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9
19
“강윤희는요?”
“안에 있어. 그런데 왜?”
“본가에서 불러서요.”
멍하니 다른 여자들이 화장하는 걸 보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승수였다.
‘본가에서 왜?’
가고 싶지 않다. 냉랭하게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가르쳐주던 그 얼굴을, 다시는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여기 갇혀 있는 게 낫겠다고. 처음엔 몸서리치게 끔찍했던 이곳이 지금은 유일하게 있고 싶은 곳이 되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사람 일이라더니. 최대한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마음에 문에서 등을 돌려 구석에 가 앉았다. 그런다고 해서 피해질 일도 아니건만.
“강윤희.”
과연 승수는 어렵지 않게 윤희를 발견했다.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는 눈길이 따갑다.
‘가리고 싶어.’
이렇게 착 달라붙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도, 온통 검은 옷 속에 저만 새하얀 차림새도, 낯설기만 한 짙게 화장한 모습도, 다 숨기고만 싶어. 양팔로 어깨를 스스로 그러안고 모른 척하는데 승수의 블레이저가 훤히 드러난 어깨를 덮었다.
“나가자.”
“싫어.”
팔꿈치를 잡고 일으키려는 승수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줘 버텨 보지만, 반사적으로 들려오는 무거운 한숨 소리에 그만 힘이 풀렸다. 여기까지 찾아온 승수는 무슨 죄인가 싶어서. 그만 고집을 굽히고 따라나서기로 했다. 이미 짓밟힐 대로 짓밟혀 만신창이가 된 자존심 따위, 한 번 더 버리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그런데 승수가 윤희를 데리고 나간 곳은 뜻밖에도 건물 뒤편으로 이어진 후문이었다.
‘이상하다.’
본가에서 만나러 왔다면 정문을 이용할 텐데.
“어디 가는 거야?”
“쉿, 조용히.”
승수가 주의를 주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둘을 불렀다.
“거기, 둘.”
“왜요?”
“어디 가?”
“본가에서 불러요.”
아무렇지 않은 척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승수지만, 윤희의 어깨를 감싼 손은 힘이 꾹 들어가 있다. 팽팽한 긴장감 때문일까, 덩달아 등줄기를 타고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그쪽으로 가?”
“오래 걸릴 줄 알고 뒤에 주차해 놨어요. 만약 룸 안에 있으면 한참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래? 알았다. 수고!”
휴, 권승수가 한숨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나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환이 생각하면 이게 맞는 것 같긴 한데.”
“환이?”
“그런데 꺼림칙해. 정말…….”
꺼림칙하다니, 뭐가? 물으려는데 어느새 뒷문 앞에 시동이 걸려있는 검은 세단 앞에 도착했다. 못 보던 차라 망설이는 사이 조수석 문이 열렸다. 안에서 윤희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뜻밖에도 최환이었다.
“얼른 타.”
“최환?”
“조심해서 운전해. 잘 가, 강윤희.”
망설이고 서 있는 윤희를 욱여넣다시피 밀어 태운 승수가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앞문이 닫았다. 철제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가 곧 출발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묻고 싶지만, 그동안 최환에게 쌀쌀 맞게 대했던 자신이 생각나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대신 최환이 무덤덤하게 입을 뗐다.
“나 지금 너 데리고 도망가는 거야.”
“어?”
“너 그런 곳에 있는 거, 난 도저히 못 보겠다.”
“…….”
“비록 절반뿐이라 해도 내 핏줄이니까.”
잠자코 듣고 있다가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지? 핏줄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때 내 따귀 때렸던 사람, 우리 아버지야.”
‘우리’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자마자 순식간에 토기가 올라왔다. 서슴없이 치마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이정후의 무자비한 손길이 생각나서.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몰랐다 쳐도, 당신은 알면서 그런 거잖아. 생부 앞에서. 친딸인 나를. 혈육 앞에서 그렇게. 마치 창녀 대하듯. 노리개 다루듯.
