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801)
헌터클럽 796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하,이 아저씨 보게? 돈이 없어? 누구는 땅 파서 돈 빌려주는 줄 알 아? 남의 귀한 돈 빌려갔으면 재깍 재깍 갚아야 할 거 아냐!’
‘갑자기 저희 애 병세가 나빠져서……
‘씨팔! 또, 또,또 핑계 댄다! 사정 이 딱해서 좋게 대해주니까 아주 변명이 입에 붙어서는……! 누군 핑계 없는 줄 알아? 이래서 봐주고,저래 서 봐주면,우린 뭐 먹고 살라고? 최소한 이자는 내야 할 거 아냐! 그 놈의 병 걸린 애새끼가 무슨 만능 방패라도 되는 줄 알아? 앙!’
‘이달 말까지만 …… 이달 말까지만 말미를 주세요!’
‘어이, 아줌마! 아줌마도 똑같아. 돈을 빌려갔으면 밖에 나가서 한 푼 이라도 더 벌어올 생각을 해야지, 애새끼 아프다고 방에만 죽치고 있 으면 뭘 어쩌자고? 안 그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병풍처럼 둘러선 증오스런 얼굴들.
멋대로 쳐들어온 왈패들이 제집인 양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언제나 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일상처럼 그 광경을 바라보 며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진 나 자신.
당신들께서 왜 머리를 숙이는 겁니 까? 죄라도 지었습니까? 예? 죄라도 지었냐구요!
마음속으로 수백 번,수천 번 부르 짖었던 말이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늘 염치없이 숙이기만 하는 부모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평생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게 살아왔던 두 분이 왜 한낱 왈패들 따위에게 엎드려 빌 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나다. 천형을 앓고 있는 못난 아들 때문이다.
난치성 심장질환.
말이 난치(難治)지,실상 불치(不治)나 다름없는 병이다. 유수의 의사들도 몇 번 검진해보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던 저주받을 질병 이다.
그러나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안 된다고,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을 때에도 어 떻게든 못난 아들을 살려보고자 사 방팔방으로 수소문하며 방도를 찾았다. 양의사는 물론이고 한방과 점쟁 이,굿까지 벌어가며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자 했다.
밑빠진 독에 물을 쏟아붓듯 돈을 써댔으니,당연히 가산이 남아날리가 없다. 그럭저럭 유복했던 가정은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풍비박산 났고,일가족이 시골 헛간만도 못한 단칸방으로 쫓겨났다. 더 이상 수중에 가진 게 없었던 부모는 결국 사채까지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 시작된 지옥 같은 나날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매일매일 찾아와 윽박지르는 건달들과,그런 그들의 앞에 엎드려 비는 부모,그 비참한 모습을 알고 있 음에도 모른 체해야만 하는 자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는 병.
하루에도 몇 번씩 나쁜 생각이 들 었다. 차라리 일찍 죽었더라면……
구질구질한 목숨 연명치 않고 빨리 끊어버렸다면 자신도,부모도 이렇 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창 밖 아래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기회가 찾아왔다.
천사처럼 나타난 그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저주 받을 천형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 다고 했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힘 을 가질 수 있다고도 했다.
단,부모와는 이별이다. 부모뿐 아 니라,이 세상과도 영영 작별이라고 했다.
당연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평생 나만을 위해 살아오신 분들이 다. 쌓아놓은 명예도,재산도 모두 내팽개치고 못난 아들놈 하나 살리 겠다고 생지옥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분들을 저버리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난 다니.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분들의 삶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갈등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대신 그에게 조건을 걸었다. 잠깐 만 말미를 달라고. 가기 전에 부모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쾌히 승낙했다.
나는 모처럼 병실을 나와 차에 몸 을 실었다. 급한 마음에 직접 운전 대를 잡았다.
여느 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였다.
그날 밤, 나는 다시없을 악연과 얼 굴을 마주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배를 뒤집은 개구리처럼 대 (大) 자로 뻗어있던 김정인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식도를 타고 넘어 오는 화끈한 기운에 꼽추처럼 몸을 굽혔다.
“크허어어억……!”
걸쭉하게 쏟아낸 핏물이 바닥에 흥건한 웅덩이를 이룬다. 정전되어 새 까매진 머릿속에 아련한 의문이 감돌았다.
‘갑자기 왜 그때의 일이 생각난 거 지?’
‘이 멍청한!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텐가!’
왕왕 울리는 욘의 고함성은 이제 들리지도 않았다. 또다시 쿨럭쿨럭 피를 토한 김정인은 간신히 일으킨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붉은 칠이라도 한 것처럼 온통 새빨간 것이,눈에 피 눈물이라도 괸 듯했다.
