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6
06
“윤희야, 강윤희. 이번 주 토요일에 뭐해?”
“글쎄. 왜?”
토요일도, 일요일도 학교만 안 간다 뿐이지, 발레 레슨, 영어 회화, 각종 과외까지. 윤희에겐 주말이 평일보다 더 바빴다.
“나 생일인데. 축하해 줘.”
“생일?”
“응. 참, 넌 생일 언제야?”
“어? 그게…….”
“자기 생일을 뭘 그렇게 한참 생각해?”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생일이라고 일러 주거나 챙겨 준 적이 없는데. 가까스로 주민 등록 번호에 있던 숫자를 외워 답하자, 최환이 반색했다.
“그럼 겨울이네? 내가 한참 오빠잖아. 오빠라고 불러 강윤희.”
“그럼 넌 나한테 형이라고 불러라.”
옆에서 듣고 있던 승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엎드려 있기에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나 보다. 최환은 불청객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무튼, 그럼 우리 토요일에 보는 거다?”
“…….”
승수의 핀잔을 아무렇지 않게 귓등으로 넘겨버리며 토요일에 만날 것을 종용하는 최환에게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주말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그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일이 윤희에겐 큰일이었다.
당장 이정후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여태껏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키는 일을 어겨본 적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줄 알았는데. 주말 동안 잡힌 수업들을 마다하고 최환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간다고 하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왜 대답이 없어?”
“잘 모르겠어서.”
“아버지 때문에 그래? 허락받으면 되잖아.”
“그게…….”
“난 너 꼭 온다고 믿는다?”
“…….”
난처한 웃음만 짓고 있자 이번엔 최환이 울상이 되었다.
“뭐야, 정말 안 돼?”
“얘기해볼게.”
자신이 없어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런 윤희를 바라보는 승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탁자 앞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정후가 매무새를 다듬는 걸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말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그나저나 오늘도 밖에 나가는 모양이다. 이정후는 요즘 들어 부쩍 밤에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네, 저, 그런데요.”
“할 말 있어?”
“그게, 음, 이번 주 토요일에,”
“왜, 친구랑 약속이라도 했어?”
어떻게 알았지. 덕분에 얘기하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아직 확실히 만나겠다고 한 건 아니고요.”
“무슨 일인데?”
“음, 최환 생일인데요, 제가 축하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주말에 잡혀있는 레슨을 빼놓은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조마조마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이정후는 의외로 시원하게 허락했다.
“레슨이랑 과외 다 미뤄 놓을 테니까 다녀와.”
“그래도 돼요?”
“너무 늦진 말고.”
“네!”
“그럼 난 이만 나갔다 올게.”
시계를 확인한 이정후가 서둘러 나갔다. 제 얘기를 들어주려고 시간을 지체했던 것 같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이 말랑해졌다. 돌이켜보면 그는 항상 자신을 위해줬다. 그런데 대체 왜.
‘왜, 나는.’
이정후를 어딘지 모르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걸까. 언제나 따뜻한 이정후인데. 항상 먼저 손 내밀어준 건 그였다.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자신은 늘 선택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그가 제공하는 모든 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선택을.* * *최환의 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생일엔 만나서 뭘 하는 걸까. 축하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모르는 것투성이다. 승수에게 물어보자 귀찮은지 가서 밥이나 먹고 오면 된다고 건성건성 대꾸했다.
‘선물은 뭘 하나. 옷은 뭘 입지.’
이런저런 잡생각들로 책상에 펼쳐둔 영어 지문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심기일전해 집중하려는 와중에 이정후가 들어왔다.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든 채였다. 말하지 않아도 윤희를 위한 선물이라는 걸 알았다. 얼른 받아 들고 그중 하나를 벌리자 밑단에 자잘한 하늘색 꽃무늬가 프린트된 감색 원피스가 나왔다.
“입어봐.”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갈아입고 와 거울에 비춰보니, 제가 보기에도 제법 잘 어울린다. 흡족하게 윤희를 바라보던 이정후가 그녀를 앉히고 원피스와 같은 색의 예쁜 구두를 신겼다.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는 구두에 그의 입술이 다시 한 번 호를 그렸다.
