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20
20
밤새도록 나란히 앉아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검푸른 하늘이 희뿌연 잿빛으로 변하는 걸 말없이 지켜보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어느 순간 까무룩 지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불안함에 몸을 누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벽에 기대 웅크린 채 오로지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야 했던 지난 밤, 문풍 틈으로 스며들어 살을 에는 한겨울 찬바람보다도 싸늘한 이야기들이 서로를 오고갔다. 한순간 재로 변해버린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염탐꾼의 카메라와 함께 담겨 보내졌던 잘린 손가락,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인 한 남자의 죽음까지.
되짚어 보면 윤희 자신은 그저 이정후의 원한을 갚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계획적으로 최환의 이상형에 맞춘 것이 그 증거였다. 설령 최환이 제게 반하지 않더라도 Ange noir의 고급 창녀로 써버리면 그만이다. 흰옷을 입고 첫 경험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자신에게 투자한 비용은 뽑고도 남았을 테니. 원수의 딸에게 이보다 더한 복수가 있을까.
그것도 모르고 제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그를 위해 대신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어리석게도. 비참함에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북받쳐 오른 원망과 증오가 한데 뒤섞여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가 전신을 샅샅이 헤집어 놓는다. 이대로라면 미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아니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좋겠다고.
“추워?”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몸서리를 쳤다. 그 바람에 환이 잠에서 깼다. 뭐라 말하려던 환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윤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너른 가슴에 꼭 그러안고 흥분이 가라앉길 기다려 줄 뿐.
“이러다 몸 상하겠다.”
어느 정도 떨림이 가라앉자 고개를 들어 손등으로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준 환이 손을 옮겨 목덜미며 뺨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달랑이는 진주 귀걸이를 통해 살가움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귀걸이도 최환의 생일에 맞춰 이정후가 손수 끼워줬던 거지.
생살을 뚫고.
살점이 투두둑 터지던 느낌이, 꼼짝도 못 하고 그저 내맡기고 있던 저를 흥미롭게 살피던 시선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다시금 몸서리쳤다.
‘싫어.’
이정후를 떠올리게 하는 건 뭐든 싫다. 단지 그가 끼워줬다는 이유만으로 아픈 것도 꾹 참고 예쁘다며 좋아했던 제 모습이 머저리 같다. 이젠 다 잊고 싶다. 한시라도 빨리 떼어버리고 싶단 생각에 그대로 움켜쥐고 잡아 뜯으려 하자 환이 깜짝 놀라 제지했다.
“다쳐. 하지 마.”
“그 사람, 너무 끔찍해. 지독하고 악랄해.”
악마도 그보다 모질진 못 할 거야.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 건데.
환이 진저리치는 윤희를 다시금 안아 등을 토닥였다.
“윤희야, 있잖아, 난 어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사람한테 고맙다고. 그래도 너 이렇게 예쁘고 곱게 키워줬으니까, 또, 이렇게 나랑 만나게 해줬으니까.”
“아니야.”
“그날, 내 생일날,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넌 모르지.”
“…….”
“지금도 너무나…….”
조금 전까지 올곧게 윤희를 응시하던 최환의 까만 눈동자가 점차 습윤해졌다. 윤희 역시 마주하던 눈을 순순히 감았다. 행여나 제 눈동자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 환이 더는 망설이지 않도록. 최환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다 받아들이리라. 설령 그게 천륜을 어기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간 상처받은 환을 위로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기에.
입술 바로 위로 가까워진 숨결이 한참을 머물렀다. 결심한 듯 점점 다가와 종잇장처럼 얇은 틈만 남겼다 생각한 찰나, 뜨겁고도 촉촉한 입술이 쇄골께로 떨어졌다. 꾹 눌렀다가 그마저도 못하겠는지 작은 흔적만을 남기고 떨어지는 고개에 눈물이 고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
“이런 건 안 하는 게 좋겠다.”
