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87
상남자 87화
반면 최민희 과장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는 요 며칠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필 쉼터에서 유현의 몸을 닦던 모습이 지나가던 김현민 차장에게 딱 걸린 탓이다.
거기다 둘이서 출장까지 간다고 했으니 그가 짓궂게 놀릴 만도 했다.
-흠흠.유현이가 좀 잘생기긴 했지만 최 과장은 결혼도 했고, 나이 차도 좀 나고…….
-차장님 아니라니까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던 그녀가 짜증을 낼 정도였다.
김현민 차장의 장난이야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가지 않게 막는 게 고역이었다.
소문이 돌아 유현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소름 끼쳤다.
“진짜 김 차장…….나중에 꼭 복수할 거야.”
“네?”
“응? 아, 아니.뭐 좀 먹을래?”
최민희 과장이 딴청을 피웠다.
치이이잉.
부산역에서 내린 유현은 최민희 과장을 따라 뛰어야 했다.
기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버스 출발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에휴, 오늘 너무 정신없네.”
“다이내믹하고 좋은데요.”
그 와중에도 유현은 초조해하는 최민희 과장의 기분을 잘 맞춰 줬다.
역 앞 광장엔 딱 한성화학 버스가 있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올라탄 유현은 아이디카드를 확인받은 후 빈자리에 앉았다.
한성 직원이라 좋은 점은 신청만 하면 다른 계열사 버스를 탈 수 있단 점이다.
부산에서 거제까지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붙어 있는 자리가 없어 최민희 과장과 따로 앉은 유현이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과거엔 이렇게 버스에서 밖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한눈팔 만한 여유가 없던 시기였다.
당시 유현은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었는데 그걸 몰랐다.
어느덧 버스는 거제에 진입했다.
바다와 오래된 시가지를 지나 현일자동차 공장 부지가 나왔다.
일 년에 백만 대 이상의 자동차를 찍어 내는 곳이니만큼 그 규모가 대단했다.
버스는 조금 더 달렸다.
다리를 건너자 곧이어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유현을 반겼다.
“다 왔어.내리자.”
“네, 과장님.”
버스에서 내린 유현은 고개를 들어 보았다.
바로 앞에 한성화학 건물이, 그 옆에 현일자동차 연구소가 보였다.
뿐만 아니라 한성 생명과학, 생활건강을 비롯한 다양한 기업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정부에서 조성한 대규모 기업단지다운 위용이었다.
현일자동차 연구소 건물 입구에 위치한 고객안내센터 안이었다.
최민희 과장은 작성한 출입 확인서를 안내원에게 제출하고 나서야 안도감이 드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진짜 멀긴 하다.그치?”
“그러게요.고생하셨어요.”
“뭘.네가 고생했지.”
원래 최민희 과장이 이렇게 남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나?
유현이 빙긋 웃자 최민희 과장은 눈을 돌려 괜히 벽에 붙은 글귀를 보았다.
-오늘 당신에게 기가 막힌 행운이 따를 겁니다.
네 잎 클로버 배경 위에 올려진 한 줄의 말에 유현이 살을 덧붙였다.
“오늘 왠지 잘 풀릴 거 같은데요?”
“그래야지.”
이제 들뜬 기분이 가라앉은 걸까?
최민희 과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지한 눈빛을 보였다.
유현을 의식하지 않고 발표 내용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린 모습이었다.
내심 미소 지은 유현은 들고 온 노트북을 꺼내 발표 보고서를 미리 띄웠다.
언제든 바로 발표할 수 있게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기다리다 보니 회의 시간이 다 되어 갔다.
그럼에도 픽업하러 오기로 한 직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 왜 안 와.”
“아까 연락 오지 않았어요?”
“오면 뭐 해.안 오는데.하여간 갑질은…….아냐.이럴 수 있는 거야.”
“네, 과장님.”
투덜대던 최민희 과장은 유현을 보더니 말을 돌렸다.
한 번에 그녀가 신경 써 주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 언제 오나 싶을 때쯤, 작은 키에 파마머리를 한 남자가 들어왔다.
유현과 통화하기도 했던 현일자동차 내장 제품 기획팀 권승범 대리였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진작에 왔어야 하는데 좀 늦었네요.”
“아닙니다.들어가시죠.”
입이 툭 튀어나왔던 최민희 과장도 프로답게 가면을 썼다.
여기서 굳이 싫은 티를 낼 필요 없다.
얻을 걸 빨리 얻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그녀에게도 도움이 된다.
저벅저벅.
권승범 대리를 따라 현일자동차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한성전자 건물 내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로비엔 현일자동차 초창기 개발 차량이 전시되어 있었고, 실내 곳곳에서 자동차 부품의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이런저런 풍경을 눈에 담으며 도착한 곳은 중회의실 크기 정도 보인 미팅룸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렸고, 그 안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권승범 대리까지 포함해 총 5명이었다.
드디어 인사가 시작됐다.
“처음 뵙겠습니다.내장 제품 개발팀 한승욱 책임입니다.”
“진작에 들렀어야 하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상품기획팀 최민희 과장입니다.”
회의실에 들어선 최민희 과장이 다가가자 현일자동차 직원들이 일어나 인사했다.
웃으며 간단한 안부와 함께 명함을 교환했다.
자리에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은 유현도 그 뒤를 따랐다.
내장 제품 개발팀, 내장 기구 설계팀, 내비게이션 개발팀, 그리고…….
유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인사를 건네는 남자가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안녕하십니까.”