하지만 정작 윤희는 구두가 잘 어울리는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정후의 손이 닿은 발목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의 손길이 닿은 것도 아닌데 볼도 덩달아 화끈거리는 이유는 모르겠다. 괜스레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가위 자로 꼬았다 풀었다 하며 시선을 피했다.
“마음에 안 들어?”
“네? 아니요! 그럴 리가요!”
“…….”
“아.”
격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든다는 게 그만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고 말았다. 덕분에 이젠 귀까지 화끈거린다. 어찌나 얼굴이 달아올랐는지 뇌수마저 절절 끓는 착각에 빠졌다. 온통 발갛게 달아오른 저에 비해 귓불에 닿은 이정후의 손은 차갑기만 하다.
“아직 귀 안 뚫었지.”
“네…….”
작정이라도 한 걸까. 아님 윤희 자신이 예민한 걸까. 손닿은 곳마다 온통 확확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런 윤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정후가 문득 오른쪽 귓불을 쥐었다.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아!”
“쉬이…….”
망연히 올려다보는 윤희에게 조용히 하라며 가볍게 눈짓한 이정후가 계속 귓불에 대고 무언가를 대고 눌렀다. 마침내 이정후의 손이 떨어진 자리를 무심코 만지고 나서야 그 무언가가 귀걸이라는 걸 알았다.
투두둑.
반대쪽 귓불도 연이어 뚫렸다. 생살이 찢기는 데도 꼼짝 않고 견디는 건,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해 보이는 이정후 때문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꾸우욱 박아 넣곤 그대로 손을 두고 표정을 살피는 게 꼭 관찰하는 것처럼 느껴져 섬뜩했다.
“아팠지.”
“아니요.”
도리도리,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얼른 손등으로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눈물이 번져 모습이 흉할까 싶어 얼른 올려다본 거울 속, 귀에는 작은 귀걸이가 박혀있었다. 감색 원피스와 대비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연한 핑크빛 진주 귀걸이가. 앙증맞고 예쁜 귀걸이에 조금 전 느꼈던 섬뜩함은 사라져버렸다.
‘착각이었겠지.’
표정을 살핀 게 아니라 아파할까 봐 들여다본 거겠지. 오늘따라 유난히 예민한 자신 탓이다.
“참, 그리고 이거.”
얼떨떨해한 채 거울을 들여다보는 윤희 앞으로 손바닥 크기의 상자가 놓였다. 남성용 시계였다.
“뭐예요?”
“생일 축하해 주러 간다며. 선물 해주면 좋아할 거야. 아직 선물 준비 못 했지?”
이정후는 이렇게나 자상하다. 그녀 자신 보다 그녀를 더 잘 아는 사람. 그래서 늘 한 발 앞서 챙겨주는 사람. 키다리 아저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걸. 얼굴도 모르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는 주디의 처지에 비해, 언제나 가까이에서 이렇게 챙김을 받는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지.
“정말 감사해요.”
귀의 얼얼함도 잊었다. 저도 모르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얼싸 목에 매달리자, 이정후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얼마나 경직됐는지, 윤희도 따라서 순식간에 뻣뻣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죄송해요. 실수했어요.”
“……정리하고.”
“……네.”
쇼핑백이며 빈 상자를 정리한 후,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 이정후는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시계를 보니 그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미 일을 마치고 온 줄 알고 있었는데 또 일이 있는 걸까.
“또 나가세요?”
“…….”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려 했는데, 이정후는 막 드레스 룸 문을 열고 나오는 윤희를 무시하곤 그대로 나가 버렸다. 어쩐지 외면당한 것 같아 한참 망연자실하게 있다가 공부고 뭐고 내버려 두고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밤, 이정후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여느 때와 같이 책상에 고개를 묻고 있는 승수에게 최환이 까무잡잡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야, 넌 강윤희랑 집에 가는 길에 무슨 얘기해. 전에 보니까 같이 가는 것 같던데.”
“별로. 아무 얘기도.”
방향이 같다는 핑계로 학교가 끝나자마자 강윤희를 데리고 본가나 발레 수업에 데려다주는 게 승수의 임무 중 하나였다. 어째서 강윤희를 그렇게까지 과잉보호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짧지 않은 거리지만 얘깃거리도 없어 둘 사이에 말이 오가는 일은 드물었다.
