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80
상남자 480화
송현승 상무가 떠난 후, 허리를 편 심병직 팀장이 유현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신낙균 대리는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얼어붙은 그를 뒤로하고 유현이 심병직 팀장에게 말했다.
움츠렸던 좀 전과는 달리 무척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팀장님, 신 대리 좀 빌리겠습니다.노트북을 받아 와야 할 거 같아서요.”
“그, 그래.당연히 해 줘야지.”
“감사합니다.”
빙긋 웃으며 인사한 유현이 신낙균 대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해, 가지 않고?”
어느새 말투는 다시 낮아졌지만, 신낙균 대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자식.안 잡아먹어, 인마.”
신낙균 대리의 어깨에 팔을 두른 유현이 그를 끌고 갔다.
어쩐지 신낙균 대리의 뒷모습이 무척 처량해 보였다.
과거 신낙균 대리는 같은 직급이라는 게 불쾌하다는 이유로 유현의 호칭에서 직급을 빼 버렸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적응하려는 유현에게 온갖 갑질을 다 했다.
-야, 한유현, 이리 와서 바닥에 있는 쓰레기 좀 주워.좀 지저분하다.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피식 웃은 유현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과거 그가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신 대리, 이리 와 봐.”
“…….”
한발 물러서 있던 신낙균 대리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은 필요한 걸 콕콕 집었다.
“책상에 명패가 없네.책꽂이도 없고.바로 챙겨 오고, 노트북도 그룹전략실 전용 통신망 접속 가능하게 세팅해 놔.”
“그걸 왜 제가 합니까?”
“그럼 내가 해? 오늘 처음 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유현의 말에 신낙균 대리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유현이 그 모습을 보며 과거 그가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꼬우면 네가 내 상사 하든지?”
“…….”
“싫으면 말아.나야 일 안 하고 놀면 되니까.”
송현승 상무 뒷배가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다.
유현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빙글빙글 돌자, 신낙균 대리가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짜증나겠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유현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어기적거리는 신낙균 대리를 보며 소리쳤다.
“신 대리, 왜 이렇게 늦어? 10분 준다.”
제법 큰 목소리였지만 누구도 유현에게 태클을 걸지 못했다.
여전히 사무실엔 송현승 상무의 분노 여파가 남아 있는 탓이다.
쿵.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고, 유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후로도 유현은 몇 번을 더 신낙균 대리를 불렀다.
그때마다 신낙균 대리는 오만상을 썼다.
그런 그를 보며 유현이 실소했다.
“인마, 너 그러다 주름 생겨.”
“또 뭡니까?”
“뭐긴, 각 그룹 계열사 비상 연락망이랑 내부 조직도 프린트해 와.”
“…….”
“또 이유 설명해 줘? 아니다.귀찮으니까 그냥 해 와.”
유현이 손을 휘휘 젓자, 신낙균 대리가 참지 못하고 씩씩댔다.
“지금 장난치십니까?”
“됐고.뽑아 와.5분 준다.”
“…….”
“가져오라고.”
유현이 눈을 부릅뜨자, 신낙균 대리가 몸을 움찔거리며 한발 물러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현에게서 느껴진 강한 기백은 신낙균 대리의 경험엔 결코 없던 것이었다.
스윽.
유현이 말없이 턱짓했고, 신낙균 대리는 결국 또 움직였다.
유현은 축 처진 어깨로 멀어져 가는 신낙균 대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네가 훨씬 심했어, 인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과거 신낙균 대리는 지금 유현보다 더 훨씬 더 집요하게 사람을 물어뜯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현이 똑같은 놈이 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소소한 복수는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일 뿐, 그보다 그를 장기 말로 이용할 목적이 더 컸다.
사리사욕에 눈이 먼 그는 뒤에서 움직이기 딱 좋은 스타일이었다.
유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낙균 대리가 다가왔다.
탁.
“여기 있습니다.”
“2분 40초 늦었어.”
“…….”
“다음부턴 제대로 해.알았어?”
“하아.”
