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86
상남자 86화
유현은 다리가 되어 준 강창석에게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이었다.
“제가 더 고맙죠.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래.얼마든지.네 부탁은 꼭 들어주마.”
“네.잊지 마세요.”
“그럼.당연하지.”
“갈게요.”
유현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도 인근의 한 유명 골프장.
한 남자가 골프채를 휘둘렀다.
깡.
멀찍이 날아가는 공을 보며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전무님, 나이스 샷입니다.”
그중 한 남자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영업팀 이경훈 부장이었다.
공을 친 모바일 그룹장 안준홍 전무는 입맛을 다셨다.
“살짝 슬라이스 난 것 같은데 말이지.”
“코스가 더 좋은 곳으로 떨어진 것 아닙니까.저건 의도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허허, 안 전무님은 좋겠습니다.알아서 기분 척척 맞춰 주는 부하직원이 있어서요.”
그때 옆에서 골프채를 쥐고 있던 일성전자 LCD 사업부 윤재일 상무가 한마디 보탰다.
“윤 상무야말로 딱 붙어서 보좌하고 있는 성 부장이 있지 않나.”
“에이, 성 부장은 아직 부족하죠.안 그런가?”
“맞습니다.아직 많이 부족합니다.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일성전자 성득수 부장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에 안준홍 전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역시 일성은 각이 딱 잡혀 있다니까.배울 건 배워야겠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9번 홀까지 친 후 잠시 있던 식사 자리에서도, 끝난 후 사우나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겉으로는 서로 칼을 겨누는 라이벌이자 적대 관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꼭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생 관계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한골모(한국대 동문 골프 모임)라는 사조직으로 만들어진 이 모임 안에서, 이들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이득을 취했다.
자신만 살면 회사의 이익과는 하등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허허허, 요새 일성 분위기 그래도 좋지 않나?”
“다 안 전무님 덕분입니다.”
“이 사람 뭘 또 그러나.다 돕고 사는 거지.덕분에 일성과 우리가 전 세계 시장을 동시에 잡고 있는 거 아닌가.”
“하하하, 맞습니다.그러고 보면 저희가 다 애국자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이라고 포장하기도 했다.
한성전자 LCD 사업부와 일성전자 LCD 사업부의 고위 임직원들이 이곳에 그냥 모였을 리는 없다.
당연히 원하는 게 있었고, 그 원하는 걸 들어줄 준비도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패를 내보이며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윤재일 상무가 안준홍 전무를 향해 슬쩍 운을 띄웠다.
“전무님, 한성이 현일자동차에 공급하기로 한 패널 있지 않습니까.”
“아, 그거? 이 팀장, 어떻게 되고 있지?”
“조 상무가 상품기획 쪽으로 넘겼습니다.그런데 영 신통치 않네요.현일자동차 측에선 그리 마땅치 않아 하고 있고요.”
“허허, 이 팀장이 맡았을 땐 괜찮았지 않나? 조 상무가 손만 대면 문제가 생기는군.”
“네.아무래도, 너무 아마추어처럼 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척하면 척이다.
이경훈 부장이 눈치껏 답하자 윤재일 상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일성에서도 비벼 볼 여지가 있겠군요.”
“그럴 수 있지.”
“안 그래도 이번에 저희가 내비게이션 완제품까지 만들어서 현일자동차에 노크해 보려고 합니다.현일에서 문제가 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안준홍 전무의 물음에 윤재일 상무가 답했다.
“네.자동차 회사가 자체적으로 내비게이션 할 때부터 예견된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이참에 일성 걸 넣으려고 하는데 패널이 이미 계약되어 있다고 해서 골치 좀 썩고 있었습니다.”
“허허, 계약? 영업팀에서 받은 게 없을 텐데? 안 그런가?”
윤재일 상무가 은근슬쩍 속내를 비치자 안준홍 전무는 아무렇지 않게 내부 정보를 떠벌였다.
