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221)
221_[외전] 원점에 서다 (3)
조선에 다행스러웠던 사실은,
여왕이 입성한 항구가 동래(부산)이었단 점이었다.
부산은 일본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던 곳.
이곳은 외교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가 돼 있었다.
“영국 국왕 전하의 방문을 환영하나이다.”
우선 동래 도호부사가 긴급히 나와 여왕 일행을 맞이했다.
그는 정3품의 당상관으로, 동래 전체를 통괄하는 존재였다.
일반적으로 왜의 사신을 대접하는 훈도보다 격이 높은 인물.
이는 조선이 영국을 가벼이 생각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처사였다.
비록 영국이 그 의미를 알아주는가는 별개 문제였지만 말이다.
“당초 서신을 통해 알린 대로, 동맹인 조선에 방문했다네.”
여왕은 그렇게 뻔뻔스레 말했다.
분명 조선에 보냈던 외교문서는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만,
처음부터 통보를 목적으로 했던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 외교적 언사 따위, 의사소통 차이라고 밀어붙이면 돼.’
여왕의 생각대로, 동래부사는 이 문제를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는 과연 그 자리까지 출세한 자답게 능숙히 대처했다.
“먼저, 전하를 임시로 머물 숙소에 모시겠습니다.”
동래부사는 부산포 왜관에 여왕의 일행을 모셨다.
왜관은 거대한 규모였기에, 여왕의 일행이 머물기에 충분했다.
이후 부사는 일행을 융숭히 대접하고, 연일 광대를 불러 잔치를 열었다.
조정에서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고자 한 것이다.
부사에겐 다행히도, 여왕은 그 대처에 만족했다.
광대의 줄타기나 가면극 따위가 정겹게 느껴졌다.
잔치도 즐거웠으나, 그보다 조선인을 구경하고 조선어를 듣는 게 즐거웠다.
“그래, 내가 정말 조선에 와 있구나.”
여왕은 조선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렸다.
조선. 그녀는 조선에 와 있었다.
비록 부산 사투리가 강한 조선어는 귀에 설었고,
부산항의 모습 또한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랐으나,
그래도 이곳은 조선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내가 태어난 땅이라네.”
여왕은 망치를 매만지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옆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페르디난트, 함께 둘러보지 않겠나?”
물론 그가 거절할 리가 없었다.
페르디난트는 여왕과 함께, 조선 탐방에 열중했다.
왜관 안을 조금 돌아다녔을 뿐이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월터의 보고대로, 조선이 변화한 것 같긴 한걸.’
왜관을 둘러본 뒤, 여왕이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여왕이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왜관은 본래부터 조선보다 왜의 풍습이 많은 곳이었고,
한양쯤으로 올라가면 이곳과는 상황이 영 딴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여왕이 보기에 이곳은 변해 있었다.
당장 동래부사가 여왕에게 대접한 차만 봐도 그랬다.
수십여 종의 차를 소개하며 권유하는 그 모습은, 여왕이 알던 조선에선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영국에서 차를 많이 수입하는 걸 아니까 그랬겠지만, 차는 고려의 양식이라고 규제당하던 문화였잖아?’
차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조선 중기가 넘어가며 차차 실전되던 걸로 알고 있던 고려청자가 이곳에서는 드물지 않게 보이는 기물이었다.
동래 항에 한해서일지는 모르겠으나,
은화 역시 익숙하다는 듯 유통이 되고 있었다.
역시, 영국과의 무역이 끌어낸 변화이리라.
‘이 정도 변화면, 정말 월터의 보고가 사실일지도 모르겠어.’
여왕은 마카오에서 받은 보고를 상기했다.
본래도 조선에 갈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급해진 건 월터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이 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대에게 내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래도 되겠는가?”
여왕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동래 부사를 찾았다.
그를 자연스럽게 떠볼 생각이었다.
“하명하십시오.”
“내가 듣기로, 협정을 맺을 때와 조선의 왕이 변했다더군.”
동래부사는 통역의 말을 전해 듣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큰 내색 없이, 그가 입을 열었다.
“예,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어진 세자께서 이어받으셨지요.”
“저런, 세자께서 아버님의 죽음으로 많이 슬퍼하셨겠군. 내 애도를 표하도록 하지.”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부사의 눈치를 살폈다.
