병사들의 월급과 한 달 동안 쓸 보급품 가격 등을 다 합쳤을 때 상당한 이윤이 남는 정도로.
전장의 위험성은 지현이 판단할 게 아니지만 수의 차이를 고려했을 때 절망적인 전투에 투입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니오 용병대가 100명 출격한다면 양측의 수는 비등한 수준이 되었다. 용병대의 무위를 생각하면 비등한 수는 큰 위협이 아닌 것도 같았다.
“지현 양?”
“조건은 좋아요. 비용도 후하고, 계약 기간을 넘어갈 때 추가 비용도 확실하게 명시해 놨어요. 게다가 고등법원에 제소했다니 사실상 전투가 한 달씩이나 이어질 것 같지도 않고요.”
“역시 그렇구려. 받아들이겠소!”
“조금 요청하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이오?”
“발데마르 씨가 직접 나설 건가요?”
“오랜만에 큰 건인 만큼 그럴 것이오.”
“그렇다면 이끌고 나가는 백부대 이외에도 추가로 기병을 일부 데려 가 주세요. 리하르트 씨가 교련하는 부대면 좋겠고요.”
“의뢰는 100명만 요청했소만?”
“적의 규모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어요. 안전을 위해선 비장의 패가 필요해요. 비용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의뢰비 안에서 백부대에 기병 부대를 추가로 운용해도 될 정도로 예산을 짜 드릴 테니까.”
“흠, 지현 양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당연히 받아들이겠소.”
“고마워요.”
“자, 그럼 나와 함께 갈 백부대는 어디로 할까.”
“전 빠지겠습니다.”
아드니가 먼저 손을 들고 말했다. 발데마르가 나가는데 본인까지 본부를 비우기는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힐다와 하인리히는 토너먼트에 나갔던 경험이 있기에 나서지 않았다. 다른 전우들에게 기회를 줄 때였다.
“게다, 네가 좋겠다.”
“영광입니다, 대장님.”
“리하르트, 휴가는 끝났다.”
“그 말씀만 기다렸슴다.”
출전할 부대가 정해졌다. 이번만큼은 지현도 따라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목검을 들고 싸우는 토너먼트도 보기 힘들었는데 진짜 피 튀기는 전장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자리를 파하는 와중에 린다가 지현에게 다가왔다. 그는 의뢰서와 별개로 지현에게 온 편지를 전해 주고 부대를 떠났다.
“지현 양? 무슨 일이오?”
“저한테 편지가 왔네요. 아까 전해 줬으면 됐을 텐데.”
“린다 녀석도 바빴으니 이해해 주시구려. 이번 편지는 누구한테서 온 것이오?”
“글쎄요. 저한테 더 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는데.”
지현은 봉인을 뜯고 편지를 꺼냈다. 필적이 의뢰서와 똑같았다. 카타리나가 보낸 편지였다.
“어?”
의뢰서와 달리 소박하고 소소한 문구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지현은 편지를 읽다가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지현 양?”
“발데마르 씨…….”
“말씀하시오.”
“이번 의뢰, 저도 따라갈게요.”
“으응? 갑자기 무슨 말씀이오?”
“의뢰인인 백작 부인이, 백작 부인이 슈틸나울트의 딸이래요.”
발데마르는 순간 크누트를 떠올렸다. 슈틸나울트를 만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가 생각났지만 머리에서 치웠다.
“토너먼트 때야 열흘 만에 돌아왔지만 이번엔 길게 나갈 것이오. 준비 시간은 이틀뿐이오. 그래도 좋다면 따라와도 좋소.”
“물론이에요.”
“좋소. 그럼 가서 준비하시오.”
“네!”
발데마르는 지현을 내보내고 자신도 나갈 채비를 갖췄다. 단순히 무장을 챙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와 휘하 병장들, 리하르트를 포함해 열두 명의 간부와 함께 필요한 군수물자를 확인해야 했다. 또한 목적지까지 모든 길을 검토하고 어떤 경로로 이동할지 정해야 했다.
겨울 동안 썼던 길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눈이 녹은 진창에 수레가 빠지는 일은 흔하디흔했다. 전군이 정예병인 니오 용병대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여타 군대에선 행군 중 탈진해 낙오하는 병사도 자주 있었다.
정보 수집을 게을리했다 전염병이 퍼진 곳에 발을 들여 전멸한 용병대 이야기는 수 세기에 걸쳐 회자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지휘관의 책무였다.
지현은 지현대로 업무를 정리했다. 아디슬은 지현의 말을 듣고 영혼이 잠시 외출을 나갔지만 빨리 정신을 다잡았다.
“영수증이 중요하다는 건 이제 다 아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저번 같은 일이 또 일어나도 당황하지 말고 찾으면 돼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신임 회계 사무원들이 오기 전까지만 힘내세요. 버디어 쪽에서 편지를 먼저 보낸다고 했으니까 혹시 받으면 저한테 알려 주세요. 바로 돌아올 테니까.”
“옙.”
