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8
18
“직접 만나길 청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석우 측의 끊임없는 협박과 조임 끝에 결국 우두머리가 나서기로 한 모양이다. 그동안은 수하들만 보내 의견을 전달했었는데 이번엔 직접 석우를 찾아와 꼭 오야를 뵙고 싶다고 먼저 허리를 숙여오는 걸 보면, 며칠 사이 어지간히 시달렸구나 싶다. 어쨌거나 오야의 오랜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는가 싶어 한달음에 본가로 달려와 이렇게 소식을 전한다.
“시간 잡아.”
“네, 그럼.”
기다렸다는 듯 상대의 제안에 응하는 오야의 모습에 석우의 가슴도 한껏 부풀어 올랐다.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 정도로 숨통을 조여 주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지시에 부푼 가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커다란 물음표만 자리 잡았다.
“강윤희도 대기시키고.”
“네?”
“못 들었어?”
“아니, 아닙니다. 그런데.”
“…….”
“제가 아는 그 강윤희가 맞는지……?”
물으면서도 참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믿기지 않았다. 얼떨떨해져선 대답을 기다리다가 말없이 노려보는 시선에 반사적으로 응했다.
“먼저 가서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그럼.”
설마 이제 와서 생부를 찾아주려는 건 아닐 테고, 강윤희는 갑자기 왜? 그나저나 매니저가 약속은 잘 지키고 있을까. 미리 가서 살펴볼 요량으로, 준비를 해놓겠다는 핑계를 대곤 먼저 Ange noir로 향했다. 당도하자마자 매니저를 찾자, 마침 자기도 석우를 찾으려 했다며 빈 룸으로 석우를 이끌었다.
“강 실장님, 윤희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허락해 주실 거예요?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구요. 30억짜리 빌라까지 나왔어요. 지금. 그것도 단 하루 밤에.”
석우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쏟아내는 걸 보면 일전에 석우가 다짐받아 두었던 것은 잘 지켜진 듯해 일단 한 시름 놓았다.
“오늘 VIP룸에 오너랑 손님이 올 거야. 거기 들여보내.”
꺅, 새된 비명을 지른 매니저가 잔뜩 상기되어 물었다.
“정말? 얼마나 대단한 손님이기에? 그쪽은 뭐 걸었는데요?”
“나중에 얘기할 테니 준비 해줘.”
“강 실장님은 맨날 나중에, 나중에! 도대체 그 나중이 언젠데요?”
오늘은 석우에게서 뭔가 호기심을 채워줄 만한 이야기가 나올까 한껏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던 매니저가 김샌 목소리로 핀잔을 줬다. 서운하다는 듯 길게 찢어 흘겨보는 눈초리에는 이런 곳에서 일하는 여성 특유의 몸에 밴 교태가 담겨 있다. 윤희도 곧 저 모습을 닮게 될까. 그게 오야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일까.
‘설마.’
석우 자신은 단지 일 때문에 오고 가며 자주 마주친 것만으로도 정이 들어 윤희가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석연치 않은데, 하물며 매일같이 옆에 끼고 살다시피 한 오야는…….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아무튼 그렇게 알아둬.”
일단은 닥친 일부터 해결하자고, 잠시 혼자 남아 숨을 골랐다. 청룡파라면 비열한 짓은 서슴지 않고 했던 무리니, 흉기를 숨겨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급습을 위해 주변에 매복을 심어놨을지도 모르고.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얼른 연락망을 통해 몸수색과 주변 순찰 강화를 지시했다. 이정후를 오야로 모신 뒤론 이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모처럼의 긴장감에 온몸의 근육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 *“이런 이런, 아주 젊으십니다. 수완이 좋아서 꽤 연륜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석우의 염려와는 다르게 상대방은 무기가 될 만한 어떤 것도 소지 하지 않았다. 무기는커녕 오히려 동정표를 얻을 셈인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기 아들을 데리고 오기까지 했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는 얕은 전략이 고스란히 보여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과거, 나림동의 절반을 지휘하며 독사처럼 번득이던 눈에도, 냉혹한 얇은 입술에도, 인정머리 없이 무참히 상대를 베던 손에도,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백발로 변한 머리카락이 가장 큰 증거였다.
