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5
05
정후의 모친은 아들의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출가했다.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파르라니 깎은 민머리가 조금 낯설었던 걸 제외하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절에 가면 됐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충분치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때때로 절을 찾아 산책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걸로 그럭저럭 만족했다.
– 아버지는 여전하시고?
– 네. 아버지는 변함없으세요.
– 너라도 연등을 품고 살아야 한다.
– 그렇게 할게요.
연등을 품은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좋은 뜻이겠거니, 습관처럼 타이르는 어머니에게 습관처럼 대답했을 뿐이다.
어머니를 뵙고 온 날이면 아버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하곤 했다.
– 이제 와서 여길 정리하기엔 너무 많이 커버렸다.
– 네. 저라도 연등을 품고 살라고 하시던데요.
– 연등?
– 네.
번뇌와 무지로 쌓인 어둠의 세계를 지혜로 두루 밝히라는 설명을 덧붙여 전하자 잠자코 듣고 있던 아버지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어둠의 세계가 단지 불가에서 말하는 몽매한 상태를 뜻하는 것만은 아님을 읽어냈기 때문이리라. 잠시 모자의 대화를 곱씹던 아버지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음성이 정후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난 확실히 알지. 누구나 가슴 속엔 홍등을 품고 산다.
– 홍등이요?
– 그래. 금지된 것을 희망하는 붉은 빛. 저 사창가처럼.
제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심도 없었고, 자신도 똑같은 길을 걸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게 되지 않을까. 머리가 더 굵어지면 어머니가 바라듯 그냥 일반인처럼 살 거라고 막연히 정해두고 있었다.
그전에는 공공연히 자기 뒤를 잇게 할 거라던 아버지도 어머니의 출가 후로는 아들의 앞날에 가타부타 입을 대지는 않았다. 굳이 조직을 넘겨준다면 충실한 오른팔인 석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그날도 그냥 그런 평범한 날 중의 하나였다고 기억한다. 한가로이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 일정을 알아보고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던 그런 하루.
‘오야께서! 그만, 그만……!’
이어지는 말에 비스듬히 기대있던 의자가 쓰러지는 것도 모르고 벌떡 일어섰다. 희게 질린 제 얼굴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석우 또한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얼마나 부정했던가. 사실이 아니기를, 세상의 모든 초월을 향해 빌던 그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한계에 달했을 즈음 도착한 곳에는 한 중년 남자가 반듯이 누워있었다. 전신을 덮은 흰 천 밖으로 비죽이 나온 손가락만 보고도 그것이 제 핏줄임을 단숨에 깨달았다.
‘……어쩌다?’
‘형수님 계시는 절에…… 한사코 혼자 다녀오신다고…….’
더듬더듬 설명하던 석우가, 흰 천을 들추려는 정후를 황급히 막아섰다.
‘안 됩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석우는 덩치였다. 그런데 무슨 힘이 났는지 그런 석우를 단박에 물리쳤다. 비장한 모습에 제풀에 꺾인 건지도 모르겠다. 석우가 물러선 자리, 시신을 덮고 있던 천을 들추는 동안 그 많은 조직원들 사이에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 속, 정후의 외마디만이 짧게 울렸다.
시신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누군가 눈이며 입술을 도려낸, 열 손가락과 두 무릎의 관절이 반대 방향으로 꺾인 시신을 본 순간, 탁! 제 속에서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누구나 가슴 속엔 홍등을 품고 산다.’
입술도 없는 시체가 자길 보고 웃은 것도 같다.* * *‘이영하, 김동원, 박수혁.’
벌써 셋이다. 전학을 가거나 학교를 무단으로 일주일 넘게 결석한 녀석들의 빈자리를 차례로 응시하던 승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석우에게는 말한 적 없는데. 윤희와 말 섞는 애들에 대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수업 시간에 윤희의 책상으로 팔을 뻗어 가만히 적었다.
