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65
상남자 465화
반면, 누구보다 임시 주주총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사장 자리에 오를 예정인 신천식 부사장이었다.
“드디어 내일이군.”
집무실 소파에 앉은 신천식 부사장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우창범 전무가 거들었다.
“이제야 잘못된 게 바로잡히나 봅니다.신경수 이사님의 공이 확실히 컸지요.”
“그래.엘리엇까지 움직일 줄이야.뭐, 그쪽 멤버 몇 명 임원으로 넣는 건 일도 아니지.”
“맞습니다.우리가 잃을 건 없어요.그보다…….”
우창범 전무가 말하고 있을 때, 윤주탁 전무가 불쑥 끼어들어 양해를 구했다.
“부사장님, 엘리엇 측에서 전화가 왔습니다.잠시 좀 받겠습니다.”
“허허.그래그래.당연히 받아야지.”
신천식 부사장이 흔쾌히 응했고, 윤주탁 전무가 휴대폰을 들었을 때였다.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는데 윤주탁 전무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우창범 전무가 넋을 잃은 윤주탁 전무에게 물었다.
“뭔데? 무슨 일인데 그래?”
“에, 엘리엇이 임시 주주총회를 취소했습니다.”
“하하.그래.엘리엇과 한번…….뭐라고?”
어깨를 들썩이던 신천식 부사장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윤주탁 전무의 굳은 표정을 본 그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곤 버럭 소리쳤다.
“취소라니.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시뻘건 그의 얼굴엔 잔뜩 노기가 끼어 있었다.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유현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뭐라고요?”
유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통화 상대인 박두식 차장에게 되물었다.
“엘리엇이 임시 주주총회를 취소하다니요.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박두식 차장의 이어진 설명에 유현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마주하고 있던 현진건이 무슨 일이냐며 눈짓했다.
손바닥을 뻗어 양해를 구한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밖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시원한 밤바람이 느껴짐과 함께 박두식 차장의 말이 끝났다.
그의 말을 곱씹던 유현이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확정된 거죠?”
-맞아.몇 번씩이나 확인했어.
“그렇군요.”
유현의 목소리가 누그러지자 박두식 차장은 그제야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다행인 거죠.”
-그렇지? 죽어라 준비하긴 했는데, 솔직히 밀릴 가능성이 크다고 봤거든.전무님이 괜찮다고 했지만 불안했다고.
지금 뱉는 하소연처럼 유현과 거의 모든 걸 공유하는 박두식 차장조차 BCG 건을 자세히 몰랐다.
유현이 미국에 간 것도 다른 방안을 찾기 위함인 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유현은 BCG 보고서를 비밀리에 관리했다.
혹시나 새어 나갈 수 있는 문제에 대비해 공식 자료는 BCG 본사에서도 배포하지 않게 했다.
그런데도 보고서가 유출됐다면 근원지는 BCG 본사로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설령 보고서를 봤다 한들 당사자인 엘리엇이 출혈을 감수하며 물러설 수 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유현이 물었다.
“혹시 신경수 이사는 한국에 왔습니까?”
-옆 파트에서 체크하고 있는데 아직 알아내진 못한 거 같아.확인하는 대로 연락 줄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그리고 그간 정말 고생하셨어요.”
-너도 미국에서 고생이 많다.일 잘 정리된 거 같으니까 좀 즐기다가 돌아와.
“네.그럴게요.”
나름 기분 좋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지만, 유현은 절대 웃을 수 없었다.
치명타를 날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귀신같이 알고 빠져나가 버린 까닭이다.
만약 자신이라면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아무리 20년 내공이 있는 유현이라 해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이토록 과감하게 자르는 건 불가능했다.
모처럼 유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동시에 신경수가 내뱉은 차가운 말이 기억을 스쳤다.
-한 상무, 버릴 때 과감하게 버려.아쉬워할 필요 없어.어떻게든 원인을 찾아내서 밟아 버리고, 다시 뺏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가 이 판에 끼어든 이상 그냥 물러설 리는 없었다.
