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85
정도마신 184화
넓고 화려한 방안.
세상의 모든 사치가 담겨 있는 듯한 방이었다.
“어떻소?”
종천의 물음에 설린은 어두운 표정으로 방안을 돌아보았다.
“지나치게 좋은 방이군요.”
“방을 묻는 게 아니지 않소. 지금의 내 모습 말이오.”
뒷짐을 지고 앞서 있던 종천이 몸을 돌리며 양팔을 벌렸다.
설린이 종천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약 석 달 전이었다.
그는 설린의 옷을 찢으며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황급히 사라진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설린은 그 시간 동안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바깥의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는 상황.
그녀는 그저 방안에서 무공 수련을 하며 탈출할 수 있는 순간을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감시하는 보초들의 무공은 매우 뛰어나고 경비는 철통같아서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백 일 만에 다시 나타난 종천은 설린을 다짜고짜 새로운 방으로 데려왔다.
그는 확실히 전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머리였다.
소림사의 승려였던 현종의 머리에서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이 귀 밑까지 길게 자라나 장발이 되어 있었다.
본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해 절세미남으로 불릴 만했던 그는 머리가 자라면서 마치 선계의 장군이 세상에 내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보다 더 특별한 것은 바로 그가 걸치고 있는 황색(黃色)의 곤룡포(衮龍袍)였다.
설린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도 바로 이 옷 때문이었다.
“나는 마침내 이 나라의 황제가 되었소.”
“당신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 버렸군요.”
“자격이 있는 자가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오.”
종천은 한 팔로 방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화려한 방은 황후전이오.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이고, 앞으로는 당신이 쓰게 될 것이오.”
설린은 황당한 얼굴로 종천을 바라봤다.
“화, 황후전이라니요?”
“당신을 내 여인으로 삼겠다 말하지 않았소.”
설린은 종천의 무서울 정도로 혁혁한 안광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요. 나는 당신에게 조금의 마음도 없습니다. 현종 스님은 나의 좋은 친구였지만, 당신은 강호의 공적이요, 황실의 반역자일 뿐입니다. 나를 이곳에 가둬둘 수는 있어도, 내 마음이 변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백 일 전, 설린이 이와 비슷한 말로 거절했을 때, 종천은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종천은 그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인 후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마음도 바뀔 것이오.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완악은 내 손에 죽을 것이고, 강호의 모든 문파는 내 발 밑에 무릎 꿇을 것이오.”
사완악이 죽는다는 말에 설린의 몸이 움찔했다.
“당신은 말 한마디로 원하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오. 그리고 나는 변하지 않는 태도로 당신을 대우하며, 당신의 마음을 서서히 돌리겠소.”
설린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종천을 바라봤다.
그녀가 어떤 말로 거절하든, 종천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눈빛에는 설린을 차지하겠다는 욕망과 집념이 넘실거렸고, 자신에게 불가능이 없다는 강한 믿음이 온 정신을 지배한 듯 느껴졌다.
그런데 이때였다.
“황제 폐하!”
갑자기 하나의 차분한 음성이 황후전 밖에서 들려왔다.
종천은 여전히 설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정도맹이 오고 있습니다.”
“……!”
설린이 흠칫하며 종천을 바라봤다.
종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군. 기다리시오. 당신이 미련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끊어 내고 오겠소.”
“사 공자님이 계신 한, 당신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 신경을 거슬렀던 것일까?
종천의 눈썹이 미세하게 씰룩이더니 돌연 밖을 향해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너희도 황후를 감시할 필요 없다!”
종천은 무서운 안광을 쏟아 내며 말했다.
“이제 당신이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막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싸움이 시작되면 밖으로 나와 보시오. 당신의 눈앞에서 사완악의 목을 베어 줄 테니.”
종천은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 황후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틀 후.
자금성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 혈투가 시작됐다.
* * *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정도맹에 가입한 수많은 무림문파.
그 숫자는 도합 천 명.
일반 병사라면 천이라는 숫자는 황궁을 공격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모두 일류 수준 이상의 엄선된 무공 고수들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한 명의 무인이 수십 명의 병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치면, 족히 수만 명의 병사 못지않은 수준.
하물며 명문대파의 장로급 고수들이 목숨을 건다면 수백 명의 병사들과도 싸울 수 있으니 실제 전력은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넓은 평야에서 싸웠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황궁으로 향하기 전,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중용은 이와 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활을 쏘며 수성 작전으로 나온다면, 아무리 정도맹의 무인들이라 해도 천 명의 숫자로는 부족합니다. 억지로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이미 많은 힘을 소진한 터라 마교와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사완악이 말했다.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마교는 오히려 성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릴 거야.”
당시 제갈중용은 사완악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금성 앞에 도착한 지금, 제갈중용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정말…… 성문을 열고 있군요.”