“회계사가 오면 아디슬 씨 직무도 바뀔 거예요. 그분들이랑 회계 업무도 봐야 하지만 그보다는 제 보조로 빠질 거예요. 제가 틈틈이 작성해 놓은 교안이 있으니까 시간 남을 때마다 보면서 공부하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현은 아디슬에게 말해 놓고 용병대 출전 예산을 짰다. 사람과 말의 식료품, 부싯깃, 땔감, 숙박비, 화살 따위의 소모성 전투 물자 등등을 면밀히 계산해 최소한의 지출로 용병대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야 했다.
여기에는 발데마르와 협업도 필수였다. 어떤 경로로 며칠에 걸려 이동할 것인지, 그 경로 중 어디서 얼마나 머물 것인지를 알아야 정확한 계산이 가능했다.
야숙을 한다면 숙박비가 굳는 대신 부싯깃과 땔감을 더 구매해야 했다.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미리 챙길 식료품의 양도 달라졌다. 베겐도르프 같은 도시가 아닌 이상 주문한 식량을 척척 내놓을 순 없었다.
그나마 다른 상품과 달리 식료품만큼은 큰 사건이 있는 지역이 아닌 이상 하이틸란트 전역에서 비슷한 가격을 유지한다는 게 다행이었다. 영주들도 생각이 있는 만큼 식량 가격은 상당히 통제했다.
서류도 공짜가 아니었다. 예산을 짜고 명령서와 주문서를 작성하고 그걸 인편에 부치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그 모든 과정이 다 돈이었다. 지출이란 건 상품을 구매할 때만 발생하는 게 아니었다.
지현은 대강의 예산 범위를 산정하고 발데마르를 찾았다. 발데마르는 간부진과 상의해서 정한 일정을 지현에게 알려 주었고 필요한 물자를 함께 고민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용병대가 돌아갔다.
* * *
토너먼트 때와 마찬가지로 용병대는 이른 새벽 출발했다. 리하르트와 기병 부대는 정찰을 겸해 더 일찍 출발했다. 지현은 힐다와 하인리히의 배웅을 받으며 말에 올랐다.
“산에서 내려가면 수도원까진 군사 기동 수준으로 행군할 것이오. 지현 양은 아직 승마술이 능하지 못하니 내 옆에 바싹 붙으시오. 슈바르츠는 영리한 녀석이니 지현 양이 손을 떼더라도 바우그와 보조를 맞출 것이오.”
“네!”
“혹여 행군에 지친다면 참지 말고 빨리 말하시오. 지현 양이 탈진하여 낙오하면 더 큰일이 벌어지니.”
“알겠어요.”
눈이 녹으며 안 그래도 좁은 산길이 더 어지러워졌다. 말들은 녹은 눈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사박사박 걸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속도가 더뎠다.
산에서 내려오고 발데마르는 일단 말을 멈췄다. 좁고 긴 열로 이동하던 게다 백부대가 산 아래에서 대오를 갖추어 집결했다. 중심에 보급 마차를 놓고 격자 상으로 선 기병들이 뿔나팔 소리에 맞춰 행군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구보로 간다!”
지현은 획획 지나치는 풍경에 긴장해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고삐를 잡은 손으로 안장 위 손잡이를 꼭 쥐었다. 구보로 달리는 말은 사람의 뜀박질만큼이나 빨랐다. 보급 마차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 평소와 달리 네 마리 말을 연결해 끌었다.
지현은 이런 속도로 오래 주행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진 빨라 봐야 속보 정도로 달렸고 그것도 발데마르와 리하르트의 보조가 있었다.
그렇기에 지현은 슬슬 승마가 쉽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딱 조금 알게 됐을 때가 위험하다는 건 지현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불과 10분이 지나기 전에 지현은 허리와 허벅지가 뻐근한 걸 느꼈다. 그리고 10분이 더 지나자 엉덩이가 다 까진 것처럼 아팠다. 자신도 모르게 자세가 엉거주춤해졌고 이것이 허리의 통증을 가속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허리나 엉덩이뿐만 아니라 등과 어깨까지 욱신욱신 쑤셨다. 자세가 잘못되어서 생긴 문제였지만 본인이 눈치채지 못하는 이상 고칠 수도 없었다.
30분가량을 내리 달린 끝에 부대는 일단의 기병 무리와 만났다. 먼저 출발한 리하르트 기병대의 분견대였다.
“여기가 첫 번째 중계 지점인가?”
“예, 대장님! 앞쪽엔 이상 없습니다.”
“좋아. 일시 휴식!”
발데마르가 휴식을 지시했다. 지현은 말에서 내리려다 순서가 헷갈려 안장에 발이 걸린 채 굴러 떨어질 뻔했다. 옆에 있던 발데마르가 화들짝 놀라며 지현을 받아 주었다.
“괜찮소?”
“으윽, 괜찮아요. 처음 해 본 거라 그렇지 조금만 쉬면…….”
“무리하지 마시구려. 다음 중계 지점까진 마차를 타시오.”
“저는…….”
“마차가 괴롭다는 건 알지만 그 몸으로 말을 모는 것보단 나을 것이오.”
