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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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서남에 위치한 에스티아 왕국은 문화와 예술로 명성 높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가들은 대부분 에스티아 출신이었다.
거장들은 자신의 고국을 사랑했으며, 아름다운 왕실을 위해 작품을 바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숨결이 스친 에스티아 왕궁은 예술의 정점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붉은 벽돌과 회색 우석으로 지은 궁전은 특별한 도료를 발라 햇빛을 받으면 우아하게 반짝였다.
아름다운 외관만으로도 경탄스러운데, 그 내부는 더욱 화려했다.
수직으로 뻗어 올라간 원기둥과 긴 복도를 중심으로 섬세하게 이어지는 수십 개의 방들은 백색 대리석을 주로 하여 갖가지 유색 대리석과 황금, 보석으로 치장했다.
궁전 곳곳에는 조각상과 그림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전부 이름만 들어도 놀랄 거장들의 것이며, 어딜 가든 귀하게 취급받을 예술작품이었다.
허나 왕실은 그것들을 단순한 장식품 따위로 치부하며 보란 듯이 궁전에 늘어놓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모습과 달리, 왕실의 내부는 처참했다.
귀족들은 더 이상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때 태양에 비견될 만큼 높이 받들어지던 에스티아의 왕은 작금에 이르러선 작은 등불만도 못한 처지였다.
왕은 의미 없는 자존심을 움켜잡고 현실을 외면했지만, 왕권이 바닥에 추락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금번에 결정된 왕녀의 결혼은 왕실의 추락을 명백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오베르데 변경백은 왕녀를 원했고, 왕실은 그에게 군말 없이 왕녀를 내어주었다.
변방에서 쿠르칸을 막아내는 오베르데 변경백의 군사력은 일국의 왕이라 불려도 좋을 수준이었다.
실제로 그는 왕족만이 쓸 수 있는 보라색 옷을 대놓고 입기도 했다.
따뜻한 바다에서 사는 수십만 마리의 고둥을 으깨어야 겨우 옷 한 벌을 염색할 수 있을 만큼 귀한 보라색 염료였다.
그것을 변경백이 독점하는 바람에, 정작 왕족들이 쓸 염료가 부족했던 적도 있었다.
변경백의 오만함은 수많은 이들에게 질타 받았으나, 전부 뒤에서 수군거릴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면전에서 대들지 못했다.
힘없는 왕실 또한 그를 막지 못하니, 차라리 오베르데 변경백을 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지경이었다.
“……왕녀님, 차를 새로이 내어올까요.”
멜리사 백작부인의 목소리에 레아는 정신을 차렸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레아가 상념에 잠겨있는 것을 알고서, 실례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일깨운 것이었다.
“고마워요, 부인.”
한창 집무를 보는 중인데 잡생각이라니. 레아는 속으로 스스로를 나무랐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세르디나가 시녀를 통해 보낸 전갈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둘이서 저녁식사나 하자꾸나. 네게 줄 선물도 있으니, 조금 이르게 왕비궁으로 건너오렴.
세르디나와의 식사.
그것은 레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전갈을 받은 순간부터 온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었다.
레아는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딴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멜리사 백작부인과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무대신과 궁정백까지 불러놓았다.
레아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현재 레아는 왕궁의 관리들에게 업무를 인계하는 중이었다.
여태 레아가 왕궁 업무의 대부분을 맡아왔기에, 결혼으로 생겨날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접 업무를 분배하여 인계하고 세부사항을 지시하는 중이었다.
왕실은 레아를 버렸지만, 왕국민들은 죄가 없었다. 맡은 책임은 최대한 잘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내가 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제를 개편할 생각이에요.”
이것을 초안으로 잡도록 하자며, 레아는 미리 작성해놓은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건네받은 재무대신 로랑은 작게 숨을 들이켜더니, 옆의 발테인 궁정백에게도 보여주었다.
발테인 궁정백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그가 멋들어진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마 대영주들의 반발이 만만찮을 겁니다. 특히 오베르데 변경백이…….”
발테인 궁정백이 말하다 말고 눈치를 보았다. 옆에 서있던 멜리사 백작부인이 그를 맹렬하게 노려본 탓이었다.