안타깝게도, 그의 표정에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 이야기이니까요.”
부사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에겐 영 생뚱맞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남의 나라 임금이 죽은 이야기를, 그것도 10년도 더 지난 지금 갑작스레 꺼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저 불쾌함만이 들어찬 부사의 표정을 보며,
여왕은 안타까움에 내심 혀를 찰 뿐이었다.
‘쯧, 모르겠군.’
이렇게 떠보는 정도로는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기에도 망설여졌다.
여왕이 궁금해하는 것이 대단한 비밀은 아니겠지만, 타국의 사람에게 함부로 떠들어댈 이야기가 아닌 것 역시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국왕의 승계에 관한 걸 함부로 말하지는 않겠지.’
여왕은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레 물어볼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동시에 당황스럽게도.
여왕은 머지않아 그녀의 의문을 풀어낼 기회를 맞이한다.
눈앞에, 그녀가 궁금해 온 답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사절이 도착했습니다!”
연일 열리는 연회가 어언 달포째 되던 날.
동래부사는 기쁜 목소리로 여왕을 불러냈다.
‘으음, 예상보다 빠르게 방문했는데?’
아무래도 좋다. 슬슬 연회도 질리던 참이었으니.
여왕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왕의 태연함은,
조정의 사절과 마주친 그 순간 깨져버리고 말았다.
“영국의 국왕 전하를 맞이하러 온 영사, 왕실 종친 하성군 이균이라 합니다.”
통역의 서투른 통역 따위는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왕의 귀에 울린 것은 오직 하나, 하성군이라는 이름뿐.
‘틀림없어!’
여왕은 그녀 앞에 선 남자를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한국인이라면, 저 눈매 가는 남자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성군 이군.
역사에 기록된 다른 이름으로는, 선조.
조선의 왕으로 기록되었을 남자가 여왕의 앞에 서 있었다.
‘분명 명종은 죽었다고 들었다.’
동래부사가 말하길, 선대 왕은 죽었다.
‘그러나 선조는 내 눈앞에 서 있다.’
여왕은 다시금 침을 삼켰다.
‘월터의 보고대로야. 조선의 왕조는, 내가 아는 역사와 크게 달라진 것이 틀림없어!’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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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왕이 알고 있던 역사를 되짚어보자.
선조는 본래 왕실의 방계 혈통이었다.
후에 명종의 조카로 입적되었으나, 명종의 양자는 아니었다.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왕이 될 수 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명종이 아들 없이 요절하며, 조선 왕실의 직계 혈통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명종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심지어는 꿈에 나타난 노인의 예언에 의지해 새 후궁까지 들이며 후사를 얻는 데 힘썼으나, 결국엔 실패하고 말았다.
명종은 선조, 하성군을 세자로 삼지는 않았다.
그건 끝까지 아들을 낳아, 왕위를 물려주고픈 미련이었다.
하지만 명종이 중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그 곁을 지키며 간호한 것은 바로 하성군이었다.
암묵적으로, 그것은 세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영의정이 하성군을 세자 삼자고 이야기했을 때,
명종은 구태여 영의정을 벌하지도 않았다.
본래라면 크게 화를 내야 할 일이었음에도.
즉, 명종은 자신이 후사를 잇지 못할 경우,
하성군이 왕이 되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이후 명종은 후사 없이 죽었고, 선조는 왕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역사.’
그러나 이 세계의 조선은 달랐다.
먼저 명종이 겪는 스트레스가 달라졌다.
본래, 명종은 외척 윤원형 일파와 왜구의 침탈에 시달렸다.
과한 스트레스는 왕을 신경질적으로 만들었고, 오죽하면 내시들 사이에서 왕을 ‘걸주’라는 악명으로 불렀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국이 나타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명종은 영국과 손을 잡고,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었다.
영국과의 교역으로 얻은 대포로 군을 강화했다.
을미왜변의 참상을 일으킨 해적은 죽고 포로는 풀려났으며,
왜구들은 명나라에서 토벌당해 그 세력이 훨씬 약화하였다.
또한, 영국과 교류에 관심 있는 서학 파가 세력을 키웠다.
그들은 영국과의 무역으로 부를 이루었기에 조정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 데에 성공했고, 윤원형 일파 및 사림과 균형을 이루었다.
