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01
-101-
레아는 섣부르게 답하지 못했다.
죽음을 논하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나, 눈빛에는 어떤 장난기도 섞여있지 않았다.
여기서 까닥 한 마디라도 잘못했다간,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레아가 답을 하지 못하자 이샤칸은 느릿하게 눈매를 좁혔다.
그의 손가락이 조금 불긋해진 눈가를 훑었다. 간지러움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잘게 떨리는 몸과 살짝 물기 어린 보라색 눈동자를 확인한 이샤칸이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사납게 굴었군.”
레아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분명 무서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신뢰감이 들었다.
그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신뢰였다.
고작 두어 번 본 것이 전부이건만,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마음을 품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괴로워하며 분노하는 남자를 안아주고 싶어서 자꾸만 손이 꼼틀거렸다.
한참 머뭇거리던 레아가 이샤칸의 몸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을 때였다. 짧고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금색 눈동자 위로 짜증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도둑놈이 눈치가 빨라.”
이샤칸은 레아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하지 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이뤄진 입맞춤이었다.
“어서 나를 기억해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이샤칸은 짧은 말을 남겨놓고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녹아 없어지듯 사라지는 그가 아쉬워서, 레아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손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잔뜩 술기운이 오른 블레언이었다.
레아가 오랫동안 연회장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직접 찾으러 온 듯했다.
그는 휴게실 안을 샅샅이 살폈다. 마치 누가 숨어있나 찾아보듯 둘러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레아는 살짝 문을 살폈다.
아까 이샤칸이 내려쳐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부서지지는 않은 듯했다.
블레언은 휴게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입을 열었다.
“왜 혼자 있지?”
레아는 흔들림 없이 답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잠시 심부름을 보냈어요.”
사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둘러댔다. 이샤칸이라면 알아서 뒷수습 해놓았을 것 같았다.
레아의 대답을 들은 블레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가 비틀비틀 걸어와 레아를 끌어안았다.
“레아.”
술 냄새가 지독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속이 술 냄새를 맡으니 다시 울렁거렸다.
레아는 숨을 최대한 적게 쉬려 노력했다.
블레언은 레아가 고군분투하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레아를 끌어안은 채 만지작거리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넌 복숭아를 좋아했어.”
그랬던가?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다른 과일보다 각별하게 더 좋아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러나 블레언이 저리 말하니, 앞으로는 그런 척해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맞춰주지 않아서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깃펜 말고 복숭아나무를 선물하도록 하지. 아냐, 복숭아과수원을 하나 사서 별장으로 삼을까.”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빨라졌다. 조용한 레아를 안고서 그는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꽃은? 너 꽃 좋아하잖아. 원하는 꽃을 잔뜩 심어줄게.”
블레언은 어린 소년처럼 웃으며 말했다.
“별장이 완공되면 휴가를 가자. 그곳에서 새로운 기억을 덮는 거야…….”
레아와 함께할 미래를 상상하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솜털처럼 폭신한 꿈에 취해 잔뜩 들떠있었다.
허나 레아는 블레언의 상상에 함께하지 못했다.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었다.
거칠고 사납지만, 포근하고 따뜻했던 품.
뜨거운 체온은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고, 시원하면서도 끝이 달짝한 향은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았다.
정혼자의 품에 안겨서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레아는 애써 제 마음을 단속했다.
위험한 사랑에 목숨 거는 일은 미욱한 자들이나 저지르는 짓이었다.
그런데 그 짓을 지금 레아 자신이 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좋아해온 연인과 결혼식을 얼마 남겨두지도 않고 말이다. 짐승만도 못한 꼴이었다.
그러나 레아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심장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었다.
남자는 레아의 논리와 이성을 벗어났다.
그의 앞에서는 어떤 상식을 들이대도 어긋나기 일쑤였으며, 반듯하던 질서는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졌다.
문득 왼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수갑처럼 거슬렸다.
레아는 살며시 손을 움켜쥐었다.
내가 네 남편이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남자. 존재하지도 않는 기억을 되살리라며 다그치는 남자.
사실 그가 말하는 기억이 무엇인지, 아직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레아는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 * *
하반과 게닌, 모르가는 기절한 멜리사 백작부인을 두고 둥글게 둘러앉았다.
모르가는 미리 만들어온 묘약을 먹여 멜리사 백작부인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었다.