그 말을 받은 이경훈 부장이 더 자세히 브리핑했다.
“네.아직 개발 단계고 최종 수량과 가격은 픽스된 게 없습니다.”
“그래.사소한 일이지만 이 팀장이 신경 좀 써 줘.”
“네.알겠습니다.송 차장이 담당하고 있으니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안준홍 전무가 턱짓하자 이경훈 부장이 윤재일 상무와 눈을 맞춘 후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일 상무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오고 가는 정이라는 게 있지 않나.”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그럼 오늘 저녁 진하게 한잔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가세.”
안준홍 전무가 일어나자 약속한 듯 모두가 일어났다.
서로 스치는 눈빛 속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였다.
이찬호가 손수 프린트한 자료를 들고 박승우 대리를 찾았다.
“조사한 목업 업체 리스트입니다.”
“메일로 준 거 봤어.괜찮던데?”
단순 보고에 저렇게 정성을 쏟는 걸 보니 제법 진지하게 일하고 있는 듯했다.
옆에 있던 유현은 의자를 당겨 내용물을 힐끔 보았다.
리스트 안엔 세미전자도 있었다.
박승우 대리가 그 부분을 콕 집으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오, 세미전자 쪽이 디자인 잘빠진 것 같은데?”
“문제는 아직 협업 경험이 없어서요.나중에 한번 가 보려 합니다.”
이찬호는 딱 필요한 부분을 집어냈다.
열심히 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박승우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고마워.멋진 거 하나 만들어 보자고.”
“네.알겠습니다.”
잦은 야근에 출장까지 다녀오고 있지만 얼굴은 늘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덕분에 함께하는 이찬호도 신바람이 났다.
저 두 사람이 바쁜데도 즐거워 보이는 이유가 뭘까?
유현은 답을 알았다.
그건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가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결코 저렇게 웃을 수 없다.
이런 걸 보면 회사원들이 가장 많이 퇴사하는 이유는 ‘바빠서’가 아니라 ‘의미를 찾지 못해서’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제 점점 틀이 맞춰져 갔다.
대외적인 부분은 유현이 어느 정도 허들을 낮춘 상태였다.
포인트를 거의 잡아 놓은 상황이라 중요한 시점에 슬쩍 도움을 주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일정 내 아이디어를 구현해 내야 한단 점이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게 개발 부서와의 협의였다.
박승우 대리가 능력이 있긴 하지만 변수가 많았다.
회로, 패널, 터치 부분에 요구되는 가격 절감 방안을 현실성 있게 검증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각이 중요한 프로젝트가 될 만한 사안들이다.
그걸 혼자서 한 달 만에 다 처리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단순히 숫자 놀음을 하는 게 아니라 현실성 있게 하려면 사람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해야만이 공모전을 통과하고 빠른 시일 내에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김영길 대리는 차세대 애플폰과 애플팟 패널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최민희 과장이 지금 도움을 주면 딱인데, 그녀 역시 현일자동차에 들어갈 내비게이션 패널 때문에 고민이 많아 보였다.
유현은 모니터에 뜬 팀 일정을 살폈다.
이번 주 목요일.
최민희 과장이 현일자동차와의 미팅에 참석하는 날이다.
그날 오래 끌었던 패널의 최종안이 결정된다.
그녀가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는지 알고 있다.
중간중간 보고되는 내용만 봐도 틈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가 현일자동차라는 것 자체가 변수였다.
현일자동차는 갑질로 유명했다.
진행되어 온 패널을 갑자기 바꾼 것처럼, 했던 말을 뒤집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만큼 어려운 미팅이 예상됐다.
만약 이번 일만 제대로 마무리한다면?
최민희 과장을 공모전에 투입하는 게 가능하다.
이미 터치 쪽 혁신 활동을 해 왔던 그녀였기에 무조건 도움이 될 터였다.
“그래, 해보자.”
