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232
상남자 232화
김선동 주임이 OLED 공장의 TFT를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지 않았다면.
거기에 맞는 설계 방법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획기적인 IC의 통신 방법을 도출하지 않았다면.
그걸 구현할 최적의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애플폰4 패널은 없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주임님.”
“그렇게 말하지 마.”
“안 할 테니까 저 어렵게 대하지 마세요.”
“하하.”
김선동 주임이 웃자 유현도 미소 지었다.
과거엔 그 덕분에 유현이 애플폰4로 수혜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가 있기에 선행제품팀을 마음껏 밀 수 있었다.
김선동 주임은 이 회사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잠시 후, 울산 공장 1층에 위치한 회의실.
그곳에서 유현이 김호걸 수석과 마주했다.
옆에는 김선동 주임이 함께했다.
“무슨 일이길래 여기서 보자는 거야?”
김호걸 수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유현이 답했다.
“말씀드렸듯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 봐.”
김호걸 수석의 허락을 받은 유현이 침착하게 상황을 전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지금 상황이…….”
기다렸단 듯, 김선동 주임이 말을 덧붙였다.
“네.제가…….”
“…….”
설명을 들은 김호걸 수석의 낯빛이 상당히 어두워졌다.
그후로도 한참 생각하던 김호걸 수석이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확실해?”
“장비 이력 확인했고, 바꾼 정황도 확보했습니다.”
“알았어.그건 내가 확인해 보면 되고.”
“네, 팀장님.”
“하아.”
유현의 대답에 김호걸 수석이 긴 한숨을 쉬었다.
유현은 생각 외로 담담한 그의 표정에서, 그가 이미 이 일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읽었다.
하지만 눈빛엔 그를 망설이게 하는 뭔지 모를 두려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걸 눈치챈 유현이 강한 어조로 나섰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쉽지 않아.”
“그럼요?”
“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어.어쩌면 나랑 김 주임뿐만 아니라 더 있을지도 모르지.”
“네.맞습니다.쉽지 않겠죠.”
“그럼 프로젝트는? 안 그래도 사람이 모자라 죽을 지경인데, 포기해야 하나?”
김호걸 수석이 유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유현은 그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아니, 누구보다 프로젝트를 걱정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팀장님, 감히 조언 하나 해도 됩니까?”
“해 봐.그런 거 잘하잖아.”
“물러나지 마시고 책임을 지셔야 해요.팀장이라면 그래야 합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홍 책임, 윤 선임의 공백은 커.차라리 일을 끝내고…….”
김호걸 수석이 살짝 뒤로 빼자 유현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뇨.그건 안 됩니다.”
“왜지?”
“썩은 부위를 빨리 도려 내지 않으면, 전부를 버려야 합니다.”
“맞아.맞는 말인데…….”
“그깟 게 두려워서 팀을 버리실 생각이세요?”
“…….”
김호걸 수석이 침묵했다.
사실 힘든 상황이었다.
당장 큰 전력 2명을 잃으면 프로젝트가 휘청거릴 건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면 썩은 부위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퍼지게 된다.
그건 유현이 과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에 새긴 진리였다.
-썩은 부위는 더 썩는 법이지.김 상무, 책임지고 정리해.시간은 하루 준다.
과거 냉정하게 판단했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 했다.
다만, 바뀐 게 있다면 칼자루를 쥔 게 유현이 아니라 김호걸 수석이란 사실이었다.
유현이 그를 보며 진심을 담아 말문을 이었다.
“팀장님 생각은 잘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일을 되게 하려면, 이 부분을 빨리 정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안 되면?”
“아니, 됩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김호걸 수석의 의심쩍은 질문에 유현이 결의에 찬 시선을 보냈다.
“대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보셨잖아요.제가 예전에 보고했던 백업 방안들 말입니다.”
“…….”
유현의 확신 어린 말에 김호걸 수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처음 프로젝트를 고준호 상무에게 보고했을 때를 떠올린 까닭이다.
그때 눈앞에 있는 이 겁 없는 사원이 생각도 못했던 백업 방안을 들고 왔었다.
그게 여기서 이렇게 이어질지 상상도 못했다.
할 말을 잃은 김호설 수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생각을 정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려 줘서 고맙네.김 주임도 용기 내 줘서 고맙고.”
“아닙니다.”
“아, 아닙니다.”
유현과 김선동 주임이 차례로 답하자, 김호걸 수석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눈빛에 결기가 서려 있었다.
“시간이 좀 필요할지도 몰라.”
“네.선택은 팀장님의 몫입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유현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제대로 끝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유현은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그 후, 유현은 이 일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김선동 주임과 김호걸 수석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예전과 똑같이 지냈다.
하지만 뒤에서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김호걸 수석은 정확한 정황을 잡기 위해 과거의 기록을 뒤졌다.
김선동 주임은 자신의 결재 아이디를 빌려 준 정확한 시점을 되짚었다.
유현은 CCTV와 아이디카드 태그 기록 등을 확인할 방법을 찾았다.
비단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현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을 때였다.
복도 쪽에서 윤기춘 선임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유현이 살짝 다가가 보니 그와 마주하고 있는 김선동 주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야, 김선동, 너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저, 전 못하겠습니다.”
“아오.너 진짜 내가 확.”
“…….”
윤기춘 선임이 손을 들었지만, 김선동 주임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서고 있었다.
유현은 김선동 주임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마음이라면 후폭풍이 닥치더라도 잘 이겨 낼 수 있을 듯했다.