한숨을 쉬는 그에게 유현이 강한 어조로 말하다가, 이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이 정도도 못하겠으면, 때려치…… 우지 말고 계속해, 계속.쭉.”
“아오.”
신낙균 대리가 죄 없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돌아갔다.
송현승 상무의 영향력으로 인해 누구도 유현을 건드리지 않았다.
집무실에서 돌아온 지원호 차장은 아예 눈길부터 피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팀원들은 오히려 유현을 더 멀리했다.
아예 어울리지 않으려는 듯 인사도 받지 않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회의도 유현만 쏙 빼놓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곤란한 미션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네? 감시요?”
신낙균 대리의 물음에 심병직 팀장이 말했다.
“그래.저 녀석 분명히 딴짓할 거야.혁신전략실로 정보를 빼돌리려고 전화를 하든, 자리를 비우든 할 거라고.”
“그걸 왜 제가 합니까?”
“기왕 옆에 붙어 있는 거잖아.잘 정리돼서 저 녀석 몰아내면, 내가 네 기획안 어떻게든 통과시켜 줄게.서로 윈윈하자고.”
“팀장님.”
신낙균 대리는 발끈했지만 소용없었다.
심병직 팀장은 두말하지 않고 떠났고, 신낙균 대리는 혼자 화를 삭였다.
이곳은 누군가 도와주는 그런 부서가 아니었다.
그런 신낙균 대리를 유현이 또 불렀다.
“신 대리, 이리 와 봐.”
“…….”
마지못해 다가온 신낙균 대리에게, 유현이 옆에 있는 빈 의자 쪽으로 손가락질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꼭 손가락으로 부리려 하고 있다.
신낙균 대리는 짜증이 치솟았지만, 팀장이 한 말도 있어 일단 의자에 앉았다.
“또 뭐요?”
“잔말 말고, 마우스 잡아.”
“저, 지금 업무해야 합니다.이럴 시간 없다고요.”
“업무는 무슨.별로 할 일 없는 거 다 아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 좀 그만 부리시죠.저,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 있습니다.”
이번만은 못 참겠는지 신낙균 대리가 째진 눈을 매섭게 떴고, 유현이 빈정대듯 말했다.
“아, 3개월째 기획안 통과도 못 시킨 배터리 공장 투자 건?”
“뭐라고요?”
“내가 네 업무 바로 정리해 주면 그룹전략실 내부 자료 브리핑할래?”
“그게 무슨…….”
무슨 업무를 하는지 알고서나 하는 얘긴가?
신낙균 대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유현은 바로 그룹전략실 직통 전화를 들어, 비상 연락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한성화학 배터리 사업부 전략기획팀 번호를 눌렀다.
그러곤 전화기를 대뜸 내밀었다.
“받아.”
“이게 무슨 짓입니…….네, 그룹전략실 신낙균입니다.네, 장 부장님.네, 네.”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신낙균 대리에게 유현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당최 알 수 없는 상황에 그가 전화기를 다시 넘겼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낙균 대리가 대신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부장님, 저희 한 과장님 좀 바꿔 드리겠습니다.”
유현은 바로 전화를 이어받으며, 대뜸 송현승 상무를 팔았다.
“그룹전략실 한유현 과장입니다.송현승 상무님 지시로 연락드렸습니다.”
-헉.송 상무님 지시요?
“네.이번에 검토 중인 중국 배터리 공장 투자 건 때문입니다.보고서 봤는데 수치가 너무 왜곡됐네요.”
유현이 다짜고짜 본 적도 없는 내용을 떠벌리자, 옆에 있던 신낙균 대리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
“쉿.”
발신부를 손으로 막은 유현이 눈빛으로 신낙균 대리를 제압했다.
곧이어 당황한 목소리가 수화기로 울려 퍼졌다.
-그럴 리가요.그룹전략실에 올린 보고서 수치는 확실합니다.
“설마요.지난 분기 배터리 중국 내 판매량이 급감했습니다.영업 이익까지 고려하면 수치는 더 엉망이고요.”
-그건 겨울이 계절적으로 비수기라서 그렇습니다.
