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02
-102-
연회장에서 돌아와 기절하듯 잠든 레아는 다음 날 개운하게 눈을 떴다.
조금이라도 먹은 덕분인지, 한동안 제대로 먹질 못해서 비실거리던 몸에 기운이 반짝 돌았다.
오래간만에 기운이 나니, 밀린 업무들도 의욕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간밤의 수난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슬며시 떠보듯 물어보아도 그녀는 자신이 휴게실에서 레아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수를 써서 백작부인의 기억을 바꿔버린 것인지 궁금했다.
급한 업무를 처리한 뒤, 레아는 잠시 짬을 내어 정원을 산책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곧장 빈틈 사이로 의문이 스며들어왔다.
자신은 처음 보는 대추야자의 맛을 어찌 알고 그리워했을까.
남자의 말처럼 잃어버린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설핏 웃음이 나왔다.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라니, 정말로 그에게 온통 휘둘리고 있구나 싶어서였다.
그 이후 며칠 내내 레아는 이샤칸을 생각했다.
끈질기게 떠오르는 생각은 블레언을 좋아하는 마음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제 구역을 넓혀갔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일단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고, 그가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다.
이샤칸을 생각하다가 업무에서 실수까지 저질렀을 정도였다.
위험한 호기심이었다. 날름거리는 불꽃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모양새에 홀려서 그것이 마치 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종일 떠올리기만 할 뿐, 실상은 그를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레아는 오직 생각들로만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왕녀님!”
“……고마워요.”
오늘은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가봉하는 날이었다.
에스티아 최고의 장인들이 전부 나서서 만들어낸 순백의 드레스로, 작은 수정을 일일이 실로 꿰어서 무늬를 수놓은 모양새가 압도적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는 레아에게 맞춘 듯이 어울렸다.
재단사와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찬사를 쏟아냈지만, 레아는 표정 없는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불분명한 기시감이 몸을 스쳤다. 과거에도 이런 새하얀 옷을 입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레아는 섬세한 레이스 장갑에 휘감긴 손으로 거울을 짚어보았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문질러보았지만,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혹 미흡한 부분이라도……?”
재단사가 눈치를 살피며 질문했다. 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완벽해요.”
기쁜 척 미소를 지어 보이니, 재단사와 시녀들은 그제야 안심하며 함께 웃어 보였다.
그러나 레아는 그들의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원래의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었는데도 설레지가 않았다. 자꾸만 속이 갑갑했다.
드레스가 불편하고 무거워서 그런 것 같다고, 레아는 혼자 마음을 다스렸다.
가봉이 끝나고 드레스를 벗어내자 그나마 조금 홀가분해졌다.
재단사를 돌려보내고, 시녀들과 함께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각국에서 방문한 사절단들 때문에 할 일이 배로 늘어난 상황이었다.
거기다 결혼식 준비까지 해야 하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버겁다는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정신없이 시달리며 일에 매진하던 때였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목소리를 낮게 하여 말했다.
“미라옐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알현 신청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예. 사전에 어떠한 연락도 없었습니다.”
레아는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교만한 행태였다.
블레언의 총애가 없었다면 왕녀궁 문턱도 밟지 못했을 텐데, 알량한 권력에 취해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교만해질 거리들이 많기는 했다. 여태 레아는 미라옐 부인 앞에서 못 볼 꼴을 많이 보였다.
침실에서 블레언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미라옐 부인이 지켜보고 있었다.
부부관계를 하지 못하는 아내라니. 코르티잔인 그녀가 레아를 얼마나 우습게 여길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블레언에게 미안할 일이지, 미라옐 부인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와 내가 만날 이유는 없지 않나요.”
레아는 냉랭히 말했다.
“돌려보내세요.”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린 레아는 얼마간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블레언과 성교를 하지 못하면 필시 큰 문제가 생길 터였다.
폐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항상 레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블레언과 성교를 맺으려 들면 항상 겁부터 났다. 어째서 그렇게 거부감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
레아는 잠시 눈매를 찌푸렸다. 아랫배에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 약간 당기듯 아파왔다.