덕분에, 명종의 근심거리들은 원 역사보다 훨씬 적어졌다.
“늘 피곤에 시달렸는데, 최근에는 어쩐지 살 것 같구나.”
스트레스가 해소되며, 명종은 한결 너그러워졌다.
정신병을 의심케 하던 히스테리는 사라졌고,
후궁과의 합방은 더욱 잦아졌다.
명종의 요절은 역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하성군이 병 든 명종의 곁을 지킨 것도 역사와 같았다.
그러나 명종이 죽기 직전.
어의는 후궁에게 아이가 들어섰음을 알렸다.
극적으로 조선의 적장자가 태어나고 만 것이다.
그가 바로 조선의 현 주상이었다.
‘설마 했는데, 역사가 이렇게나 바뀌었다고?’
여왕은 당혹스러워했다.
이러면 선조 이후에 등장할 왕들은 전부 왕이 되지 못하나?
명종의 대에서 끊겨야 했던 왕실의 직계 혈통은 이어지나?
그렇게 되면, 조선사가 어찌 변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간 여왕은 많은 나비효과를 경험해왔다.
당장 마카오에서 겪었던 일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만큼 확실히 느낀 것은 또 처음이었다.
‘미래가 완전히 바뀌었다.’
여왕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별달리 손을 쓴 것도 아닌데도 바뀌어버렸다.
“폐하. 듣고 계십니까?”
“···아, 그래. 듣고 있네.”
여왕은 여러 차례 자신을 부르는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하성군을 마주친 순간, 당황해서 잠깐 넋을 놓아 버렸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여왕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지금 앞에 있는 건, 선조가 아니라 종친 하성군이었다.
그는 영국의 국왕 부부를 맞이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이었다.
‘일단 정신 차리고, 응대하도록 하자.’
다행히도, 상대는 여왕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예법 때문인지, 여왕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화 역시 이중 통역을 거쳐 가며 진행되었기에, 말투에서도 당황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언어도 예법도 다르니, 그나마 다행이군.’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상대는 영국을 칭찬하고 있었다.
조선과 영국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는,
형식에 가까워 보이는 말들과 함께 말이다.
“상대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여왕은 다소 무감각하게 감사를 전했다.
하성군을 마주쳤다는 것이 놀라웠을 뿐이지,
조선의 왕실 종친과의 대화에 큰 흥미는 없었다.
하지만 대화를 이어갈수록, 무언가가 이상하다 싶었다.
‘잠깐만, 왜 선조, 아니. 하성군이 저렇게 잘 알고 있지?’
선조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세세했다.
물론 영국과의 무역이 양국에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지 정도야,
급히 사절로 파견되며 준비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상왕께서 산악의 야인들을 토벌하고 국가를 통일하며,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니 이는 진시황을 연상케 하는 업적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통일과 도량형의 통일 같은 것은,
조선의 왕실 종친이 알기엔 꽤나 세세한 정보였다.
‘게다가, 나를 상왕이라고 불렀어.’
그건 양위한 왕을 뜻하는 말이었다.
물론 여왕은 양위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하성군이 영국 내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날 진시황에 비유했다고?’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조가 영국에 보이는 태도가 지나치게 친근했다.
진시황으로 여왕을 비유한 것도, 여왕 자신은 썩 유쾌하지 않았으나 어쨌건 여왕을 높여 이르고자 한 것은 틀림없었다.
하성군은 명백하게도 영국에 관심이 있었다.
정치에 관여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왕실 종친이 말이다.
‘어째서일까.’
여왕은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았다.
당황해서 놓치고만, 근본적인 질문을 말이다.
‘어째서 선조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여왕이 조선에 방문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
그런데도 하성군은 재빠르게 동래로 찾아왔다.
지금의 태도로 보면, 아마 본인이 자원해서 이루어진 일.
어쩌면, 그는 영국과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려고 한다?
‘직전까지 후계자로 여겨지던, 그러나 왕위를 잊지 못한 종친. 그리고 어린 왕이라···.’
어딜 봐도 수상한 그림이 그려졌다.
여왕은 눈살을 찌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뭔가 엮여버린 모양인데.’
모처럼의 고향 방문에서,
귀찮은 일에 제대로 엮여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