“기존 예측 성장률에 턱없이 못 미치는 건 사실이죠.그렇게 예측한 결과로 중국에 공장을 더 짓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맞는 말이었다.
신낙균 대리는 한성화학과 한성정밀의 배터리 합작 공장을 중국에 짓는 기획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는 최근 화학제품의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성화학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아침 주간 회의시간에 띄워진 내용을 살핀 유현은 대번에 이번 기획의 문제점을 잡아냈다.
그 이유가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장 부장이라는 사람 입에서 튀어나왔다.
-일단 투자를 해서 규모의 경제를 만들면…….
“이런 식이니 송 상무님이 우려할 수밖에요.저희 그룹전략실이 마냥 돈 퍼주는 부서는 아닙니다.”
유현이 말을 자르며 다시 한 번 송현승 상무의 이름을 거론하자, 장 부장이 기겁을 했다.
-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저희가 올렸던 자료는 분명 북경과 상해 매출을 제대로 반영한 것으로…….
“내부 검토 자료 뻔히 있는 거 아는데, 이러지 맙시다.결국 투자 받아도 책임지셔야 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아니면 제가 따로 알아봐 드려요?”
유현이 강하게 나오자, 장 부장이 말을 더듬었다.
-바, 바로 정정해 보내겠습니다.
“수치만 정정하지 말고, 중국 정부 리스크까지 싹 다 올리세요.기한은 오늘 오후까지.그룹전략실 보고 양식 맞춰서 신낙균 대리에게 보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빠르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툭.
전화를 끊은 유현에게 신낙균 대리가 따지듯 쏘아붙였다.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방금 못 들었어? 자료 보내 준다잖아.내부에 이미 있다는 거야.거짓 보고한 거고.”
“긍정적인 수치를 쓴 것뿐이죠.일단 투자를 받아서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겁니다.제가 한성 정밀과 엮은 것도 그 이유고요.”
지금 뱉은 말에서 신낙균 대리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그룹에 아무리 돈이 넘쳐도 해외 공장 투자 문제는 예민할 수밖에 없다.
비판적으로 가도 모자를 판에 그는 당장 성과를 위해 자꾸 긍정적인 말만 언급했다.
그런 문제를 산전수전 다 겪은 송현승 상무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쯧쯧.그러니까 기획안이 통과 못하는 거야, 인마.멍청하긴.”
유현이 비꼬듯 말하자, 신낙균 대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답했다.
자존심이 꽤나 상한 눈치였다.
“뭐라고요?”
“도와줘도 지랄이네.됐어.네 생각보다 잘 풀릴 테니까 그냥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이랬는데 잘될 리 있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다 망쳤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신낙균 대리가 유현에게 씩씩 댔다.
열 받는 건 알겠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담당한테 가서 지금껏 네가 거짓 데이터 올린 거 말해 줘?”
“내가 언제…….”
“멍청한 것도 죄야, 인마.화낼 시간에 이걸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하라고.”
“…….”
비꼼 가득한 말 뒤에 덧붙은 한마디가 신낙균 대리의 미간을 바짝 좁히게 만들었다.
한참 머리 굴리는 소리를 내던 그는 숨을 크게 고른 후 자리에 앉았다.
한결 차분해진 그의 얼굴이 유현을 향했다.
“이번에 거짓 데이터 잡은 건 제가 한 겁니다.그렇게 퉁 치시죠.”
한마디로 프로젝트가 잘 안되면 그 탓을 한성화학 쪽에 전가하겠다는 의미였다.
“공짜로?”
“남의 프로젝트에 멋대로 간섭한 것도 좋은 말 못 들을 텐데요.”
“어쭈? 나까지 물고 늘어지려고?”
“얌전히 넘어가 주는 대가로 생각하시죠.”
이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자기 안위를 챙기려는 모습은 칭찬해 줄 만했다.
피식 웃은 유현이 손짓했다.
“오케이.그럼 마우스부터 잡아.”
“뭐 할까요?”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마우스를 잡은 그가 물었다.
“일단 그룹전략실 자료 저장소로 들어가 봐.”
신낙균 대리는 유현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바로 화면을 전환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