“알겠어요.”
“말을 교대해라. 슈바르츠는 지현 양의 마차에 묶도록.”
“예, 알겠습니다!”
“말들에게 물을 충분히 먹여라. 콩도 조금 먹이고. 에이자, 폴카. 너희도 말을 마차에 묶어라. 지현 양과 함께 타고 지현 양이 너무 힘들어한다 싶으면 열 명을 차출해 분견대로 빠져서 천천히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지현이 탄 마차에 에이자와 폴카가 올랐다. 지현은 에이자가 내민 물통으로 목을 축였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가야 하나요?”
“온 만큼의 길을 다섯 번 정도 더 가야 합니다.”
“알겠어요.”
지현은 하인리히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대로 퍼지는 대신 자리를 잡고 스트레칭을 했다. 몸이 아프고 뻐근할 때 그대로 퍼지면 나중에 더 고생할 것이었다. 지현은 경험에서 배웠다.
“출발한다!”
10여 분의 짧은 휴식을 마치고 부대가 움직였다. 지현은 마차가 속도를 높이며 덜컹거리는 걸 느꼈다.
지현은 멀미 대책으로 마차 앞쪽에 앉았다. 먼 곳을 보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멀미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차의 진동이 몸을 더 쑤시게 했지만 이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고통도 상대적인 건지 처음 마차부터 탔을 때는 이보다 괴로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을 타다 마차로 옮기니 차라리 이게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폴카가 지현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잘도 움직였다.
“조금 힘들지만 버틸 만해요.”
“말을 모는 게 힘드십니까?”
“쉽다고 생각했는데 리하르트 씨가 없으니까 다시 힘드네요.”
“발데마르 대장님을 빼면 리하르트는 우리 부대 최고의 기수입니다. 말들과 교감하는 정도를 생각한다면 대장님보다도 뛰어난 기수일 겁니다. 자신이 직접 몰지 않아도 말을 조종하는 실력자이니.”
“헷, 역시 대단하네요.”
“지현 재무관님. 리하르트가 말을 달래 줬기 때문에 조마가 더 쉬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네?”
“혹시 자세를 잘못 잡고 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세 말인가요. 과연…….”
폴카의 지적에 지현은 자신이 슈바르츠 위에 어떤 자세로 앉아 있었는지 고민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리하르트가 가르칠 때마다 항상 했던 잔소리가 허리를 앞이나 뒤로 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지현이 자세를 틀리게 하면 옆에서 바로 교정해 주었다.
“저도 감히 남을 가르칠 실력은 아니지만 조언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폴카 씨. 배운 걸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기수의 자세가 잘못되면 달리는 말도 피곤했다. 등에 얹은 존재가 엉뚱한 곳에 자꾸 무게를 실으니 당연했다. 그런 생각에 지현은 슈바르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중계 지점에서 제 자세 좀 잡아 줄 수 있을까요?”
“그건 발데마르 대장님께 부탁하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구보로 달리면서 다른 사람까지 지속적으로 살펴볼 여력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 그러네요.”
대화를 하고 있으니 멀미도 조금 덜했다. 지현은 말을 모는 방법에 대해 소소하게 질문하며 마차에 있는 시간을 버텼다. 잠시 뒤에는 에이자도 와서 폴카를 거들었다.
“잠시 휴식!”
또 일단의 기병이 기다리고 있는 중계 지점에 도착했다. 날씨는 좋고 길은 평탄하니 문제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덤불 사이에 숨어 있다 기습해 오는 도적 하나 없이 이따금 지나다니는 여행객과 순례자 정도만 있는 평화로운 길이었다.
발데마르는 우연히 중계 지점에서 만난 여행자에게 동전을 하나 쥐어 주고 정보를 얻었다. 그 여행자는 슈마렌 백작령의 메데바흐에서부터 오는 길이라고 했다. 지금부터 니오 용병대가 싸워야 할 그 백작의 영토였다.
여행자는 자신이 출발할 무렵 자유민 징집이 있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경로에 있던 장원마다 자유민을 징집하고 농노로부터 보급품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징발했다.
여행자는 정확히 징집된 인수를 알지 못했다. 발데마르는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대략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메데바흐 지역은 도시가 아닌 광활한 농경지 장원이었고 농노의 비율이 6할 이상 되는 곳이었다. 당연히 징집이 가능한 자유민 장정도 그만큼 적었다.
걱정되는 건 징집된 군인이 아니었다. 경작지가 넓은 만큼 산물도 풍부하고 당연히 가산도 어느 정도 풍족할 것이었다. 가산이 풍족하면 가신을 많이 거느릴 수 있고 용병을 끌어오기도 쉬웠다.
‘이거 참, 백작 부인이 호걸이길 기대해야겠군.’
일단은 같은 가문이니 양측이 손에 쥔 패는 비등할 것이었다. 중요한 건 어떤 패를 어느 순간 내냐는 것이었다.
“어서 옵셔.”
“먼저 수도원에 홀랑 들어가 버릴 줄 알았더니 여기서 기다렸구나.”
