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53
정도마신 152화
사완악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당신들을 도와주고 싶지는 않아.”
회의실에 모인 각 문파의 대표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크게 마음을 먹고 자존심을 굽히며 무릎까지 꿇었는데, 이건 그야말로 농락이나 다름없었다.
수장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완악을 노려봤다.
그런데 이때, 사완악은 그들의 표정을 읽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사 소협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정파 무림의 많은 인재와 각 문파의 뛰어난 제자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 문파의 존망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자존심을 굽히셔야 합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깜짝 놀라 현암 대사를 쳐다봤는데, 현암도 놀란 듯 사완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완악이 중얼거린 말은 조금 전, 현암 대사가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보낸 전음이었기 때문이다.
전음을 보내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 내용을 엿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무공의 고하(高下)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현 강호에서 그런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었다.
물론 이것은 사완악이 사령문에서 익힌 주술 중 하나였다.
사완악은 현암 대사의 입이 소리 없이 달싹이는 것을 본 순간, 바로 이 주문을 사용해 그의 전음 내용을 엿들었다.
사완악은 당황스러운 표정의 문파 대표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서 사과했다면 받아줬겠지만…… 이거야 원, 지들 문파 이득 챙기자고 억지로 무릎을 꿇으니 마음이 동할 리가 있나?”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무당파의 장문인, 태극신검(太極神劍) 상현 진인이 말했다.
“소협이 우리를 돕는다 해도 마교와의 전쟁이 쉽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소협이 나서지 않는다면 무림은 훨씬 더 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소. 그 희생에는 우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있겠지만, 다른 중소문파의 젊은이들도 많을 것이오. 소협은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결국 보고만 있겠다는 말이오?”
이어서 그는 시선을 살짝 돌려 사완악 옆의 설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유문의 문주께서도 같은 생각이시오?”
설린은 갑작스러운 지목에 무당파의 장문인과 눈을 마주치고는 움찔했다.
상현 진인은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무림을 위해서 사완악의 생각을 돌리라고.
물론 설린 역시 사완악이 어차피 마교와 싸울 것이라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 힘을 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린은 조용히 답했다.
“정유문은 사완악 공자님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상현 진인이 바로 말했다.
“설영충 대협이었다면 다른 답을 하셨을 것이오.”
“…….”
설린은 사조의 이름이 나오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사완악의 혀를 차는 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쯧쯧쯧. 이게 문제라니까? 수련은 게을리하고 책상에 앉아 입만 나불대니 도사 주제에 잔머리만 느는 거야.”
상현 진인이 사완악을 노려보며 물었다.
“나보고 한 말이오?”
사완악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지금도 어떻게든 우리 문주님을 압박해서 내 대답을 바꾸려 하잖아.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당신들을 도와 마교와 싸워 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황금 이천 냥.”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사완악을 바라봤다.
사완악이 말했다.
“너희도 너희 문파의 이득을 위해 나를 써먹으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 나도 무릎 꿇은 사과가 아니라 나한테 이득이 되는 걸 받아야겠어. 황금 이천 냥이 조건이야. 아, 물론 각 문파당.”
수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금 이천 냥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아니, 웬만한 상단이나 전장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물론 유서 깊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조금씩 모은다면 마련할 수 있는 정도이기는 했다.
하지만 각 문파당 이천 냥이라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이니 삼만 냥이 된다.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임시맹주 연천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너무 무리한 금액이오…… 황금 이천 냥만 해도 정도맹 일 년 예산을 뛰어넘는 돈인데…… 삼만 냥을 어떻게 마련하라는 말이오?”
사완악도 그 말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에 마련하기는 무리겠지. 기한은 오 년. 마교와의 싸움이 끝난 후로부터 오 년 안에 갚는 것으로 하지.”
“오 년……!”
“그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이야. 싫음 말고.”
수장들이 서로를 마주 봤다.
황금 삼만 냥.
그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싶었지만, 사완악이 전음을 엿들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회의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연천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소. 황금 삼만 냥. 대신 마교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하는 것이 조건이고, 추후에 금액이 더 이상 늘어나서는 아니 되오.”
사완악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다고.”
‘양심은 개뿔! 삼만 냥이 뉘 집 개 이름이냐!’
각 문파의 수장들은 그리 외치고 싶었지만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 *
안휘성의 성도 합비(合肥).
동비(東肥)천과 서비(西肥)천이 합류했다고 하여 합비라 명명된 이곳은, 과거 위나라 조조가 군사훈련을 하고 조조의 대장 장료(張遼)가 팔백의 병사로 손권의 십만 대군을 격퇴한 전장인 소요진(逍遙津)이 있는 땅이었다.
그만큼 평야가 넓고 따뜻한 기후를 지닌 도시 합비.
그리고 당대에는 이 합비에 중원의 무림세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원이 있었으니, 바로 남궁세가의 장원이었다.
하지만 그 남궁세가 장원의 문은 현재 굳게 닫혀 있었다.
정유문에서 사완악과 싸워 큰 타격을 입은 남궁세가는 봉문(封門)과 다름없을 정도로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이잉-!
