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59
상남자 659화
메신저 위드로 시끌벅적했던 것도 잠시였다.
음식은 비워지고 있는데, 주인공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시끄럽던 강준기와 이한준의 말도 첨차 누그러들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틈을 타 한 녀석이 불만을 토로했다.
“원석이 이 녀석, 이러다 안 오는 거 아냐?”
“그러게.돈 빌릴 때도 그러더니, 자기 마음대로네.”
그 옆에 있던 녀석은 불쑥 돈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들 쌓인 게 조금씩 있는지 불만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너한테도 돈 빌렸냐? 나한테도 20만 원 빌렸는데.”
“원석이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돈 빌려갔으면 갚아야지.”
“오늘 이 자리도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거 아냐?”
그러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의 소리도 나왔다.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인지 다들 조그만 자극에도 금세 휩쓸렸다.
유현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유현아, 내가 거기서 돈 갚을 거라는 거 말하지 말아 주라.친구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래.원망에 대한 사과도 직접 하고 싶고.
박원석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원했던 만큼,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잡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 무슨 일 있나?’
고개를 갸우뚱한 유현이 휴대폰을 들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박원석이 아닌, 단발머리에 키가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어라? 누구지?”
“우리 학교 아닌 거 같은데?”
“…….”
의아한 분위기 속에 유현만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과거 유현의 회사로 찾아왔던 박원석의 여동생이었다.
커다란 눈동자를 본 순간 기억이 확실히 났다.
또각또각.
걸어 들어오는 여자를 보며 이한준이 목소리를 냈다.
“여기 산내중학교 모임인데요.”
“네.알고 왔어요.”
“누구시죠?”
“원석이 오빠 동생, 박원영이라고 해요.안녕하세요.”
박원영은 오빠의 친구들을 향해 고개 숙였다.
몰린 시선이 어색할 만도 하건만,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순간 유현과 눈을 마주친 그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마치 유현을 잘 아는 눈치다.
의아해하던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오빠가 무척 오고 싶어 했는데, 제가 검사받아야 한다고 말렸어요.”
“웬 검사요?”
의아해하는 강준기에게 그녀가 세부 설명을 했다.
낯선 사람들 앞이라 움츠러들 만도 한데, 그녀는 무척 당찼다.
“수술 전에 하는 검사가 있대요.원래는 일정이 다른 날이었는데, 수술 날짜를 앞당길 수 있게 돼서 당기니까, 검사 일정도 바뀌었어요.양해 부탁드려요.”
“수술이요?”
“간암 수술인데, 잘될 거예요.병원에서도 잘될 거라고 했고요.”
연이은 충격적인 단어의 등장에 일순간 분위기가 술렁였다.
“헐.”
“간암이라고요?”
술렁술렁.
놀란 친구들을 뒤로하고 박원영은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오빠가 건강해지면 알려 줄 거예요.아, 그리고 여기는 계산 마쳤고, 2차로는 이 앞 호프집에 계산했어요.오빠의 마음이니 다들 그냥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
뭐라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원영은 분위기를 개의치 않고 준비한 가방을 뒤적여 봉투를 꺼냈다.
그러곤 앞에 앉아 있는 이한준에게 먼저 내밀었다.
스윽.
“한준 오빠 되시죠? 저희 오빠가 돈 빌려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했어요.”
“아니, 이게…….”
예상치 못한 봉투의 등장에 이한준이 눈을 껌뻑였다.
“확인해 보시고, 잘못된 부분 있으면 알려 주세요.정말 감사합니다.”
얼떨떨해하는 그에게 박원영은 또다시 인사했다.
꾸벅.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박원영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가가 봉투를 내밀었다.
“준기 오빠, 저희 오빠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까지 다 알고 있었다.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과거 박원영이 찾아왔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돈을 돌려줬었다.
오빠의 죽음을 전하면서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랬던 박원영이 몇몇 친구들을 지나 유현 앞에 섰다.
