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3
03
등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승수는 제게 손가락질하는 놈들이 몇인지 셀 수 있다. 오늘은 다섯이다.
‘야, 쟤 또 저기로 간다.’
‘냅둬. 자기 아버지 직장이잖아.’
‘직장이 시발, 그것도 직장이라고.’
킬킬대며 비웃는 소리를 뒤로하고 하나둘씩 홍등이 켜지기 시작한 거리로 들어섰다. 학교에서 주택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나림동 한가운데에 자리한 이 홍등가를 지나는 것이지만, 열에 아홉은 그냥 먼 길을 빙 돌아가곤 했다. 승수만이 늘 거리낌 없이 붉은 불빛 사이로 들어섰다.
“아따, 이게 누구여! 아들 왔는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던 춘재가 승수를 보고 반색했다.
“네.”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아버지라는 것은 훨씬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서 주워들어 알고 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생부가 아니라는 건 거울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춘재의 길쭉한 얼굴과 자신의 동그란 얼굴엔 닮은 구석이라곤 없기에.
그래도 승수는 춘재가 좋았다. 요란한 분칠을 하고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밖으로 나돌기 바쁜 생모보다는 숙제는 잘했는지, 학교에서 괴롭히는 애들은 없는지, 급식 반찬은 마음에 들었는지, 꼬박꼬박 관심 갖고 물어주는 춘재가 훨씬 친부모의 그것에 가까웠다.
“오늘 공부 열심히 혔어?”
“네.”
심드렁하게 답했다. 가만히 앉아서 책만 들여다보는 건 좀이 쑤셨다. 춘재가 제게 거는 기대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가고 회사원이 되는 것이란 걸 잘 알지만, 공부는 제 길이 아니라는 건 진즉 알아챘다. 지루한 학교보다는 생기 넘치는 이쪽이 더 끌린달까.
또래들이 저를 창녀의 아들이라고 부르건 기둥서방의 아들이라고 부르건 상관 없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살갑게 챙겨주는 춘재가 좋았기에,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춘재의 삶도 나름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같은 길을 걷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기회가 된다면 언젠간 저도 조직에 몸담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아닐까? 그런데 승수의 예상보다 그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 *“단속은 잘하고 있고?”
단속이라 함은 입단속을 의미했다. 정후가 윤희를 데려가고 나서 석우와 몇몇 조직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홍등가의 개처럼 부려지던 작은 여자아이의 소식을 모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다면 어디에 있는지.
“네, 뭐. 거의.”
“거의라니?”
홍등가에서 윤희는 이미 세상엔 없는 사람이었다. 몇 번 포주가 그게 정말이냐고 은근슬쩍 석우를 떠보려 했으나 그쯤이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밤마다 윤희를 끼고 자는 정후 덕에 한구석에 가만히 똬리를 틀고 기회만 엿보던 어두운 소문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이쪽 세계에서야 계집 한둘쯤이야 예사로 끼고 사는걸.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졌을 일일 테지만, 그러기엔 홍등가의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건너편 청룡파와 비교되어 수익이 떨어지는 판에, 정부에서는 연일 창녀촌 단속 선언과 함께 해체 일자를 공표하며 밤마다 순찰을 강화했다. 여기에 나림동 일대에 곧 재개발 바람이 불 것이라는 떠도는 이야기도 뒤숭숭한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정후도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아니, 자신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의라니?’하며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고 있다.
“그것이, 궁금증이 많은가 봅니다. 아시다시피 보는 눈이…….”
흐릿하게 말끝을 사리며 정후에게 동의를 구했다. 다행히도 그런 석우에게 정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불화의 싹은 미리 잘라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야 그렇죠…… 네?”
무심코 따라 끄덕이다 깜짝 놀라 되물었다. 불화의 싹이 가리키는 바도 그렇지만, 잘라버리라니 무슨 뜻일까.
“대릉에서 지금 컨택이 들어왔어. 최고가야. 빨리 정리해주길 바라나 봐.”
나림동이 재개발 될 것이라는 소문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미 주변에 유흥 상권이 자리 잡은 데다 도심 중앙에 있어 접근성도 좋았다. 정부의 단속 계획을 틈타 은근히 부지를 매입하려는 물밑작업이 계속 진행되는 상태였는데, 이번에 비로소 제안을 수락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읽어봐.”
매입 조건이 적힌 서류였다. 그동안 들어왔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높은 가격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떤 조건에도 끄떡없던 석우도 마음이 동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는데요.”
“동감이야. 그럼 나림동은 이번 주 내로 알아서 처리해.”
잡음 없도록. 나지막이 덧붙인 말의 행간을 읽지 못한 석우가 허둥댔다.
“이번 주라면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이사도 시켜야 하고, 새로 옮길 곳도 알아봐야 하고.”
“……잡음 없이 하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딸깍딸깍.
“…….”
거슬리는 쇳소리에 무심코 바라보니 정후의 손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금속 라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뜻을 알아차린 석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겁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문을 나섰다.
며칠 후, 유난히 햇볕이 쨍하게 비추던 어느 목요일 오전, 나림동의 한구석에서 불길이 거세게 치솟기 시작했다. 홍등가의 이쪽 입구부터 저쪽 출구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화마는 이제 막 새벽의 고단함을 누르고 잠든 영혼들을 남김없이 집어삼켜버렸다.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화염은 기민하게 깨어난 몇몇이 울부짖으며 토해내는 숨의 틈마저 파고 들어갔다. 마침내 홍등가의 입 있는 자들은 모두 뜨거운 응어리만 간직한 채 영원을 달리하고 말았다.* * *“부르셨어요.”
