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13
상남자 613화
“기자님이 저 팍팍 밀어줬죠.하하! 아, 근데 오빠, 명함 없어요?”
“명함?”
“네.저 명함 교환 처음 하는 거거든요.”
기대에 부푼 목소리였지만, 유현에겐 명함이 없었다.
“난 두고 왔는데.”
“아쉽다.혹시 상사님은 가지고 계세요?”
정예슬이 고개를 돌려 묻자, 신경욱 부사장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처음이라는 말에 신경 써 준 느낌이다.
스윽.
“여기 있습니다.”
“이야! 이렇게 하는 거구나.자, 성함이…….”
정예슬이 명함을 살피려 할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식당 아주머니가 불쑥 말했다.
“예슬아, 뭐 해?”
“뭐 하긴.우리 고객 취재하잖아.”
“취재는 무슨.방해하지 말고 나와.”
식당 아주머니가 손목을 잡고 당기자, 정예슬이 반사적으로 받았던 명함을 흔들었다.
팔랑팔랑.
“취재 맞다니까.여기 봐 봐.명함도 받았잖아.”
“명함을 네가 왜 받아?”
“원래 이런 게 비즈니스야.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긴 뭘 몰라? 내가 이 바닥에서 버틴 게 얼만데.빨리 나와.”
정예슬이 버텨 보려 했지만, 식당 아주머니는 완강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정예슬의 눈동자가 명함을 본 순간 휘둥그레졌다.
“알았어.가면 되…….어? 부사장…….”
“부사장이라니?”
식당 아주머니도 놀라 눈을 껌뻑였다.
부사장치고는 신경욱 부사장이 너무 어려 보이는 까닭이다.
그때 이름을 읽던 정예슬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름이…….헉! 시, 신경욱이면 그 신경욱?”
워낙 목소리가 컸던 탓에, 순식간에 테이블 사이로 퍼져 나갔다.
여기서 황태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술렁술렁.
“그분이 대체 여길 왜 와?”
“헉! 그러고 보니 기사에서 본 사진이랑 닮은 거 같아.”
“어떻게 해! 아까 뒷담화했잖아!”
“나 안 했어.네가 했잖아.”
“아, 진짜! 나 말실수한 거 없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 식당 아주머니의 표정이 제일 어두웠다.
“이를 어째.괜한 걸 가르친다고 오바해서…….”
상무, 전무가 와도 눈도 껌뻑 안 하던 식당 아주머니였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신경욱 부사장의 눈치를 봤다.
그만큼 신경욱 부사장의 이름값이 크다는 방증이다.
아직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유현이 조용히 물었다.
“자리 옮기시겠습니까?”
“아니.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럴 순 없지.”
“어떻게 하시게요? 가만히 계시면 다들 신경 쓸 겁니다.”
돌려 말했지만, 이대로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식당에서 나갈 거라는 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던 신경욱 부사장이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한 실장, 내가 직원들의 삶을 보면서 느낀 게 뭔지 아나?”
“뭡니까?”
신경욱 부사장은 답 대신 손을 들었다.
“이모님.”
“네? 네! 네, 부사장님.”
“여기 전체 계산서, 다 제 테이블에 올려주세요.이후에 나오는 것들도요.”
그러곤 시원하게 골든벨을 울렸다.
얼떨떨해하던 사람들이 탄성을 뱉었다.
“와! 대박!”
“살다 살다 황태자 골든벨을 다 타네.”
“부사장님, 진짜 더 먹어도 됩니까?”
무리 속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냈다.
전부 한성의 직원들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경욱 부사장이 크게 말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드세요.제 욕 해도 됩니다.”
“그럴 리가요!”
“감사합니다!”
일순간에 분위기가 정리됐다.
이제는 먼저 나가는 게 아니라 더 있으려 했다.
확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신경욱 부사장이 턱짓했다.
“어떤가?”
“나쁘지 않네요.아뇨, 너무 좋습니다.”
직원들을 피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치겠다는 그의 의지가 나쁠 리 없었다.
유현은 엄지를 내밀어 줬다.