정말이지 인간 이하 아닌가.
구역질이 가라앉은 자리를 눈물이 메웠다. 히터를 틀어 후덥지근한 차 안임에도 온몸이 역풍을 맞은 사시나무 마냥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 제 모습을 보며 말없이 운전만 하던 최환이 어느 정도 외곽으로 벗어나자 조용히 티슈를 무릎 위로 건넸다.* * *저러다 탈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죽여 계속 눈물만 줄줄 흘리는 강윤희, 아니, 이제 최윤희라고 불러야 하나. 나, 널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핏줄. 그래, 배다른 남매인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지. 아니, 지금은 그런 것 떠올리고 싶지 않아. 다 차치하고 그냥 힘겹게 꾹 눌러 참고 있을 네 울음소리를 온전히 받아주고 싶다.
도심을 벗어나기 전까진 불안해서 주변을 살피기 급급하다가 시외로 빠진 후에야 간신히 운전대를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찾아 건넸다. 물끄러미 하얀 뭉치를 바라보기만 하는 윤희.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고개만 숙인 채, 한 번도 이쪽을 봐주지 않았다.
“윤희야, 강윤희. 아니, 원래는 최윤희인가.”
“…….”
“능력이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런 것뿐이네. 미안.”
“…….”
“내가, 막무가내로 이러는 건 아니지?”
윤희의 침묵이 뜻하는 바를 가늠할 수 없어 불안한 환이 주절주절 쏟아냈다.
“그때 네 표정, 절망과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렸던 그 얼굴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더라. 지금 이렇게 너 빼내온 거, 난 후회 안 해. 똑같은 순간이 와도 또 널 구해낼 거야. 그래도, 그래도 싫다면…….”
괜히 불안해져 슬쩍 눈치를 보았다. 여전히 윤희는 묵묵부답이었다.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자신이 지금 잘못 판단한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런 일을 당해놓고도 너는 그 남자가 좋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무 말이라도 좀 했으면. 뭐라도 좋으니 한 마디라도.
초조함에 속이 타들어 갈 때쯤에야 꾹 다물고만 있던 윤희의 입술이 겨우 단어 하나를 읊조렸다.
“미안해.”
이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끝없는 미안해가 쏟아졌다. 한 번 입이 트이자 봇물 쏟아지듯 이어지던 사과는 어느덧 커다란 비명과도 같은 오열로 변해버렸다. 눈물에 질식할 듯 숨이 막혀 꺽꺽대다가 간신히 밭은 숨을 몰아쉬는 윤희를 보다 못해 결국 차를 세우고 꽉 그러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잊자. 일단은 다 잊자, 윤희야.”
나지막하게 달래주지만, 제 입에서 나오는 말임에도 윤희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다짐인지 알 수가 없다. 혼란스럽다. 그저 최대한 멀리 벗어나 지친 영혼을 쉬게 해주고 싶을 뿐. 다시 가속 페달에 올려놓은 발에 힘이 들어갔다.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태백산 높은 굽이를 지나서도 한참을 지나야 있는 동해의 작은 해안가였다. 새벽녘에야 겨우 머무를만한 곳을 찾았는데 이번엔 당장 밤을 지새울 일이 걱정이었다.
“일단은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민박이라지만 폐가에 가까운 허름한 집, 그나마도 다 스러져 가는 방 한 칸에 간신히 들어섰다. 전구가 나갔는지 이따금 깜박이는 노란 불빛이 또 묘한 불안감을 주었다. 눈에 띄면 어떡하지? 혹시나 쫓아온 건 아닐까. 어두운 산길을 달리면서도 뒤따라오는 불빛이 없는지 몇 번을 확인했건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불 끌까?”
환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아니면 같은 생각이었는지 제안에 윤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치를 내리자마자 그나마 깜박이던 빛마저 없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온통 어두컴컴한 가운데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낡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철썩, 철썩, 거친 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내는 마찰음이 마치 제 가슴을 때리는 듯 아팠다. 동시에 허기가 몰려왔다. 반나절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이었다.
