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2
정도마신 1화
후두두두둑……! 휘이이잉……!
어느 이름 모를 산중(山中)의 밤.
후두두두둑……!
휘이이잉……!
바위를 뚫을 듯한 빗줄기와 천하를 휘감듯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한 줄기 달빛조차 없는 칠흑 같은 산골짜기.
그리고 그때였다.
번쩍-!
번갯빛이 어둠을 쪼개는 순간.
마치 절벽에서 바위 하나가 떨어지듯, 기골이 장대한 사내 한 명이 그곳에 나타났다.
그는 왼손에는 거대한 염주를 들고 있었고, 이마에는 승려를 상징하는 계인 네 개가 찍혀 있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이런 장소에 홀연히 나타난 것일까?
“클클…… 정말 당신까지 와 버렸군.”
“이것으로 모두 모인 셈인가…….”
승려가 노려보는 암흑 속에서 다른 음성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호호, 강호 칠대고수라 한들 별수 있겠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욕정(欲情)이 치솟을 정도로 간드러진 한 여인의 목소리. 승려는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잔혹신풍(殘酷魔人), 요희요검(妖姬魔劍), 신천마뇌(神天魔腦)…… 설마 네놈들도?”
승려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온 세 개의 별호는 실로 놀라웠다.
잔혹신풍(殘酷神風) 구득소.
요희요검(妖姬妖劍) 채보령.
신천마뇌(神天魔腦) 사마소.
바로 얼마 전, 무림공적으로 공표되어 모든 강호인들의 추적을 받고 있는 강호 사대악인 중 세 사람의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저 기골이 장대한 승려가 바로 사대악인과 강호 칠대고수 중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염라대사(閻羅大師) 영환이란 말인가?
잔혹신풍 구득소는 기름진 얼굴로 눈이 볼살에 파묻힐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키키…… 보아하니 우리 모두 같은 이유로 모였구먼. 역시 천기자란 놈, 평범하지는 않군. 감히 사대악인을 한자리에 모으다니 말이야.”
염라대사, 잔혹신풍, 요희요검, 신천마뇌.
천하 사대악인으로 꼽히는 이들은 현재 무림공적의 신분이다.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 행적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의 네 사람. 그럼에도 그들이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의 서찰 때문이었다.
무림공적이 된 후, 추적자들을 피해 잠적한 그들 앞에 각각 한 사내들이 나타났다. 평범한 얼굴의 삼십 대 사내들. 그들은 사대악인 각자에게 한 통의 서찰을 전해 주었다.
-강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알려 주겠소. 내가 보낸 사자(使者)가 당신을 안내할 것이오. 만약 오지 않는다면 내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당신들의 행적을 노출시키겠소.
만약 이러한 내용의 서찰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다면 사대악인은 모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아니, 비웃기 전에 이미 서찰을 전한 사자를 그 자리에서 찢어 죽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서찰 마지막에 적혀 있는 성명과 인장(印章)을 확인하고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천기자(天奇者).
강호 제일기인으로 불리는 이름.
천기자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많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능력이 실로 비범하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천기자의 내상 치료술이다.
그는 일반적인 질병을 치료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공에 의해 입은 내상을 치유하는 의술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한다.
둘째는 천기자가 집필한 강호역사서(江湖歷史書).
강호의 역사에 남을 만한 일들만을 기록했다는 강호역사서에는, 오백 년 전의 사건까지도 상세히 적혀 있다고 하니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천기자가 가장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그의 점괘술과 예언 능력 때문이었다.
천기자는 근 사십 년 사이에 강호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 중 일곱 가지를 예언했었고, 그 예언은 단 한 차례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또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그의 점괘술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통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실로 신비로운 기인(奇人).
또한, 천기자는 역용술 역시 뛰어나 강호의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인물이니, 강호의 그 누구도 천기자의 이름을 경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하의 사대악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강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니!
서찰의 내용은 무림공적이 된 그들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대단하신 시주께서는 어디 계신가?”
염라대사는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해 준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클클…… 시주는 무슨. 색마 주제에 중놈 행세는 계속하려는 건가?”
잔혹신풍 구득소가 염라대사 영환을 향해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역시 자못 궁금한 얼굴로 천기자의 사자를 바라보았다. 과연 자신들을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이곳까지 데리고 온 천기자의 낯짝을 빨리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본인은 이미 이곳에 있소이다.”
별안간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맑은 음성이 하늘에서 울리듯 들려왔다.
사대악인들은 모두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호 칠대고수로 꼽히는 염라대사와 잔혹신풍은 물론, 요희요검과 신천마뇌 역시 강호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아무런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요희요검 채보령은 여우 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잠시 쏘아본 뒤 이내 배시시 웃으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과연 천기자의 재주는 명불허전이로군요. 이제 장난은 그만 치시고 그 잘생긴 얼굴을 좀 보여 주시지요?”
그녀의 음성은 평범한 듯했으나 다른 사대악인들의 안색은 몹시 굳어졌다.
‘이 요녀의 탈정미혼술(奪情迷魂術)이 무섭다더니…….’
채보령의 음성에는 남심을 뒤흔드는 마법 같은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진심을 다해 미인계를 펼친다면 자신들도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그녀의 음성에, 허공에서 대답이 울려 퍼졌다.
“허허…… 굳이 그렇게 힘을 쓰지 않아도 본인은 모습을 숨길 생각이 없소이다.”