스윽.
그때, 어느새 카메라를 꺼낸 정예슬이 불쑥 물었다.
“혹시 부사장님, 이거 기사로 써도 돼요?”
“어떤 거요?”
“고, 골든벨 울린 거요.”
어이없는 제안에, 신경욱 부사장이 유현을 바라봤다.
유현이 어깨를 으쓱였고, 신경욱 부사장이 피식 웃었다.
찰칵.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곧이어 식당에 모인 직원들과 단체 사진도 찍었다.
배경이 된 직원들이 모두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얼마 후, 정예슬의 기사가 인터넷 뉴스란에 올라왔다.
인턴이 쓴 데다, 별 내용도 없는 뉴스였다.
사진에 몇 줄의 설명이 달린 게 다였다.
그럼에도 소소한 이 뉴스는 인터넷에서 꽤 큰 반응을 일으켰다.
-이젠 하다 하다 국밥 먹은 것도 뉴스로 나오냐?
-그래도 국밥을 깨끗이 비웠다잖아.반찬 남기는 것도 없이.정감이 가는구만.
-엄청 맛집인가 보다.재벌이 굳이 저런 곳에 가는 걸 보면.
-저기가 한성타워 있는 데지? 국밥 마렵네.지금 바로 간다.
뭘 해도 먹힐 만큼 신경욱 부사장의 화제성이 높았다.
그간 쌓은 긍정적인 이미지 덕분이다.
휴대폰으로 뉴스를 본 유현이 피식 웃었다.
“재밌네.”
예상치보다 큰 신경욱 부사장의 대중적 인지도가 향후 큰 자산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유현의 머릿속엔 이미 다음이 그려져 있었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소소한 뉴스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도 흘러들었다.
임혁수 부회장에게 보고를 받은 신명호 회장이 실소했다.
“밑바닥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고 한소리 했더니, 이젠 하다 하다 서민들 식당에까지 들르는군.”
“직원들도 일일이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좀 과한 면이 있습니다.”
“직원들을 위해 그룹 전체의 시스템을 뜯어고치겠다고?”
“네.이 중요한 시기에 내부부터 뜯어고치겠다며, 그룹전략실 인원들까지 달라고 그러더군요.”
의외의 말이라서 그런지 신현호 회장의 눈썹이 들썩였다.
“호오, 그래서?”
“반려했습니다.지금 권한을 주면, 경수와의 경쟁이 제대로 안 될 거 같아서요.”
“그랬더니 물러나던가?”
“아뇨.한성디스플레이만이라도 바꿀 수 있게 권한을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하하! 그 녀석, 어떻게든 만들어 가고 싶은가 보군.”
이 또한 예상에서 벗어난 결과여서일까?
신현호 회장이 모처럼 크게 웃었고, 임혁수 부회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회장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사업 방향성을 준비하랬더니, 영 엉뚱한 걸 하고 있는데요.”
“안 괜찮을 게 뭐 있나.사람도 사업의 일부인데.”
“그래도 지금은…….아닙니다.그럼 계획대로 후계자 선정 작업을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경욱이 녀석 하는 걸 보니 시기를 좀 당겨도…….음.”
입꼬리를 올리던 신현호 회장이 왼쪽 가슴팍에 손을 댔다.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이 잠시 찡그려졌다.
한편, 신경욱 부사장의 행보를 접한 신경수는 코웃음을 쳤다.
“참 정 많은 형님이란 말이지.”
“아직 한국엔 이런 감성팔이가 먹히나 봅니다.”
마주 앉은 남자의 답에 신경수가 고개를 저었다.
“후진국 마인드를 못 벗어나서 그런 거지.이대로라면 너무 싱겁게 끝나겠군.”
“바로 조치할까요?”
“아니.스스로 무덤을 더 팔 거야.그때 움직여.”
“이해했습니다.곧 재미난 장면을 보게 되겠군요.”
대답한 남자가 이죽거렸다.
그 웃음 뒤로 월스트리트의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신경욱 부사장이 그룹 운영 본부장과 만나 어떤 담판을 지었을까?
