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503
상남자 503화
그날 저녁, 유현은 아주 반가운 사람에게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제가 원주 공장에서…….”
유현의 오피스텔, 아일랜드바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남자가 귀를 쫑긋했다.
앉은키가 제법 큰 남자의 정체는 얼마 전 한국에 돌아온 박승우 과장이었다.
자신만 못 와 본 게 억울하다던 그는 굳이 유현의 복귀 날에 맞춰 집으로 찾아왔다.
유현의 말을 끝까지 들은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한다고 서로 칼을 겨눌까?”
“안 그럴 거라 생각하세요?”
“당연하지.괜히 잘못 건드리면 자기 잘못도 다 드러날 텐데, 왜 그런 짓을 해.그냥 조용히 살겠지.”
“조용히 살 사람들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욕심도 안 부렸겠죠.”
유현의 말에 박승우 과장이 혀를 내둘렀다.
“그럼 넌 세 사람이 알아서 자폭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글쎄요.그건 저도 모르겠네요.어쩌면 다른 곳에서 불똥이 튈 수도 있고요.”
“다른 곳?”
박승우 과장의 물음에 유현은 장석준 노조위원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가 직원들에게 너무 몹쓸 짓을 한 거 같습니다.벌을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유현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떠보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다.
어쩌면 그가 먼저 자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버티고 있는 남민식 기자가 무너지며 사건이 드러날 수도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진 않을 터다.
서로 흠을 잡다 서서히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유현은 그 시점을 그룹전략실 폭파에 이용할 생각이었다.
잠시 앞으로의 일을 그려 본 유현은, 아직 실체 없는 결과를 떠벌리는 대신 잔을 들었다.
“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멘토님과 제가 마주하고 있는 게 중요하지.”
“그래.내가 드디어 멘티 집에 입성해서 이렇게 술을 마시는 게 중요하지.”
챙.
대체 그게 왜 중요한 건지 모르겠지만, 유현은 그냥 웃고 말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처럼 두 사람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장소가 달라지고, 위치가 달라지니 그만큼 할 얘기도 많았다.
그중 유현의 귀를 잡는 이야기가 있었다.
“신화반도체를 조사하신다고요?”
“어.부사장님께서 인수합병 관점에서 조사해 보라네.근데 이게 될 법한 일인지 모르겠다.”
“왜요?”
“덩치가 너무 커.이 정도 기업 인수하려면 진짜 장난 아닐걸?”
박승우 과장은 그 장난 아닌 걸 자신이 담당하게 됐단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
‘진짜 제대로 써먹으려나 보네.’
신경욱 부사장의 스타일을 뻔히 아는 유현이 쿡쿡 웃자, 박승우 과장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뭐야,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아닙니다.하던 이야기 마저 해 주세요.”
쪼르르르.
유현의 잔을 받은 박승우 과장이 다시 좌충우돌 적응기를 읊었다.
“그래.부사장님 먼저 만나고 혁신전략실에 들어갔는데…….”
“준식이가요?”
“그래.진짜 나만 보면 한숨을 쉰다니까.진짜 네 멘토가 맞는지 의심하는 눈치야.”
“하하.재밌네요.”
오랜만에 복귀한 그가 바뀐 팀 안에서 참 고생이 많은 거 같았다.
유현이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삐삐삐삐삐.
철컥.
현관문이 열리며 느닷없이 한재희가 등장했다.
박스를 들고 낑낑대는 여동생에게 유현이 황당한 듯 말했다.
“뭐야, 네가 지금 왜 나타나?”
“그게 근 한 달 만에 복귀한 사람이 동생에게 할 말이야? 이거나 받아.”
한재희는 무심한 듯 말하며 들고 온 박스를 내밀었다.
안에는 술병과 안주가 가득했다.
후다닥 달려 나간 박승우 과장이 박스를 들며 반색했다.
“역시.재희 씨는 통이 크네요.”
“저 아세요? 어,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데.”
“저 박승우입니다, 박승우.그때, 독일 전시회에서 뵀었잖아요.”
