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03
-103-
레아가 굳어있는 사이, 미라옐 부인이 다급하게 블레언을 불렀다.
“저, 전하……!”
그녀는 애달픈 목소리로 황급히 변명했다.
“오, 오해하신……, 아악!”
그러나 제대로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블레언은 머리채를 잡은 그대로 내던져버렸다.
미라옐 부인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녀가 충격 받은 얼굴로 파르르 떨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블레언은 차갑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천한 년이 주제도 모르고…….”
가죽장갑을 낀 손이 번쩍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레아는 얼른 일어나며 외쳤다.
“그만하세요!”
블레언이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서둘러 책상을 돌아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만하면 충분하잖아요.”
필요 이상으로 과했다. 레아는 블레언이 너무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습관적으로 손찌검하는 짓은 반드시 고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블레언은 레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발로 미라옐 부인의 손을 짓밟았다.
미라옐 부인이 간신히 비명을 삼키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발 그만해요……!”
블레언을 잡아당기며 재차 만류하니, 그가 눈을 번뜩거리며 말했다.
“저년이 언제부터 이따위로 굴었어.”
여전히 미라옐 부인의 손을 밟은 채였다.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난폭한 것인지, 그의 폭력성에 넌더리가 났다.
어쩌면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은 미라옐 부인이 머리채가 붙잡혀 바닥에 내던져졌지만, 그것이 언제든지 레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슬아슬하던 끈이 툭 끊어졌다. 레아는 거르지 못한 말을 내던졌다.
“이따위 상황을 만드신 것은 전하이시죠.”
진실로 그러하지 않은가. 미라옐 부인이 저를 얕잡아보도록 만든 이는 블레언이었다.
애초부터 그가 모욕적인 짓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코르티잔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레아를 지켜보고 있던 블레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뻣뻣해진 뺨이 짧게 떨리고,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다 나가.”
긴장해서 미동조차 않고 서있던 시녀들은 곧장 블레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블레언이 낮게 욕설을 내뱉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꺼지라고!!”
시녀들이 미라옐 부인을 데리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안에는 블레언과 레아, 단 둘만이 남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레아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그가 제 뺨을 내려칠까 두려워하면서도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기억 속의 블레언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여태껏 왕위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그의 성격이 예민하게 변한 것이라 납득해왔으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블레언의 만행을 죄다 받아주던 무언가가 고장 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가 달라졌다는 이질감이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졌다. 레아는 눌러왔던 속마음을 꺼냈다.
“왜 이렇게 변하신 거예요…….”
레아의 속삭임에 블레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서운 눈으로 레아를 노려보았다.
소름끼치는 정적 속에서 레아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얼마나 마주 보고 있었을까. 먼저 정적을 깨트린 것은 블레언이었다.
그는 뭔가를 물을 듯이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의미가 없군.”
블레언은 홱 돌아서서 말없이 나가버렸다.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레아는 엉망이 된 집무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가 과연 옳은 것일까.
* * *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레아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지금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자꾸만 느껴지는 이질감과 괴리감은 과거엔 어찌 그냥 넘겼나 싶을 정도로 점차 선명해졌다.
그 남자가 말한 것처럼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것까지는 너무 억측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레아는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믿고 털어놓을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테인 궁정백이나 로랑 재무대신, 멜리사 백작부인과 왕녀궁의 시녀들…….
전부 레아가 느끼는 이질감에 속한 이들이었다.
바쁘게 일과를 보내는 한편, 레아는 혼자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제자리걸음처럼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뭔가 제대로 알아보려 해도 시간이 없으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목표한 업무를 끝내고 나니 밤이었다. 아직 조금 남은 일거리를 가지고 레아는 침실로 돌아왔다.
혼자서 서류를 마저 끝내고 나자 녹초가 되었다.
반쯤 기절한 상태로 침대에 누웠지만, 끔찍하게 피곤한데도 잠들 수가 없었다.
레아는 뜬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았다. 레아는 하루 종일 먹은 것을 생각해보았다.
다 토해버리고 그나마 물이랑 과일만 조금 먹은 게 다였다.