“아무렴 저 혼자 갈 수야 있겠슴까.”
마지막 중계 지점에선 리하르트가 남은 부하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로서 백부대와 기병 부대를 포함해 144명의 부대가 모두 모였다.
“엣, 지현 양도 오셨슴까?”
“네.”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진 않으셨슴까? 지현 양, 아직 구보는 제대로 다 못 배우셨잖슴까.”
“아, 진짜 힘들었어요. 에이자 씨랑 폴카 씨가 도와줘서 살았어요. 지금도 후들후들 떨려요.”
“돌아가면 제대로 갈쳐 드리겠슴다. 슈바르츠 넌 지현 양 모시고 오느라 수고 많았다. 오구 귀여워.”
리하르트가 슈바르츠의 턱을 마구 쓰다듬으며 코를 맞대어 비비는 걸 본 지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수도원까진 이제 금방임다.”
점심 식사도 전인데 벌써 목적지에 다다랐다. 부대가 움직인 거리가 40킬로미터는 족히 된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그 탓에 사람도 말도 지쳤지만.
“자, 점심은 수도원 앞에서 먹는다. 다시 출발!”
“옛!”
성 카타리나 수도회는 수녀와 사제를 비롯해 서원을 맺고 수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입회자까지 합쳐 90여 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한때는 봉쇄 수도원이었지만 기사단으로 거듭나면서 봉쇄를 풀었기에 용병대도 수도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리하르트와 합류한 니오 용병대는 곧 수도회 영토에 들어섰다. 수도원까지는 이제 금방이었다.
어떤 수녀들은 밭에서 파종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화단을 가꿨다. 한눈에 보아도 활기찬 모습이었다.
“베겐도르프에서 오신 분들이시죠?”
“반갑소. 니오 용병대의 발데마르라 하오. 카타리나 원장수녀를 만나러 왔소만.”
“이쪽으로 오세요. 저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수도원 안에 144명의 사람과 같은 수의 말, 그리고 열댓 대의 마차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짐은 모두 수도원 옆에 있는 창고에 내려야 했다. 창고에도 자리가 부족하여 남는 마차와 말들은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말들이 밭으로 들어가면 큰일이니 일부는 남아서 말과 짐을 지키기로 했다. 용병들이 짐을 풀고 말을 묶는 사이 카타리나가 그들을 찾아왔다.
“환영합니다, 형제자매님들. 발데마르 형제님도 어서 오세요.”
“금방 다시 뵙소, 카타리나 원장수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군요. 사람이 많으니 원기회복실에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말씀 나누는 김에 원기회복도 함께하지요. 여러분을 맞이하느라 자매님들이 아침부터 노력했답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만큼 감사하오.”
지현은 원기회복실이 무엇인가 궁금했다. 카타리나의 안내에 따라 들어가니 평범하게 넓은 식당이었다.
리하르트가 옆에서 수도원의 몇몇 내부 구조는 바깥과 다르게 부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화장실은 욕구해결실 같은 식이었다.
지현은 불교에선 화장실을 근심을 더는 곳이라고 부른다는 걸 생각했다. 종교들은 생각이 비슷한 모양이었다.
리하르트를 비롯해 개종한 이들은 요리가 자신의 자리에 올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눈을 감고 기다렸다. 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개종하지 않은 이들은 자유롭게 떠들었다. 카타리나도 그런 용병들을 제지하진 않았다. 발데마르가 주의를 줬지만 소리를 낮추는 정도였다.
“밖에 있는 분들에게도 식사가 제공될 거니 안심하세요.”
“원장수녀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별말씀을요.”
식단은 단출했다. 삶은 콩 한 줌, 수도회의 상징이 찍힌 납작한 빵 한 덩이, 맥주 한 잔, 치즈 한 덩이, 이름 모를 채소 한 뭉치가 전부였다.
개종한 용병들은 동료들이 불만을 토로할까 걱정했지만 그들도 나름 종교 상식은 있었다. 더군다나 수도자들이 힘들여 준비했는데 불평할 정도로 생각이 없는 이들도 아니었다.
“식전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천신님이시여, 하늘에는 당신의 태양과 땅에는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시어 우리에게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진실로 그러하소서.”
기도 이후부터 종교인들은 말 한 마디 없이 식사를 했다. 용병들도 그 분위기에 감화되어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했다.
지현에게는 오랜만에 음식 때문에 고생한 식사였다. 수도자들은 미식을 금하는지 삶은 콩은 조미 없이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비린 맛이 났고 빵은 단단해서 찢어지는 게 아니라 부러졌으며 채소는 흙처럼 썼다. 그야말로 지구의 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유일한 위안은 한 잔의 맥주였다. 맥주만큼은 밖에서 흔히 마실 수 있는 시큼한 맛이 아니라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났다. 대체 이런 맥주를 빚는 이들이 왜 이런 요리를 먹고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수녀들이 빈 그릇을 치웠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수녀는 카타리나 혼자만 남았다.
“식사가 입에 맞았을지 걱정이군요. 우리는 그레고리오 규칙서를 일부 따르다 보니 노동과 검소를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어서요.”
