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4
04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쥐죽은 듯 고요했던 교실이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엎드려서 잠을 청했겠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만큼 오전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오늘 전학 온다고 했는데.
“야, 매점 가자.”
웬일로 깨어있는 승수를 보고 최환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너나 가.”
“아 그러지 말고 좀!”
성화에 못 이겨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뒷문으로 향하자 최환의 팔이 목에 확 감겨왔다.
“치워, 병신아.”
낮게 읊조리자 뭐가 그리 웃긴지 킬킬대던 최환이 갑자기 양다리를 쭉 뻗어 풀쩍 뛰더니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을 때면 곧잘 하는 짓이었다.
“미친놈아.”
“재즈 스피릿 몰라? 재즈 스피릿?”
“자꾸 그럼 나 다시 들어간다.”
“내가 오늘 특별히 햄버거 쏜다, 가자!”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등을 돌리는 승수의 팔을 덥석 붙잡은 최환이 억지로 잡아끌었다. 어릴 때부터 재즈를 배워서 그런지 유달리 몸이 좋은 최환은 활달한 성격과 특유의 명랑함 덕에 언제나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고 지내야 하는 승수에겐 큰 부담이지만 매일같이 옆자리에 앉는 데다가 워낙에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는 터에 딱히 물리칠만한 거리도 없었다.
“햄버거 두 개랑 흰 우유 하나, 딸기 우유 하나!”
작은 매점 안을 최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채우고 얼마 되지 않아 따끈한 햄버거가 손에 들려진다.
“신제품인데 먹어봐. 핫스파이시치킨버거!”
주황색 포장지에 박힌 오밀조밀한 갈색 글자를 따라 읽다가 최환의 손에 들린 분홍색 우유 팩을 타박했다.
“애도 아니고 허구헌 날 딸기 우유야.”
“난 세상에서 딸기 우유가 제일 맛있어.”
일부러 승수보고 들으라는 듯 쪼로록, 소리를 내며 빨대를 빨아들이는 최환의 뒤통수를 가볍게 갈겼다.
“남자 새끼가 빨대는.”
“이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투닥거리다가 쉬는 시간 끝날 새라 교무실 앞을 빠르게 지나치는데 교감이 여자애 하나를 데리고 교무실 문 앞을 지나는 것이 보였다.
‘강윤희.’
고등학생이면 이제 제법 성인 티가 나는 여자애들도 많은데 또래에 비해 아직 덜 자란 느낌이었다. 그 때문인가 묘하게 연약해 보였다. 동그랗고 작은 어깨와 가느다란 팔,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도 한몫했다. 먼발치에서 드문드문 봤을 때도 한 줌이나 될까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그랬다. 그런 주제에 차분한 얼굴은 꽤 어른스러워 자꾸 눈길을 끌었다. 최환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승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관심 가득한 투로 물었다.
“전학생인가?”
“어.”
무심코 확정적으로 내뱉었다가 아차 싶어 얼른 수습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당연히 전학생이지.”
“네가 무슨 전교생 얼굴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네.”
대답 대신 우유 밑을 쳐올리자 빨대가 입천장을 긁었는지 몇 번 켁켁 대더니 금세 다른 소릴 했다. 최환의 좋은 점은 이런 거다.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 주는 것. 혹은 알은체하지 않는 것. 승수가 어디선가 줘 터지고 와도, 꿈이라곤 없는 놈처럼 종일 엎어져 있어도, 승수의 부모가 조폭과 관련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도,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하긴, 따지고 보면 최환에 대해 모르는 건 승수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사는지, 부모님은 뭘 하시는지, 형제는 몇인지, 앞으로 하고 싶은 건 뭔지. 아는 것이라고는 어릴 때부터 재즈를 해왔다는 것뿐. 이처럼 서로 아는 것이 없어도 붙어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어쨌거나 승수의 신상이 알려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
“쟤 운동했나 봐.”
“어떻게 알아.”
“다리 보면 알지. 허벅지 안쪽에 근육 잡혔잖아.”
몰랐는데 최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마냥 가늘고 유약한 다리라고만 생각했는데, 묘하게 탄탄한 느낌이 종아리에서 무릎으로, 걸을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허벅지로 이어지는 선으로 이어졌다.
“맞춰볼까, 발레 했을 것 같아.”
빙고. 속으로 외치며 잠자코 들어주자 최환이 신난 듯이 빙그르르 돌며 외쳤다.
