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394
상남자 394화
지금껏 자신이 낸 아이디어로 밀어붙였지만 먹히지 않은 까닭이다.
오전 회의에서도 실장이 지원했지만, TV 팀장 앞에서 씨도 안 먹혔다.
이대로는 안 된단 생각에 전면 재검토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걸 그대로 쓴다고?
혼란스러워하는 권세중 대리를 뒤로하고 김영길 과장이 툭 하고 말했다.
“괜찮은 거 같은데? 다른 팀만 설득할 수 있으면 파워풀할 거야.”
“저도 좋습니다.제가 더 열심히 지원하겠습니다.”
장준식이 나서자 유현이 씩 웃었다.
“준식이 네가 백업한 거 다 알아.실력 많이 늘었더라.”
“아닙니다.감사합니다.”
유현을 보며 눈을 반짝이던 장준식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럴수록 권세중 대리의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정말 로고 마케팅으로 갈 거야?”
“어.그래야지.”
“쉽지 않을 텐데.”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건데 뭐 어때.”
유현이 웃으며 어깨에 손을 두르자, 권세중 대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냐?”
“동기랑 같이 일하니까 좋지.”
“참 나.”
유현은 헛웃음 짓는 권세중 대리를 보며, 새삼 과거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는 남들보다 1년 빨리 진급했다.
옆에 있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
수차례 진급에서 밀렸던 김영길 과장은 이제 파트리더가 되었고,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했던 장준식은 지금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완전히 틀어졌던 과거가 보란 듯이 잘 짜 맞춰졌다.
-권세중이 죽었습니다.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과거 그 일은 이제 추억거리로도 떠올리지 않을 부스러기가 되었다.
그렇게 조금 남은 과거의 앙금마저 훌훌 털어졌다.
새삼 가벼워진 마음에 유현이 권세중 대리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잘해 보자, 동기야.덕분에 아주 재밌을 거 같아.”
“난 자료 정리나 하러 가야겠다.과장님,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권세중 대리는 부담스러운지 김영길 과장에게 인사하고는 돌아섰다.
“오늘 일찍 퇴근해야 하니까 그 전에 끝내 놔.”
유현이 손을 흔들자, 권세중 대리의 한숨 소리가 등 뒤로 크게 퍼져 왔다.
“에휴.”
“저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의욕 넘치는 장준식이 그 뒤를 따랐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보던 김영길 과장이 말했다.
“권 대리가 동기 왔다고 많이 밝아졌네.”
“원래 밝은 놈입니다.”
유현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유현을 보며 김영길 과장이 피식 웃었다.
“한 대리, 정말 의외야.”
“뭘요?”
“권 대리 위해서 담당자 하겠다고 손까지 들 줄은 몰랐거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유현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김영길 과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권 대리가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었잖아.그래서 그거 덜어 주려는 거 아냐?”
유현이 오기 전까지 1파트엔 김영길 과장, 권세중 대리, 장준식, 이 3명뿐이었다.
이찬호 대리와 황동식 대리가 2파트로 빠진 까닭이다.
그런 상황에서 갓 이동한 권세중 대리의 아이디어가 전면 채택됐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다른 팀에선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으니, 중간에서 권세중 대리가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유현이 손을 든 게 그를 위해서라고 볼 만한 여지가 충분했다.
사실과는 달랐지만, 굳이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는 터라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셈이죠.”
“그래.한 대리가 잘 좀 챙겨 줘.너무 부담 가지지 않게 말이야.”
“걱정 마세요.그건 제 전공입니다.”
유현은 자신 있게 말하며 난간에 올려놓은 커피를 마셨다.
웃음 짓던 김영길 과장도 종이컵에 입을 댔다.
휘우웅.
바람이 만든 공백 뒤로 김영길 과장의 물음이 이어졌다.
“근데 신경욱 상무님, 아니 전무님이 한국에 왔다며.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아니, 소식은 들리는데 회사 명단엔 직책이랑 소속 부서가 공란이라서 말이야.”