사완악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진짜 성문을 열고 있네.”
제갈중용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사완악을 쳐다봤다.
“사 공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사완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지 않을까 예상은 했는데, 확신은 못했지.”
“그럼 만약에 성문을 닫고 수성했으면 어쩌실 생각이었소?”
“글쎄? 그때 가서 생각해 보려 했지? 에이, 어쨌든 열려 있으니 됐잖아. 우리끼리 힘 빼지 말자고.”
“허……!”
제갈중용은 황당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완악을 쳐다봤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사완악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성문이 열려 있는 건 마냥 좋은 게 아니야.”
“음?”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거든.”
사완악은 작게 휘파람을 불고는 중얼거렸다.
“마치 지옥문이 열려 있는 기분이군. 다들 각오해. 진짜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으니까.”
* * *
지옥문이라는 사완악의 표현은 매우 그럴싸했다.
“흐아앗!”
“크윽!”
“물러서지 마라! 마교 놈들을 모두 무찌르고 황제 폐하를 구하라!”
“와아아아아!”
곳곳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박투(搏鬪)!
기합과 비명이 뒤섞이고, 번쩍이는 검광(劍光)과 난무하는 도풍장영(刀風掌影)까지.
처절한 격전의 연속.
정도맹의 무인들이 자금성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마교의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사방에서 적들이 쏟아지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정도맹의 무인들은 모두 고강한 무공을 익혔거나 숱한 난전을 경험한 일류 이상의 무인들이었다.
거기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절정 고수들이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지휘를 하니 그 결속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개방도들은 타구봉진을 펼쳐라!”
“참궁검호대는 참궁검진을 펼쳐라!”
“황제 폐하를 구해야 한다!”
각 문파의 장문인과 가주들이 선두에 나서서 명을 내리자 문도들은 목숨을 걸고 마교와 맞서갔다.
거기에 황제를 위한다는 명분은 기묘한 용기를 불러일으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마교도들조차 움찔하며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자네는 어서 그를 상대하러 가시게.”
말을 한 사람은 무당파의 장문인, 태극신검 상현 진인이었다.
이때 그의 손에서 한 자루의 송문고검이 하늘을 날아가 다가오던 마교 무인의 목을 꿰뚫고 다시 돌아왔다. 그것은 바로 이기어검술이라는 검도의 최상위 수법이었으니, 과연 천하 팔대고수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사완악은 조금 감탄한 얼굴로 그의 검술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 정도면 믿을 만하군. 하지만…….”
사완악은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현 진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겐가?”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내가 처리해 주는 게 나을 놈들이 있거든.”
“음?”
“그 사천당문에 쳐들어왔던 놈들 말이야. 원독마가인가, 뭔가.”
“아!”
상현 진인은 사완악의 말에 깨닫는 바가 있었다.
사천당문을 기습했던 칠대마가 중 한 가문, 원독마가.
그들은 사천당문과 같이 독을 쓰는 가문이었고, 독이란 평소에도 그렇지만 이런 난전에서는 더욱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미처 경계할 틈도 없이 중독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슬슬 모습을 드러낼 텐데……!”
이때 사완악이 한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찾았다. 난 저놈들 처리하고 종천을 상대하러 갈게. 나머지는 잘 부탁해.”
“걱정 마시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완악의 신형이 땅을 박찼다.
* * *
“흐흐. 겁 없는 정도맹 녀석들. 세상에 태어나 느껴 본 적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해 주마.”
원독마가의 가주, 응계종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가 이끌고 있는 가문의 문도들은 총 사십여 명.
그들은 모두 독을 흡입하여 내공을 연성한 자들로, 만약 아무런 방비 없이 그들과 무공을 겨루었다가는 중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싸움이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칠대마가의 무인들조차 원독마가와 무인들과는 다툼을 꺼려 할 정도였다.
특히 가주 응계종은 숨결마저 독성을 지닌 완벽한 독인이라는 마독지체를 이루었고, 성격 또한 안하무인에 막무가내라 교주를 제외하면 호법들조차 그를 제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저 늙은 거지는 개방의 방주인가. 좋다, 저 더러운 늙은이와 그 쫄다구들부터…….”
그런데 그때였다.
“……!”
응계종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깜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이 무슨……!”
의문을 표할 틈도 없었다.
응계종은 빠르게 몸을 돌리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꽝!
엄청난 굉음.
그리고 응계종의 몸은 오륙 장을 날아가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땅에 착지했다.
초절정 고수인 그는 이렇게 한 번의 격돌로 날아가 본 적이 처음이었다.
“웬 놈이냐!”
응계종은 고개를 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격돌로 인해 피어올랐던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상대를 확인한 응계종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 긴장감이 역력히 드러났다.
백의장삼을 펄럭이며 나타난 젊은 청년.
바로 사완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