팔을 뻗어 천천히 귀걸이를 푸는 손에 맥아리가 없다. 한쪽을 떼어 내고 다른 쪽에 손을 댄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짧은 울림에 삽시간에 긴장으로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이 시간에 누가 여기를? 숨조차 쉬지 않고 미동도 없이 문만 바라보는데 재차 문을 두드리더니 그래도 반응이 없자 문을 따려는지 문틀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덜컹.
낡은 민박집 문은 너무나도 수월하게 열렸다. 문을 따고 성큼성큼 들어서는 남자를 최환이 막아섰다.
“도망쳐!”
다급한 외침에 반사적으로 빈틈을 노려 뛰쳐나갔지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남자에 의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잡혀 버렸다.* * *“…….”
“…….”
살아서도, 죽어서도, 혼이 남아있는 한 영원히 보고 싶지 않던 이정후 앞에 마주 서게 됐다. 더 이상은 그를 봐도 아무렇지 않아. 거센 바다 바람에 몸도 마음도 차게 식었으니까. 다시는 그를 위해 타오르지 않겠어. 다시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찬찬히 저를 훑어보던 날카로운 시선이 목선 근처에 머물렀다.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최환이 남긴 붉은 자국이 희미하지만 그래도 눈에 띄게 남아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댄 순간, 이정후가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잤어?”
이 무슨 미친 물음인가. 어이없어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 아니었어?
“네. 했어요. 소원대로 되니 이제 속이 시원한가요?”
“…….”
“다시 Ange noir에 내보낼 건가요? 그럼 이번엔 검은 옷을 입어야겠네요.”
최대한 비아냥거리는 동안, 손목을 움켜쥔 이정후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겁내지 않을 거야. 더 이상은.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빛을 똑바로 받아내자, 재미있다는 듯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확인해보면 될 일이야.”
“싫어!”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잡은 손목을 거칠게 당겨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곤 정장 상의를 벗는 이정후의 등 뒤로 말없이 석우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단둘이 남은 방안, 이정후가 옷을 걸쳐놓기 위해 잠시 뒤 돈 사이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달려가 고리를 당기지만, 그가 한 발 더 빨랐다. 강하게 어깨를 잡아 젖힌 탓에 그만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랑곳 않고 뜨겁게 맞춰오는 입술에 완강하게 도리질 쳤다.
“흐, 싫어. 싫……!”
잠시 사이를 띄운 사이 거부의 의미로 고개를 홱 돌리자 억지로 고개를 돌려 저를 보게 한 후, 이정후가 낮게 속삭였다. 선뜩한 눈빛에 가슴이 얼어붙었다. 꼭 반미치광이 같았다.
“피하면, 도려낼 거야.”
“…….”
“너 말고, 최환.”
턱을 세게 거머쥔 손아귀 힘이 아파 반쯤 감겼던 눈이, 환을 도륙하겠다는 잔인한 말에 저절로 흡 뜨였다. 기다렸다는 듯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또렷이 마주했다. 팔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흠칫 놀라 몸을 피하자 이정후가 낮게 웃으며 겁박했다.
“이러면 그 녀석 팔이 잘릴 텐데?”
“악마.”
“애초에 날 악마라고 부른 건 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악마라는 호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 수긍하는 모양새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Ange noir.”
“…….”
“타락천사. 악마의 다른 이름 아니었나.”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오래전 그를 동경하는 마음을 담아 지었던 별명, 그 이면의 의미를 깨닫자 절망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정후만 바라봤던 한결같았던 마음도, 밤이 이슥하도록 그를 그리며 일기를 쓰다 잠들던 어린 날도, 어서 성인이 되어 그의 여자가 되기만을 손꼽던 갈망도,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폐부를 찌르고 심장을 할퀴어 댄다.
“뭐가 됐든.”