“기사 훈련도 병행하시는 분들이 이 식단으로 생활하신다는 게 놀랍소.”
“그렇기에 ‘일부’만 따르는 거지요.”
카타리나가 싱긋 웃었다. 잠시 뒤 한 모자가 수녀의 안내를 받아 식당에 들어왔다. 카타리나가 소개하기 전에 여인이 먼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야드가르 ‘마리아’ 파데슈타트 폰 람부르크 백작 부인이네. 이 아이는 내 아들이자 파데슈타트의 적자인 프리츠 파데슈타트라네.”
야드가르는 하이틸란트인보다 피부의 색조가 높고 이목구비도 이국적으로 생긴 여인이었다. 큰 차이는 없고 자세히 살펴봐야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지만 그 미약한 차이가 독특한 기품을 만들어 냈다.
프리츠는 어미의 가슴께에 겨우 닿는 어린아이였다. 그는 낯선 이들이 두려운지 야드가르의 치맛자락을 잡고 그 뒤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반갑소. 니오 용병대장인 잉게마르의 아들 발데마르요.”
“급한 요청이었음에도 흔쾌히 받아 주어서 고맙네.”
“계약 조건도 후하니 받지 못할 것도 없었소.”
“그럼 자세한 내용을 상의하지.”
야드가르가 자리에 앉았다. 그와 마주보는 자리에 발데마르와 게다, 지현이 앉았다.
야드가르는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중에도 가신들을 움직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적의 정확한 규모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적들이 파데슈타트 본성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네. 적의 집결지로 추측하는 곳은 뒤카셀, 몰트보른, 델벅 이렇게 세 곳이고.”
야드가르가 지도를 펼치며 지팡이로 세 군데를 지적했다. 소로가 아닌 가도가 나 있으며 가도가 서로 교차해 병력과 물자를 유통하기 용이한 지역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헬무트의 병력은 기사 열아홉에 사병 100여 명이었으니 실제로 여기에 올 수 있는 병력은 그중 절반 미만일 터.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자유민을 징병했냐는 거네.”
“헬무트 백작의 경제력 수준을 감안한다면 어떻소? 용병은?”
“믿을 만한 정보로는 그쪽도 100여 명의 용병을 고용했다네. 게르빈 용병대야.”
“나름 강군을 고용했군.”
“빌레바덴 지역에서야 유명하지. 하지만 니오 용병대를 믿네.”
“크하하. 믿으셔도 좋소. 게르빈 녀석들과 값도 실력도 비교가 안 된다는 걸 보여 드릴 테니.”
“좋아. 나는 파데슈타트에서 공성전을 벌일 마음 따위는 없다네.”
“슬슬 파종기이니 농성으로 시간을 뺏길 수 없을 터. 그 마음 이해하오.”
“얘기가 잘 통하니 좋군. 우리 또한 영지 곳곳에 소집령을 내렸네. 기사들이 병력을 이끌고 집결 중이지. 우리의 병력은 여기, 잘츠코넨에서 집결할 걸세.”
야드가르는 발데마르가 기대한 것보다 더 호걸이었다. 지성이 뛰어나다거나 학식이 풍부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타고난 지도자였고 지휘관이었다.
“세작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으니 적의 집결지를 알아내는 것도 금방이네. 적이 어디에 모이는지만 알 수 있다면 그 자리를 선점해서 유리한 전투를 이끌 수도 있겠지.”
“훌륭하오! 반대로 적의 세작이 아군에 침입해 있을 가능성은?”
“물론 있지. 그렇기 때문에 집결지를 영지의 후방인 잘츠코넨으로 정한 거네. 기습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카타리나 수도회 안에는 세작이 있을 수 없네. 이곳 자매님들이 나를 돈 따위에 팔 리도 없으니.”
“알겠소. 그렇다면 우리의 임무는?”
“니오 용병대의 기동력과 맹렬한 공격성을 믿고 맡기네. 적 본대의 경로를 틀어막고 지휘 체계를 흔들게. 지휘관이 도착하지 않아 혼란에 빠진 적 세력을 결집한 람부르크의 힘으로 소탕할 걸세.”
‘호걸도 이런 호걸이 따로 없구나. 죽은 하이네 백작은 복 받은 사람이었군.’
“적은 나를 얕보고 있네. 보호해 줄 사람을 잃은 여자, 도망친 겁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군을 움직이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네. 이쪽 군을 완전히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어. 하지만 그게 착각이란 건 제 상처로 깨달을 걸세.”
“오늘 백작 부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었소.”
“나야 말로 영광이네. 그대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 아니겠는가. 이번에도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주길 바라네.”
“믿고 맡겨만 주시오.”
“출격 전까지는 수도회 영역 안에서 숙영하게. 적들에게 정보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야.”
“원장수녀께서 허가해 주신다면 우리도 그러고 싶소.”
“저야 물론 허락한답니다. 갈리스토 주교님도 허가하셨어요.”
“고맙소.”
