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716
상남자 716화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꽁꽁 감춰 둔 속내를 꺼냈다.
“유현 씨…… 사실 저 얼마 전에 아버지 만났어요.”
“그래요?”
“네.원망의 대상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리웠나 봐요.아버지도 많이 늙으셨더라고요.”
“20년이면 정말 긴 세월이죠.”
어릴 적에 부모님 손을 떠난 어린 정다혜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이다.
자세히 말은 안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쌓인 오해와 서운함이 어느 정도 풀린 거 같았다.
“오래 원망했던 마음이 바로 바뀌진 않을 거예요.그래도……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녀는 유현에게 다짐하듯,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제 강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유현은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안아 줬다.
“다혜 씨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옆에 있을게요.”
“유현 씨…… 고마워요.”
꼬옥.
그녀의 몸이 가냘프게 떨려 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깼을 때, 정다혜는 사라지고 없었다.
스윽.
유현은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봤다.
2통의 메시지 중에 먼저 온 걸 띄웠다.
-다혜 : 유현 씨, 잠든 모습 보고 나와요.고마워요.모든 게 다요.
이 메시지 하나로 유현은 모든 걸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유현이 한 건 다리를 놓는 일뿐, 이제부터는 정다혜의 마음이다.
유현은 왠지 그녀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다음 메시지는 한재희로부터 왔다.
-한재희 : 오빠, 내가 자리 비워 줘서 고마웠지?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주기다.
“참 나.”
내용을 본 유현이 헛웃음을 지었지만,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덕분에 정다혜가 속마음을 토해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술꾼인 줄만 알았더니.’
은근 분위기를 이끄는 데 소질이 있었다.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린 유현이 피식 웃었다.
정다혜를 다시 만난 유현은 그녀의 술버릇을 알려 줬다.
듣고 있던 정다혜가 놀라 물었다.
“에이, 제가 그렇게 웃었다고요?”
“엄청 울기도 했죠.”
“그럴 리가요.저 주사 없거든요.”
“아, 네…….”
유현은 뻔뻔한 정다혜를 보며 웃고 말았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무척 가벼워 보였다.
정다혜는 속에 있는 응어리를 떨쳐 낸 것처럼 자주 웃었다.
유현 앞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회사 사람들 앞에서도 편하게 미소 지었다.
달라진 표정만큼 행동도 변했다.
회의실에 들어선 그녀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지금껏 제 판단대로 기업용 메신저만 목표로 잡았는데, 그걸론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어요.지금부터 바꾸려고 합니다.”
“어떻게요?”
나도하의 물음에, 정다혜가 세부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우리 회사의 전체 방향성부터 먼저 잡을까 해요.먼저 저희는 모바일 증권 플랫폼, 메신저 위드, 기업용 메신저, 세 가지 업무를 하고 있죠.우선 첫 번째로…….”
다들 아는 내용이었지만, 개발자가 아닌 컨설턴트 관점에서 이윤과 연결해 설명하니 무척 새롭게 느껴졌다.
이렇듯 큰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사람들을 이끄는 게 원래 그녀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방향성을 그리되, 직원들을 참여시키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쉬운 부분부터 눈높이를 맞췄다.
“내용이 어렵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이는 우리 업무의 이름이 명확하지 않아서예요.그래서 그 전에 이름부터 정하려고 합니다.”
“이름이요?”
“네.한성 노트와 연동한 위드를 그냥 위드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플랫폼 역할을 하는 위드를 중심에 두고, 파생되는 이름을 정해야 해요.”
그녀가 한마디 툭 던지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맞네요.앞으로 각종 어플과 협업하는 파생 제품이 나올 텐데, 위드라고 쓸 순 없죠.”
“제 생각도 그래요.위드 확장성을 생각하면 클라우드 저장소나 커머스와 합칠 수 있는데, 그때를 대비해야 해요.”
“기왕이면 통일성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 어렵다.”
별것 아닌데 다들 집중하고 있었다.
어려운 것도 단기간에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 이름 가지고 고민하는 게 퍽 우스웠다.
가만히 보고 있던 유현이 가볍게 제안했다.
“위드H 어때요?”
별것 아닌 제안을, 조용희가 흥분한 목소리로 받았다.
“오오! 한성 노트와 연동하는 거니까 위드H로 하시는 거군요.알파벳으로 확장시키면 통일성도 있고, 특색도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특히 다른 파생 제품을 만들 때…….”
심지어 없던 설명까지 곁들였다.
“그…… 런 셈이죠.”
조용희의 열변에 유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듣고 보니 꽤 의미 있는 이름 같았다.
덕분에 이견 없이 이름이 쉽게 결정됐다.
정다혜도 이에 동의했다.
“그럼 메인은 위드, 기업용은 위드H로 가시죠.다음으로 모바일 증권 플랫폼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요.그냥 더블와이로 하기엔 앞으로 저희 확장성을 고려할 때…….”
정다혜는 왜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눈높이를 맞춰 설명했다.
또다시 직원들은 고민했고, 유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간단히 답했다.
“밀키 어때요?”
이번에도 조용희가 큰 목소리로 부연 설명을 했다.
“오오! 미리내가 은하수잖아요.은하수는 밀키웨이고요.뒤의 글자 떼면 밀키네요.이렇게 하면 미리내 증권을 배려해 주면서도 특색이 있는 데다…….”
듣고 있던 직원들도 유현을 치켜세웠다.
“사일런트 님 설명대로라면 엄청 괜찮네.밀키.입에도 딱 붙잖아.”
“역시, 이사님.더블와이와 위드 이름을 지으신 분은 다르다니까.”
“내 닉네임도 이사님께 지어 달라고 할걸.”