콱 막힌 울혈 때문인지 호흡이 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써 한 손을 들어 올린 김정인은 갑갑하게 꽉 막힌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반쯤 기능을 상실한 심장의 맥동은 현저 히 둔해져 있었다.
‘이게…… 주마등이란 건가……
‘김정인!’
갑작스레 되살아난 기억 속에서 볼 수 있었던,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부모의 얼굴.
‘날…… 저주하시겠지……
그가 스퀘어로 넘어온 이후,남겨 진 부모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이 숨쉬기조차 괴로운 생지옥 속에서 희망의 끊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무엇보다 소중한 아들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 다. 일언반구조차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남은 건 노쇠한 몸과 산같은 빚 더미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 무리 생각해도 절대 좋은 결말은 아닐 테니까.
‘속죄하려고 했는데……
신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고혈을 빨아먹는 거머리들이 활개 치지 않는,부모 같은 사람들이 더는 없는 그런 세상.
물론 그런다고 다른 세상에 있는 부모가 알아줄 리 없다. 하나 그렇 게라도 해야 마음의 짐이 덜어질 것 만 같았다.
오직 그것만을 이루기 위해 살았 고,목표를 위해 처자식까지 등한시 했다. 마지막에는 꿋꿋이 지켜왔던 자존심과 긍지까지 내던졌다.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다. 목표 까지는 정말 코앞. 서부만 제압하면 모든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가 원망스럽냐?”
감정으로 응어리진 눈초리가 정면을 향한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눈빛이 오연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난 것일까. 불씨가 다 꺼져 무너지는 육체이건만,김정인은 가까스로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저 눈빛,한심스러워 어쩔 줄 모르 겠다는 저 눈빛이 견딜 수 없을 만 큼 짜증났다.
덤으로 얹혀온 주제에. 이렇다 할 목적의식도 없는 주제에……. 자신 이 얼마나 큰 짐을 짊어져야만 했는 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 저 남자를 미치도록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이젠 정말…… 아무래도 괜찮았다.
저 남자. 저 남자만 죽일 수 있다 면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아치우리 라.
‘……마지막이다. 결정해라.’
차갑게 끼어드는 욘의 목소리와 함께,넝마가 된 육신이 일신했다.
..
유령처럼 신음하는 그의 눈가에 시퍼런 독기가 감돌았다. 피딱지가 내 려앉은 손아귀에 다시 한 번 새하얀 빛의 검이 돋아났다.
그것을 본 노구덕은 끌끌 혀를 찼 다.
“헛똑똑이구나.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모르겠냐? 해봤자 안 돼. 넌 날 이길 수 없어.”
“노구덕,기고만장하지 마라.”
찰랑거리며 뿜어진 등 뒤의 서광이 마치 한 쌍의 날개처럼 보였다.
천사가 강림한 듯 장엄한 광경이었 지만,노구덕은 피식 입매를 터뜨리며 조소했다.
“박쥐같은 놈이 이제 와서 천사 흉내라도 낼 셈이냐? 욘,네놈이 기어 나온들 달라질 건 없다.”
“고작해야 인간 따위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치켜든 광검(光劍)에서 눈부신 빛이 레이저처럼 폭사했다. 대지를 가로지른 굵은 섬광은 지면에 거대한 고랑을 만들며 노구덕의 육신을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현신한 욘의 공세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비로소 김정인의 육신을 차지한 욘은 이 기회에 그간 쌓인 분을 모조리 풀어버리겠다는 듯, 우리에서 풀려난 짐승처럼 포효했다.
“너! 네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다!
내가 일군 이 세계를 무너뜨렸어! 그 죄는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다!”
펄쩍 상공으로 날아오른 검신의 살 기가 일대를 뒤덮는다. 무시무시한 분노로 점철된 눈길이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는 인간들을 훑어 내렸다.
천신처럼 태양을 떠받친 욘의 입매 가 사납게 씰룩였다. 노구덕을 보다 개미 발톱만도 못한 버러지들을 보 니 더욱 울화통이 치밀었다.
욘은 다짐했다. 노구덕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기로.
멸하리라. 그놈과 관계된 것들은 모조리 박멸하리라!
“전부 없애 버리겠다! 저 도시와 이 아래에 있는 버러지들 전부! 후에 만들어질 신세계에 너희 버러지 들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다!”
광포한 선언과 함께,그가 등지고 있던 태양이 폭발했다.