용병들은 숙영지를 건설하러 떠났다. 리하르트는 성당에서 기도하고 가겠다며 수도원 안의 성당을 향했다.
발데마르도 지휘를 위해 떠났지만 지현은 남았다. 야드가르와 대화하고 싶었다.
“마리아 자매님. 이분이 바로 니오 용병대의 재무관인 지현 자매님이랍니다.”
네 사람만 남자 카타리나가 지현을 소개했다. 야드가르는 지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는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는 많이 다르시군요.”
“모친께선, 슈틸나울트셨다고요?”
“네. 내 이름을 들으면 아시겠지만 하이틸란트의 보통 이름과는 다르지요.”
“네. 생김새도 조금 이국적이시네요.”
“어머니도 크게 다른 생김새는 아니셨어요. 그에 비해 지-현 양은 생김새가 확 다르시네요.”
“모친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그분은, 여기서 돌아가셨나요?”
야드가르가 자신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주름이 잡히도록 꽉 쥐었다.
“아니요. 어머니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에요. 저보다는 카타리나 원장수녀님이 더 잘 아실 테지요.”
“그럼 마리아 자매님이 태어나서 자라기까지의 이야기는 제가 대신하지요.”
야드가르의 모친은 이름이 여러 개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의 민족 전통에 따라 지은 이름, 그가 사는 국가가 법에 의해 강요한 이름이 있었고 하이틸란트에 떨어져서는 주변 사람들과 동화되기 위해 지은 이름이 있었다. 수도회에 들어와 서원을 한 뒤 세례명을 받았으니 이름이 총 네 개나 되었다.
“우리에게는 본명을 말해 주었지요. 로샤나크. 다른 이름은 왕 리밍. 지현 양과 마찬가지로 성을 앞에 놓고 이름이 뒤에 있는 조어였지요. 발음을 정확히 할 때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그때 연습한 덕에 지금 지현 양의 이름도 발음이 비슷하게 나지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지현은 로샤나크의 또 다른 이름을 듣고 그가 어디 출신인지 짐작했다. 지현과 다른 우주에서 왔겠지만 거기에 대응하는 나라가 어딘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우리와 만나기 전까지는 삯바느질을 해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손재주가 비상한 자매님이었어요. 마을 주민들도 로샤나크의 솜씨에 금방 마음을 열고 일원으로 받아 주었다더군요.”
갑자기 모르는 세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맨몸으로 던져졌지만 로샤나크는 꺾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지인이라고 배척당했고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위험한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지만 결국 마을에 안착해 그들과 함께 살았다. 언어의 장벽이 없다는 게 그를 도왔다.
시간이 흘러 로샤나크는 자유민과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다. 서서히 원래 세계를 잊고 행복을 찾아갔다.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대공위 시기가 길어지며 군대는 점점 흉포해졌고 그 결과 로샤나크의 마을에도 전화가 들이닥쳤다.
먼저 장정들이 징병 당해 마을에서 떠났다. 그리고 약탈에 눈이 돌아간 용병들이 들이닥쳤다.
미처 피난을 가거나 영주의 군대가 지원 올 틈도 없었다. 약탈과 폭력이 있었다. 영주의 군대는 한발 늦게 도착해 용병들은 몰아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신관인 마르코가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로샤나크는 간신히 찾았던 행복을 모두 잃은 뒤였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했던 주민들은 모두 죽거나 크게 다쳤고 군대와 함께 온 남편은 만신창이가 된 로샤나크를 보고 광분해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죽었다. 다시 모든 걸 잃었다.
마르코는 그런 로샤나크를 구조해 수도원에서 보호했다. 카타리나는 당시 로샤나크가 야드가르를 유산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고 전했다.
카타리나를 비롯해 수도원 수녀들의 헌신적인 간호 끝에 로샤나크는 무사히 야드가르를 낳았다. 로샤나크는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고 마침내 수도회 생활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고자 일어섰다.
“참 강인한 사람이었어요. 마리아 자매님도 그런 로샤나크를 쏙 빼닮았지요.”
그 후 10년간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로샤나크는 기력을 회복하고 수도회 생활에 적응했다. 수녀들은 로샤나크를, 서로를 친자매처럼 대했다. 야드가르 역시 수도회 사람들이 함께 키웠다. 야드가르에게 있어 카타리나를 비롯한 그 시기의 수녀들은 모두 어머니라고 할 수 있었다.
“카타리나 자매님은 어머니께서 당시 기력을 회복했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따금 너무나 슬픈 얼굴을 보여 주곤 하셨지요. 특히 고향을 말씀하실 때는…….”
로샤나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야드가르에게 고향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야드가르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잔뜩 있었다.
예를 들자면 로샤나크의 세계에는 자동차라는 탈것이 있는데 이건 말이 끌지 않아도 혼자 달릴 수 있는 마차라고 했다. 또는 멀리 떨어진 사람이 한 말을 실시간으로 전달해 주는 라디오라는 물건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야기는 지현도 흥미롭게 들었다. 로샤나크는 산업화의 단계를 넘어선 시대에서 넘어온 걸로 보였다.