“우리 반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반이면 어쩌게.”
“재즈 스피릿 몰라? 재즈 스피릿? 발레는 재즈의 어머니라고.”
“미친. 그래서 쟤가 네 어머니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퉁명스레 말을 받자 입맛을 다셨다.
“아 몰라. 아무튼 내 스타일인데.”
전날 꿈자리가 사나웠나. 이상하게 최환의 관심이 좋게 보이질 않았다. 최환은 모르겠지만, 윤희는 승수의 반으로 배정이 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과 말 섞지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신신당부하던 석우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강윤희입니다.”
“나이스!”
사정 모르는 최환은 교실로 들어서는 강윤희를 보자마자 팔을 허공에 붕 휘두르며 즐거워했지만.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우물우물 말하던 윤희는 담임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가서 조심스레 앉았다. 낯선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잔뜩 얼어붙어선 옆자리 앉은 애가 뭐라고 말을 걸어도 고개만 숙인 채 별다른 대꾸가 없는 게 승수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래도 맡은 일은 일이라 옆의 최한을 툭툭 쳤다.
“자리 좀 바꿔.”
“뭐? 왜? 누구랑?”
“강윤희랑.”
“뭐야, 아깐 관심 없는 척하더니. 이제 와서? 싫어. 네가 바꿔.
“나? 내가 왜?”
“내가 강윤희 짝하려고.”
박박 우기는 최환과는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앞에 앉은 두 놈의 머리통을 툭툭 쳐댔다.
“야야, 너 가서 강윤희랑 자리 바꿔라. 넌 내 자리 앉고.”
승수의 험악한 소문 때문인지, 몇 번 회까닥 돌아서 죽도록 상대방을 패준 전력 덕분인지, 두 녀석은 입이 불퉁하게 나와서도 군말 않고 얼른 자리를 정돈했다. 그렇게 최환을 뒤에 두고 나란히 강윤희랑 앉았는데 여전히 바짝 긴장했는지 뚫어져라 책상만 마주하고 있다. 자리를 바꾸는 동안에도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던 강윤희다.
‘꽤나 수동적일지도.’
얘기를 하면 누가 들을까, 종이에 적어서 조용히 밀었다.
[나, 석우 아저씨한테 너 부탁 받았어.]짧은 한 줄짜리 문장이건만, 몇 번이고 되새김질해서 읽더니 이내 저를 보고 눈을 맞춰 안심이라는 듯 살짝 웃는다. 그러고선 다시 뭐가 걸리는지 화들짝 놀라 얼른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찰나였지만 눈망울이 유난히 맑았다고, 승수는 생각했다.* * *“음, 그래서 인사는 했는데…….”
흘긋 이정후를 올려다보니 별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냥 그러고 말았어요.”
“그랬구나.”
“네.”
같은 배움이라 해도 학교는 이제껏 윤희가 받아왔던 개인 교습과는 전혀 달랐다. 한 공간에서 여럿이 앉아 한꺼번에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이미 신세계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교재로 공부하는 것도, 내용을 따라가든 못 따라가든 상관없이 진행되는 설명도, 시간표에 따라서 이 교실 저 교실 옮겨 다니는 것도 모두 새롭기만 했다. 하지만 가장 적응되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관심을 보이는 것 아닐까. 뒤에 앉은 최환처럼.
“전학생, 발레했지.”
옆에서 가만히 기척을 살피는 승수도 한몫했지만, 질투난다는 이정후의 말이 떠올라 알아서 제 쪽에서 무시하기를 벌써 일주일 째였다. 그러던 것이 앞에 앉은 남학생이 갑자기 뒤돌아 ‘너 되게 얌전한가 보다.’하고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응?’ 하고 대답한 것이 최환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말았다.
“뭐야, 난 너 벙어리 인줄 알았네.”
“…….”
“말할 줄 알잖아. 왜 말을 안 해. 사람이 인사를 하면 좀 들어먹어야지.”
최환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구 말을 걸었다. 말이야 첫 날 자기소개를 했으니 당연히 할 줄 안다는 걸 알겠지만, 부러 저러는 거다.
“최환, 시끄러워.”
가끔 승수가 제지하긴 하지만, 최환의 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늘은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쉬는 시간에 제 책상 옆으로 와 턱을 괴고 올려다보더니 피하지도 못하게 고개를 바싹 들이밀었다.
“전학생, 강윤희!”