[너 학교에서 있었던 일 누구한테 말해?] [아무한테도.] [그 사람한테 말한 적 없어?]그 사람. 윤희가 가만히 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승수는 이정후를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긴 저도 딱히 제멋대로 지어 부르는 검은 천사 외에는 그를 부르는 일정한 호칭이 없다. 그마저도 저 혼자 속으로만 부르고 삭이는 이름이지만. 저기요. 있잖아요. 그런데요.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지는 부름에 그는 항상 ‘응, 윤희야.’ 하고 다정히 대답해주는데.
‘그나저나.’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짤막하게 거짓말을 적었다. 그에 대한 일은 어쩐지 최대한 모른 척해야 할 것만 같다.
[없어.] [그럼 석우 아저씨는?] [없어.]더더욱 없다. 전학하면서야 부모님 성함 란에 ‘강석우’ 세 글자가 적혀 있어서 그가 법적으로는 제 아버지로 되어있음을 알았을 뿐. 늘 굳게 다문 입술과 무뚝뚝한 표정의 석우와는 네, 아니오, 외엔 제대로 된 대화마저 나눠본 적이 없다.
마지막 두 글자를 끝으로 승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해서 제가 먼저 승수의 책상 위로 샤프를 옮겼다.
[그런데 왜?] [몰라서 물어?] [뭘?] [너랑 조금만 친해지면 다 전학가고, 학교 안 나오는 거]이번에는 제 쪽에서 먼저 답장을 거뒀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 안 해봤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하지만 같이 노는 여자애들 무리는 다들 학교에 잘 다니고 있지 않은가. 저에게 대하는 태도도 변함없고. 무엇보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먼저 학교에 다니라고 한 사람도, 부족한 것은 없는지 살펴주는 사람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들어주는 사람도, 다 이정후, 그인데.
가만 고개를 처박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저를 보고, 권승수가 팔을 뻗어 책상에 다시 글씨를 썼다.
[시험 삼아 아무나 한 번 던져보든지.]잠시 승수의 글씨를 뚫어지게 보다가 지우개로 박박 지워버렸다.
‘그럴 리 없어.’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종이 울리자마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와 체육관으로 향했다.
“윤희 왔구나. 오늘은 환이랑 해.”
“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용반을 특활로 택했을 땐 선생님이 직접 스트레칭을 맡아줬었는데 이제 익숙해졌다고 여겼는지 최환을 불렀다. 저쪽에서 오른 다리를 바에 올리고 상체를 접어 꾹꾹 누르던 최환이 부름에 신나게 달려왔다.
“나 알지?”
옆에서 계속 눈치 주면서 말 걸지 말라는 승수 탓도 있지만, 과한 관심이 부담스러워 계속 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문득 조금 전 책상에 승수가 적었던 글씨가 떠올랐다.
[너랑 친해진 애들은 다 없어져.]그렇다면 이제 최환도 없어지게 될까.
“강윤희, 나 몰라?”
반응 없는 윤희에게 최환이 거듭 물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순한 눈을 하고서 조르는 투가 꼭 커다란 강아지 같다.
“……알아.”
겨우 대꾸하자 환호성을 질러댔다. 갑작스런 소란에 선생님의 주의가 떨어졌다.
“거기, 뭐해? 스트레칭부터 하지 않고?”
“네!”
어색한 상태로 서로 마주 서서 어깨를 눌러 허리까지 쭉 늘리기도 하고, 다리를 양 옆으로 찢은 채 등에 앉아 반동을 주기도 하면서 한동안 몸을 풀었다. 하지만 최환은 이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세 다시 말을 붙여오는 걸 보면.
“너 어릴 때부터 발레 했지. 엄청 유연한데.”
“으응.”
“집에서 밀어 준거야? 좋겠다. 난 조르고 졸라서 겨우 허락받은 건데.”
“그냥…….”
윤희의 기억 속에 허락이란 과정은 없었다. 제가 무엇을 원한 적은 없었으므로.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이정후가 데려왔을 때도, 이것저것을 끊임없이 시킬 때에도 착실히 따른 건 전부 그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였다. 무엇보다도 선택의 여지 자체가 윤희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 이정후는 바라고, 윤희는 받아들이고. 다만 그뿐이다.