승수와 윤희 사이에 무슨 공통분모가 있어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어쩌다 이정후에 대해 물을라치면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무는 강윤희도 한몫했다. 게다가 오가는 길목에는 나림동이 있다. 지금은 고층 빌딩 단지가 들어선 옛 홍등가가. 그 앞을 지날 때면 화재가 났던 날 아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가슴이 먹먹해져 저도 모르게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고 마는 것이다.
“한마디도 안 하진 않을 거 아냐.”
“거의 안 해.”
강윤희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속사포같이 ‘진짜, 사복까지 내 스타일일 줄은 몰랐는데. 완전 예뻐. 옷도 잘 입고, 구두랑 깔맞춤한 거 봤냐? 아 진짜, 액세서리까지 다 내 취향이야.’ 쏟아내던 최환.
“자세히도 봤다.”
“장난 아냐, 진짜.”
핀잔에도 최환은 굴하지 않고 난리 법석이었다. 연신 자기가 좋아하는 어느 무용수의 트레이드마크가 강윤희가 했었던 것 같은 작은 진주 귀걸이였다느니, 평소 꿈꾸던 이상형이 실물로 존재한다느니. 그런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입 안이 썼다. 최환은 알까. 지금 자기가 저렇게 얼굴을 붉혀가며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그 여자애가 매일 밤 다른 남자 품에서 잠든다는 사실을.
“……걔 너무 좋아하지 마.”
“왜 또.”
“음침하잖아.”
“음침은 자식아, 네가 음침하지.”
“…….”
“너, 강윤희 좋아해?”
“뭐?”
대화가 어이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애를 뺏기기 싫은 옹졸한 녀석 정도로 정의한 최환이 계속 캐물었다.
“야, 솔직히 이상하잖아. 매일 같이 집에 가면서 무슨 얘기 했냐면 알려주지도 않고. 내가 걔 좋다는 말만 하면 별로라고 하고. 싫어하는 이유 대보래도 말 안 하고. 난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걔 좋아한다고밖엔 결론이 안 나는데?”
“이거나 먹어.”
짜증이 나서 사이드로 나온 감자튀김을 냅다 던지자 얄밉게 쏙 피해버린 최환이 변죽을 올렸다.
“봐봐, 할 말 없으니까 이래. 내 말 맞지?”
“맞긴 뭐가 맞아.”
“아니면 나 대시해도 돼?”
“안 돼.”
“뭐야, 너 진짜.”
순간적으로 정색했다. 최환하고 강윤희가 엮여서 좋을 건 없다는 판단에. 안 된다고 딱 자르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최환에게 급하게 변명을 댔다.
“네 말 맞아. 나 사실 강윤희 좋아해.”
“에이, 뭐야.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너스레를 떠는 최환의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핑계다. 녀석이라면 친구가 좋아한다는 여자애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강윤희가 돌아와 더는 중언부언해도 되지 않는 상황에 안도했다.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 했어.”
별 얘기 안 했다는 말에 끄덕이더니 가방을 뒤적거린 강윤희가 잘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브랜드는 잘 모르는 승수지만, 고등학생이 차고 다니기엔 비싼 시계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환아, 이거.”
“뭔데?”
“생일 선물.”
“진짜? 나 주는 거야?”
얼른 포장을 푼 최환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와, 진짜 멋지다! 나 이런 거 좋아하는데.”
“맘에 들어?”
“나 이렇게 숫자판이 무광에 다크 블루인거 좋아하거든, 이 브랜드엔 이런 숫자판이 많이 없어서. 진짜 고마워. 내가 엄청 눈독들이던 건데.”
얼른 손목에 시계를 찬 최환이 자랑하듯이 손등을 이쪽으로 휙, 돌려 보였다. 그러다가 승수와 눈이 마주치곤 살짝 눈가가 기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애써 표정을 바꾸고 환하게 웃으며 손목을 흔들흔들하는 최환을 보며 곰곰이 되짚었다.
‘그래. 저런 스타일은 흔하진 않지.’
강윤희는 최환이 저런 스타일의 시계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단지 우연의 일치인 걸까. 아님 최환의 말대로 하늘에서 떡하니 이상형을 현실세계에 내려준 걸까. 어느 쪽도 납득하긴 힘들어, 석연치 않은 마음을 괜히 얼음만 남은 콜라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달랬다.* * *윤희는 돌아오자마자 정후에게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했다.