무럭무럭 크기를 더해가던 서광이 폭죽처럼 터져나가며 천지를 온통 새하얗게 물들였다. 평야와 산맥을 넘어,저 멀리 제네시스까지 영역을 뻗친 빛무리는 이내 거센 폭우가 되 어 지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누리를 에워싼 찬연한 빛의 폭포.
얼핏 보기엔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요,신의 자비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지만,그 아래의 사람들이 느끼기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조금 전 욘이 발했던 무자비한 살기는 명백히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때 아닌 날벼락을 맞게 된 사람들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아연실색했다.
“하늘이 무너진다……!”
“피,피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고함은 혼란에 빠진 군중에 절망만을 더해주었다.
피하다니?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다. 하늘과 땅을 뒤덮은 빛의 세례를 어떻게 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전부 물 먹은 솜처럼 탈진한 상황에서.
“거,검신이시여!”
“왜 우리까지……!”
노구덕과 그 동류,즉 인간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욘의 화풀이는 레그나토르와 리베르타를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도망치려 해도 발이 굳어 움직이지 않고,살려 달라 빌고 싶어도 맥이 빠진 목에선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신을 찾으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분노가 덮쳐오는 가운데서 신을 찾는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모순된 일이다.
물론,이 자리에 있는 신이 한 명 일때의 얘기지만.
“아니?”
자신이 만든 종말의 현장을 흡족하게 내려다보던 욘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역류(逆流) 한다.
지상을 새빨갛게 물들일 빛의 폭우 가,마치 누가 억지로 잡아당긴 것처럼 방향을 바꾸어 위로 치솟고 있었다.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처럼 역류하는 빛무리를 멍하니 보고 있던 욘의 머리가 퍼뜩 위로 쳐들렸다.
이후,하늘에 뚫린 거대한 천공(券 孔)을 발견한 그의 턱이 쇄골에 걸릴 듯이 늘어졌다.
“저,저건……!”
갑자기 하늘이 왜 이렇게 어두워졌나 했더니,그게 아니었다.
저건 먹구름이 아니라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무지막지한 심연이었다. 한 점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광활한 블랙홀이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별무리를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저럴 수가……!”
벌어진 욘의 턱이 바르르 경련했다.
이럴 순 없었다. 저토록 정교한 인력(引大)의 조절이라니…….
설령 발레기우스가 재림한다하더라도 저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지상에는 티끌만 한 영향도 행사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을 쏙 빨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때,멍해 빠진 귓전으로 고드름 같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놀랐나? 별거 아냐. 익숙해지니까 되더군.”
“퀘액!”
눈앞이 번쩍 뒤흔들리는가 싶더니, 두개골이 빠개질 듯한 통증이 뒤따랐다. 불시에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욘은 어쩔 새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 했다.
안면을 정통으로 지면에 처박은 욘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마가 깨져 철철 피가 흘러내렸지만,찢어질 듯 부릅뜬 눈은 고통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노구더어어억—!”
“말했지? 너희들은 날 이길 수 없다고.”
장승처럼 우뚝 선 노구덕은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제야 그를 발견한 욘은 급히 숨을 들이켜며 물러났다.
“우우우우……!”
끓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치는 욘의 민낯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감돌았다.
비로소 실감한 것이다. 노구덕이 발레기우스의 화신체가 아니라는 것을. 그와 자신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힘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어떻게……?”
“먹어치웠다.”
“먹어치웠다고? 발레기우스를 먹어 치웠단 말이냐?”
“그래. 이젠 네놈 차례지.”
“으헉!”
성큼 가까워지는 초록색 형체를 본욘은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신을 먹어치웠다는 노구덕의 말은 지금껏 죽음을 경험한 적 없었던 욘을 단숨에 패닉으로 몰아넣었다.
의식을 자각한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
지금 욘의 상태는 최초로 불의 뜨거움을 안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죽고 싶지 않다는,노구덕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저 우악스런 손에 잡히면 그대로 죽고 만다. 발레기우스처럼 자신 또 한 흔적도 없이 잡아먹히고 말 것이 다.
‘도,도망쳐야……!’
“끄아아아악!”
슬금슬금 기회를 엿보던 욘은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유령처럼 나타난 노구덕의 손이 고삐를 잡아채듯 그의 목줄을 틀어쥐었기 때문 이다.
염라대왕 같은 노구덕의 눈빛과 마주한 순간,욘의 사고는 그대로 정지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꽤애애액 비명을 내지른 욘의 머리가 삶은 문어대가리처럼 축 늘어졌다. 천신의 신광을 내뿜던 눈도 본래의 혼탁한 색으로 돌아갔다.
물리적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몸의 통제권을 도로 김정인에게 넘기고 의식 저편으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참으로 집요한 생존 본능이었다.