유현은 일정표 안에 기록된 출장 인원을 살폈다.
출장자 인원은 최민희 과장 한 명뿐이었다.
충분히 유현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다.
문제는 자존심 강한 최민희 과장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다.
유현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최민희 과장이 직접 유현을 불렀다.
“유현 씨, 차 한잔 할까?”
“네.좋죠.”
여러모로 시기적절한 제안이었기에 유현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10층 쉼터 안.
유현은 마주 앉은 최민희 과장을 바라봤다.
말수가 별로 없는 성격이라 그런지 끊어지는 분위기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최 과장은 너무 딱딱한 게 탈이야.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윗사람들이 그녀에게 내린 평가였다.
조찬영 상무나, 오재환 팀장이 심심치 않게 하는 말이다 보니 유현도 자주 들었다.
그 외에도 차갑다든지, 깐깐하다든지, 예민하다든지 등등.
어떻게 보면 박승우 대리 스타일과는 정반대였다.
유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최민희 과장은 기본적으로 성공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고 휴직한 후 생긴 경력 단절을 메우기 위해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유현에게 물었다.
“이렇게 커피 마시는 게 처음이지?”
“네.그러네요.”
“섭섭하진 않았어? 선배가 잘 안 챙겨 주는데?”
“설마요.바쁘신 거 다 아는데.”
유현의 말에 최민희 과장은 눈썹을 빠르게 들썩이곤 커피 잔에 입을 댔다.
보지 않는 척하면서 유현을 살피고 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유현의 행동을 자주 살폈다.
눈치 빠른 유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속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거겠지.’
자신에게 철저한 만큼 남에게도 같은 기준을 내미는 사람의 특징이었다.
유현은 굳이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최민희 과장의 얼굴엔 깊은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거제까지 내려가는 출장이다.
보조도 없이 혼자 가서 정리까지 다 해야 하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현이 생각하고 있을 때, 커피 잔을 내려놓은 최민희 과장이 말했다.
“사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네.말씀하세요.”
“아니야.내가 무슨 생각인 건지.”
유현은 답답했다.
그냥 도와 달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그걸 못 하는 걸까?
자존심 때문이다.
과거 유현도 그랬다.
이용하면 이용했지 부탁하진 않았다.
빚을 지는 일 자체가 싫었다.
하지만 그래선 외톨이가 될 뿐이다.
유현이 자세를 풀며 말했다.
상대방이 편안해야 말도 편하게 나오는 법이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유현 씨 혹시 목요일에 시간 돼?”
“그럼요.현일자동차 출장 때문이죠?”
유현의 말이 정곡을 찌른 탓일까?
“푸!!”
순간 최민희 과장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유현이 재빨리 고개를 틀었지만 바로 앞에서 분무기처럼 퍼져 나오는 커피를 다 피할 순 없었다.
“어머! 어머!”
최민희 과장은 너무 당황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쿠당탕탕.
의자가 넘어지든 말든 그녀는 유현에게 달려갔다.
유현의 우측 옆구리엔 선명한 액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미안해.미안해.내가 진짜 미쳤나 봐.”
“아닌데요.괜찮습니다.”
“어머, 어떡해.”
옆에 티슈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신이 없는 나머지 자신의 팔로 유현의 옆구리를 닦았다.
갑자기 닥쳐 온 당황스런 상황에 유현이 움찔했다.
“과장님, 괜찮아요.제가 할게요.”
“아냐.너무 미안해.”
발을 동동 구르는 최민희 과장의 얼굴이 이미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늘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던 그녀와 무척 대비된 모습이었다.
그 주 목요일 이른 아침.
부산행 기차 안에 몸을 실은 최민희 과장의 표정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나 보네.’
유현은 그녀의 마음이 십분 이해 갔다.
거제까지 가는 장거리 출장이다.
일 처리가 삐끗하면 하루를 날리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을 그르칠 수도 있다.
철저한 성격이니만큼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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