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84
정도마신 183화
사완악은 천기자의 유서를 모두 읽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힌 대로 탁자 아래에 조금 다른 색깔의 바닥 부분을 찾아내 뜯어냈다.
‘정말 관까지 준비해 놨군.’
전각 바닥의 나무판자를 들어내자 하나의 관(管)이 준비되어 있었다.
재질은 좋아 보였지만, 특별히 꾸며진 것 없이 간단하게 만들어진 목관.
사완악은 그 관이 천기자의 수수한 도복과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은 천기자에게 조금 컸다.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짜둔 관이겠지만, 봉신환에 기운을 모두 주입한 뒤 몸이 노화되며 왜소해졌기 때문이다.
“당신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
사완악은 관에 들어간 천기자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신념과 노력은 인정해 주지.”
천기자와 그의 사부는 최악의 천살성이 나타나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는 예언을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많은 것을 계획하고 준비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완악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과 제자들의 목숨까지 걸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그는 한평생 자신을 위해 살았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로지 천의문의 문주로서, 이 세상을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사완악은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한 행동들을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한 가지 신념으로 평생 살았다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었다.
사완악은 천기자의 관을 다시 땅에 넣고 뜯어낸 나무판자를 덮었다.
누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감쪽같았다.
사완악은 유서와 탁자 위의 지도 몇 개를 품에 갈무리한 뒤 전각을 빠져나왔다.
“돌아가자.”
지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비려와 천기자의 막내제자 허곤은 동시에 사완악을 쳐다봤다.
“사부님은요?”
“그는 이미 떠나고 없다.”
“떠났다고요? 오라버니,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사완악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 거 없다. 마교와의 싸움을 위해 한 가지 더 준비할 것이 있다고 하더군.”
소년 허곤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제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떠나셨다고요?”
사완악은 품에서 하나의 서찰을 꺼내 허곤에게 주었다.
“네게 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했다.”
허곤은 빠르게 편지를 열어 확인했다.
서찰은 분명히 천기자의 필체였다.
허곤은 그 내용을 다 읽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십시오.”
사완악은 돌아서며 말했다.
“아, 그리고 자신의 방 안에 너에게 남긴 다른 서찰도 있다고 하니 가서 확인해 봐라.”
“사부님의 처소에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부디 마교를 무찌르고 세상을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고.”
사완악은 짧게 대답한 뒤 연비려와 함께 북망산을 떠났다.
* * *
자금성.
천하의 주인, 황제가 살고 있는 황궁.
그 자금성에서 세상이 뒤집어질 만한 소식이 전국 각지로 전해졌다.
-나는 천마신교의 오대 교주, 종천이다. 자금성의 주인이었던 영한제는 방탕했던 선왕의 기질을 물려받아 정치를 멀리하고 오직 술과 여인만을 즐기니 나라의 존망이 위험해졌다. 한 국가가 사라지는 것은 상관없으나 그 과정에서 고통 받는 것은 오로지 백성들뿐일지니. 나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어 황제의 자리를 빼앗노라. 오늘부터는 내가 이 자금성의 주인이요, 천하를 통치하겠노라.
이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야기였다.
역사적으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한 정변(政變)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
또한 황실 내에서의 권력 쟁탈전도 아니고, 병사를 거느린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 들어 보는 종교의 교주가 소리 소문 없이 하루아침에 황제가 된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놀라운 일은 끝이 아니었다.
종천의 황제 등극에 좌우도독과 좌우도어사, 육부상서와 통정사와 대학사까지, 이 나라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열두 명의 신하 중 아홉 명이 동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종천의 황제 찬탈을 끝까지 반대했던 우도독과 형부상서, 그리고 황제의 스승이자 한림원의 수장인 대학사는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른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도독이라면 좌도독과 함께 이 나라 병력의 최고지휘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우도독이 어떤 반항도 해 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는 것일까?
하지만 놀라운 소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한제를 구하기 위해 악두 장군과 곽거영 장군은 각각 일만의 병사를 이끌고 자금성으로 향했으나 장렬히 전사했다.
악두와 곽거영은 우도독의 오른팔과 왼팔이었다.
악두는 창술로 유명한 무림문파, 악씨세가 가주의 동생으로 무공은 악씨세가에서 가장 뛰어났다. 또한 곽거영은 용맹함이 하늘을 찌른다 하여 천용장군(天勇將軍)이라 불렸는데, 과거 단 백 명의 군사만으로 오랑캐의 갑작스러운 침략을 막아 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의 무명(武名)은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나라를 대표하는 장군들이었다.
그런 그들마저 패배했다면, 이제 새로운 황제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황제 종천은 빠르게 다음 행보를 이어 갔다.
-천마신교를 국교(國敎)로 삼고, 천마신교의 교리를 전파할 사신을 전국 각지로 파견할 것이니, 누구든 신교를 믿는 자는 생활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종교의 우두머리가 황제가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까?