달거리가 불규칙한 편인데, 근래 몇 달째 소식이 없더니 슬슬 하려고 통증이 오는 모양이었다.
불현듯 재단사가 허리둘레가 조금 늘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배가 살짝 나온 것도 같았다.
먹은 것도 없건만 배는 왜 나오는지 의아했다.
세르디나가 알면 드레스 모양이 망가진다고 나무랄 텐데 걱정이었다.
한번 걱정을 시작하니 끝이 없어서, 레아는 생각 자체를 관두었다.
지금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거리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수도 치안에 관한 서류를 읽어 내리고 있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환한 금발의 여인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에스티아에 빛이 내리길.”
미라옐 부인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레아의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레아는 그녀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왕녀궁의 시녀들과 기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몰려있었다.
보아하니 미라옐 부인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눈치였다. 기사들이 그녀를 강제하지 못한 이유는 알고 있었다.
전부 블레언이 두려운 탓이었다.
블레언의 난폭함은 왕궁에서 유명했다. 그는 제 심기를 거스르는 이를 결코 용서치 않았다.
그런 블레언에게 총애 받는 미라옐 부인을 잘못 건드렸다간 어떤 벌을 받게 될지 모르니, 섣부르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레아는 가볍게 한숨 쉬며 깃펜을 내려놓았다.
보고 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앉은 채로 미라옐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궁에 들어왔으면 기본적인 예법은 알 것이라 생각했는데.”
새치름한 눈으로 저를 보는 그녀에게 레아가 잘라 말했다.
“왕궁 예법을 가르쳐줄 선생을 새로 구해야겠어, 미라옐 부인.”
하지만 냉담한 어조에도 미라옐 부인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어머나……. 곡해하지 마셔요.”
그녀는 샐쭉 웃으며 달라붙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교양 없는 말씨에 멜리사 백작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레아는 미라옐 부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연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내버려둬 볼 생각이었다.
미라옐 부인은 레아의 집무실을 스윽 둘러보았다.
각종 서류로 빡빡하게 채워진 책상을 살피던 그녀가 레아의 손을 보더니 눈매를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레아는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 잉크가 묻어있었다. 일이 바빠서 묻은 줄도 몰랐었다.
“왕궁 업무도 중요하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요?”
미라옐 부인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여러모로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가령 예를 들어…….”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그녀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전하께서는 뒤로 하는 걸 좋아하신다든가.”
그리고 기어코 해선 안 될 말까지 내뱉었다.
“노력하셔야죠, 왕녀님. 어머니처럼 폐비가 되시면 곤란하잖아요?”
집무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미라옐 부인은 기대에 찬 눈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대충 무슨 생각으로 머리 굴려서 찾아왔는지 짐작되었다.
그녀는 레아와 크게 싸움이 나길 원하고 있었다.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아, 왕녀궁에서 모진 꼴을 당했다며 블레언을 찾아가 이간질하려는 속셈이리라.
문득 피로함이 느껴졌다. 굳이 미라옐 부인과 소모전을 벌여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탓이었다.
이럴 시간에 서류 한 장이라도 더 봐야 하는 처지였다.
“미라옐 부인.”
레아는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아내며 물었다.
“왕의 총애가 떨어질까 불안한 모양이지?”
“……!”
미라옐 부인은 허점이라도 찔린 사람처럼 움찔 떨었다.
“나를 찾아와 대거리할 시간에 그대의 미모를 가꾸는 일에 힘쓰는 게 어떨까.”
“그, 그런…… 말씀을…….”
“그대는 코르티잔이지 않나.”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녀에게 레아는 차분히 꽂아 넣듯 말했다.
“왕비가 아니라.”
미라옐 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대번에 악독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밤일도 못하는 반푼이 주제에……!”
“뭐 하는 짓거리지?”
차가운 목소리가 집무실을 갈랐다. 레아도, 미라옐 부인도 놀라서 돌아보았다.
문 앞에 블레언이 싸늘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사냥복을 입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복사꽃 가지를 내던지고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곧장 미라옐 부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놀라서 비명조차 못 지르고 헐떡이는 그녀를 움켜쥔 채, 블레언이 재차 물었다.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