레아의 시녀들에게 현재 오베르데 변경백은 원수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부인.”
“죄송합니다, 왕녀님.”
레아의 짧은 부름에, 멜리사 백작부인은 그제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레아는 발테인 궁정백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계속 말하세요.”
차분한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의 기복도 담겨있지 않았다. 발테인 궁정백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변경백은 최근 야만족을 핑계 삼아, 오베르데 령에 부과된 조세를 줄여 달라 요청한 바 있습니다.”
레아는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변경백이 세력을 불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쿠르칸을 빌미 삼아 각종 혜택을 누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다른 영주들에 비해 수많은 이득을 누리고 있건만, 줄기차게 특혜를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레아는 깃펜에 잉크를 묻히며 입을 열었다.
“욕심이 끝도 없군요. 차라리 쿠르칸이 왕성을 침공하는 쪽이 좀 더 재정을 아낄 수 있겠어요.”
발테인 궁정백과 재무대신 로랑은 일제히 헛기침을 했다. 웃음을 감추려 그러는 것이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그냥 대놓고 웃었다. 레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쪽 서기관은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이가 아니었나요? 오베르데 령에 과연 조세 감면이 필요한지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 결정하도록 하죠.”
“예, 왕녀님. 그리 진행하겠습니다.”
로랑이 정중히 답했다. 서류에 서명을 하다 말고, 레아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보다 내가 오베르데 령으로 가는 것이 빠를 수도 있겠지만.”
“…….”
집무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가져온 결과가 무거웠다.
경솔한 발언을 후회하며 다시 분위기를 환기하려던 때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왕녀님. 시나엘 남작부인입니다.”
“들어오세요.”
본궁으로 심부름을 보내놓았던 레아의 시녀, 시나엘 남작부인이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이었다.
심상찮은 기색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시나엘 남작부인은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야만족들이 왕궁으로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
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시나엘 남작부인을 쳐다보았다.
“에스티아와 화친을 원하며, 회담을 위해 사신단을 보낼 것인데…….”
그녀는 잠시 헐떡이는 숨을 고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만족의 왕이 직접 사신단을 이끌고 에스티아를 방문하겠다고 합니다.”
* * *
짐승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전해지는 야만족, 쿠르칸은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 대륙에 존재했다.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한 사막지대에 무리지어 사는 그들은 각기 피를 이어받은 짐승에 따라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갈래갈래 찢어진 부족들을 이끄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으니.
바로 쿠르칸의 왕이었다.
왕을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약육강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대륙은 쿠르칸의 야성을 비난하며 야만족이라 일컬었다. 그들이 경멸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약탈혼 풍습이었다.
쿠르칸은 반려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상대를 반려로 인식하는 순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범죄조차 거리낌이 없어서, 합법적인 수단으로 데려올 수 없다면 강제로 납치하는 일 또한 서슴없이 자행했다.
쿠르칸의 약탈혼은 대륙에서 큰 문제였다. 그러나 대륙의 국가들은 말로만 쿠르칸을 비난할 뿐, 군사행동을 벌이진 못했다.
이미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대륙은 연합군을 만들어 쿠르칸을 침공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약탈혼을 비난하며 벌인 성전이었지만, 속내는 검었다.
노예로 값비싸게 팔리는 쿠르칸을 대량으로 잡아들이고 싶다는 음험한 욕심이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연합군은 야심차게 정벌에 나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와해되었다.
그것은 대륙인들이 겪어보지 못한 기후 때문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모래의 땅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연합군은 낮에는 불같은 더위, 밤에는 얼음 같은 추위에 시달리며 고전했다.
불리한 것은 기후만이 아니었다. 타고나길 뛰어난 전사인 쿠르칸들은 날렵하고 용맹했으며, 사막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지형과 기후를 이용한 쿠르칸의 공격에 연합군은 장난감처럼 놀아났다.
형편없는 패배를 거듭하다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뼈아픈 전쟁 이후, 대륙은 쿠르칸에 대해 묵인하는 방식을 택했다.
쿠르칸 또한 대륙과 어떤 교류도 없이 단절된 세계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지금, 얄팍하게 유지되었던 평화가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