“스님은 스님이 딱 어울려요.”
“…….”
무슨 말만 꺼내면 몰아가 버리니, 유현도 할 말이 없었다.
정다혜가 그런 유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사님, 이름 잘 짓네요.짓는 김에 저희 비전도 지어 주시죠.”
“비전이요?”
“네.방향성에 비전까지 정하면 딱 그림 나올 거 같은데.대표님께서 지어 주셔도 되고요.”
정다혜의 시선을 받은 박영훈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한 이사가 지어.다들 이름 잘 짓는다잖아.”
왠지 그는 유현이 부러운 기색이었다.
“흠.”
유현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비전은 유현이 더블와이에 오기 전부터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기왕이면 더블와이부터 시작하는 게 괜찮을 것 같았다.
스윽.
직원들을 둘러본 유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어때요?”
유현이 답한 순간이었다.
조용희가 이번에도 침을 튀기며 열변했다.
“오오! 더 나은 세상의 ‘더’는 더블와이의 ‘더’잖아요.이렇게 비전과 사명이 일치함으로써 전체 구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고…….”
말도 안 되는 데다, 비논리적인 답에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짝!
“역시 다르다니까.”
“대단하시네.”
“이것 참…….”
유현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됐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더블와이의 항해가 시작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현은 더블와이에 적응해 갔다.
특색 있는 사람들과 일하는 건 한성에서도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정다혜와 같이 일하고, 퇴근 후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것도 즐거웠다.
특히 땀 흘린 후에 같이 맥주 한잔 기울일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과거와 일하는 곳은 달랐지만, 함께하는 기쁨은 더 커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유현은 차를 몰아 더블와이로 향했다.
트렁크엔 직원들에게 전할 초콜릿이 박스째로 실려 있었다.
가끔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게 유현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또 난리 나겠네.’
유현이 즐거워할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휴대폰 알림이 울리며, 내비게이션 창에 권세중 대리의 이름이 떠올렸다.
유현은 반가운 마음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바쁜 녀석이 웬일이야? 휴대폰 출시 임박했다고 전화한 거야?”
-아냐.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그래?”
-하아! 어떻게 말해야 하냐.너 준식이한테 연락 좀 해 봐라.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각한 데다, 내용도 뜬금없었다.
유현이 바로 이유를 물었다.
“준식이는 왜? 걔 서울로 왔어?”
-아니.그 정신 나간 녀석이 원주 공장에 있어서 문제야.
“그게 왜?”
-그 녀석 아버지가 위독하셔.오늘내일하신다고.근데 그 녀석이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해.
“뭐?”
끼이익!
차를 길 한쪽에 세운 유현이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위독하시다니? 안 움직인다는 건 또 뭐고?”
-나도 조금 전에 연락받은 거야.의사가 임종 준비하라고 했대.근데 준식이 녀석은 빨리 가라도 해도 원주 공장에 남아 있는 거고.
“대체 왜?”
-그 녀석 책임감 강한 거 알잖아.지금 공장에 생산 이슈가 발목을 잡고 있으니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같아.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그게 말이 돼?”
유현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울컥했다.
-절대 돌아가실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네가 좀 어떻게 해 봐.내 말은 도통 안 들어먹어.
“후! 알았어.일단 병원 주소 메시지로 보내 줘.준식이는 내가 연락해 볼게.”
-그래.꼭 좀 부탁한다.
통화를 끝낸 유현은 바로 장준식 대리에게 전화했다.
띠로리로리.띠로리로리.
통화 연결음이 한참 울렸지만, 장준식 대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좀 받아라.”
초조하게 중얼거리는 유현의 뇌리에 예전에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준식아, 기왕 하는 거 조금만 더 힘내라.지금은 힘들겠지만, 분명 이 시간을 잘 극복해 내면 넌 누구보다 성장해 있을 거야.
설마 그딴 말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걸까?
고지식한 녀석을 위한답시고 했던 그 말이 후회로 밀려왔다.
그만큼 장준식 대리는 유현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사이 권세중 대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동성의료원 202호.
앞부분만 확인한 유현은 다시 장준식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어지면 또 걸고, 그렇게 3번을 반복했을 때였다.
달칵.
장준식 대리가 전화를 받았다.
유현은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물었다.
“준식아, 너 뭐 해?”
-과장님, 지금 공장에서 장비 셋업하는 걸 봐주고 있습니다.
갈라진 목소리만 들어도 피곤함이 느껴졌다.
며칠 밤을 새운 모양이다.
순간 유현의 마음이 요동쳤다.
“아버지 위독하시다며.빨리 아버지 계신 곳으로 내려가, 인마.”
-괜찮습니다.아버지는 그렇게 약한 분이 아니십니다.지난번에도 이겨 내셨습니다.
“야, 장준식.”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제 일 마무리 짓고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고요.아버지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 미친놈아! 지금 그딴 말 할 때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빨리 내려가!”
-병상에 계신 아버지에게 제 일도 제대로 못 끝낸 못난 아들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후배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은 유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후! 장준식, 너 지금 안 내려가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아닙니다.그래도…….
“네 일 뒷수습은 바로해 놓을 테니까, 걱정 마.나 못 믿어?”
-…….
“준식이 너, 짐 싸 들고…….아니다.지금 바로 게이트 A로 튀어나가.”
-하지만 제 차는…….
장준식 대리는 지금 원주 공장에 있다.
주변에 챙겨 줄 사람도 없다 보니,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현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너 그 정신으로 가면 사고 나.일단 가 있어.10분 안에 너한테 연락 갈 거다.”
뚝.
전화를 끊은 유현은 바로 다른 곳으로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