한 번 뒤통수를 맞은 만큼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내 응징하려 할 게 뻔했다.
“후.”
불어오는 찬바람에 유현의 숨이 섞였다.
드르륵.
테라스 문을 열고 다가온 현진건이 맥주 캔을 내밀었다.
“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은 건가?”
“아니.딱 좋은 타이밍이네.땡큐.”
맥주 캔을 건네받은 유현에게 현진건이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심각해?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없어.그냥 날 찾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거야.”
“표정을 보니 좋은 상대는 아니구나.”
“뭐야, 너 왜 이렇게 눈치가 늘었어?”
유현이 장난스럽게 묻자 현진건은 언제나처럼 진지하게 답했다.
“능력 있는 친구를 보니 나도 자극이 돼서 말이야.이참에 사람 다루는 법 좀 배울까 봐.”
또 한 단계 발전하고자 하는 천재에게 유현이 넉살 좋게 물었다.
“그거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는 거 아닌데 어쩌지?”
“그럼 또 혼자 일하지, 뭐.”
“크크.배 쨀 줄도 아는 걸 보니 준비는 충분하네.”
“퀄컴 건물 1층에 커피숍 차리고 싶다는 네 꿈, 내가 꼭 이뤄 주고 싶어.”
폴 그레이엄에게 했던 말을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인 걸까?
이 또한 현진건답다는 생각에 유현이 맥주 캔을 내밀었다.
팅.
“노력 많이 해야 할 거야.”
“그럼.당연하지.”
“꽤 힘들 거고.”
“못할 게 뭐 있냐?”
툭하고 내뱉은 현진건의 물음이 유현의 답답함을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그랬다.이젠 혼자가 아니었다.
이렇게 든든한 동료가 있는데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고민을 떨쳐 버린 유현이 빙긋 웃었다.
“그것 참 간질간질하면서도 좋은 말이네.땡큐.”
“나 이런 멘트 잘하니까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해.”
어쭈?
항상 진지하던 녀석이 농담까지?
피식 웃은 유현이 기분 좋게 맥주를 마셨다.
캘리포니아의 밤바람 덕분인지 맥주의 목 넘김이 유난히 시원했다.
유현이 현진건의 작은 집에서 꿈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뉴욕에 있는 대저택 거실 소파에 신경수가 앉아 있었다.
전화를 받고 있는 그의 표정이 무척 싸늘했다.
-에머슨, 당신의 말대로 움직였다가 저희 엘리엇은 너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로버트, 말은 정확히 해야죠.맥킨지의 의견을 전했을 뿐이었고, 이번에도 BCG의 의견을 전했을 뿐입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한 거잖아요.
“흥분하지 마시죠.냉정하게 판단해서 엘리엇이 잃은 건 없지 않습니까? 약속된 대가까지 받으면 오히려 얻는 거겠죠.”
신경수 말에 상대방이 억눌린 목소리를 들려줬다.
-후.알겠습니다.오랜 파트너인 당신을 믿도록 하죠.
“좋은 판단입니다.”
상투적인 인사로 통화를 마무리한 신경수는 얼음이 담긴 위스키를 한 잔 마셨다.
모처럼 위스키의 쓴맛이 입안에 강하게 감돌았다.
이번 결정에 잃은 게 꽤 있었지만, 절대 후회하진 않았다.
버리지 않았다면 완전히 당할 뻔한 까닭이다.
상대가 BCG 공식 자료를 일부러 배포하지 않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대체 누굴까?
이 정도의 대범함과 치밀함은 월스트리트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꽤 쓸 만한 인재가 순둥이 신경욱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곧 알게 되겠지.”
차가운 목소리를 뱉은 신경수가 비릿하게 웃었다.
다음 날, 결국 임시 주주총회는 열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 분명하건만, 그 부분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는 언론은 없었다.
우리일보에 올라온 이 뉴스도 순식간에 기사 목록에서 사라졌다.
어쩐 일인지 임시 주주총회에 참석하기로 한 대주주들 사이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이번 일에 관심 없던 직원들이 갑자기 신경 쓸 리도 없었다.