갑자기 얼굴을 휙 들이미는 바람에 깜짝 놀라 결국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 난 최환인데.”
“…….”
손까지 내밀어 악수하자며 까딱까딱 손목을 흔들어 뵌다.
“최환, 그러다 손목 잘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무시무시한 승수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았다. 낮게 키득거리면서 그럼 손목 없는 재즈 댄서가 되어야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다.
“아무튼, 너 발레 했어, 안 했어? 아, 진짜, 계속 말 안 할 거야?”
끝내 책상 한 귀퉁이만 보고 말 없는 윤희를 보고 포기했다는 듯 손을 털고 뒤로 가 앉던 최환.
“그래서, 우리 윤희랑 같이 얘기한 애는 이름이 뭐야?”
“음, 이영하요.”
최환하곤 ‘같이’ 얘길 나눈 건 아니니까.
“그래?”
혼잣말처럼 반문하곤 이젠 학교 일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지 정후가 이불을 윤희의 턱까지 덮어주고 토닥였다.
“얼른 자자, 내일 또 학교 가야지.”
“네.”
고분고분 대답하면서도 궁금했다.
‘어째서.’
학교에 가야만 하는 걸까.* * *“잘 알아듣게 말하고 왔습니다.”
기계적으로 서류를 넘기는 정후에게 조직원이 보고했다.
“아마, 이영하가 강윤희에게 다신 말 거는 일 없을 겁니다.”
“알았어, 가봐. 참, 내일 갈 준비는 다 됐고?”
“네. 진작부터 비워놓으라고 연락해놨습니다.”
“잘했어. 이제 가서 일봐.”
깍듯이 인사하고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석우도 정후에게 경과를 보고하러 나섰다.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매출도 꾸준히 늘고 있고. VIP룸을 더 늘릴까요?”
“그러든가.”
“요즘엔 국회의원들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그제는 대현전자 대표이사도 들렸답니다.”
“시설 투자 더 해. 일하는 애들도 좀 신경 써서 뽑고.”
“아, 새로 오픈하는 곳은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요?”
“글쎄. 뭐 좋은 아이디어 있어?”
“전 엘리트가 아닙니다.”
“엘리트만 머리를 달고 있는 건 아니잖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한 번 생각해봐, 그럼.”
벌써 이름이 몇 개나 올라갔지만 다 퇴짜 맞은 걸로 아는데. 석우는 괜히 애꿎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처음에 목 좋은 건물들을 물색해 오라고 했을 때는 사창가를 접고 음식점 체인이라도 하려는 걸까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에서 하던 사업을 이어가려면 굳이 나림동의 절반을 불태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전 오야가 죽고 나림동도 불에 타서 흉흉한 상황, 조직원들은 오야로 모시기엔 지나치게 젊은 이정후를 탐탁지 않아 했다. 은근히 석우가 정후의 뒤를 치기를 바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우는 꿋꿋하게 곁을 지켰다. 그런 짓은 석우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새로운 계획이 윤곽을 드러냈다. 뜻밖에도 윤락업이었다.
– 강남 한복판에서 이런 게 통할까요? 일할 사람이 구해질지부터가 의문인데.
– 서울권 4년제 이상. 학벌 좋을수록 페이 높여.
어디까지나 음지에 머물러 있어야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한 석우가 조심스레 말리자 무덤덤하게 대답했던 정후였다. 처음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정후가 내건 조건의 여자가 미쳤다고 제 발로 이런 곳에 기어들어 오겠는가.
그래, 백번 양보해서 설사 그런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수요를 맞출 수나 있을까? 만 원짜리 몇 장이면 얼마든지 쉽게 성을 살 수 있는 세상인데. 오랜 시간 홍등가에서 뼈가 굵은 석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컨셉이었다. 망할 게 분명하다고, 홍등가 부지를 판 돈으로 차라리 도박을 하는 것이 더 성공확률이 높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웬걸. 1호점을 개점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물색해 둔 모든 건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다.
석우의 예상과 달리 검은돈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오는 여자는 많았고, 그렇게 들어온 콧대 높은 계집들이 손 한번 맘대로 잡지 못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그것에 환장하는 남자도 넘치게 많았다. 나림동의 밤하늘을 채웠던 고성방가는 없어지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자들이 점잖게 드나들었다. 대화가 통한다나.
‘대화는 무슨.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 하나씩은 달고 나오는 것을. 지랄한다.’
