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25
정도마신 24화
“네, 제 능력이 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사완악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유문을 세운 설영충은 당시 강호제일의 대협이었다고 들었어.”
강호에서 대협이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붙여 주는 호칭이 아니었다.
설영충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설린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일어났다.
“네. 현조부(玄祖父)님은 인품과 무공, 협행 모든 면에서 강호 무인들의 존경을 받으신 분이었고, 그 당시에는 정유문의 위상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완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정유문의 문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예에?”
설린이 깜짝 놀라 사완악을 바라봤다.
사완악이 말했다.
“아니, 보는 사람마다 항상 정체를 물어보는데 대답할 말이 없어서 말이지. 정유문의 문도가 된다면 ‘나는 정유문의 문도 사완악이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거 아니겠어?”
설린이 눈을 깜빡였다.
사완악의 말은 한마디로 소속을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설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문도를 받는 것이야 제 권한이기는 한데…….”
사완악은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를 문도로 받는 것이 곤란한가?”
설린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뜻밖이어서요.”
뜻밖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사완악은 흑사방의 방주 두 명을 가볍게 죽이고, 흑철야왕을 기세만으로 굴복시킨 엄청나고 신비로운 고수였다.
그런 사완악이 당장 내일 강호에서 이름이 지워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유문의 문도가 되겠다니?
정녕 상상도 못 한 부탁이었다.
사완악이 재차 말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거야?”
무림의 근원에는 약육강식의 생리가 있다.
아무리 정의로운 문파라 해도 강한 무공과 고수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고, 그것을 정유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정유문 입장에서 사완악 같은 초절정의 고수가 생긴다는 것은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라 감히 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사완악이 먼저 문도로 받아 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설린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무, 물론 가능합니다.”
사완악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날 문도로 받아 줘.”
설린은 지금의 상황이 이상하고 믿기지 않았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사 공자님, 대신 정유문의 문도가 되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율이 있습니다.”
사완악이 규율이라는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규율? 자유롭지 못하다면 곤란한데.”
“본래는 몇 가지의 규율이 있지만, 사 공자님은 한 가지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한 가지?”
설린이 말했다.
“정유문의 대규율. ‘정유문의 문도는 정의롭게 행동한다’입니다.”
사완악은 오호, 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것 참 마음에 쏙 드는 규율이군.”
설린이 웃으며 말했다.
“사 공자님이라면 굳이 규율이 아니더라도 그리하시겠지만요. 그럼 오늘부터 사 공자님을 정유문의 문도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따로 묵으실 거처가 없으시다면, 사 공자님이 지내실 처소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사완악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야? 숙소까지 제공해 주는 거였어?”
“그럼요. 그리고 사 공자님은 특별히 원하시는 요리나 술, 혹은 그 외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준비해 두겠습니다.”
사완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유문…… 정말 엄청난 곳이었군.”
설린은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무서운 무공을 지니신 분이 겨우 평범한 음식과 술에 이리 순박하게 기뻐하시다니.’
설린이 말했다.
“그럼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 공자님의 처소를 준비하고 휘아를 보내겠습니다.”
설린은 그렇게 말하고 객당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게 된 사완악은 그릇에 남아 있는 음식과 술 한 모금을 마신 뒤 중얼거렸다.
“이야,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구나.”
그런데 사완악의 마지막 말이 조금 이상했다.
일석이조(一石二鳥)라니?
그 말은 마치 사완악이 정유문의 문도가 되기를 희망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돌연, 사완악의 눈빛에서 장난스러운 느낌이 사라지고 혁혁(赫赫)한 안광이 진지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자, 이 정도면 당신의 반응을 볼 수 있으려나?”
* * *
밀실(密室).
그곳에는 하나의 긴 탁상이 있었고, 여덟 명의 사람이 좌우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성별과 나이, 키와 외관 모두 제각각이어서 이 모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중에는 단 한 사람,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사완악이 하북성 입구의 객잔에서 만났던 재담꾼, 나양조였다.
이때 나양조 맞은편의 한 노파(老婆)가 입을 열었다.
“영성옥(靈星玉)은 정말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나양조는 조용히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내가 말했다.
“이것 참 예상 밖의 흐름이 되고 말았소. 계획대로라면 이성을 잃고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혹시 준비한 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오?”
“아닙니다. 그것은 이군(二君)께서 직접 준비하신 물건이었습니다.”
“그럼 어찌 된 일이오? 게다가 흑사방의 삼방주와 이방주를 죽이고, 도리어 정유문의 문도가 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 건지 모르겠소.”
놀랍게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사완악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이 땅굴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팔군(八君), 그의 기운은 어떻소?”