굳게 닫힌 장원으로 무심한 밤바람만이 드나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남궁세가 장원 앞에 사오십 명의 무인이 은밀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회색 무복을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석 삼(三)자와 비슷한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같은 길이와 모양의 검을 차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는 한 중년의 사내.
그는 다른 무사들과 달리 회색에 적색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있어 특별한 신분임을 알 수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남궁세가의 정문에서 현판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시작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년 사내의 좌우에 있던 사내 네 명이 땅을 박차고 훌쩍 도약하여 벽면을 밟으며 남궁세가의 담장을 훌쩍 넘었다.
그러고 잠시 후, 장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사오십 명의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신법을 전개하며, 마치 밀물이 밀려오듯 남궁세가의 장원으로 들어갔다.
창창창창창!
그들의 발검(拔劍) 소리가 남궁세가의 적막한 고요를 깨뜨렸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침입자다! 크악!”
야간 순행을 돌던 두 사람은 간신히 소리를 지른 후 비명을 터뜨렸다.
그들 역시 남궁세가의 무인이었지만, 회색 무복을 입은 사내들의 쾌속무비한 검초식에 제대로 된 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행이라면 그들의 음성이 침소에 든 남궁세가 사람들의 귓가에 똑똑히 전달되었다는 것.
“무슨 일이냐!”
남궁세가의 장로 하나가 검을 들고 뛰쳐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뎅뎅뎅뎅!
세가 내에 위급한 일이 생겼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록 정유문에서의 사건으로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남궁세가는 오대세가의 수장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남궁세가의 고수들은 누가 감히 남궁세가에 침입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신속하게 검을 들고 마당으로 집결했다.
특히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창궁검호대는 이미 언제든 적과 싸울 수 있는 대열을 만들었다.
사완악은 남궁세가와의 싸움에서 가주 남궁조와 그의 동생 남궁우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큰 중상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창궁검호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당당한 위세를 내뿜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주, 무애신검 남궁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수십 명의 침입자와 그 선두에 서 있는 중년 사내를 바라보며 위엄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웬 놈들이냐?”
회색에 적색 무늬가 섞인 무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말했다.
“나는 귀검마가(鬼劍魔家)의 가주, 독진고다.”
“귀검마가?”
남궁조는 생소한 이름에 의아함이 일었다.
독진고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담히 다음 말을 내뱉었다.
“교주님의 명으로 너희 남궁세가의 모든 종자들을 말살하러 왔다.”
“교주님?”
남궁조는 그 호칭에 빠르게 생각에 잠겼다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설마 마교의 놈들인가?”
독진고는 부정하지 않으며 답했다.
“강호에서 가장 검술이 뛰어난 문파로 무당파와 화산파, 그리고 남궁세가를 꼽더군. 그 남궁세가의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 순간, 무애신검 남궁조와 참혼중검 남궁우를 비롯한 모든 남궁세가의 고수들은 가슴에서 분노가 일었다.
얼마 전, 사완악 한 사람에게 패배한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제는 마교의 놈들이 대놓고 담장을 넘어와 검을 겨누다니.
오대세가의 수장이라는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남궁세가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정말 아버님을 볼 면목이 없구나. 말살? 감히……!”
남궁조와 남궁우 형제의 몸에서 일순 거대한 기운이 일어났다.
독진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애신검과 참혼중검이 내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하. 재밌군. 과연 남궁세가인가?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겠구나.”
“닥쳐라! 오늘 남궁세가의 담장을 넘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무엇하냐? 저들을 모두 죽여라!”
독진고의 명이 떨어지자.
회색 무복의 무인들은 일말의 지체함도 없이 그대로 신법을 전개하며 검을 휘둘렀다.
“창궁검호대는 검진을 펼쳐라!”
양측의 무사들이 서로 격돌했다.
사방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따갑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끄악!”
“컥!”
“윽!”
비명은 한쪽 진영에서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이들의 검술은……!’
남궁조와 남궁우, 그리고 남궁세가의 장로들은 모두 깜짝 놀라 안색이 굳어졌다.
귀검마가 무사들의 검술은 중원의 일반적인 검술과는 매우 달랐다.
실로 빠르면서도 기이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초식들.
남궁세가의 무인 십여 명이 순식간에 쓰러진 것이었다.
장로들이야 검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 처음 보는 생소한 검술과 맞닥뜨려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었으나, 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일류급의 무인들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야, 이자는 내가 맡겠다. 너는 제자들을 도와라!”
“예, 형님.”
남궁조는 동생 남궁우에게 명했다.
하지만 그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촤아악!
까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남궁우는 황급히 자신의 검을 들어 날아오는 섬광을 쳐 냈다.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검.
그것은 바로 독진고의 검이었다.
“너희 둘은 나를 상대해야지. 한 명씩은 재미없으니까.”
“……이놈!”
어찌 보면 참으로 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남궁조와 남궁우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만큼 방금 보여 준 독진고의 한 수는 대단했던 것이다.
천하의 무애신검과 참혼중검, 두 사람이 함께 합공을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상만 모두 회복되었더라면…….’
그런데 이때였다.
“맞아. 한 명으로는 부족해. 둘 다 비켜.”
갑자기 들려온 하나의 낭랑한 음성.
독진고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람과 의아함이 떠올랐고, 남궁조와 남궁우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두 사람에게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