속으로 일갈했지만, 어쨌거나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정후에 대한 신뢰도 높아져만 갔다. 조직원들도 험악하게 굴던 나림동에서의 생활보다 지금의 정돈된 분위기를 훨씬 좋아했다.
‘참 의외지 뭐야.’
제 아버지가 칼부림으로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후는 조폭 두목의 아들이라곤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성격의 모범생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무자비하고 냉혹한 고황파의 새 주인으로 변모해 버렸지만.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전 오야보다도, 지금은 이정후가 더 조직에 잘 어울리는 주인이라고, 석우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었다.* * *“우리 윤희, 오늘은 혼자 잠들어야 할 것 같네.”
달력을 보니 ‘그 날’이 온 것 같다. 해마다 이맘때 쯤, 정후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곤 했다. 먼저 자라는 그의 말을 어기고 웅크리고 앉아 밤새 기다리곤 했었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면 옆자리에서 곤히 잠든 정후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은 꼭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잠들어야지.’
다녀오시라고 문 앞까지 손 흔들며 배웅하고 침대 옆에 마련된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없으니 오늘은 마음 편히 일기를 쓸 수 있겠다.
일기의 첫머리엔 언제나 ‘Dear, my Ange noir’가 적혔다. 영어 과외 시간에 ’키다리 아저씨‘를 원서로 읽은 후 생긴 버릇이었다. 오갈 곳 없는 자신을 거둬준 그가 키다리 아저씨와 꼭 닮았기에. 키가 큰 것도, 자신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것도.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주인공이 키다리 아저씨와 사랑을 이루는 결말이었다.
‘나도, 언젠가…….’
큰 키의 주인공인 그가 제게 손 내밀어 키다리 아저씨가 주디에게 했던 것처럼 사랑한다고, 오랫동안 너만을 바라봐 왔다고 고백하기를. 그럼 얼마나 행복할까.
탁자에 엎드려 Dear, my Ange noir까지 쓴 후, 간만에 쓰는 일기인지라 뭐라고 써야 할까, 한참을 망설였다. 이윽고 가는 샤프심이 옅게 흔적을 남겼다. 나의 키다리 아저씨가 라고 썼다간 지우고, 사랑하는 나의 키다리 아저씨, 라고 또 썼다간 지우고, 애꿎은 지우개 가루를 몇 번이나 꽁꽁 뭉쳐내 한곳에 모으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다.* * *전 오야의 기일이었다. 따로 내려온 지시는 없었지만, 석우가 쥔 핸들은 자연스럽게 위패를 모시는 절로 향했다. 이정후의 모친이 은거하는 절이기도 했다. 죽어서라도 부인 곁에 있고 싶다는 평소 고인의 유언을 따른 결과였다. 그렇다 해도 그뿐이었다. 살아서 외면받던 이가 죽었다고 해서 외면받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사십구재를 올리던 날, 혹시나 모습을 드러낼까 기대했건만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건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정후를 시작으로 첫 향불이 완전히 재가 되어 스러지기까지, 그다음 향불도, 그다음 향불도. 조직원 수십 명이 올리는 향불이 다 타도록 그녀가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다음 기일도, 그다음 기일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남편을 끔찍하게 여겼다. 야차 같던 전 오야도 자기 부인 앞에선 순한 양처럼 굴곤 했지만, 이리가 양의 탈을 쓴다 해도 이리는 이리 아닌가. 결국 못 견딘 그녀는 기어이 속세와의 연을 끊어버렸다. 더는 물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정후에게 몸소 본을 보이고자 함이었다.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모질기만 하던 전 오야의 독기가 한풀 꺾인 건.
‘만약.’
출가하지 않았더라면, 이정후도 그녀가 바라던 대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럼 전 오야가 경계를 푸는 일도, 한밤중에 홀로 그녀를 만나러 절에 다녀오다가 기습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 그럼 끔찍해 마지 않던 이 세계에 아들이 깊이 발 담그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석우는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 흔히들 말하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이 길어졌던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목적지였다.
“너희들은 여기서 대기해.”
주변을 물리친 석우가 길을 트자 이정후가 앞섰다. 층층이 굽이쳐 도는 오래된 절 계단은 투박했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길을 더듬어 오르면 작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절간의 불은 모두 꺼진 지 오래건만, 처마 밑 작은 창 하나만이 홀로 노랗게 등불을 밝혔다. 둘의 발걸음 소리에 안쪽에서 약하게 느껴지던 기척마저 사라졌다.