당시 어렸던 야드가르는 모친이 왜 자꾸 돌아가지도 못하는 고향 이야기를 해 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로샤나크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로샤나크는 많은 걸 잃은 사람이었다. 이 세계에서 간신히 만든 행복조차 잃은 그가 고향을 그리워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딸의 이름을 ‘기억’이란 뜻으로 지은 것도 그런 이유였을지 몰랐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니께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아무런 말씀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로샤나크는 그렇게 말도 없이 어디론가 떠날 사람이 아니었어요. 하물며 수도원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나갈 수 있는 공간도 아니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천신께서 로샤나크를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하셨다고 믿어요.”
야드가르가 미소 지었다. 어딘가 처연한 미소였다.
“그렇다면 천신께서는 짓궂은 분이시네요. 어미가 이제 겨우 열 살 된 딸도 챙길 틈 없이 데려가 버리시다니.”
“그럼 저기, 백작님은…….”
“편하게 부르세요. 어머니의 고향에서 오셨으니까요. 나도 귀족 말투는 지긋지긋하고요.”
“고마워요. 저기, 야드가르 씨.”
“네.”
사실 로샤나크와 지현은 다른 세계 출신일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야 다 같은 외계인일 테지만.
지현은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지현을 만난 것으로 야드가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식을 얻었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기에 굳이 그걸 깰 필요는 없었다.
“어머님께선, 아무런 징후나 언급도 없으셨던 건가요?”
“네. 그야말로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흔적도 없이 당신의 방에서 사라졌지요. 누구도 어떻게 된 일인지 본 사람은 없었어요.”
“그렇군요.”
이번에도 단서는 없었다. 지현은 실망한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이후로 남편을 만나기 전까진 수녀로 살다가 남편을 만나서 환속하고 백작 부인이 됐지요. 이래저래 고충은 많았지만……. 지현 양의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고향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모친께 들은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거예요.”
“괜찮아요. 그래도 듣고 싶어요.”
지현은 최대한 이곳 사람들이 혼란을 겪지 않을 수준에서 자신의 세계를 설명했다. 여전히 괴리가 크긴 하지만 야드가르는 지현의 말을 경청했다. 카타리나도 몹시 흥미롭다는 듯이 지현의 말을 들었다.
지현은 설명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것을 말했다. 지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야드가르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어머니의 세계는 내게 직접 닿아 있지 않아요. 거기에 그리움이나 향수를 느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어지더군요. 호기심 때문에 무리하게 불렀지만 흔쾌히 받아 주어서 고마웠어요. 지현 양.”
“별말씀을요. 저도 모친의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어요.”
“그래요. 이제부터 다시 파데슈타트 백작 부인으로 돌아가야지요. 남편이 내게 남긴 것들을 지키려면.”
“남편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서로 사랑했지요.”
“수도원 바깥도 모르던 아이가 환속을 택할 정도로 열렬하게 사랑했지요. 마음을 여는 데 1년이나 걸렸지만요.”
“카타리나 수녀님도 참. 놀리지 마세요.”
“사실이잖아요, 마리아 자매님. 인근 영토를 다스리는 백작이 굳이 매 주일마다 대성당도 아닌 수도회 성당을 찾아왔는걸요. 그럼에도 마리아 자매님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결코 수도원 안에 들어오진 않았지요. 여느 대귀족이라면 수도원까지 들어오는 건 물론 선물 공세를 퍼부었을 거랍니다. 나도 젊었을 적에는 여러 귀족들이 구애해 와서 잘 안답니다. 참 좋은 사람이었지요.”
사위 자랑하듯 카타리나가 옛 이야기를 꺼냈다. 야드가르는 웃으면서도 눈시울을 붉혔다. 야드가르의 눈을 본 카타리나가 손수건을 꺼냈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군요. 옛 이야기를 이렇게…….”
“아니요, 수녀님. 이것도 이겨 내야지요.”
로샤나크도 끊임없는 상실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야드가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려서 모친을 잃었고 지금은 바로 얼마 전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이다. 대를 이은 상실의 연쇄에 타자인 지현마저 가슴이 아팠다.
“힘내세요.”
지현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야드가르의 손을 꼭 잡았다. 지현의 격려에 야드가르 역시 지현의 손등을 맞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대화를 마친 야드가르는 새 정보를 수집해 온 가신과 접선하러 떠났다. 지현은 한창 숙영지를 건설 중인 용병대로 복귀했다.
“지현 양. 유익한 대화였소?”
“네. 따라오길 잘한 거 같아요.”
“그것 참 다행이구려.”
지현은 발데마르에게 거짓말을 했다. 로샤나크가 사라진 건 알았지만 실제로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또 다른 세상에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 번 일어나는 것도 낮은 확률이라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었다. 지현은 희망보단 두려움이 왈칵 치밀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현이 니오 용병대를 만난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로샤나크처럼 허허벌판에 떨어져서 무일푼의 무적자 신세로 떠돌아야 했다면,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로샤나크는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1년이 걸렸다. 지현은 그나마 니오 용병대가 당장 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빠르게 섞일 수 있었다.