여기까지 확인하자 조금은 맥이 빠졌다. 수년간 칼날을 갈아온 복수의 대상치고는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싶어서. 시시함은 곧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심심한 나머지 아쉬운 사정을 이야기하는 청룡파의 두목에게서 시선을 거둬 말없이 바닥만 보고 앉아있는 최환 쪽으로 옮겨 관찰하기 시작했다.
‘콧대가 우뚝한 건 제 아비를 닮았나 보지.’
윤희가 들어와 오야 옆으로 이동하는 동안 떼지 않고 날카롭게 따라 움직이던 눈빛도 마치 전성기 시절의 청룡파 우두머리를 보는 것 같다. 오야의 술 시중을 드는 윤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내뿜던 살기등등하던 기세도.
‘그런데…….’
이 위화감은 뭐란 말인가. 아까부터 자꾸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께름칙한 느낌이 석우의 신경을 긁어댔다. 모든 게 완벽한데. 자기 딸인 줄도 모르고 윤희의 흰 원피스를 보고 군침을 삼키는 저 얼간이와, 곧 피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최환의 애끓는 모습과,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칼자국. 이 얼마나 훌륭한 광경인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세 사람, 그 셋의 목숨 줄을 끊어낼 칼자루를 쥔 건 오야다. 휘두르리라 마음만 먹으면 망하다 못해 삼대가 빌어먹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완벽한 오야의 승리였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눈곱만큼도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걸까. 석우가 고민하는 동안 오야의 손이 윤희의 치마 안쪽을 쓸었다. 동시에 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손 떼라며 낮게 협박하는 환의 따귀가 가차 없이 올려붙여 졌다.
‘이런…….’
그 순간, 아까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의 정체를 깨달았다. 자신이 모시던 보스가 새파랗게 어린 오야에게 굽실거리는데도 별다른 이견 없이 무뚝뚝하게 앉아있던 칼자국의 얼굴이 분노로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어쩌면…….’
오야는 지금 뭔가 크게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불길한 예감에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머리를 굴렸다.
‘가장 확실한 건 유전자 검사겠지.’
때마침 오야가 자리를 파했다. 발버둥 치며 끌려나가는 최환 덕에 어수선한 틈을 타 재빨리 머리카락과 타액이 묻은 컵 등을 몰래 챙길 수 있었다. 어서 이걸 믿을만한 녀석에게 맡겨야 할 텐데.
‘누가 있었더라.’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 룸을 빠져나가는데 어쩐지 오야가 제자리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함에 돌아보자 이정후의 허리를 안은 가느다란 팔이 보였다. 윤희였다.
“제 첫 손님이 되어 주세요.”
술 시중을 드는 내내 파랗게 질려있던 계집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곤 꽤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오야의 등에 가려 보이진 않아도 울음을 꾹 참고 있는 게 눈에 훤한데 제법 또박또박 제 진심을 전하는 것이 대견한 한편, 애처롭기도 했다.
안타깝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라, 한참을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피가 날 정도로 꾹 깨물고 있던 이정후가 안은 팔을 잡아 내리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 바람에 석우에게도 비스듬히 쓰러진 윤희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뺨이 불쌍할 정도로 젖어있었다.
그런 계집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천천히 손을 뻗은 이정후가 망설여지는지 멈칫했다. 사이를 두고 다시 올리다가 또다시 주먹을 쥐고 멈추는 손. 그렇게 몇 번을 허공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가 종내는 아래로 떨어지는 오야의 팔. 얼마나 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는지 손등에 굵은 핏발이 터질 듯이 섰건만, 목소리만은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했다.
“손님 앞에서 우는 건,”
“…….”
“예의가 아니야.”
“…….”
“주의해.”
냉정하게 선을 긋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계집의 고개가 오야의 발걸음이 문을 나섬과 동시에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실낱같이 남아있던 희망마저 사라진 동공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만이 남아, 순식간에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생기를 앗아가 버렸다.