또한 무림문파에 대한 선포문도 함께 내려졌다.
-그동안 무림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교묘하게 법에서 어긋나는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무력과 권력으로 만들어진 적폐세력이니, 새로운 나라에서는 마땅히 처단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대표가 황실로 와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지난 과오는 용서하고 세상에 이로운 역할을 위임하겠노라.
구파일방 중 소림사와 무당파는 민간에서도 존경받고 있었고,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들 역시 각자의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장문인들과 가주들이 자금성에 와서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행동을 제약받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과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무림이 새로운 황제의 지시에 응할 것인가?
만약 아니라면 무림과 황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온 세상이 새로운 황제와 무림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었다.
* * *
쾅!
하북팽가의 가주, 혼원벽력도 팽일해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
“감히 마교의 교주 따위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고, 우리에게 무릎을 꿇으라니! 이래도 두고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장 자금성에 가서 그놈의 목을 베어 버리고 황제 폐하를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도맹의 임시맹주이자 화산파의 장문인 연천도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그, 그건……!”
“목숨을 바쳐서 가능한 일이라면 진작 움직였을 것이오.”
“그럼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기다리고 있지 않소.”
“하!”
팽일해는 다시 한번 분노를 터뜨렸다.
그 역시 화산파 장문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장문인들과 가주들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사 공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금방 다녀올 곳이 있다더니 벌써 삼십 일이 넘었습니다! 설마 마교가 무서워서 혼자 도망친 것은…….”
“그만.”
엄숙한 음성으로 팽일해의 말을 멈춘 것은 무당파의 장문인, 상현 진인이었다.
“사 공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네. 처음에는 나도 그의 사람됨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들 느끼지 않았는가? 그는 오히려 아이처럼 순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강직한 사람일세. 그리고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지. 또한 그의 능력은…… 이미 진정한 입신의 경지에 다다랐네. 그런 사람이 어찌 겁을 먹고 도망친단 말인가? 팽 가주는 마교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모욕하지 마시게.”
팽일해는 상현 진인의 말에 뜨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조바심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답답한 마음은 이해되네. 나라고 해도 다르지 않으니.”
팽일해는 조바심이라고 표현했으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모두가 그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말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교가 어떻게 천황무위대가 지키고 있는 황실을 무너뜨렸냐는 것입니다. 정말 사 공자가 말한 대로 종천은 천황무위대마저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게 된 것일까요?”
“나무아미타불…….”
아미파의 장문인은 자신도 모르게 불호를 읊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천황무위대는 이미 명맥이 끊겼다더군.”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갑자기 들려온 낭랑한 음성.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동시에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것은 바로 사완악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답답함을 토로하던 하북팽가의 가주는 하늘로 뛰어오르다시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완악을 반겼다.
“사 공자, 어서 오시오! 금방 다녀온다더니 왜 이리 늦은 것이오?”
사완악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상을 입었거든.”
“내, 내상? 어쩌다가 그랬단 말이오! 괜찮은 것이오?”
사람들은 진정 깜짝 놀랐다.
사완악이 마교와 싸운 것도 아닌데 내상을 입을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또한 내상을 입어서도 아니되는 상황 아닌가?
“별거 아니야. 이미 다 회복했고.”
사완악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천기자가 봉신환에 천황신공을 주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리를 하는 바람에 내상을 입었다. 그 내상은 북망산의 한 객잔에 들러 보름 동안 운기조식을 하고서야 회복될 수 있었다.
“처, 천만다행이오.”
팽일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사완악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마교와 싸워 주는 조건이 뭐였는지 기억하지?”
“조건? 아, 황금 이천 냥을 말하는 것이오?”
“맞아. 마교를 이기면 당신들은 각 문파당 황금 이천 냥씩 내게 주기로 했었지.”
“기억하고 있소.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묻는 것이오?”
“하북팽가는 오백 냥 추가.”
“음?”
사완악은 팽일해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마교가 무서워서 도망친 거 아니냐며?”
팽일해의 몸이 움찔했다.
“드, 들었소?”
“누구는 마교를 상대하려고 개고생하며 내상까지 입는데, 뭐? 도망을 쳐?”
“아니, 그건 그저 상황이 너무…….”
“됐고. 오백 냥 추가야. 불만 있어?”
팽일해는 물론 불만이 있었다.
겨우 그 한마디 했다고 무려 황금 오백 냥이 추가되다니.
하지만 그는 차마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가는 오백 냥이 천 냥으로 늘어날지도 모르므로.
“……알겠소.”
사완악은 특유의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사정이 생겨 늦은 것도 있지만, 그 자식이 생각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군.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보지.”
모두가 기다리던 사완악의 말이 떨어졌다.
“마교와의 전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