“배고프지. 먹을 것 좀 사 올게.”
근처에 가게가 있었던가. 있다 한들 열기나 했을까. 걱정하며 몸을 일으키는 최환의 인영에, 흠칫 놀란 윤희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가지 마.”
“…….”
“무서워. 나만 두고 가지 말아줘. 응?”
별 것 아닌 짧은 문장을 말하는 것조차 윤희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좁은 방 안에서 최환의 기척을 따라 옷자락을 잡는 건 그것보단 쉬운 듯했다. 저를 잡은 손을 따듯이 감아쥔 최환이 조금 더 가까이 윤희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가까스로 눈에 익은 어둠 속에 물기를 머금은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하곤 윤희를 품 안에 가두었다. 점점 입술을 붙일수록 숨결이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차마 입술엔 닿지 못하고 이마를 부드럽게 누르는 데 그치고 말았다.
“웃긴다.”
“…….”
“나, 윤희 너 좋아하는 마음은 똑같은데, 이제 전처럼 할 수가 없네. 참 웃기지. 그치. 솔직히 나, 너 구한다는 핑계로 여기까지 왔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다. 그냥 너 보려고, 내 여자 만들고 싶어서, 내 욕심에.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하하, 하아, 진짜 웃기다.”
자조적으로 뇌까리는 음절 마디마디에 흐느낌이 섞였다. 이미 너덜해진 가슴을 그러모아 연신 뜨거운 것을 쏟아내는 눈가를 가만가만 닦아 주는 윤희에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 글썽이면서도 안심하라는 듯 위로를 건네는 무구한 눈동자에 다시금 억장이 무너졌다.
이런 널 짓이긴 거야, 그 자식은. 이렇게나 다정하고 이렇게나 착한.
“있잖아, 난 이해가 안 가.”
“뭐가.”
“그 사람은 왜, 무얼 위해서 나를, 그리고 너를.”
“그거 알아, 윤희야?”
“뭘?”
“어쩌면 너랑 나랑 이렇게 도망 온 것도, 다 그 자식이 원하는 걸지도 몰라.”
“어째서? 너랑 나랑 만나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우리 남매라며.”
아직은 남매라는 호칭이 어색한지 말끝에 윤희가 고개를 숙였다. 발끝으로 내린 시선을 따라 나직이 답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남자의 자식들이 서로 남매인 것도 모른 채 사랑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그런…….”
“그리고 그 끝은…….”
채 말을 맺지는 않았지만, 잔악한 의도를 알아챈 윤희의 눈이 질끈 감겼다. 팔에 돋은 소름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 *“강원도 해안가 민박에 묵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최환과 윤희의 어설픈 도주는 금세 발각되었다. 가자미가 천적을 피하기 위해 주변을 본 따 제 거죽을 모래 무늬로 만들어 납죽 엎드려 있듯, 최대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몸을 숨기고 있었다면 오히려 찾기 힘들었을 텐데. 외지인은 잘 드나들지 않는 고립된 해안가의 어린 두 남녀는 너무나도 쉽게 이쪽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돈이 부족한지 방 하나를 빌려 같이 지낸다는 덧붙임에 석우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검사 결과지는?”
“여기.”
“수고했어. 나가 봐.”
수하를 물리고 조심스레 봉투를 열자 먼저 복잡한 그래프와 함께 ‘친자확률 (%) : N’이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오고, 이어 다음 장에 ‘친자확률 (%) : 99.998 543’과 함께 굵은 고딕체로 쓰인 ‘일치’라는 두 글자가 또렷이 눈에 박혔다.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본가로 향해 급히 차를 몰았다.
‘오야는 분명히…….’
거기 있을 것이다. 지하의 술 창고. 독주로 가득한 그곳에. 언젠가 윤희를 잠시 떼어놨을 때처럼, 고통으로 일그러진 제 속내를 안주 삼아 한 모금, 두 모금 쓰게 삼키다 결국 자기 자신마저 삼켜버리면서, 그렇게.