“글쎄요.”
유현이 미소 띤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시각, 그룹전략실 본부장실 안.
송현승 상무가 상석에 앉은 윤주탁 전무에게 보고했다.
“지금 신경욱 전무는 회장 저택에 두 차례 방문한 것 외엔 아무런 대외 활동이 없습니다.”
“신명호 부회장은 따로 안 만났고?”
“네.회사에는 아예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명호 부회장이 직접 그를 불렀고, 진급까지 시켰다.
게다가 언론을 이용해 복귀를 알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잠적일까?
관자놀이를 검지로 쿡쿡 찌르던 윤주탁 전무가 물었다.
“사모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나?”
“날이 서 계십니다.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빨리 알아보라고 했고요.”
신경욱 전무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차기 회장 승계 구도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요인이었다.
신경욱 전무와 심하게 척을 지고 있는 회장 부인이 민감하게 반응할 만했다.
이대로 더 있다간 로열패밀리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그녀의 눈 밖에 날지도 모를 노릇.
어떻게든 상황을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을 끝낸 윤주탁 전무가 눈을 번뜩였다.
“먼저 나설 수밖에 없겠군.영향력을 키우기 전에 흠집부터 내 놔.”
“네.언론 쪽에 손을 써 놓겠습니다.”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들은 송현승 상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언론까지 동반한 신경욱 전무의 등장은 그룹전략실의 이목을 완전히 차지했다.
덕분에 유현은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이제는 다른 부서의 일개 대리에게 신경 쓸 사람이 없을 법하건만, 있었다.
13층 혁신제품TF TV 팀장석.
의자에 앉은 이본석 팀장이 이야기를 듣고 실소했다.
“참 나, 연태 사업장? 좌천당했다가 막 복귀한 놈이 그딴 소릴 지껄였다고?”
“네.7개월 동안 산골 생활을 해서 그런지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거 같습니다.”
윤병관 차장의 말에 이본석 팀장이 코웃음 쳤다.
“의욕은 무슨.프린트는 쓸 줄 안대?”
“글쎄요.오늘 보니까 노트북도 안 켜고 놀러만 다니더라고요.”
“푸하하하.하여간 모바일 놈들 진짜 꼴통이라니까.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풋내기가 손든다고 바로 담당자를 시켜?”
이본석 팀장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떨결에 TV팀 담당자까지 붙여 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TV팀 파트리더이자 담당자인 윤병관 차장이 물었다.
“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차라리 잘됐어.그놈한테 다 떠넘기고 우리도 손 털자고.”
“네.제가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윤병관 차장이 이죽거렸다.
13층으로 내려온 유현은 사무실 복도에서 통화 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신경욱 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일은 어떤가?
“괜찮습니다.동료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고, 정리도 잘하고 있네요.전무님 등판 시점까진 충분히 정리가 될 거 같습니다.”
-그래.시점을 맞추려면 지금쯤 그룹전략실이 반응을 해 줘야 하는데 좀 굼뜨군.”
신경욱 전무가 아쉬운 소리를 내뱉자 유현이 피식 웃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 사람도 은근히 모험을 즐기는 타입이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움직일 겁니다.
-그렇겠지.뭐, 여유 있고 좋긴 하네.
“너무 즐기시는 거 아닙니까? 언론 반응이 생각보다 꽤 매울 텐데요.”
유현의 답에 신경욱 전무가 웃음 지었다.
-하하.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건가?
“그럴 리가요.지금 회사 생활 즐길 시간도 부족합니다.”
유현은 넉살을 부리며 신경욱 전무와 몇 마디를 더 나눴다.
연태리에서 서로 속내를 보인 이후 부쩍 더 가까워진 모습이다.
기분 좋게 통화를 끝낸 유현은 사무실 자리로 돌아왔다.
걸어 들어올 때부터 이런저런 시선이 쏠렸다.
특히 유현의 옆자리에 서 있던 남자는 대놓고 빈정거리는 눈빛을 보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눈, 큰 콧구멍이 인상적인 남자, 윤병관 차장이었다.
