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66)
66화
“하아……. 후우…….”
뒤늦게 날숨을 내쉬며 손등을 살펴보았다. 먹잇감을 표시하는 검은 문양은 어느새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298층보다도 훨씬 약해서 수월했어요.”
“하긴 그래요. 신성력을 썼으면 좀 더 쉽게 끝났을지도요.”
그때 메시지 창에 불이 났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보스 처치 알림을 듣고 와서 깜짝 놀랍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당신이 왜 탑이 아니라 던전에 있냐고 묻습니다.] [‘천기누설 감찰관’이 튜토리얼 지역을 무단이탈하고도 알림이 안 울린 데에 놀랍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어뷰징이 의심된다고 외칩니다.]‘어뷰징이라뇨. 그런 거 아니고요. 건축가님께 물어보세요.’[‘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자진해서 시말서 양식을 불러옵니다.]빙의 관리국 신들이 건축가님을 대상으로 청문회를 열러 갔다.[‘천기누설 감찰관’이 자리를 지키며 눈을 부릅뜹니다.]날 감시하는 것이 우선인 감찰관님만 빼고.
나는 일행에게 다가가 수성의 방벽을 거두었다.
“다친 덴 없으시죠?”
“…….”
다들 대답 없이 나를 멍하니 보기만 했다.
“저기요, 여러분?”
“…….”
“여러분……?”
“…….”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저 몇몇 사람들이 넋 나간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 게 고작이었다.
“혼자…… 해치웠어…….”
“어떻게 S급 던전을…….”
그러게요.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사실은 내가 너를 붙잡은 거야.”
아일렛과 옵스큘리아의 전투가 한창일 당시.
“…….”
분홍 머리 알러지가 있는 레이, 그러니까 ‘레이윈 발렌슈타인 소공작’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힐러인 줄로만 알았던 알러지 유발 존재가 오러로 S급 보스를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러와 신성력, 오러와 마법을 수양하여 시너지를 내는 강자들, 일명 ‘듀얼 능력자’들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오러를 주능력으로 각성한 자들로, 신성력이나 마법은 거의 초보 수준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수준급 신성력을 각성한 소드 마스터라고?
혹여 성황청에서 키운다는 ‘성흔양’인가 싶었지만 치유력이 있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신성력이 영락해 가는 이 시기에 그녀가 보여준 치유력은 엄청났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아무리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평생 신성력 외길을 걸으며 환자에게 헌신함으로써 치유력만 갈고 닦았어야 정상이다.
‘이게 말이 돼……?’
심지어 아일렛이 쓰는 검술이 그녀의 비정상적인 오러 경지를 알려주었다.
영웅 아그네스의 이름과 함께 유명해진 사복검술.
이 검술로 말할 것 같으면,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입문이 가능한, 극악 난이도의 변태 같은 검술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지금 레이윈을 비롯한 일행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은빛 성채 모양의 결계도 범상치 않았다.
메테오도 막을 법한 궁극 결계가 분명했다.
이쯤 되면 신성력과 오러 중에서 어느 게 주능력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듀얼 능력자였다.
‘맙소사…….’
레이윈은 눈앞에서 전설이 펼쳐지는 기분으로 전투 중인 아일렛을 바라보았다.
분명 통로를 걸을 때만 해도 선하고 밝게 웃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검을 든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표정을 지운 채 무섭도록 진지한 눈빛으로 적을 직시하는 모습.
레이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숨이 조금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쿠우웅!
어느새 전투는 마무리를 앞두고 있었다. 바닥에 처박힌 옵스큘리아의 가면을 그녀가 검으로 겨누었다.
길게 뻗은 팔과 검이 만들어내는 직선이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느낀 그 순간.
퍼석! 파스스스…….
관통당한 옵스큘리아가 검은 가루가 되어 비산했다.
“단신으로 S급 보스를 처치했어…….”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로델라인은 대체 뭐 하는 집안이길래……?”
사관학교 117기 수석 졸업생 프린츠 로델라인도 대단했지만, 그의 여동생은 그보다 더했다.
아니, 비교를 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였다.
압도적인 우월함 앞에서는 사감을 가져봐야 무의미했다.
레이윈은 이번 일을 계기로 분홍 머리 알러지가 싹 낫는 것을 느꼈다.
한편, 경외감을 갖는 것은 그만이 아닌 듯했다.
“인간이 맞는 걸까요.”
목소리의 주인은 애쉬였다. 그는 아일렛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집요함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네요. 누님과 관련된 사람들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좋은 다짐이었다.✠생명이 멸절해 버린 사막 위에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마계의 땅. 사나락(沙奈落)에도 소식이 들려왔다.
“내 귀여운 애완동물이 죽었군?”
이곳의 주인이자 마계 서열 2위의 마왕, 카르페이오스가 생각에 잠겨 턱을 매만졌다.
그가 앉은 왕좌 앞으로는 길고 투박한 돌계단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었다.
흡사 산 정상의 성지로 이어지는 순례자의 길 같은 모양새.
그것은 바로 사나락의 독특한 알현장이었다.
그곳에 대군이나 다름없는 무수한 마족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마왕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카르페이오스가 말을 덧붙였다.
“인간들은 이런 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표현하던가?”