“허,그새 도망갔나. 소용없는 짓을 하는군.”
“으웃……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린 노구덕의 시선이 미약하게 신음하는 김정인을 향했다.
욘이 도망갔으니,그 빈자리를 대신한 건 당연히 본래 주인인 김정인의 의식이다. 아마 본인으로서는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네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구나.”
“……”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어. 그렇지?”
먹살을 잡힌 김정인은 그저 가는대로 힘없이 머리를 흔들 뿐,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쩌면 입을 열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일지도.
욘과의 빙의가 풀려 버린 그의 육신은 이제 화력이 다한 백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말라비틀어진 바게트처럼 푸석푸석했고,잔주름 가득한 얼굴 또한 쉬어터진 밥알처럼 누렇게 뜬 채다.
꼬부랑 할아버지처럼 변한 그의 몰골은 실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설사…… 입을 열 힘이 남아 있었더라도 딱히 할 말은 없으리라.
완패(完敗). 지독할 정도로 뼈아픈 완패를 당했으니까.
승패를 판가름하는 게 무안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격차였다.
그러나 노구덕은 고작 이 정도의 완승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김정인의 멱살을 틀어쥔 그의 몸이 천천히 위를 향해 부상했다. 높이 날아오른 노구덕은 시체처럼 늘어진 검신의 몸을 바깥쪽을 향해 내돌렸다.
“자,봐라. 저들이 널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생기 잃은 검신의 눈길이 아래를 훌는다. 방금 전,하마터면 그로 빙의한 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했던 리베르타의 진영이었다.
마침,그들 또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패했어…”
“졌잖아……?”
허탈한 울림과 함께,달그락 손에 쥔 무기가 떨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격정의 파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냐. 바,방금 전…… 우릴 죽이려고 했잖아?”
“생사고락을 함께한 우리를 버렸어!”
“저딴 게 무슨 신이야!”
철옹성처럼 굳건하던 신앙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소리였다.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충격이,무패의 검신이 형편없이 두들겨 맞으며 패배하는 광경이 신도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자숙하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패배를 입에 담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참하겠다!”
김상목 등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휘관들이 술렁거리는 진영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지만,이미 뚫려버린 제방을 도로 틀어막기엔 너무나도 무력한 움직임이었다.
말없이 지상을 내려다보던 김정인의 머리가 힘없이 삐걱거렸다. 동시에,터진 입술로부터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기음이 새어 나왔다.
“……잔인하시군요.”
“추락은 언제나 잔인한 법이지.”
“절 놀림거리로 삼을 생각입니까?”
“그것도 괜찮겠어. 죽은 뒤에 효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쿡쿡……”
어느덧 사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해져 있었다. 지휘관들의 엄포에 억지로 침묵에 빠져든 리베르타와, 노구덕의 신위에 거듭하여 놀라움을 삼킨 레그나토르의 모두가 해바라기처럼 두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문득,하릴없이 눈을 굴리던 김정인의 동공이 레그나토르 진영 속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섰다.
무척 낯익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윤희지…… 그녀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그의 지시로 가두었던 그녀 가 어느 틈엔가 탈출하여 레그나토르의 진영에 섞여 있었다.
그 옆으로 아가레스트와 소피아, 소냐의 찌를 듯한 시선도 느껴졌다.
아마도 안개여왕 아가레스트의 작품이리라. 어렵지 않게 전후사정을 짐작한 김정인의 잇새가 악다물렸 다.
뭔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아가레스트,소냐,소피아,데모나……. 그토록 많은 인재들이 어째서 레그나토르에만 있는 것인지. 왜 자신에겐 저런 인재들이 따르질 않았는지.
불현듯 치민 불만은 어린애 같은 투정이 되어 목구멍 밖으로 새어 나왔다.
“……좋으시겠습니다. 인복이 많으셔서요.”
비꼬는 기가 다분한 그 말을 들은 노구덕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어처구니없다 못해 경멸이 어린 표정이었다.
“이 멍청한 자식.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제 말이 틀렸습니까? 형님 곁엔……. 컥!”
빡! 갑작스런 박치기에 당한 김정인의 얼굴이 핏물을 흩뿌리며 뒤로 홱 젖혀졌다.
공룡보다 더 단단한 노구덕의 이마를 정통으로 받아냈으니,그 얼굴이 성할 리 없다. 겨우 재건되었던 코뼈가 다시 함몰된 것은 물론이고, 뭉그러져 벌어진 입 안에선 깨지고 부러진 이빨들이 피거품과 함께 뒤 섞여 춤을 추었다.