과거 오베르데 변경백에게도 한번 써먹었던 주술이었다.
모르가가 열심히 작업하는 동안, 하반과 게닌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쭈그려 앉아있었다.
모르가는 시무룩한 두 호위기사를 보고선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사건이었다.
레아와 이샤칸이 마지막 맹세의 의식을 치르기 전에, 쿠르칸은 에스티아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게 되었다.
하여 급하게 대비를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무력하게 눈앞에서 왕의 반려를 빼앗겼던 그날은 다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에스티아로 가겠다고 미쳐 날뛰는 이샤칸을 겨우 붙잡아놓고, 쿠르칸이 정벌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에스티아에 남겨놓은 쿠르칸들에게서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레아가 기억을 잃고 블레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르가는 왕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고해야 했다.
-주술을 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왕비는 밖에서 낳아온 아이를 여태 왕족인 척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머리카락 색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고귀한 왕족의 피가 되도록 설계된 주술이었다.
최소 십 년은 넘게 공들였을 주술은 가짜 왕태자가 진짜 왕족으로, 에스티아의 왕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완성되었다.
어느 주술사도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할, 대담하고 까다로운 주술이었다.
그리고 주술을 완성시킨 왕비는 끝을 모르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 모르가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모르가는 남은 자료를 바탕으로 레아에게 걸린 주술을 모두 파악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이 연결된 주술은 없었다. 왕비를 죽이더라도 레아는 무사할 터였다.
허나 왕비의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주술을 푸는 일은 요원해졌다.
술사가 죽는다고 해서 주술이 풀리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레아는 블레언을 사랑하는 채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사막으로 다시 데려오더라도, 이샤칸은 평생 다른 이를 사랑하는 반려를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지만, 모험해볼 만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쿠르칸 주술사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연구한 끝에, 모르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레아 님께서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고 잘못된 감정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이샤칸이 있기 때문에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샤칸은 주술사들에게 재앙과 같은 존재였다.
주술의 불확실성을 극대화시키는 강력한 변수이기 때문이었다.
일전에도 이샤칸과 가까이 접촉하며 체액을 주고받으면 주술이 약해지곤 했다.
게다가 서로 반려의식을 통해 영혼의 일부가 엮여있는 상태였다.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몹시 낮은 확률이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만일 성공한다면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레아에게 걸린 주술은 세뇌를 기반으로 하여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억과 감정을 되찾는다면 앞에 걸려있던 세뇌까지 전부 깨트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보존해놓는 게 좋습니다. 기억을 자극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지요.
하여 에스티아 왕궁에서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어보자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결정지었을 때, 에스티아에서 서신이 날아왔다.
결혼식에 초대하는 청첩장이었다.
숨죽인 쿠르칸들 앞에서 이샤칸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반려가 결혼식을 치르는 모습까진 보고 싶지 않군.
그러나 그것이 끓어오르기 직전의 고요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결혼식을 거사일로 결정한다. 그때까지 그녀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는 것으로 하지.
만일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더라도, 사막으로 데려가겠노라고 결론 내렸다. 이샤칸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적절한 도움만 준다면, 분명히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을 터…….
나는 그녀를 믿어.
반려를 향한 신뢰는 무엇보다도 단단했다.
이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르가조차 순간 낙관적인 희망을 가질 정도로 말이다.
레아 님…….
아직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이샤칸은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한계의 끝에 서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를 떠올리며 모르가는 초조히 입술을 씹었다.
주술을 마무리한 모르가가 바닥에 끌린 옷자락을 털면서 몸을 일으켰다.
“끝일세.”
게닌과 하반이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모르가는 두 쿠르칸들 앞에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부탁할 것이 있네. 레아 님께서 알고 있었던 사람 중에 세뇌를 당하지 않은 이가 있으면 좋겠네만.”
왕비의 손에서 벗어난 이가 필요했다. 기억을 자극하는 데 필시 도움이 될 터였다.
모르가의 말에 게닌이 입을 열었다.
“과거 왕녀궁에서 시녀로 일하다가, 장례식 전에 궁 밖으로 나간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게닌은 이름이 생각 안 나는지 머뭇거리다 말했다.
“시나몬……?”
그리고 하반이 앙칼지게 외쳤다.
“시나엘 남작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