그가 두려움을 이겨 낸 만큼 이젠 유현이 도울 차례였다.
두 사람에게 다가간 유현이 모르는 척 한마디를 꺼냈다.
“윤 선임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아, 아니, 그냥.”
유현의 등장에 사색이 된 윤기춘 선임이 얼른 손을 내렸다.
얼마 전, 유현에게 받은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 탓이다.
분명히 부하직원이지만 파견 온 사람이다.
그건 그만큼 소속감이 덜하고 관리하기 힘든 존재란 의미이기도 했다.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황이 이상한데요.”
“그, 그런 게 아니야.그치, 김 주임?”
윤기춘 선임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김선동 주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앞으로 저에게 그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 일단 알았어.”
결국 윤기춘 선임은 꼬리를 내리고 돌아갔다.
자존심이 퍽 상할 만하건만, 아직 그는 유현을 약간이나마 두려워했다.
겉으로 있는 척하는 부류일수록 자존감이 낮은 법이다.
이제 김선동 주임도 그 사실을 조금은 깨달은 듯했다.
유현과 눈이 마주친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유현이 자리에 돌아왔을 때였다.사무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진목 주임에게 유현이 물었다.
“주임님, 무슨 일이에요?”
“사업부장, 그룹장 인사 개편 떴어.”
“그래요?”
유현은 바로 자리에 앉아 사내 게시판에 뜬 공지를 확인했다.
-LCD 사업부장 : (전) 정우근 부사장, (후) 임준표 부사장
-모바일 그룹장 : (전) 안준홍 전무, (후) 여태식 전무
얼마 전, 최민희 차장이 알려 준 내용과 동일했다.
사업부장과 그룹장이 바뀐 게 뭐 그리 대수겠느냐만, 이렇게 2명이 동시에 바뀐 적은 없었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뒤에서 다가온 이진목 주임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둘 다 찍혀서 떨어져 나간 거라더라.”
“그래요?”
“어.정 부사장은 울산 공장 비리 때문에 잘렸고, 안 전무는 부회장에게 찍혀서 나가리 됐고.대충 알지?”
“네.동기들에게 들었어요.”
“하긴.네가 모를 리가 없지.”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얼토당토않은 말에 유현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이번엔 왼쪽에서 맹기용 선임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아무리 유현이라도 이건 모를걸?”
“뭐요?”
유현이 묻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 온 사업부장님 말이야.가전 사업부에서 왔잖아.”
“네.”
“3담당도 같은 출신이거든? 그래서 애플 쪽 밀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
뭔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유현은 할 말을 잃었다.
임준표 부사장은 대표적인 쇄국정책의 선두주자였다.
오히려 애플 비즈니스의 방향이 바뀔 처지였다.
듣고 있던 이진목 주임이 순진한 얼굴로 반색했다.
“아, 그럼 우리도 수혜를 받겠네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럼 그룹장님은요?”
유현이 모른 척 묻자, 맹기용 선임이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꺼내는 표정이었다.
“여태식 전무가 IC 사업부에서 온 거 알지?”
“네.들었어요.”
“상무에서 진급해서 한 번에 온 거야.이건 몰랐지?”
맹기용 선임이 의기양양해서 물었다.
유현이 답하려던 찰나 이진목 주임이 말했다.
“아, 그래요? 사업부 급수 따지면 2계단 진급이네요.”
“그런 셈이지.게다가 고준호 상무와도 친분이 있다더라고.”
“헉.그럼 우리 편의 잘 봐주겠네요.”
“그렇지.안 그래도 이번에 담당이 보고한다던데, 잘 끝날 거야.”
“…….”
유현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헛소문이 어떻게 퍼져 나가는지 정확히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나름 똑똑하게 보였던 맹기용 선임이 맹하게 보인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유현의 속을 알 리 없는 맹기용 선임이 툭 하고 물었다.
“좀 도움이 됐나 몰라.”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럼 내가 이번에 IC 업체랑 미팅을 하는데…….”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맹기용 선임이 은근슬쩍 속내를 꺼냈다.
그때, 이진목 주임이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맹 선임님, 안 돼요.유현이 저랑 부품 찾으러 가야 해요.”
“왜.그건 너 혼자 해도 되잖아.”
“같이 하겠다고 했어요.그치?”
이진목 주임이 다급한 목소리로 유현에게 호소했다.
그때 유현이 책꽂이에 꽂힌 종이를 내밀어 보였다.
“네.테스트보드(PCB) 제작 먼저 보내고 갈게요.미팅은 4시 맞죠?”
“어? 어.너 그것도 확인했냐?”
“그럼요.맹 선임님 일이잖아요.”
“어…….”
맹기용 선임이 또 맹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유현의 종이를 받아 든 이진목 주임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현이 너 이건 또 어디서 프린트 한 거야?”
그가 들고 있는 건 보드 제작용 부품 리스트였다.
중요한 건이기에 유현이 미리 뽑아 놨었다.
“이 주임님이 사이트에 올리신 거잖아요.”
“그것도 확인해?”
“다른 사람 건 아니고, 이 주임님 거만요.”
“흠, 흠.”
유현이 넉살 좋게 말하자 이진목 주임이 또 헛기침을 했다.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그 모습에 맹기용 선임이 눈을 흘겼다.
“야, 내 거는?”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죠.”
“…….”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이 피식 웃자, 맹기용 선임이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그의 새로운 면을 많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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