아니나 다를까, 술독에 담갔다 꺼낸 사람처럼 독한 향내에 푹 절여지다 못해 그대로 길게 쓰러져 누운 이정후의 모습에 안쓰러움과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일어나십시오.”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이정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이런 상태로 꽤 오래 있었던 듯, 냉기 도는 창고 바닥의 그것처럼 몸이 차디찼다. 일단은 따뜻한 침대로 옮겨 누이자는 생각에 상체를 안아 세운 후 어깨에 들쳐 메자, 반동에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에 삶의 의지라곤 비치질 않는다.
“석우, 강석우입니다.”
“아, 석우.”
“네. 접니다.”
“또 우리 둘뿐이네.”
‘또’와 ‘뿐’이라는 짤막하고도 단순한 두 마디가 석우의 명치를 둔탁하게 후려쳤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직면해 왔을 것이다. 혼자 남겨진 두려움과, 남은 조직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책임감과, 복수에 이용된 희생자들에 대한 자책감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향해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실로 오랜 기간 외로이 맞서 싸운 결과로, 끝내는 오야가 이겼다. 하지만 그뿐, 지금은 석우의 등에 축 늘어져 제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는 상처투성이에 불과하다. 잠깐 이동하는 사이 잠들었는지 침대에 눕혀도 지쳐 늘어진 몸은 미동조차 없다.
딱한 마음에 더 편히 자게 해주려 겉옷을 벗기려다 헛웃음이 났다. 잔뜩 흐트러져 엉망이 된 와중에도 넥타이만은 단정하게 매고 있는 모습에. 석우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건 윤희가 새해를 맞아 선물했던 바로 그 넥타이 아닌가.
‘이럴 거면서 왜.’
당장 억지로 흔들어 깨워 친자확인 결과를 들이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모처럼 깊이 잠든 오야를 위해 조금만 참아보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이정후는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목이 마른지 탁자를 더듬는 손에 컵을 쥐어주자 실눈을 뜨고 이쪽을 확인했다.
“……석우?”
“강원도에 있는 민박집에서 묵고 있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강윤희랑 최환.”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 이제 다 끝난 일이야.”
듣기 싫다는 듯 반대편으로 돌려버린 고개에 완강함이 묻어났다. 윤희와 환이 도망간 사실을 알렸을 때도 저런 반응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고. 앞으론 더 이상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저는 지금까지 오야께서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취했어?”
이정후가 마시다 남긴 양주 반병 정도를 마시긴 했다. 새벽까지 곁을 지키며 그간의 일을 곱씹어 보다가 도저히 울분이 터져서 견디지 못하겠기에.
“네, 취했습니다. 그래서 눈에 뵈는 것도 없습니다.”
“……나가.”
“나갈 때 나가더라도 이 말만큼은 꼭 해야겠습니다.”
“…….”
처음 보는 이런 제 모습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정후가 실랑이하기 귀찮은지, 뒤로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하려면 빨리하고 나가라는 듯이.
“오야께선, 믿는 거라곤 맷집뿐인 저와 다르니 잘 모르시겠지만.”
“…….”
“저희 어깨들 사이에선 현장에 나가기 전, 늘 가슴에 새기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
“남의 무덤을 파려는 자, 자신의 무덤도 같이 마련하라.”
“짧게 하고 나가.”
“최환 말입니다, 어느 쪽도 닮지 않아서 헷갈렸는데 외탁한 것 같더군요.”
“…….”
어느새 상체를 세워 자신을 노려보는 이정후에게 서류 두 장을 건넸다. 최환과 칼자국으로 불리는 승필의 부자 관계를 입증하는 검사결과였다. 몇 번이나 두 장을 번갈아 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더니, 속이 타는 듯 앞섶을 움켜쥔 이정후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다. 이윽고 간신히 노기를 억누른 낮은 목소리가 석우의 귓전에 울렸다.
“당장 잡아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