무척 슬퍼 보였던 눈망울은 이제 환한 눈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현 오빠, 오빠에겐 특히 고마운 게 너무 많아요.”
“제게 고마울 게 뭐 있나요.”
“아뇨.정말 정말 많아요.부족한 건 꼭 갚겠습니다.”
스윽.
유현은 그녀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에는 유현이 빌려줬던 50만 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거기엔 박원석이 전한 편지도 함께였다.
-유현아, 느닷없이 나타난 나를 따뜻하게 대해 줘서 너무 고맙다.그리고 쉽지 않았을 텐데 돈 빌려줘서 고마워.어릴 적 너랑 같이 놀면서…….
종이 1장을 손 글씨로 빽빽하게 채운 게 무척 인상적이다.
얼마나 시간을 들였을지, 눈에 보였다.
“녀석.”
유현이 편지에서 눈을 못 떼는 것처럼, 김현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말없이 박원석의 정성을 눈에 담았다.
조금 전까지 박원석을 원망하던 다른 친구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봉투를 모두 다 돌린 박원영은 다시 친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빠들, 정말 감사합니다.”
“…….”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그녀의 행동엔 주저함이 없었다.
어느새 유현에게 다가온 박원영이 나지막이 물었다.
“유현 오빠, 혹시 잠깐 시간 되세요?”
“그럼요.”
거절할 이유가 없는 터라, 유현은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박원영의 뒤를 따랐다.
김현수가 그런 유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유현은 박원영과 같은 건물 1층 커피숍에서 마주했다.
박원석이 워낙 큰 반면, 박원영은 키가 작은 편이었다.
이목구비 형태도 달라, 남매가 닮았단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웃을 때 진하게 팬 보조개만큼은 붕어빵처럼 똑같았다.
유현을 바라보던 박원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에 유현 오빠가 수술비 도와준 거 말할까 하다가 말 못했어요.”
“잘하셨어요.굳이 꺼낼 필요 없죠.원석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요.”
유현의 답에 박원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네요.”
“뭐가요?”
“아니, 저도 듣긴 했는데, 괜히 또 유현 오빠 마음은 그게 아닐까 봐 걱정됐어요.워낙 크게 도와준 거잖아요.알리지 못하면 섭섭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했고요.”
이게 마음에 걸려서 따로 보자고 한 모양이다.
장황한 설명 속에서 그녀의 배려심과 고민의 흔적이 묻어 나왔다.
피식 웃은 유현이 손을 내저었다.
“뭘 그런 걸 신경 써요.”
“우리 오빠 도와주시고 수술시켜 주신 은인이신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당장 갚지 못해 너무 죄송할 뿐인걸요.”
“괜찮아요.저 여유 많으니까 아주 늦게 갚아도 돼요.”
“진심으로 감사해요.정말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박원영은 또 꾸벅 인사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계속 인사만 받을 순 없는 노릇이라, 유현이 말을 돌렸다.
그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근데 원석이는 어때요?”
“잘 있어요.억지로라도 쉬니까 얼굴도 좋아졌고요.”
“잘됐네요.”
“이제부터 제가 챙겨야죠.그간 못 챙겼으니까요.”
박원영은 씩씩하게 미소 지었다.
오빠 돈 갚겠다고 오빠 친구들 모임에 와서 직접 봉투를 돌리는 모습만 봐도, 절대 보통 내기는 아니었다.
유현은 박원석이 했던 말을 그녀에게 전했다.
“원석이가 원영 씨 얘기 많이 하더군요.대단한 동생이라고.”
“제가 뭘요.오빠야말로 대단하죠.어릴 적에 울 오빠 어땠는지 알아요?”
“어땠어요?”
“그땐 제가 정말 철부지였는데, 오빠는 저 대학 보내 주려고 일찍부터 돈을 벌었어요.매일 새벽마다…….”