유현은 다소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박두식 차장을 통해 들었을 뿐, 결과는 알지 못했다.
지이잉.
그 결과가 지금 막 신경욱 부사장으로부터 직접 전해져 왔다.
-일단 한성디스플레이만 바꿔 보는 걸로 결론이 났어.아쉽겠지만 자체적으로 준비했던 내부안 먼저 적용해 보도록 해.임 사장님에게는 내가 직접 말하지.
애초에 유현은 그룹 전체를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목표로 부딪쳤기에, 한성디스플레이라도 건질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 작은 변화로 큰 변화를 이끄는 건 이제 유현의 몫이었다.
유현은 마음을 담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아쉽다니요.정말 수고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그룹을 바꾸는 건 혁신전략실로 들어와서 했으면 좋겠어.
-당연히 그래야죠.정리되는 대로 가겠습니다.
이미 나눴던 이야기인 터라 더 깊게 들어갈 내용은 없었다.
빠르게 메시지를 주고받은 유현에게 권세중 대리가 불쑥 물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테이블엔 음식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뭔데 그렇게 집중해? 무슨 소식이라도 있어?”
“자식, 감 좋네.”
“또 그런다.뭔데? 일?”
“송년회 자리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다.내년에 들어.”
유현이 손을 젓자, 권세중 대리가 대번에 알아들었다.
“급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어.그런 건 아니야.근데 준식이는?”
“또 접시 채우러 갔지.하여간 뷔페 오니까 제일 신났어.”
“맛있긴 하잖아요.”
정현우의 말에 유현도 거들었다.
미래기술TF의 송년회 장소는 여의도 외곽에 위치한 뷔페였다.
유현은 일류 호텔 뷔페를 모두 섭렵한 경험을 살려 솔직한 비평을 늘어놨다.
“인정.외관이 작아서 걱정이었는데, 음식 퀄리티가 상당해.”
“네.여길 마지막으로 오길 잘한 거 같아요.피날레를 장식하기 딱 좋네요.”
“그래.그간 맛집 투어 한다고 현우 네가 고생이 많았다.”
“그 영광을 함께하는 모두에게 돌리겠습니다.”
유현이 빙긋 웃었고, 정현우가 넉살 좋게 답했을 때였다.
장준식이 양손에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탁.
접시를 본 유현이 눈을 껌뻑였다.
김밥이 종류별로 산처럼 쌓인 게 인상적이다.
“뭐야, 뭐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실장님께서 김밥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요.”
“뷔페에서 김밥을…….”
유현이 뜸을 들이자, 장준식이 다급하게 물었다.
“헉! 김밥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냐, 아냐.좋아해.근데 어떻게 알았어?”
“요새 실장님께서 퇴근하실 때마다 김밥집 들러서 김밥 종류별로 맛보신다는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아까도 김밥부터 드시는 거 봤습니다.”
“네가 나를 많이 관찰했구나.”
여러 김밥을 맛본 건 사실이지만, 그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곧 생길 ‘나도김밥’의 경쟁 업체 분석 차원이었다.
뒷사정을 조금 알고 있는 권세중 대리가 어깨를 들썩였다.
“크크! 유현아, 준식이가 모처럼 센스를 발휘했는데, 좀 먹어.”
“그럼.그래야지.준식아, 너무 고맙다.”
“감사합니다.더 노력하겠습니다.”
“아냐.넌 노력 안 해도 완벽해.그런 의미에서 건배 제의 해 봐.”
유현의 제안에 세상 뿌듯한 표정을 짓던 장준식이 벌떡 일어났다.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든 그가 멘트를 떠올리는 듯 눈알을 굴렸다.
어째 이상한 걸 외워 온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그의 입에서 인터넷 블로그에서 나올 법한 멘트가 나왔다.
“건배 제의는 진달래로 하겠습니다.진은 진하고, 달은 달콤한, 래는…….”
“푸하하하하!”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배를 잡았다.
덕분에 2011년 미래기술TF의 마지막 회식엔 웃음꽃이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