험한 꼴을 많이 보아온 석우로서는 빛을 잃은 저 눈망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만, 당장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서둘러 마담을 불러 윤희를 잘 감시하라고 이른 후 오야의 뒤를 따랐다.* *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자식!”
분해 죽겠다는 듯 험한 욕설을 입에 담는 아버지를 노려보다가 양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볼륨을 아무리 키워도 내장을 짓씹어 개에게 던져주겠다는 둥, 그 자리에서 병을 깨 목을 땄어야 했다는 둥, 잔인한 말들이 끊임없이 귀를 파고들었다. 피비린내 가득한 단어들과 음악이 섞여 기괴한 소음으로 변해버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버튼을 눌러 노래를 꺼버렸다. 이어폰은 그대로 둔 채. 이때까지 환의 눈치를 살피며 운전에만 집중하던 승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여자애, 인상이 낯익습니다.”
“누구?”
“하얀 옷.”
그 룸에서 하얀 옷은 강윤희뿐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가 태연한 척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음악을 듣는 척 발로 박자를 맞추는 시늉을 했다. 환이 듣지 않을 거라 확신했는지 잠시 끊겼던 대화가 이어졌다.
“걔가 왜.”
“고황파 구역 습격하던 날, 기억나십니까?”
“아, 그년.”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 무릎을 탁 친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군.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당시 그 여자가 몰래 애를 낳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뭐? 가만, 그래, 그랬던 것도 같군. 그런데 그게 왜?”
“확실치는 않지만…….”
흐려진 말꼬리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미루어 짐작하는 순간 환의 숨이 멎었다.
‘잠깐, 그럼 강윤희랑 나는…….’
“그걸 왜 지금에서 말하는 거야! 제정신이야?”
당황한 것은 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인지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시종일관 침착한 이는 승필 뿐이었다.
“소문을 듣고 알아보려 했을 땐 이미 다 불에 타 재가 된 뒤라…….”
“그 건방진 새끼가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짓을! 만에 하나 내가 그년을 하룻밤 사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어!”
“근친……?”
모골이 송연해져 저도 모르게 대화를 엿들은 티를 내고 말았지만, 분노로 이성을 잃은 아버지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승필의 칼자국을 향해 삿대질하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분명히 그때 같이 죽이라고 했을 텐데, 왜 그놈을 살려둔 거지?”
“…….”
“이렇게 후환이 될 줄 알았다고! 미리 싹을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네 놈이 다 망쳤다! 이 쓸모없는 자식!”
도저히 분을 못 참겠는지 씩씩거리다 차의 캐비닛을 열어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 위험, 아악!”
찌르려는 것을 막으려다 손바닥 가운데서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칼날이 박힌 채 길고도 깊게 베이고 말았다. 굵고 붉은 선이 칼자국을 따라 그어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혈액이 뿜어져 나와 베이지색 카시트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였다. 점점 손발이 싸늘해지는 걸 느끼다가 어느 순간 경악하는 승필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놓았다. 칼자국이 유난히 하얗게 질렸다고 느끼면서.
정신을 차렸을 땐 방안이었다.
“환아! 환아!”
저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다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팔이 아파 그대로 다시 눕는다. 붕대가 칭칭 감긴 왼팔을 걱정스레 살피는 승필의 얼굴에 사고 전 상황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살인. 사생아. 화재. 복수.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지던 그 순간이.
“전 아저씨나 아버지가 그저 여자나 팔아먹고, 돈이나 뜯어내는 깡패 새낀 줄 알았더니 살인자였네요.”
“…….”
“왜 안 죽였어요, 그 자식은?”
“…….”
“이왕 죽이는 거 다 죽여 버리지! 왜!”
악에 받쳐 고함을 질러댔다. 저주스런 인연의 시작점을 향해.
“죽이러 갔었다.”
“…….”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도 모르고 헤드셋을 끼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어. 발로 박자를 맞추면서.”
“…….”
“머리론 죽여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너도 음악을 들을 땐 발로 박자를 맞추지 않니. 그래서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
“아까 ‘아버지 위험해요’라고 소리친 건.”
“…….”
“……아니다.”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방을 나서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이럴 때가 아니지 싶어 급히 승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희를 구해내야 해.’
우린, 남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