박원영은 눈빛을 반짝이며 어릴 적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힘든 시절, 그녀에게 오빠는 든든한 우산이었다.
박원석이 부모 역할까지 해냈기에, 그녀는 다른 또래들처럼 밝게 클 수 있었다.
덕분에 박원영은 마음 편히 누릴 걸 다 누렸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그녀가 얼마나 오빠에게 고맙게 생각하는지 확 느껴졌다.
유현은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시네요.원영 씨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요.”
“전 정말 힘들 게 없었어요.공부만 하면 됐는 걸요.고생은 제 책값까지 일일이 챙겨 준 오빠가 다 했죠.오빠가 혼자 모든 짐을 껴안은 덕분에요.”
“원석이가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거죠.”
박원석은 정다혜의 모습과 겹쳐질 만큼 책임감이 강했고, 혼자 다 이겨 내려 했다.
박원영도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그래서 제가 미처 몰랐나 봐요.오빠는 언제나 잘 해낼 거라 생각했거든요.전 늘 받아 와서 그게 당연한 거라 여겼어요.”
“그렇군요.”
“뻔히 고생하는 거 아는데, 전 오빠에게 잘할 수 있다고, 더 힘내라고 하면서 부추겼어요.그게 오빠를 더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고요.”
“원석이는 힘이 많이 됐을 거예요.”
“아니에요.말로만 하는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힘들고 외로울 때 옆에 있어 줬어야죠.”
박원영의 후회는 유현의 반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유현은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렇죠.옆에 있어 줘야죠.”
“네.그래서 더 후회됐어요.차라리 그냥 오빠 보러 갈걸.그 쉬운 걸 못했어요.어쩌면 전 말로는 오빠를 위한다고 했지만, 방관했는지도 몰라요.”
“…….”
이어진 그녀의 말이 유현의 폐부를 찔렀다.
어쩌면 유현도 정다혜를 방관했던 건 아닐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현은 정다혜가 보낸 수많은 사인을 무시한 채, 이런저런 핑계로 시간을 뒤로 미뤘다.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편하게 마음먹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고 나서야 후회하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 결심조차 그녀를 위한 게 아니라, 유현의 마음이 편한 방향이었다.
단순한 금전적 지원이 진정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상념에 잡힌 유현에게 박원영이 의지를 전했다.
“이젠 절대 안 그럴 거예요.후회하는 삶은 지금으로 족해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올라와서 오빠 옆에 있으려고 해요.직장도 오빠가 있는 곳 근처로 구할 생각이에요.”
“하던 공부는요?”
“돌이켜 보면 대학원은 제가 원했던 게 아니라 그냥 집착이었던 거 같아요.그래서 이참에 정리하려고요.”
유현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공부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며 고생했다는 건 알았다.
아무리 집착이었다 해도 중간에 멈추는 게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쉽지 않아요?”
“아쉽긴요.그런 건 제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요.”
“그럼요?”
“진짜 중요한 건, 제가 아끼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사는 거였어요.”
쿵.
이어진 박원영의 한마디에, 유현은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유현은 멍하니 그녀가 한 말을 읊조렸다.
그 속에 유현이 놓쳤던 삶의 방향성이 있었다.
“그렇죠…….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유현이 다시 인생을 사는 건, 잘못된 삶을 바로잡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라는 조그마한 울타리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미 많은 걸 바로잡았음에도 더 해내려 집착했다.
그사이 정작 중요한 걸 다 놓치고 있었는데 말이다.
유현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박원영이 시간을 확인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양해를 구했다.
“이것 좀 봐.오빠한테 병원비 얘기만 전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너무 제 얘기를 많이 해 버렸네요.”
“아뇨.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시간이었다니요.전 그냥 하소연했을 뿐인데요.”
“제가 들은 어떤 말보다 값진 말이었어요.감사합니다.”
유현은 박원영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 속에 유현의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