그는 유현에게 들으라는 듯 옆에 있는 권세중 대리에게 목소리 높였다.
“TV 쪽 자료를 그딴 식으로 만들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개발 일정이 하나도 안 맞잖아.”
“일정은 그때 알려 주신…….”
“하 참, 요것 봐라? 그게 언제 적 일정인데 아직도 업데이트를 안 했어? 일이 장난이야?”
“그게.”
윤병관 차장이 조여 오는 통에 권세중 대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TV팀 자료를 대신 만들어 준 것도 모자라, 욕까지 먹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TV팀에서 제대로 갑질을 하고 있었다.
일은 해 주지 않으면서 갑질만 하고 있으니 권세중 대리가 화병이 날 만했다.
안타까웠지만 고통 속에 꽃이 피는 법.
이 정도는 스스로 이겨 낼 줄도 알아야 한다.
윤병관 차장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눈빛으로 관심을 가져 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 유현에겐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어디서 돼먹지도 않은 아이디어 가지고.”
풀썩.
자리에 앉은 유현은 옆에서 나오는 소음을 가볍게 무시하며, 들고 온 인쇄물을 확인했다.
올해 진급한 담당 비서 이애린 대리가 조금 전 건네준 자료였다.
“이렇게까지 안 알아봐 줘도 되는데 말이지.”
출근 후 잠깐 대화할 때 운을 띄웠는데, 그걸 또 챙겨 줬다.
유현은 고마운 마음으로 그녀가 손수 정리한 항목을 살폈다.
먼저 앞 장엔 다양한 회사 복지 시설이 나왔다.
건강 센터, 마음 상담실, 체력 단련실, 사내 카페, 헬프 센터.
시설도 시설이지만, 그 안에서 하는 프로그램 수가 상당했다.
밖에서 하면 돈 깨나 드는 것들을 회사에선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복지 시설뿐만이 아니었다.
사락.
종이를 넘기자 각종 사내 동호회가 주르르 나왔다.
각종 취미를 향유하는 모임들이 한성타워 내에서만 수십 가지였다.
이애린 대리는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활동이 활발한 동호회를 정리해 줬다.
클라이밍, 수영, 명상, 디제잉, 클럽 댄스 등등.
그중에 유현이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즐길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과거엔 앞만 보고 달리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고, 지금은 몰라서 못했다.
그만큼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며 살았다.
잘못된 걸 알았으면 바꿔야 한다.
-조금 더 어린 나이에 다양한 경험을 해 봐요.혹시 알아요? 여기보다 더 여유 있고 좋을지?
최정복 아내, 김승미의 말을 떠올린 유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옆에서 권세중 대리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윤병관 차장을 봤다.
그는 기다렸단 듯 유현을 노려봤다.
권세중 다음 타깃이 유현이라고 말하는 눈빛이다.
받아 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의 입이 열리는 찰나 유현이 먼저 나섰다.
“윤 차장님, 통합안 실무자 회의 내일 하겠습니다.”
“뭐라고?”
“회의 안건이랑 요청 자료 보낼 테니까 준비해 주세요.”
뭐? 통합안 실무자 회의?
게다가 요청 자료를 보내 달라고?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에 윤병관 차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지금 뭐 하자는 거지?”
“아, 그리고 죄송한데 권세중 대리 좀 빌리겠습니다.급한 일이 있어서요.”
유현은 다급한 표정으로 윤병관 차장의 말을 자르며 권세중 대리의 팔을 당겼다.
권세중 대리가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무, 무슨 일인데?”
“시간 없으니까 가면서 이야기하자.”
권세중 대리에게 말을 건넨 유현이 윤병관 차장에게 꾸벅 인사했다.
“차장님, 조금 있다 메일 보내 드리겠습니다.그럼.”
“…….”
윤병관 차장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이미 유현은 멀찍이 사라져 있었다.
뒤늦게 자신이 당했단 걸 알아차린 윤병관 차장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감히 날 개 무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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