“그래서요, 피자도 먹구요, 음, 아 맞다, 승수랑 환이랑 둘이 야구 게임도 했어요. 동전 넣으면 공이 나오는 거요. 환이가 이겼어요.”
“재미있었겠네.”
“참, 선물도 평소에 갖고 싶었던 거래요! 그런 건 흔하지 않다고.”
“……그래? 잘됐네.”
“그리고, 아 맞다!”
또래와의 첫 외출이 어지간히 신났던지 계속 종알거리던 윤희는 어느 순간 헤실헤실 걸려있던 미소가 그대로 입가에 머문 채 잠이 들었다.
“…….”
가만히 목덜미에 손을 가져가자 가느다란 목에 그림자가 졌다. 한 손에 들어오는 여린 선을 조르듯이 쥐었다 폈다. 그림자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아 그대로 손을 내려 목을 짚었다. 예상대로 희고 투명한 목덜미가 손아귀에 고스란히 들어온다. 이대로 힘을 주면 그대로 부러질 것만 같다. 엷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다 그대로 숨이 멎겠지.
‘차라리 그냥 죽여 버릴까.’
엄지손가락에 동맥의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대로 목을 졸라 비틀고 싶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꼴이 보고 싶다. 눈가가 발갛게 짓무르면 꽤 기쁠 것 같다. 겁에 질린 비명까지 질러준다면 더더욱.
‘그래서 얻는 게 뭐야.’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윤희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잠결에도 무구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 목숨을 잃을 뻔했는지도 모르고. 완전히 안심한 채 잠든 지금의 모습만큼 정후를 믿고 의지한다는 완벽한 증거가 또 있을까. 그게 몹시도 만족스러웠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껏 참아왔는데 까짓 2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그런데 왜.
– 정말 감사해요.
곤히 잠든 얼굴 위로 어제 선물을 받곤 환하게 웃으면서 제 목에 확 감겨 안기던 모습이 생생히 겹쳐지는 건 어째서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떨쳐냈다. 고려할 가치가 없지 않나. 그게 뭐라고.
계집이 제게 그렇게 안긴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도 처음이었으니까.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당황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지. 명치가 껄끄러운 이유는.
깔끔하게 결론 내렸음에도 평소처럼 같이 잠들기는 어딘지 거북해 석우를 불러 차를 대기 시켰다.“오늘은 어디로 모실까요?”
“Ange noir.”
평소처럼 담담한 목소리에 석우가 백미러로 흘긋, 정후의 기색을 살폈다. 그래봤자 턱을 괴고 가만히 창밖을 내다볼 뿐인 정후에게서 표정 변화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의아하다. 본가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경우는 드문데 이틀 연속 저를 불러대는 것이. 의아해도 물을 수 없는 게 답답할 뿐이다.
정후를 살피느라 바짝 곤두섰던 석우의 신경은 Ange noir에 오고 나서 한결 부드러워졌다. 매니저의 은근한 눈웃음 영향이 컸다.
“오셨어요?”
목소리마저 나긋한 매니저가 제일 안쪽 접대실로 안내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차분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상한 찻집으로 착각할 공산이 컸다. 가끔 단속 나온 형사들 중 초짜는 잘못 들어온 줄 알고 되돌아 나간 적도 있으니.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은밀히 혹은 대놓고 보내는 추파들을 무심히 흘려버리고 룸에 들어선 정후에게 매니저가 조심스레 권했다.
“오늘 흰둥이 새로 들어왔는데.”
“필요 없어.”
“너무 칼 같으시다.”
코끝을 찡긋하며 과하지 않은 교태를 부리던 매니저는 양주와 안주가 준비되자마자 문을 나섰다. 오픈 때부터 함께 한 매니저는 감이 꽤 좋은 편이어서 기분을 잘 맞췄다. 오늘 같은 날도 눈치 빠르게 얼른 자리를 비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매니저가 사라진 후에도 좀처럼 그녀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석우에게 정후가 딱딱하게 물었다.
“지금 우리가 몇 프로지?”
“75프로입니다.”
“저쪽은?”
“조금 전까지 74.5였습니다.”
고작 0.5프로 차이의 이율이 가소롭다는 듯 엷게 웃은 정후가 다시 명령했다.