“승수 너 이번에 고등학교 올라가지?”
“네.”
“이번에 네가 맡아줄 일이 생겼는데.”
“뭔데요.”
“…….”
쏘아붙이는 말투와 퉁명스러운 기색에 석우가 승수를 새삼 다시 보았다. 승수는 몇 년 전 나림동의 절반을 집어삼킨 화재로 피 섞인 모친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친, 양쪽을 모두 다 잃고 혼자가 되어버렸다. 빈소에서 말없이 울음만 삼킬 때는 그저 어린 소년에 불과했는데, 언제 이렇게 장성했나. 부쩍 깊어진 눈빛에 거친 기운이 감돌았다.
“무슨 일인가 하면…….”
석우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승수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다니는 고등학교에 ‘그 계집’이 전학 온다고 했다. 어느 누구와도 말 섞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 승수의 역할이란다.
‘잘만하면…….’
‘그 날’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싸고돌던 계집을 제가 맡게 되다니, 비로소 운명의 여신이 제게 손을 흔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석우는 한사코 그 당시 승수의 어머니, 양연심이 화재현장에 있었던 것은 우연한 사고였다고 하지만, 어딘지 미심쩍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록 매일 밤 같이 밖으로 나도는 그녀였지만, 저를 키우면서 춘재의 성화 때문에 홍등가엔 거의 발걸음을 끊다시피 했었다. 어쩌다 놀러 간다 하더라도 한참 영업할 시간인 늦은 저녁 시간이었지 홍등이 새벽빛에 옅어질 때 갔던 적은 단언컨대 승수의 기억 속엔 단 한 번도 없었다. 꽤 의외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날의 대화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 무슨 일이에요?
– 잠깐 와보라는데. 뭔 일이 생겼나.
– 일이요?
– 그러게. 이상타.
평소 아침잠이 많아 승수가 학교 갈 채비를 하느라 부스럭거려도 좀체 눈을 뜨지 않는 연심이 갸웃거리며 집을 나설 준비를 하던 그 날 아침.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양치질을 하면서 뭉개지는 발음으로 안녕히 다녀오시라고 배웅했는데,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으면 좀 더 깍듯했어야 했다고, 성의 없이 양치질 따위나 하면서 우물거리는 인사가 아니라, 잘 다녀오시라고, 마음을 다해서 인사했어야 했다고, 부질없는 자책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내내 승수를 괴롭혔다.
“지켜보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하고. 잘 할 수 있지?”
“네.”
대강 지시사항을 전달 받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승수는 늘 생각해오던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나림동의 절반을 날려버릴 정도의 불길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일까. 항간에는 청룡파의 소행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지만, 연심을 떠나보내던 그 날 아침의 정황상 청룡파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고황파의 ‘누군가’일 텐데.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언제나 남는 사람은 단 한명이었다.
‘이정후.’
그렇게 답을 내리고 나면, 언제나 강력한 물음이 뒤이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단서는 역시…….’
강윤희. 그 계집뿐이다.* * *“다음 주부턴 학교에 다니게 될 거야.”
“학교요?”
“응, 윤희야,”
윤희야, 하고 다정스레 불러주는 목소리와 눈빛에 그만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다. 그 바람에 학교에 다니게 될 거란 얘기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다른 사람하곤.”
말하지 마, 웃어주지도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왜요?”
“질투 나니까.”
그런 건 나한테만 하는 거야.
질투. 발음할 때 입술이 동그랗게 내밀어지는 것이 참 예쁜 단어라고, 별것 아닌 두 단어가 온통 머릿속을 토옥토옥 헤집고 돌아다녔다. 단지 그가 제게 해준 말이라는 이유로.
그나저나 학교라니. 뒤늦게 겁이 났다. 접해보지 못한 것엔 늘 두려움이 앞선다. 지금까진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지 완벽하게 다 잘해왔는데. 새로운 곳에 가서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할 것 없어.”
겁먹은 눈초리를 알아보았는지 정후가 어깨를 다독였다.
“다 잘 될 테니.”
무엇이 잘 된다는 것일까. 당장은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인다. 그래, 잘하면 될 거야. 그가 말한 대로 말하지 않고, 웃지 않고, 마주치지 않고 그렇게.
어차피 윤희가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은 그를 제외하곤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모두 자신을 그렇게 대했었다. 발레 교습을 오갈 때 데려와 주고 데려가 주던 아저씨들이나, 가정교사나, 피아노 레슨 때나, 미술 선생님이나 모두. 제 할 일만 하고 나면 마치 그녀를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곤 했었다. 학교에 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않을까.
“교복 입은 모습, 기대돼.”
“…….”
“분명히 학교에서 제일 예쁠 거야.”
다정하게 쓸어주는 손길에 걱정 같은 건 어느새 저 멀리 사라졌다. 대신 묘한 두근거림이 자리 잡았다.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돌아오는 그 날마다 아랫배를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손,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나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가벼운 손길, 잘 될 거라고 어깨를 토닥거리는 부드러운 움직임.
세상의 다른 모든 손길들도 이렇게 불에 덴 듯 뜨거울까. 화끈거리는 볼을 들킬까 얼른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