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15
-115-
밤이 깊었으나 세르디나는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얇은 침의 차림으로 응접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시녀들도 두지 않고 혼자서 직접 병을 기울여가며 포도주를 비워나갔다.
투명한 유리잔에 피처럼 붉은 술이 채워졌다.
평소 같았다면 향을 맡고 음미했겠지만, 오늘은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켰다.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데도 정신은 점차 또렷해질 뿐이었다.
세르디나는 결국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너른 방을 가로질러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녀는 커튼을 걷어내고 창턱에 걸터앉았다.
고요한 밤의 왕궁을 바라보는 눈빛은 싸늘했다.
에스티아를 완전히 손에 넣었음에도 아직 부족했다. 세르디나가 품은 야망은 고작 이런 소왕국에서 끝나지 않았다.
결혼식을 기점으로 다른 국가들을 향해 손을 뻗을 계획이었다.
하나씩 무너뜨려 대륙을 발아래 둘 것이지만……. 블레언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레아, 레아, 레아.
세르디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름을 되뇌었다. 그년만 고분고분해지면 블레언도 얌전해질 터였다.
결혼식 때는 정말 제대로 망가뜨려놓을 생각이었다. 야만족 놈들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나는 이제 신이야.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즐겁게 웃던 때였다. 세르디나는 눈매를 찌푸렸다.
“손님을 초대한 기억은 없는 듯한데…….”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살풋 웃었다.
“쿠르칸의 왕께서는 어찌하여 야심한 시각에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응접실에는 장신의 사내가 서있었다. 구름이 걷히며, 그림자처럼 어둠과 섞여있던 남자에게 달빛이 드리웠다.
표정 없는 얼굴에 박힌 황금색 눈동자가 금속처럼 차가웠다.
결혼식 전에 부닥치리라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이른 방문이었다. 세르디나는 새삼스럽게 그를 관찰했다.
야만족의 왕은 과거 처음 에스티아를 찾았을 때와 다름없었다.
여전히 오만한 눈을 한 남자를 보고 있자니, 흔들어주고픈 충동이 치밀었다.
세르디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사내가 밤중에 여인의 방을 찾는 것은 한 가지 뜻밖에 없을 텐데…….”
천천히 다리를 벌리자 얇은 천이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짐승하고 붙어먹는 취미는 없지만, 왕이시라면 한 번 정도는 먹어드리겠습니다.”
이샤칸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사내의 앞에서 옷자락을 걷어 허벅지를 드러내던 때였다.
철썩 소리와 함께 뺨에서 불길이 일었다.
“……!”
창문틀에 머리가 세게 부닥쳤다. 쾅 소리가 적막하던 응접실을 뒤흔들었다.
눈앞이 빙빙 돌면서 고통이 올라왔다.
한쪽 뺨이 무섭도록 화끈거렸다. 잠시 정신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리는데, 이샤칸이 다시 손을 치켜올렸다.
그는 곧바로 반대쪽 뺨을 갈겼다.
“아악!!”
몸이 아래로 고꾸라지면서 방바닥을 굴렀다. 고통을 추스를 새도 없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세르디나는 고개가 뒤로 확 꺾인 채로 손을 허우적거렸다.
손톱에 걸리는 살갗을 마구 할퀴었지만, 질기고 단단한 살가죽에는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완전히 공포에 빠져 헐떡이던 찰나,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못하는 버러지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세르디나는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힘을 끌어올렸다.
새까만 연기가 세르디나를 회오리처럼 휘감으며 피어올랐다가, 갈래갈래 나뉘어져 이샤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연기는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세르디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어째서…….”
망연한 중얼거림에 이샤칸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세르디나는 무력함을 느꼈다.
자랑스러운 롬의 주술사가 된 뒤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감정이었다.
“…….”
있는 힘껏 어금니를 맞물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마구잡이로 힘을 끌어올렸다.
검은 연기가 응접실을 가득 메울 듯 거대하게 불어났다.
쏟아 넣듯이 퍼붓는 힘에 돌풍이 몰아쳤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온통 뒤흔든 바람은 응접실의 물건들을 엉망으로 쓸어냈다.
하지만 방 안의 모든 것이 휩쓸려 깨어지고 부서져도, 남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연기가 흩어지고 바람이 가라앉았을 때, 망가진 이는 세르디나뿐이었다.
세르디나는 숨을 헐떡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이샤칸이 머리채를 잡은 그대로 세르디나를 들어올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두피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발버둥 치면 머리카락이 뽑힐까 꼼짝도 못 하고 소리만 내지르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라.”
샛노란 짐승의 눈이 세르디나를 응시했다. 비명을 지르던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아직 필요가 있어 너를 내버려두었을 뿐.”
그는 단순하고 명료하게 경고했다.
“여기서 더 이상 날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왕비.”