유현은 박두식 차장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곤 캘리포니아주로 다시 날아온 박승우 과장에게 이러한 분위기를 전했다.
호텔 바에서 유현의 말을 듣던 박승우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진짜 모든 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거네.”
“그러게요.헛고생하느라 수고하셨어요.”
“헛고생도 맞들면 낫다, 라는 말 몰라?”
“백지장이겠죠.”
“어쨌든.멘토, 멘티가 간만에 같이 일했으면 된 거야.”
박승우 과장이 뻔뻔하게 말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챙.
빙긋 웃은 유현이 술잔을 부딪쳤다.
박승우 과장은 정도 붙지 않은 후배에게 힘내라는 메모와 함께 음료를 건네준 선배였다.
야근하는 후배가 걱정되어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와 떡볶이를 사 주기도 했었다.
믿음을 줬던 후배에게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끝까지 후배를 감싸 안았다.
유현은 사람 냄새 진하게 나는 그에게 인생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는 인생의 멘토와 더 많은 걸 공유하고 싶었다.
“과장님, 궁금하셨던 부분 설명해 드릴게요.”
“아냐.너 부담되면 안 해도 돼.나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온 거니까.”
“그래도 아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꽤나 복잡한 이야기라서요.”
“그래주면 나야 좋지.나도 더 알고 싶거든.”
고개를 끄덕인 유현이 운을 뗐다.
“먼저 신경욱 전무님을 처음 만난 건…….”
BCG 건을 언급하기 위해선 신경욱 전무와의 관계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경욱 전무와의 만남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지금 왜 유현이 신경욱 전무를 돕고 있는지까지의 내용으로 이어졌다.
물론 개인적인 부분은 다 뺐고, 믿기 어려운 부분도 일부 쳐 냈다.
묵묵히 듣던 박승우 과장이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했다.
“전무님이랑은 샌프란시스코 디자인 박람회 때 인연이 된 거구나.김 과장님은 대충 알고 있었고.”
“네.맞습니다.”
“내가 없을 때 벌어진 일인 줄 알았는데, 그전부터였네.”
“섭섭하세요?”
유현의 물음에 술을 넘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그보다 전무님도 연태리에 갔다는 게 부럽다.나도 가고 싶었거든.”
“다음에 같이 가요.거기 제 정자도 있습니다.”
“알아.하하.그 얘기 듣고 직접 블로그도 찾아봤어.”
“멋지죠? 과장님 오면 거기 매트 깔고 자게 해 드릴게요.”
“모기한테 뜯겨서 안 돼.여기서 살 더 빠지면 매력도가 확 떨어진단 말이야.”
진지한 박승우 과장을 보며 유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MBA에서 어떤 걸 배웠길래 그런 논리가 나오는 겁니까?”
“다시 얘기해 줘? 이 멘토님의 화려한 학교생활?”
“아, 남자만 득실한 캠퍼스 생활이요?”
“뭐라고? 하하하.”
박승우 과장은 어깨를 들썩이며 술잔을 넘겼다.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 속에 술병이 비어 갔다.
몇 잔이나 더 마셨을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을 때 박승우 과장이 속내를 꺼냈다.
“사실 교수님 통해서 신경욱 전무님 제안을 받았어.”
“어떤 제안이요?”
“MBA 끝나고 혁신전략실에 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렇군요.”
이미 유현도 알던 이야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박승우 과장의 입에서 반전의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근데 나중에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
“왜요? 혁신전략실 좋잖아요.”
“그땐 그냥 너랑 같이 일하고 싶었거든.”
“아주 그럴듯한 이유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에게 박승우 과장이 술을 마신 후 말했다.
“그렇지.근데 지금 들어 보니까 너도 결국 혁신전략실에 가겠다.아니야?”
“그럴 수도 있죠.”
“아마 그럴 거야.넌 LCD에 있을 그릇이 아니니까.그래서 걱정이야.”
“거기서 같이 일하게 되면 더 좋은 거 아니에요?”
“맞아.맞는데,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찔한 생각이 들더라.”
어울리지 않게 약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듣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