“아, 술 마시다 제일 먼저 뻗었던?”
한재희가 손뼉을 짝 치며 아는 척 하자, 박승우 과장이 발끈했다.
“그땐 너무 피곤해서 그랬죠.”
“오늘도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설마요.이번엔 제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박승우 과장이 의지를 불태우자, 한재희가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같이 기분 좋게 마시고요.”
“좋죠.일단 세팅부터 하겠습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박승우 과장이 박스를 빠르게 날랐다.
아일랜드 바위에 술병을 모조리 꺼내는 그의 모습에서 술자리에 임하는 각오가 전해졌다.
“아이고.”
유현은 벌써부터 그림이 예상되는지라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이 방 쪽으로 걸어가자, 술병을 정렬하던 박승우 과장이 불렀다.
“어디 가?”
“이불 깔러 갑니다.”
“이불은 왜?”
“곧 뻗으실 거 같아서요.”
“뻗긴 누가 뻗어.나, 박승우야.”
박승우 과장은 허세를 부렸지만, 유현의 예상대로였다.
주제도 모른 채 한재희와 대작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엎어졌다.
박승우 과장의 잔까지 비운 한재희가 어이없어 했다.
“뭐야, 엄청 잘 마신다더니.”
“네가 무식한 거야.”
“무식하긴 누가 무식해.자, 오빠의 복귀를 기념하며.짠.”
“무슨 복귀 기념으로 양주 2병을 비우냐?”
“뭐, 어때.기분이지.”
유현은 생글생글 웃는 한재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비운 한 잔이 그날 유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지이잉.지이잉.
휴대폰 진동 소리에 유현이 눈을 떴을 땐 이미 밖이 환한 상태였다.
옆에 이불이 반듯이 개어져 있는 걸 보니, 박승우 과장은 이미 나간 모양이다.
출근하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마셨을까?
피식 웃은 유현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엔 윤준우 과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할 사람은 아닌 터라, 유현은 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네, 과장님.무슨 일이십니까?”
-쉬시는데 죄송합니다.말씀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닙니다.말하세요.”
-실은 어제…….
듣고 있던 유현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인지라, 유현은 들었던 부분을 되물었다.
“추 상무님 자리가 공석이 됐다고요?”
-네.공장장님과 팀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경영관리팀장, 기획팀장도 옷을 벗었습니다.
경영관리팀장, 기획팀장도 비리가 있던 인물이었다.
다만, 핵심에선 다소 떨어져 있는 터라 유현이 굳이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
“노조 측은요?”
-그쪽은 간부들 전체가 싹 정리됐습니다.이상해서 조사해 봤는데, 흔적이 없습니다.사람들도 쉬쉬하는 분위기이고요.
“혹시 누가 왔는지 아십니까?”
-아뇨.못 봤습니다.차량 방문 기록 살펴봐도 남아 있는 게 없었습니다.
“…….”
하루아침에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건 꽤나 높은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유현만큼 상대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투입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지금 회사에 없었다.
유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남 기자 소식은 들었습니까?”
-안 그래도 공 대리가 연락했었는데, 연락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세요.”
-네.알겠습니다.
확인을 안 해 봐도 결과는 이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깔끔하게 일 처리 한 사람이 한세일보를 그냥 뒀을 리가 없다.
왜 하필 지금 안홍구 공장장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걸까?
휴대폰을 내려놓은 유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날 약속도 안 지키는 양아치로 만들어 버리네.”
마치 유현을 도와주는 것처럼 뒤처리를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현이 마음 약해서 그들이 알아서 무너지게 둔 게 절대 아니었다.
잠재된 폭탄이 터지는 건 그룹전략실이 무너지는 시점이 되어야 한다.
괘씸한 마음과는 별개로 상대가 누구인지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머릿속으로 방안을 떠올린 유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옷매무새 점검까지 마친 유현은 빠른 속도로 오피스텔 건물을 나섰다.
그러곤 휴대폰을 들어 신낙균 대리에게 연락했다.