그것도 내키지 않았는데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먹은 것이었다.
침실 안을 서성서성 걸어 다니던 레아는 힘이 없어서 안락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식사까지 제대로 못 하니 몸과 마음이 전부 괴로웠다.
말린 대추야자가 먹고 싶었다. 딱 한 번 맛본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레아를 괴롭혔다.
대추야자의 맛을 생각하던 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샤칸이 거짓말을 했다. 대추야자 준다고 철석같이 약속해놓고선, 그냥 뚝 사라져버렸다.
그거 먹고 싶어서 입까지 맞췄는데 말이다.
배고파…….
허전한 속을 채우려 쿠션을 끌어안았다. 먹고 싶은데 못 먹으니까 너무 서러웠다.
식욕 때문에 감정마저 들쑥날쑥한 것 같았다.
혼자서 꾹꾹 참으며 배고픔을 견디고 있자니 메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어야겠다 싶어서 유리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밤의 왕궁을 바라보며 난간에 손을 얹는데 시원한 향이 느껴졌다.
냄새가 흘러오는 쪽으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레아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건너편 나무에 걸터앉아서 느긋하게 잎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금색 눈동자가 장난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이런, 들켰군.”
그가 연기를 내뱉으며 웃었다.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가려 했더니.”
레아는 너무 놀라서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벌렸다. 이샤칸은 피우고 있던 잎담배를 정리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한쪽 손에 작은 자루를 든 그가 훌쩍 발코니 쪽으로 뛰어들었다.
발코니와 나무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이샤칸은 발걸음 하나 내딛듯 가뿐히 레아의 앞에 착지했다.
하지만 씩 웃어 보이던 그는 멈칫 몸을 굳혔다.
“……레아?”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다.
이 남자가 한밤중에 왕녀궁을 무단침입 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것이 있었다.
레아는 그렁그렁 눈물 맺힌 채 대뜸 말했다.
“대추야자…….”
이샤칸이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흑, 하고 울음을 삼키며 그에게 설움 가득히 외쳤다.
“준다고 해놓고…… 왜 안 줘요……!”
“…….”
이샤칸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들고 온 작은 자루를 내밀었다. 자루 안에는 상자가 가득했다.
말린 대추야자가 들어있는 상자들이었다.
후다닥 상자를 꺼낸 레아는 그 자리에서 한 통을 끝장내버렸다.
그리고 곧장 두 번째 상자를 꺼내서 절반을 먹어치웠다.
신나게 배를 채운 후에는 남은 상자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침실 안쪽에 숨겨놓았다.
잔뜩 쌓아놓고 하나씩 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까지 나왔다.
먹이를 저장해놓은 다람쥐가 된 기분이었다.
상자를 다 집어넣어놓고 나니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레아는 어색하게 이샤칸을 돌아보았다.
“……아.”
뒤늦은 민망함에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레아는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트렸다.
두 번이나 식탐 부리는 꼴을 보였다. 이제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도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살며시 눈을 들어보니, 이샤칸은 비웃거나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느릿하게 질문했다.
“혹시 드레스 따윌 입힌다고 널 굶기는 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냥, 요새 입맛이 없어서…….”
이샤칸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는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왜 입맛이 없어.”
그건 레아도 모르는 일이었다.
먹기만 하면 구역질이 치밀어서 죄다 토하는데, 대추야자는 먹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우스워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이샤칸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겨우 살 좀 붙여놨더니…….”
쯧, 하고 혀를 찬 그가 레아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오늘 날이 좋던데. 함께 밤 산책이나 가는 것이 어때.”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식적인 언행이라는 사실을 알려줘 봤자 소용없을 터였다.
애초부터 그런 걸 신경 쓸 이였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어찌 거절하고 돌려보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이샤칸이 턱을 가볍게 붙들었다.
“대추야자도 잔뜩 주고…….”
긴 손가락이 레아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가에 묻어있던 대추야자 과육을 쓸어낸 그는 손끝을 핥으며 웃었다.
“더 맛있는 것도 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