이정후가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끌러내며 침대를 턱짓했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단호한 태도에 그만 체념하기로 했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거부한다면 정말로 최환을 토막 낼지도 모를 일이다. 몰래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을 잘라 보냈던 것처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가만히 일자로 누운 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시야를 잃은 귀에 이정후의 기척이 더욱 생생히 들렸다. 침대 한쪽이 우묵하게 파이는가 싶더니 곧 그가 제 위로 오른다.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에 등줄기가 뻣뻣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숨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잠시 멈추더니 곧 개의치 않는 듯 천천히 귓불을 핥아 올린다. 느릿하고도 부드럽게 감다가 도톰한 살덩이를 입에 물어 아플 정도로 세게 빨았다.
‘왜?’
이상한 느낌에 몸을 틀었지만 채 피하기도 전에 단단한 이가 귀걸이를 그대로 씹어 으깼다.
“이거.”
“…….”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진주는 내 취향이 아니거든.* * *할까, 말까. 망설이며 서성이길 수분 째. 수도 없이 두들겼던 문이건만 오늘은 왠지 조심스럽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기에 노크했다.
“들어 와.”
들어오란 말에도 머뭇거리다가 겨우 들어선 석우를 이정후가 몸을 일으켜 맞이했다. 덕분에 흘러내린 시트가 윤희의 가슴골을 드러낼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귀밑부터 이어지는 가냘픈 목선과 동그스름한 어깨, 매끈하고도 가는 팔.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를 수놓은 붉은 자국은 필시 오야가 남긴 낙인이다. 손목에 남은 짙푸른 멍과 거칠게 물어뜯은 듯 검붉게 변한 쇄골의 흔적에서 대강 어젯밤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의 것에 눈독 들이면 곤란해, 석우.”
서류를 살펴보던 오야가 석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피식 웃더니 시트를 계집의 턱 밑까지 끌어올려 덮어주며 가볍게 책했다. 순간 민망해져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래도 뚫어져라 쳐다본 것은 사실이기에 머쓱해져 애꿎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여기.”
민망함에 달아오른 석우의 얼굴이 다시 본래 색을 찾을 때쯤 서류철이 다시 제 손으로 넘어왔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식사, 여기로 갖다 달라고 해줘.”
“네, 그럼.”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뭔가 할 말이 남아있는 듯 망설이는 오야의 입매에 뭐지 싶어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석우에게 묻는 질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본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를 말이 나직이 들려왔다.
“……예쁘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이게 정말 오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자 수줍은 듯, 혹은 괜한 짓을 했다는 듯 비틀리게 깨문 아랫입술이 보였다. 뱉어놓고 낭패한 얼굴에 연애 경험이 없는 석우지만 단박에 그 속을 알아챘다. 몇 번이나 묻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평범한 커플들이 그러하듯, 이정후도 오랫동안 속에 품어온 연인을 자랑하고 또 확인받고 싶었을 거라고.
“네, 예쁩니다. 아, 그리고 저…….”
“…….”
“아주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물었던 입술이 풀렸다. 살짝 들린 입매가 만족감을 드러냈다. 오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석우 입장에선 최대한 진심을 담아 건넨 말이었다. 사내를 받아들여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임에도 계집은 예뻤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여린 몸 곳곳에 피어난 오야의 흔적들이 애처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묘하게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조적으로 아무 자국 없이 그냥 매끈하기만 한 오야의 목선 등에서 둘의 관계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오야가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관계. 모시는 자의 입장에선 그것이 조금 서글프다. 석우의 마음이야 어떻든 지금 이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해 보이는 오야지만.
“나가봐 이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잠을 방해했는지 윤희가 몸을 뒤척이자 얼른 왼손 검지를 입술에 대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는 한편, 반대편은 짧게 털며 빨리 나가라고 손짓했다. 큰일이라도 생긴 마냥 문 쪽을 향해 눈짓하는 다급한 모습엔 어이가 없다가도 귀엽게 느껴졌다. 이런 제 생각을 들켰다간 무슨 경을 칠지 몰라, 입가에 슬며시 걸린 웃음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인사하고 뒤돌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