-네, 과장님.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담당 집무실에 인사지원 담당님 방문 예정되어 있지?”
-맞습니다.그런데 그건 왜요?
“그럴 일이 있어.스페인 왕족 접대 시나리오 정리는 다 됐어?”
-정리 중입니다.휴가에서 복귀하실 때에 맞춰서 완성해 놓겠습니다.
유현의 스타일을 아는 신낙균 대리가 정석적인 답을 내놓았다.
어제 같았으면 칭찬해 주고 싶은 답이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유현이 빠른 걸음을 걸으며 다그치듯 말했다.
“아니, 당장 해.나 지금 회사 들어가니까.”
-네? 회사로요?
“그래.바로 볼 수 있도록 준비해 놔.”
할 말만 남기고 통화를 끊은 유현은 곧바로 휴대폰에 다른 번호를 띄웠다.
유현의 휴대폰 화면에 송현승 상무의 이름이 떠올랐다.
유현이 강남 한성타워에 가까워지고 있는 사이였다.
예정대로 전략담당 집무실엔 손님이 찾아왔다.
고개 빳빳하기로 유명한 인사지원 담당 주재오 전무가 그 주인공이었다.
담당 내 두 팀장을 대동한 송현승 상무는 몇 마디 말을 나눈 후 얼굴을 이죽거렸다.
“전무님, 그러지 마시고 솔직한 마음을 말씀하셔도 됩니다.”
“솔직한 마음?”
“네.스페인 왕족 접대 건 때문에 오신 거 아닙니까?”
담당 규모를 보나 위치를 보나, 전략 담당은 인사지원 담당 한참 아래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전략 담당이 갑인지라, 주재오 전무가 한 수 접고 들어갔다.
“그래.워낙 중요한 건이다 보니, 우리 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거 같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안 그래도 저희가 접대할 동안 뒤처리할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그 부분을 지원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게.이건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야.”
주재오 전무가 타일렀지만, 송현승 상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간의 설움을 갚으려는 듯 오히려 세게 나섰다.
“그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은 중요한 일을 만들어 낸 게 저희 담당이라서요.”
“기회를 만드는 것과 결과를 만드는 건 달라.”
“기회도 못 만드는 쪽이 결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
그렇게 날선 두 담당의 자존심 싸움이 이어질 때였다.
철컥, 문이 열리며 노트북을 손에 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고 있던 심병직 팀장이 유현을 보며 깜짝 놀랐다.
“네가 여길 왜 와?”
그런 그를 뒤로하고 송현승 상무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내가 불렀어.한 과장, 이리 와 앉게.”
“네, 담당님.”
유현이 들어와 빈 의자에 앉자, 송현승 상무가 그를 소개했다.
“전무님, 이번에 스페인 왕족 방문을 이끌어 낸 한유현 과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한유현 과장입니다.”
유현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주재오 전무를 바라봤다.
짧은 곱슬머리에 짙은 눈썹, 마른 얼굴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딱딱해 보이는 인상은 과거 기억 그대로였다.
한때 윤주탁 부사장을 밀어내고 그룹전략실 본부장이 됐던 그가 상투적인 인사를 내놓았다.
“그렇군.젊은 친구 같은데, 꽤나 좋은 성과를 냈어.”
정말 모르고 말하는 걸까?
유현은 그를 떠보기 위해 송현승 상무를 이용했다.
“저희 담당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셔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하.이 사람 참.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원주 공장 파업 건 때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지 않았습니까.배 팀장님까지 붙여 준 덕에 쉽게 해결했습니다.”
“…….”
듣고 있던 배재찬 팀장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그의 속에서 천불이 나는 줄도 모르고, 송현승 상무는 유현을 한껏 띄웠다.
“자네가 잘한 거지.이 친구가 어찌나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했는지, 최 전무님도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하.한성그룹 최초로 노사 협상 베스트 사례가 되었더군요.그리고…….”
유현은 송현승 상무의 길게 이어지는 말을 흘려들으며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