“저 왔어요. 어머니.”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은 불빛이 아들을 기다렸다는 증거이건만, 오늘도 끝내 얼굴을 마주하진 않을 모양이다. 숨 막히는 정적. 풀벌레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숨을 죽이고 있는 모양이다. 얇은 창호지 문살을 사이에 두고 모자는 무슨 언어를 나누고 있을까.
“올해도 연등이 밝네요.”
대답 없는 안쪽을 향해 정후가 조용히 운을 띄웠다. 서글픈 미소가 걸린 낯이 몹시도 씁쓸해 보였다.
“연등이.”
“…….”
“연등이 밝아요. 어머니.”
연등이 밝다는 말에 흐느낌이 응답처럼 들려왔다. 필시 회색 법복에 온통 방울방울 짙은 눈물 자국이 번지고 있을 게다.
– 중생을 구원하기 전에 저와 아버지부터 구하셨어야죠.
– 네, 제 안에 그것이 켜졌습니다. 끌 수도 없고, 끌 생각도 없어요.
– 업보? 하! 이미 내가 몸담은 여기가 아비지옥이에요, 어머니.
몇 년 전, 나림동의 큰 불로 생목숨들이 어이없게 져버린 날, 잔뜩 뒤틀린 눈빛을 하고서 그 눈빛만큼 비틀린 말들을 서로 내뱉었던가. 훨씬 전부터 스스로 세상을 끊어낸 정후의 어머니는, 그나마도 제 속에서 나온 자식이 홍등가를 모두 불태운 이후로는 지금껏 옷자락조차 드러내질 않고 있다.
흐느낌 소리가 잦아진 후에도 한참을 말없이 대웅전 처마를 지나 점점이 걸린 연등을 눈에 담던 정후의 발걸음이 돌아섰다. 부러 터벅터벅 돌계단을 딛는 발뒤꿈치를 석우가 조용히 따랐다.
몇 년 전, 제 어머니와 언성을 높이고 내려가던 길, 그가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해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석우는 그날 밤을 떠올리곤 했다. 평소 과묵한 정후가 그답지 않게 유난히 말이 많았던 그 어둠 속을.
‘아비지옥을 알아?’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괴로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옥이야. 그래서 무간지옥이라고도…… 바늘이 온몸을 뚫어 피가 말라버린다지. 산채로 가죽을 벗겨서 불에 넣는다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
‘죽지도 못해.’
피식 웃던 이정후.
‘항상 세상을 비추는 연등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연등. 그래, 연등. 그런데 말이야.’
사실은, 사람들은, 연등이 아니라, 홍등을 품고 있다고. 저마다 가슴속에 금기를 묻어두고 산다고.
‘……켜지지 않기를 빌었어.’
잠시 뜸을 들이다 쓰게 뱉은 세 단어를 끝으로 굳게 다물렸던 입술. 그날 밤부터였던 것 같다. 찔러야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정후를 두고 치고 있던 벽을 허물어버리고 더 열심히 모시겠다고 석우가 결심했던 건.* * *동트기 전, 만물이 고요함에 잠긴 시각, 제 속처럼 어두운 길을 뚫고 본가로 도착했다. 넥타이를 풀면서 문고리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침대에 윤희가 없다.
‘어디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는 찰나 조금 더 안쪽 탁자에 팔을 괴고 엎드린 푸른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비스듬히 놓인 작은 노트와 샤프도.
천천히 적힌 것을 읽었다.
‘Dear, my Ange noir’
한 장씩 넘기며 대강 훑어보니 그날그날의 일과 들이 다양하게 적혀있지만, 맨 위에 쓰인 네 단어만큼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물끄러미 상단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다 석우에게 전화했다.
– 석우?
– 네. 말씀하십시오.
– 새 상호명, Ange noir로 해.
– 네?
– 불어야. 타락 천사. 악마라는 뜻도 있고.
전화를 끊은 후 다시 윤희에게 다가가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푸른 새벽처럼 계집도 희미하게 눈을 떴다.
“잠은 침대에서 자야지.”
가만히 뺨을 쓰다듬자 잠결에도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잘 보이진 않지만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틀림없다. 정후를 볼 때마다 수줍어서 어쩔 줄을 모르니. 그런 만큼 자신을 악마라고 칭한 건 의외였다. 무슨 의도로 그렇게 부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적절한 별명 같다.
‘나도 하나 붙여줘야 하나.’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너는.’
내 홍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