세르디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허나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입술을 꿰매어버린 듯했다.
이샤칸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놓았다.
바닥에 추락한 세르디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아들에게 선물을 보내놓았다.”
“……!”
세르디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다음에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터이니…….”
그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기대하거라.”
그것이 끝이었다. 야만족의 왕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이샤칸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음에도 세르디나는 꼼짝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가운 하나 걸치지 않고 얇은 침의만 입은 채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복도에 나간 순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세르디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대비궁에는 언제나 집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들은 세르디나의 비호 아래 시종시녀 행세를 하며 왕궁을 어지럽히며 제멋대로 굴어댔다.
하지만 지금, 피가 이어진 형제자매들은 전부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었다.
마치 짐승에게 잡아 뜯긴 것처럼 몸이 갈가리 찢긴 채였다.
눈앞의 참사를 바라보던 세르디나는 작고 가냘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블레언.”
신발을 챙겨 신을 정신도 없었다. 맨발로 내달렸다.
본궁에 다다르니 시종시녀들이 전부 놀라서 뛰쳐나왔다.
평소 인자하고 너그러운 왕비가 산발로 뛰어오는 광경에 다들 기겁했다.
그러나 세르디나의 손짓 한 번에 모여들던 시종시녀들은 초점 없는 눈으로 스르륵 흩어졌다.
복도를 가로지른 세르디나는 블레언의 침실에 다다랐다. 닫힌 문 너머로 이미 비릿한 혈향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한이 든 것처럼 떨면서 문을 열었다. 펼쳐진 광경은 대비궁보다 참혹했다.
너른 침실 바닥에 잘린 목들이 뒹굴었다.
수십의 머리통들 중에는 엉망으로 터지고 함몰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사내들의 짧은 머리만 가득한 머리통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도드라지는 기다란 금발 머리카락…….
핏물에 흠뻑 젖은 금색 머리카락은 바닥에 치덕치덕 들러붙어있었고,
목 부분은 누군가 손으로 잡아 뜯은 듯 단면이 거칠거칠했다.
아름답던 얼굴은 원래의 이목구비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뒤틀려있었으나, 세르디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미라옐 부인이었다.
끔찍한 비명이 새겨진 얼굴은 그녀의 최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역력히 드러내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세르디나는 소스라치며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침대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블레언이 그녀를 불러주었다.
“……어머니.”
세르디나는 정신없이 블레언에게 뛰어갔다.
머리통들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도 서둘러 달려가 사랑하는 아들을 끌어안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어디 작게 상처 난 곳도 없었다.
먹먹한 안도감에 말도 못 하고 얼굴만 연신 쓰다듬는데, 블레언이 차갑게 손을 쳐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
블레언이 침묵하는 그녀의 멱살을 잡아채며 윽박질렀다.
“또 무슨 짓거리를 벌인 거냐고!!”
하지만 세르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블레언이 흔드는 대로 힘없이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이 잘린 목으로 가득한 침실을 환하게 비추었다.
* * *
밤이 한참 깊었다. 그러나 레아는 잠들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뜬눈으로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샤칸이 없어서일까.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현실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했음에도, 미련은 깨끗하게 끊어지지 않고 지저분히 달라붙어서 자꾸 뒤돌아보도록 만들었다.
왕녀궁의 기사와 시녀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날 밤에 목숨을 잃거나 하진 않은 듯한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블레언도 불쑥불쑥 떠올라서 괴로웠다.
이샤칸과 있을 때는 블레언 따위, 손톱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자마자 블레언이 대번에 머릿속을 차지했다.
냉철한 이성은 레아가 저지른 짓을 비난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신 차리라며 엄중히 경고했다.
생각을 쫓아내려 애쓰며 방 안을 거닐던 때였다.
“……!”
누군가 등 뒤에서 레아를 느릿하게 끌어안았다.
조금 놀랐지만, 느껴지는 온기에 금세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샤칸 님.”
얼른 뒤돌아보니 동공이 바짝 좁아진 황금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달아오른 눈빛에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그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피 냄새가 나요.”
하지만 이샤칸은 모른 척 레아를 끌어안았다.
덩치 큰 그가 안겨드니 버거워서, 레아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자꾸 딴청 부리는 남자를 밀어내며 물었다.
“어디 다쳤어요?”
“그럴 리가.”
이샤칸은 설핏 웃더니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내게 다쳤냐고 물어보는 이는 너밖에 없어.”
짙은 혈향과 함께 돌아온 남자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온 것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쿠르칸의 본성은 짐승과 가깝다고 들었다.
그에게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목숨을 취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터였다.
하지만 이유 없이 손에 피를 묻힐 성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레아는 이샤칸이 무엇을 위해 살육을 벌였는지 궁금했다.
말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이샤칸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나쁜 놈들을 혼내주고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