“그럼 우린 내일부터 72프로로 낮춰.”
“네? 너무 크지 않습니까? 갑자기 그렇게 내리면.”
220프로에서 시작한 이자가 경쟁하듯 붙어서 어느새 72프로까지 내려갔다. 이건 같이 죽자는 얘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드물게 인상을 찌푸린 석우와 달리 정후는 여유로웠다.
“아직 무리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다른 업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엔 어떻게 알았는지 4호점으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려서 꽤 애먹었습니다.”
“누가?”
“잡고 보니 L사 따까리들이었습니다.”
잔챙이들을 상대로 애먹었다는 표현이 거슬렸는지 정후의 눈살이 좁아졌다. 이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석우가 다시 정정했다.
“뭐, 애먹었다기보다는 귀찮았습니다. 그런 건 딱 질색이니까.”
비슷한 이율대로 대출해주는 사채업자들 사이에서는 0.1% 변화도 민감한 사안인데, 최근 이쪽에서 계속 ‘BD 캐피탈’이라는 대부업체와 경쟁하듯이 1%씩 낮춰버리니 그만 중간에 껴서 화를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 고객 중에 중앙지검 부장검사 있지 않아?”
“네.”
“접대 잘해.”
“알겠습니다.”
유난히 ‘흰둥이’를 밝히던 유들유들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곳 Ange noir의 컨셉은 타락 천사라는 이름 뜻에 맞춰서 검은 의상만 허락하고 있는데 아직 성 경험이 없는 아가씨만 흰색 의상을 입을 수 있다. 처음에는 하얀 천사라는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불렸는데 매니저가 애칭으로 흰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공식적인 호칭처럼 굳어졌다.
그렇게 흰 옷을 입은 여자들은 부르는 게 값이기도 하지만, 돈을 많이 낸다고 아무 손님이나 받는 것도 아니어서 공공연히 흰둥이를 사는 것이 저들 사이에서는 어떤 능력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최근에는 가끔씩 이정후의 필요에 따라 권력의 힘을 빌릴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지만.
“요즘엔 바깥출입이 잦으시네요.”
상황보고가 끝나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것이 영 어색한 석우가 먼저 운을 띄웠다. 정후가 술을 안 마시는데 저 혼자 자작을 하기도 뭐한 일이고.
“왜, 귀찮아?”
“아닙니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교과서를 억지로 읽는 것 같은 어투에 이정후가 석우의 속내를 간파하고 웃었다. 덕분에 더욱 어색해진 분위기 속, 이정후가 색다른 주제를 꺼냈다.
“결혼 안 해?”
“여자는 독입니다.”
석우도 사내인데 한창때 불타는 연애 경험쯤이야 왜 없겠느냐마는 모두 씁쓸한 뒷맛만 남기고 끝나버렸다. 전 오야의 죽음을 겪은 뒤로는 그나마 눈곱만큼 남아있던 결혼에 대한 미련도 없어져 버렸다. 이쪽 세계의 일이란 험한 일이 백에 아흔아홉이요, 그나마 남은 하나는 죽음뿐 아니었던가. 그런 마당에 가족이 생겨서 무엇 할까 싶은 생각에. 이 와중에 호적에 떡하니 강윤희가 딸로 올라있으니 나름 골 때리는 상황이기도 했다.
“결혼을 안 했지만 애도 있는데요 뭐.”
“…….”
방심했던 탓일까. 저도 모르게 실언을 해버렸다. 그 계집아이에 관한 일이라면 알고도 모르는 척, 그 앞에선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인데. 잽싸게 표정을 살폈는데 다행히 언짢은 기색은 없었다. 뭐가 생각난 듯 목덜미를 천천히 쓸 뿐.
“여자는 독이라.”
“…….”
“그럼 한 번 만나볼까?”
“예에?”
뜻밖의 말에 놀라 바라보니 평소엔 손도 안대는 양주를 앞에 놓인 잔에 따른 이정후가 석우에게도 잔을 채워 건넸다.
“뭘 놀라. 마셔.”
당황한 나머지 뭐라 대꾸할 생각도 못하고 얼른 털어 넣었다. 독한 기운이 가슴을 타고 쓰리게 흘러내려갔다. 그 때문일까. 어쩐지 명치가 껄끄러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