그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고고한 학 한 마리가 내려앉듯, 하나의 인영(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처럼 흰 삼베옷을 걸쳐 입고, 허리에는 음양 무늬가 새겨진 검은 띠를 매고 있는 노인.
바로 천기자였다.
사대악인 네 사람은 천기자를 보는 순간 직감했다.
‘고수(高手). 이 늙은이는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더 대단하다.’
물론 그렇다고 기가 죽을 그들은 아니었다.
염라대사 영환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시주는 참 용감하군. 감히 나 염라대사를 이곳까지 오라고 하다니 말이야. 죽고 싶은가?”
그러나 천기자는 염라대사 영환을 바라보며 도리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은 이미 만족하고 있지 않소?”
염라대사 영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지?”
“당신들은 느꼈을 것이오. 본인이 서찰을 통해 말한 대로 이 산골짜기는 강호의 그 누구라도 찾아낼 수 없는 장소라는 것을 말이오.”
천기자의 말에 네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사대악인은 이 장소로 안내받아 오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산골짜기는 날짐승조차 침범하지 못할 것처럼 험준했고, 근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만약 천기자가 보낸 안내인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이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평생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원하는 게 무엇이지?”
불쑥 말을 내뱉은 사람은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천마뇌 사마소였다. 천기자는 사마소와 눈이 마주치자 곧 고개를 끄덕였다.
“본론부터 말하겠소. 짐작대로 난 당신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대들을 이곳에 초청한 것이오.”
잔혹신풍 구득소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천기자가 사대악인에게 부탁이 있다? 클클,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지.”
천기자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제자 한 명을 키워 주시오.”
순간, 사대악인들의 눈에 뜻밖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제자?”
“그렇소. 당신들이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한들 강호의 추적을 평생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오. 하지만 이곳, 나의 사문이자 지난 오백 년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천의문(天意門)이라면 당신들은 안전하게 있을 수 있소.”
천기자의 말에 사대악인들은 거듭 놀랐다.
그럼 이 산골짜기가 바로 천기자를 배출한 문파였단 말인가?
“그 대신 당신들이 힘을 합쳐 한 아이를 제자로 거두어 키워 달라는 게 나의 부탁이오.”
요희요검 채보령은 재밌다는 듯 요염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좋아요. 이곳이 은밀한 장소라는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우리에게 제자를 키워 달라고요? 이유가 뭐죠?”
천기자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악인(惡人). 나는 당신들이 그 아이를 반드시 악인으로 길러 주기 바라기 때문이오.”
“뭐라?”
사대악인은 모두 어이없는 얼굴로 천기자를 바라봤다.
천기자는 딱히 정도맹에 속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누구나 그를 정파의 인물로 생각했다. 지금껏 그의 예언은 언제나 정파와 강호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사대악인에게 악인 제자를 길러 달라니…….
영환대사와 구득소, 채보령은 동시에 신천마뇌 사마소를 바라봤다. 천기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떠보라는 뜻이었다. 사마소가 천기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 순간, 천기자는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악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맑고 깊은 눈빛…… 그렇기에 더욱 무서운 자로구나.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다른 누구에게도 속지 않을 사람이다.’
심계와 계략으로는 강호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자.
사대악인 중 가장 약하지만, 가장 무서운 인물.
신천마뇌 사마소의 음성이 고요히 울렸다.
“이유는 어차피 말하지 않을 생각인 듯하고…… 평범한 아이는 아니겠지?”
천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결코 평범하지 않소. 그대들에게 맡길 아이는 수호성(守護星)의 기운을 타고났으니 말이오.”
“수호성?”
“그것은 우리 천의문에서 내려오는 전설이오. 수호성의 기운을 타고난 이가 나타나면 이 강호에 모든 악과 마를 멸한다는…….”
신천마뇌 사마소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천기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그는 그런 전설의 인물을 악인으로 길러 달라는 것이 아닌가?
요희요검 채보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아이를 악인으로 길러 달라니…… 무슨 꿍꿍이죠?”
사마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가 악인으로 자라나는 것이 강호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군.”
천기자는 놀란 얼굴로 사마소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사마소, 당신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오. 그대의 총명함이 정의를 위해 쓰인다면 좋으련만…… 어쨌든 당신 말이 맞소. 그리고 한 아이를 악인으로 기르기에는 당신들만큼 적합한 자들이 없을 것이오.”
구득소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꽤 뿌듯한 말이로군. 암, 그렇지. 우리 네 사람이 만약 공동 제자를 키운다면, 그 녀석은 천하제일의 악인이 될 테지.”
그러나 신천마뇌 사마소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천기자와 사마소의 눈이 마주쳤다.
“악인 제자를 기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결국 천기자 당신이 계획하는 강호의 정의를 위해 한 손 거들라는 소리지. 마음에 들지 않아.”
사마소의 말에 염라대사 영환이 크게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 나 염라대사가 감히 그런 수작질에 놀아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
천기자는 사대악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것은 일방적인 부탁이 아니오. 강호의 눈을 피해야 하는 당신들을 위해 오백 년 전통의 천의문 은거지 전체를 내주는 조건이오.”
그러자 그때, 천기자의 눈앞에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잔혹신풍 구득소의 미소 띤 얼굴이 번쩍 나타났다.
“킬킬, 그거야 우리가 이곳을 몰랐을 때의 이야기고. 당장 네놈들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우리가 이곳을 차지하면 그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