규모가 작은 용병대였거나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면 지현이 능력을 발휘하는 건 고사하고 지현의 말을 듣기나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어딘가에 안착한다 하더라도 무력이 부족하면 전쟁에 휘말렸을 때 끔찍한 꼴을 겪을 수도 있었다. 지현은 그런 생각에 속으로 떨었다.
만약 로샤나크가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또 다른 우주로 날아가 버린 거라면? 지현도 그런 일을 겪는다면?
다음에도 운이 좋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더 무서운 건 그게 지현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일종의 자연재해 같은 현상이란 사실이었다.
“지현 양?”
지현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발데마르는 관찰력이 뛰어난 건지 야생의 감인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지현 양, 괜찮으시오?”
“네. 완전 괜찮아요. 왜 그러세요?”
지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발데마르에게 싱긋 미소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발데마르는 그런 지현을 보고 헛기침했다.
“늘 말씀드렸다시피 함께이기에 우리는 더 강해진다오. 설령 내가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함께 고민하면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누면 마음의 짐만큼은 덜지 않겠소? 그러니 그, 무엇이든 앞으로 걱정거리가 생긴다면 의지하셔도 좋소. 언제든지 말이오.”
언제나 발데마르는 지현을 다그치지 않았다. 캐묻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지현은 발데마르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모든 걸 상담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발데마르 씨. 앞으로 걱정되는 게 있으면 꼭 상담할게요.”
“알겠소.”
숙영지를 다 지은 니오 용병대는 야드가르의 가신이 가져온 최신 정보를 토대로 적의 수와 위치를 가늠했다. 군략이니 정략 같은 건 지현의 영역 밖이었기에 지현은 회의 중인 용병대를 뒤로하고 야드가르를 찾았다.
생각해보니 아직 계약금을 받지 못했다. 야드가르에게 계약금 이야기를 꺼내자 야드가르도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인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방을 찾았다.
“고트 금화 125개예요. 세어 보아도 좋아요.”
“네.”
고트 금화는 하이틸란트 제국에서 조폐하는 금화였다. 다른 금화와 달리 제니 동전과 교환비가 고정되어 있기에 계산이 편했다. 1고트 금화가 160제니였으니 125고트 금화면 정확하게 2만 제니였다.
“계약서는 여기 있어요. 니오 용병대 100명을 한 달 간 고용한다는 조건으로 가져왔어요. 비용은 10만 제니, 계약금은 수령했으니 여기에 서명하시고, 아 인장이 있으면 그걸로 찍으시면 돼요.”
지현은 계약 절차에 따라 계약서를 나눠 가지고 계약금을 수령했다. 일을 하고 있으면 걱정이 가셨다.
두려움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올 무렵 지현은 어떤 낙관론자의 말을 떠올렸다. 걱정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게 낫다고 했다. 고민은 마음의 힘을 쓰는 행위인데 노력해도 결국 해결할 수 없으니 투입되는 힘은 무한대로 커지고 그 결과 자기 파괴적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걸 안다고 고칠 수 있는 거면 좋겠는데 말이지.’
생각이란 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더 뚜렷하게 떠올린다. 지현은 그런 모순에 갇힌 자신을 돌아보고 자조했다.
외계인들은 하나하나가 예외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희귀한 존재였다. 당장 지현 자신과 로샤나크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고 크누트 또한 그랬다.
세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보이질 않았다. 각자가 원래 속해 있던 세상마저도 공통점이란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법칙을 찾으려고 하니 걱정만 늘어나는 거였다.
지현은 차라리 일거리를 생각하기로 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걱정할 문제는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마침 크누트가 숙제 거리를 떠안겼으니 생각을 집중해야 할 일은 넘쳤다.
‘용병대 남은 현금하고 단기 예산안 상황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도 그랬다. 수를 생각하는 동안만큼은 머리가 맑아지고 고민이 사라졌다. 언제나 자본과 지표는 지현의 모든 능력을 활성화시키고 모든 능력을 집중시켰다.
지현은 걷는 내내 갑주의 잔금과 크누트가 말한 니오 본토의 철광 개발에 들어갈 재원 등을 고심했다. 거기에 더해 아직도 산적해 있는 용병대의 부채 비중을 줄일 방법도 생각했다. 발데마르는 나갔다 돌아온 지현이 무언가에 골몰하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장님?”
“엉? 아무 것도 아니다. 몰트보른 쪽은 그렇게 하고, 델벅으로 움직인다면 경로는 어디로 가지?”
“이쪽의 숲을 우회하는 것보다는 여기를 질러가는 편이 속도는 더 빠릅니다. 하지만 적에게 우리의 이동이 발각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적에게 정보가 전달되는 것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되겠지만 그것도 적 본대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에 따라 다르겠군. 최선은 여기서 막는 거고 그게 안 된다면 이곳을 선점해야겠지.”
발데마르는 다시 시선을 지도로 옮겼다. 폭풍에 대비해 밭에 물길을 파는 농부처럼, 용병들도 준비했다. 전쟁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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