별 감흥이 없는 듯이 여상한 음성이었다. 앞쪽에 자리가 배치된 힘없는 마족들 중 다수는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몇몇은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다.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퍼석! 퍼서서석! 퍼석!
카르페이오스의 붉은 눈이 번뜩인 순간, 서 있던 마족들의 머리가 사라졌다.
“히이이익!”
살아남은 마족들이 필사적으로 돌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자고로 마족의 미덕이란 욕망과 집착인 법. 특히나 카르페이오스는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이 각별하기로 유명했다.
“감히 인간이……. 미천한 가축 따위가 짐이 아끼는 애완동물을 해하다니.”
지금이야 귀찮아서 아무 데나 처박아두었지만 한때는 귀애하기까지 했던 애완동물이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우어어우어어 하던 게 퍽 귀여워서, 부드러운 슬라임 이유식까지 먹여가며 키웠거늘.
“용서할 수 없지.”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다음 안건.”
화제를 전환한 카르페이오스가 흉흉한 기운을 갈무리해서 마족들의 숨통을 풀어주었다.
“단악의 집행관의 행방은 아직인가?”
“소, 송구합니다.”
“로드리고 오르슈가 소멸한 지가 언제인데 그걸 아직도 못 찾아? 그러다 인간의 수명이 다해서 환생하면 더 찾기 어려워질 텐데.”
잔혹한 마왕의 눈이 또 붉게 번뜩이려는 순간, 마족 하나가 황급히 나섰다.
“오, 오르슈 백작이 소멸하기 직전의 행적은 알아냈사옵니다!”
“호오, 말해봐라.”
“마지막에 통신 거울을 통해 대화를 나눈 건 지브릴테 후작입니다.”
“암경매장의 주인에게 무슨 일로?”
“검보라색 사인화를 손에 넣었다며 시세를 문의했다고 합니다.”
“뭐라? 검보라색 사인화?”
카르페이오스의 눈이 다른 의미로 번뜩였다.
검보라색 사인화가 무엇이던가. 족보 있는 고위 마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수집품으로 통하는 마계의 국화(國花)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존재한다면 당연히 마왕인 카르페이오스 자신의 손에 들어와야만 했다.
일단 가지기만 한다면 옵스큘리아보다 더 귀애해 줄 생각이 만만했다.
물론 사나락의 땅은 척박하니까 화분 안에서 고이고이 키워야겠지.
카르페이오스는 오랜만에 소유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원예 계획을 짰다.
보고가 이어졌다.
“지브릴테 후작이 몇 번이나 검보라색 사인화를 입수한 게 사실인지 캐물었는데 정말인 것 같았더랍니다. 그래서 경매장에 꼭 출품하라고 했는데 마왕님께 바칠까 말까 고민 중이라며 튕겼다고 하고요.”
“호오, 그래?”
카르페이오스가 드물게 흡족한 얼굴을 했다.
“기특하고도 괘씸한 것. 바치고 나서 소멸할 것이지.”
로드리고 오르슈, 그 촐싹거리는 놈이 보기와 다르게 충신이었다고 재평가를 했을 때였다.
보고하던 마족이 눈치를 봤다.
“마왕님, 그게…….”
“뭔가?”
“어느 마왕님께 바칠 거냐고 물으니까 그것도 아직 고민 중이라고…….”
“…….”
그것은 실로 목숨을 건 직언이었다.
퍼서서서석!
“히이이익!”
주변에 있던 마족들이 하얗게 질렸다. 보고를 올리던 마족의 존재가 검은 피떡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뿌드득,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드리고 이 새끼가……?”
감히 마왕 셋을 놓고 간을 봐?
마왕의 주변으로 흉흉한 마기가 소용돌이쳤다.
끝이 붉은 금발이 폭발적인 상승기류에 미친 듯이 휘날렸다.
“힉, 딸꾹.”
“마, 마왕님, 고, 고정…….”
내버려 두면 알현의 계단에 있는 모든 마족을 화풀이로 찢을 듯한 분위기였다. 다른 마족이 다급히 진화에 나섰다.
“거, 검보라색 사인화의 행방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라.”
그제야 진정한 카르페이오스가 천연 바위의 왕좌에 몸을 깊게 묻었다.
“한 가지 사항만 통지하고 회의를 끝내도록 하지.”
드디어 이 무서운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마족들이 반색했다. 카르페이오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곧 ‘그분’이 오신다는 계시가 내려졌다.”
“……!”
계단을 타고 놀라움 가득한 수런거림이 도미노처럼 번져 나갔다.
“저, 정말입니까?!”
“세상에! 예정보다 이렇게나 일찍 재림하실 줄이야!”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경사이옵니다!”
“그래, 마계의 경사다.”
대답하는 카르페이오스의 얼굴은 조금 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제까지 군림하는 자로서 광오한 위압감을 뽐내던 그였으나, 지금은 마치 신탁을 받드는 신관처럼 겸손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제 곧이다. 더러운 가축들의 세상이 종말할 날이 곧이야.”
그가 황홀함이 깃든 얼굴을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손이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경건하게 위를 향했다.
“자아! 어서 오시길, ‘갓 태어난 혼돈악’이시여.”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