중년인의 물음에 불과 열댓 살로 보이는 홍안의 소년이 말했다.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소년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매우 유약한 서생 차림의 삼십 대 사내가 숙고하다 말했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시지요. 하지만 만약 이번과 같이 대계(大計)를 벗어나는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는 개입을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다른 일곱 명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생 차림의 삼십 대 사내가 다시 말했다.
“그런고로…… 그자를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 *
사흘 뒤, 정유문에서는 작은 연회가 열렸다.
사완악이 새로운 식구가 된 것을 축하하는 환영식이었다.
연회에는 응당 음식과 술이 있기 마련이었고, 술에는 두 가지의 마력이 있었다.
하나는 아무리 어색한 사이에도 친밀감을 만들어 내는 힘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소라면 쉽게 할 수 없는 말들을 꺼낼 수 있는 힘이었다.
“흐, 조금씩 취기가 올라오는군.”
총관 황임은 살짝 불콰해진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이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말에 관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완악은 신입 문도고, 황임은 총관, 관일성은 호법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전대 문주를 모시던 사람들이었고, 연배로 보나 직책으로 보나 두 사람은 사완악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사완악은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도깨비처럼 불쑥 등장해서 멸문 위기의 정유문을 구해 준 은인이었고, 무공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했다.
그러니 마냥 아랫사람을 대하듯 행동할 수가 없었다.
사완악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술 한 잔을 털어 넣고는 말했다.
“나는 공자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데요. 말씀은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황 총관님, 관 호법님이라 부르면 되지요?”
사완악의 말에 황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나도 사 공자라 부르겠네. 그런데 자네, 존칭도 쓸 줄 알았구먼?”
사완악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사부님들과 사람들이 없는 산속에서 자라서 예의를 잘 모르긴 합니다. 사부님들이…… 그런 것에 별로 신경 쓰는 분들이 아니었거든요. 그 점은 다들 이해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사완악의 말에 다들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느끼는 바가 있었다.
‘어쩐지, 이 사람의 언행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독특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다소 예의 없어 보이던 사완악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고, 오히려 속세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으로 보였다.
황 총관이 웃으며 물었다.
“사 공자의 사부님들은 얼마나 대단한 분들이신지 궁금하군.”
“글쎄요. 사부님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군요.”
이때 사완악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지만, 그 말투는 지금까지와 달리 조금 딱딱했다. 정유문의 사람들은 사완악이 자신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은 누구나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아하, 그렇군. 곤란한 질문이었다면 미안하네.”
사완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사적인 것을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지요. 그래도 앞으로는 한 가족으로 지내게 되었으니 우리 축하의 건배를 한 번 더 할까요?”
설린이 분위기를 바꾸며 건배를 제의했다.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연회가 무르익자, 관일성은 갑자기 홀로 눈물을 보이다가 말했다.
“어쨌든 사 공자! 자네 덕분에 우리 설 문주가 그 미친놈들한테 시달리지 않게 되었으니, 난 앞으로 사 공자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네! 정말 고맙네. 이제 죽어서도 형님의 얼굴을 뵐 수 있겠어.”
황 총관도 그 말에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무슨 낯으로 문주님을 뵐 수 있을까, 정말 죽고 싶었지요.”
두 사람이 말하는 형님과 문주님은 설린의 아버지 설전추였다.
설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두 분 다 많이 취하셨군요.”
“무슨 소리! 이제 시작이야!”
“취했다니요? 문주님, 저는 태어나서 취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만, 딸꾹!”
사완악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 설린은 사완악을 보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지나치게 장난기 가득하고 수다스러운 사완악이지만, 이런 연회 자리에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이따금 딴생각에 빠져 조용히 술잔만 채울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 공자님에게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어떤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설린의 이러한 생각은 곧 황임과 관일성의 술주정에 묻혀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유검법만 대성했어도 우리 설린이가, 크흑……!”
“이게 왜 관 호법님 잘못입니까! 이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흑사방 놈들. 사 공자! 가서 일방주 그놈도 어떻게 처리해 줄 수 없겠나! 내 분통해서 못 참겠네!”
설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사 공자님의 환영식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사 공자님은 거처로 가서 쉬세요. 이 두 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사완악은 그녀의 말에 씩 웃고는 반 정도 남은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그럼 부탁해.”
설린의 눈이 그 술병에 머물렀다.
“네. 너무 과음하지 마세요. 그리고…….”
설린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순간, 사완악은 조금 묘한 눈빛으로 설린을 쳐다봤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밥값 한 거라니까. 그럼 이만.”
사완악은 그대로 자신이 배당받은 처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사완악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술 취한 누군가의 눈빛이 강렬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