“너 향수 뭐 써? 이거 모링가 향 아니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야.”
“그래? 이름은 잘 몰라.”
그러고 보니 바디로션 조차도 모두 이정후가 정해 준 것이었다. 계속 같은 향의 제품만을 정해준 걸 보면, 그도 모링가 향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대강 얼버무리는 대답에도 그저 좋기만 한지, 최환은 끊임없이 재잘댔다.
“나 사실 너 처음 봤을 때, 세상에 이런 여자가 있나 했다?”
“…….”
“이렇게 내 이상형하고 딱 맞는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 해서.”
눈엣가시처럼 방해하는 승수도 없겠다, 선생님도 마침 다른 학생을 봐주느라 이쪽에 신경 쓸 여유 없으시겠다, 이때다 하고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내느라 최환의 혀와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윤희가 이상형이라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적당한 키, 오랜 시간 무용으로 다져진 낭창한 몸매, 스칠 때마다 은은하게 나는 모링가 향, 열쇠고리나 시계 같은 작은 소품들 모두. 하나같이 꼭 맞춘 것처럼 제 취향에 들어맞았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묵주반지를 발견했을 땐, 종교마저도 같은가 싶어 순간 설레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러워 하진 말고. 친구, 오케이?”
“…….”
“최환, 자꾸 잡담할래?”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 동안 선생님의 꾸중에 대화가 끊겼다.* *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있잖아요.”
하루 종일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것을 용기 내어 확인해 보려 한다. 나란히 누운 침대 속, 오른팔로 이마를 괴고 있던 이정후가 저의 부름에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윤희가 말하는 건 무엇이든 들을 준비가 된 것처럼, 상체를 그녀에게 잔뜩 기울여서.
“오늘 새 친구가 생겼어요.”
“그래? 누구?”
“같은 특활 하는 앤데요, 반도 같은 반이고, 어, 남자애고.”
“이름이 뭔데?”
“환, 최환이요.”
여기까지 말해놓고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승수의 말대로라면 조금이라도 언짢은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언짢아하는 기색은커녕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가.
“그랬구나, 잘하고 있어, 우리 윤희. 학교는 처음이라 낯설 텐데, 친구도 많이 생기고.”
언제나 그랬듯 부드럽게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다정한 손길에 잔뜩 졸이고 있던 가슴이 풀어졌다.
‘그래, 맞아. 항상 학교에서 있었던 일 얘기를 할 때면 이렇게 웃어 줬었는걸.’
그래도 혹시나 몰라 며칠을 더 기다려 봤다. 승수의 말처럼 다른 남자애들이 그랬듯, 최환도 어느 날 갑자기 제 곁에서 사라지는지.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최환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거나 전학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멀어지거나 사라지기는커녕,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최환 특유의 활발함, 거리낌 없이 들이대면서도 편안하게 해주는 농담이나 배려로 윤희도 점점 마음을 열게 되었다. 승수는 부쩍 친해진 둘이 어딘지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거봐. 그냥 우연이었을 뿐이야.’
시일이 꽤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정후를 두고 의심했던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미주알고주알 낮 동안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나나빵 들고 원숭이 흉내를 내는 거예요. 너무 웃겨서 쓰러질 뻔했어요.”
“그렇게 웃겼어? 많이 친해졌나 보네.”
“네, 첨엔 막 자기 이상형이라 그러고, 좀 이상한 앤 줄 알았는데. 좋은 친구 같아요.”
“좋은 친구가 생겨서, 참 다행이다.”
봐라. 지금도 이렇게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걸.
“괜찮은 학생인 것 같은데 앞으로도 그 친구랑 계속 잘 지냈으면 좋겠다, 윤희야.”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 담아 마주 활짝 웃어주는 윤희에게 정후가 유혹하듯 달콤하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