분명 존댓말인데 내려다보는 시선이 묘하게 불쾌했다.
심지어 한 손으로 검지와 중지에 낀 명함을 날리듯 건넸다.
유현의 직급이 낮으니 만만하게 보고 하는 행동이었다.
“반가워요.”
“조 대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럼에도 유현은 얼굴에 미소 지으며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을’로서 고객을 만나기 위한 미팅이다.
미팅의 주체인 최민희 과장을 건들지 않는 이상 유현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유치하게 이런 거로 기분 상하지 않았다.
당장 같은 팀에 고재윤 차장 같은 사이코도 있는데 이쯤은 별 거 아니었다.
유현은 받은 명함을 자신의 테이블 위에 차례로 깔았다.
마주하고 있는 자리엔 명함이 놓여 있는 순서대로 현일자동차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이름을 못 외워서가 아니다.
자리에 올려 두고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는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받자마자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보단 이편이 확실히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유리하다.
명함을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게 회사원들의 마음이다.
오랜 습관이 일련의 과정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건 어디서 주워듣는다고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현이 고개를 돌리자 얼떨떨한 표정의 최민희 과장이 보였다.
마치 그런 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다.
유현이 속삭이듯 말했다.
“신입사원 연수 때 담당 선배가 알려 주더라고요.이렇게 하면 되나요?”
“응? 어.그렇지.자연스럽더라.”
“감사합니다.과장님, 준비됐습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노트북과 연결된 프리젠터를 건넸다.
“…….”
프리젠터를 잠시 바라보던 최민희 과장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집중하는 모습이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프레젠테이션 실력이 능한 데다 준비도 충분했다.
“이번에…….”
“여기서…….”
“그건…….”
제품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현일자동차 측의 변덕도 바로바로 대응했다.
애초에 잡음이 나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서 나올 가능성이 컸다.
유현은 고개를 돌려 가장 바깥쪽에 앉아 있는 영업팀 조치훈 대리를 보았다.
넙데데한 얼굴과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이었다.
심술궂게 생긴 것처럼 시종일관 불만스런 표정을 유지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최 과장님, 영업팀은 안 왔어요?”
“네.지난번 말씀드렸듯이 이번 제품 진행 상황을 전달드리고 컨펌 나는 대로 영업팀에 인계할 예정입니다.”
“에구, 원래 한성 스타일이 그런가? 일을 좀 답답하게 하네요.”
“내부 프로세스라 그렇습니다.양해 부탁드립니다.”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대이지만 최민희 과장은 정중했다.
현일자동차는 큰 고객이다.
물량이 엄청나게 많아서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에서 최초로 자체 개발하는 내비게이션에 메인으로 들어간단 상징성이 컸다.
개발비도 거의 받지 않고, 무리한 요구에도 군말 없이 대응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해 왔는데 이 정도 도발에 일을 그르칠 리가 없었다.
“후.”
가볍게 숨을 고른 최민희 과장이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살폈다.
그녀는 현일자동차 측으로부터 개발 완료 컨펌을 받아 내야 했다.
그래야 영업팀으로 인계해 가격과 물량을 협정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 그에 맞춰 개발 라인을 셋업할 수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매듭지을 생각이었다.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눈빛을 반짝인 그녀가 프리젠터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전환됐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벽에 달린 스크린으로 향했다.
최민희 과장의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리 한성은……”
목소리엔 이목을 끌 만한 힘이 있었다.
내용은 직관적이었고, 진행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는 발표였다.
유현의 높은 시선으로 봐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붕 뜬 느낌일까?
현일자동차 직원들의 태도가 불량한 건 아니다.
고개도 중간중간 끄덕이고, 프린트해 온 발표 내용도 돌아가서 확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현이 어색한 기분을 느낀 건 그들의 모습에서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제품 출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스펙 변경으로 메인 부품인 LCD 패널이 아직 개발 중이었다.
물론 다른 패널로 대체해 테스트할 수 있는 환경을 꾸며 주긴 했지만, 그걸로 제대로 된 성능을 보긴 힘들었다.
처음 개발하는 내비게이션 아닌가.
영업팀, 기획팀은 둘째 치고 개발 엔지니어들도 바빠야 했다.
어떻게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일정을 더 당겨 달라든지, 추가 보완책을 요구하든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일절 없었다.
마치 제품 기획 단계의 분위기 같았다.
“……여기까지가 저희 패널의 진행 상황입니다.연말에 개발이 완료될 예정이고 다음 달이면 초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보고드린 대로 사전 검토 시 제품에 문제는 없으며 오늘 컨펌 받으면 기 협의된 대로 내년 1분기 정상 제품 출하가 가능합니다.”
“…….”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시 한번 일정을 강조한 최민희 과장은 시선을 개발팀 인원 쪽으로 돌렸다.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초품 패널이 나오는 대로 내비게이션 완제품 테스트에 저희 개발 인력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순간 내비게이션 개발팀 인원들이 시선을 마주쳤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난처한 듯 주고받는 눈빛 교환을 유현이 놓칠 리가 없었다.
“이상으로 발표 마치겠습니다.”
짝짝짝짝.
의례적인 박수가 나온 후였다.
개발팀에서 질문이 나올 만하건만 정작 먼저 입을 연 건 영업팀 조치훈 대리였다.
“권 대리, 그거 꺼내 봐.”
“네.알겠습니다.”
권승범 대리가 꺼낸 건 내비게이션 목업이었다.
틱.
전원을 켜자 화면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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