언제 이렇게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맞아본 적이 있었던가. 울컥 피를 게워낸 김정인은 치가 떨리는 고통에 끅끅거리는 신음성을 냈다.
그러나 그를 내려다보는 노구덕의 눈빛에선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아주 지랄을 떠는구나. 갈 때까지 간 줄은 알았지만,마지막까지 이렇게 막장일 줄 이야.”
“크……!”
“김정인하면 똥고집에 쇠심줄 아니었냐? 평생을 독불장군처럼 살아온 놈이 이제 와서 어쩌고 어째? 인복 이 많아서 좋겠다고? 네 개짓거리로 실패했으면 순순히 인정할 줄 알아야지,여태껏 널 믿고 따른 부하들을 병신으로 만들어?”
“이…… 자식……!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알지 못한다고? 그럼 저 김 상목은 뭐냐? 저만한 충성심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지. 다른 놈들도 그래. 너 하나만을 믿고 여기 까지 왔다. 널 구하겠다는 일념 하 나만으로 되도 않는 싸움에 끼어 든 크라벨은? 그들 모두가 바보천치였다는 말이냐?”
먹살을 잡은 손에 불쑥 힘이 들어가자,그렇잖아도 괴로워하던 김정인의 낯에 핏기가 가신다.
“끄르륵……!”
고통에 발버둥치는 김정인을 노려보던 노구덕은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을 그의 눈앞에 바짝 들이댔다. 지저에서 뛰쳐나온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과 마주한 김정인의 안색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인복이 없다? 염치가 조금이나마 있으면 네가 그런 말을 해선 안되지. 말 나온 김에 하나 얘기해 줄까?”
“으. 으…….”
“우리 싸움에 끼어들었던 이진주 말이다. 사실 그때 이미 죽은 몸이었어. 오는 도중에 발레기우스에게 잡혀 카름으로 개조당한 상태였지. 그래서 시체가 없었던 거야. 발레기우스,그놈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그 몸도 같이 사라졌거든.”
“……!”
생각지도 못한 폭로에,두려음으로 흔들리던 김정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우리가 자멸하는 걸 보고 싶었던 발레기우스는 이진주를 냉큼 첨탑에 들여보냈지. 그런데 이진주,그 소심 한 녀석이 답지 않게 거기서 조건을 걸었어.”
조건? 죽어서 카름으로 되살아난 그녀가 조건을 걸었다고?
“우리가 싸우는 과정을 모조리 영상수정에 담은 거지. 네 치부가 담긴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거야.”
믿지 못할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 진주의 사체 안에는 그런 물건이 하 나도 없었으니까.
“……그런 건,없었는데……!”
“없었지. 그때 이미 그 수정은 윤희지에게 전해졌거든.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발레기우스…… 아니,이 진주의 잔념이 충실히 마지막 역할을 수행한 거지.”
충격에 빠져 있던 김정인은 간신히 기억을 되살렸다. 최후의 순간,음험하게 메아리치던 발레기우스의 웃음소리를.
‘그게 그런 의미였나……!’
“이진주. 그 녀석이 원하던 게 뭐였을 것 같나?”
김정인은 대꾸하지 못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진주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녀석은 사랑까진 바라지도 않았어. 대신,네가 자기 시체라도 수습해 주길 바랐지. 네가 만약 그 녀 석이 죽은 뒤에 조금이라도 애도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그 수정이 윤희지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을거다.
그런데 너는 어땠지?”
김정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기가 막힌 진실에 낯이 뜨거워졌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 리가 내린다고 하지. 이진주는 제대로 네 약점을 잡았다. 우리에게 누명을 씌운 네 발언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증거물을 남긴 거야. 그런 데 아직까지도 그 영상은 공개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감겼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멍 하니 틀어진 눈길이 다시 한 번 지상을 향해 내려갔다.
살벌한 적의를 발하는 레그나토르의 무리들,그 가운데서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는 윤희지가 눈에 들어왔다. 차마 그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든 듯,뒤돌아 앉아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목울대를 콱 막히게 만 들었다.
“멍청한 여자야. 그토록 원망하고, 버림받았으면서 아직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니.”
“희지 씨가……
“이래도 네가 인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침묵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활활 타오르던 감정에 찬물이 확 끼얹어진 기분이다. 차갑게 식어버 린 그의 심장은 이제 더 이상 될 의욕을 잃은 둣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허탈함? 공허함? 맥없이 그의 손에 몸을 맡긴 김정인의 표정은 어쩐 지 후련해 보였다.
짧은 시간,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수만 군대의 신망도,
십 년이 넘도록 자신을 믿고 따랐던 여인도,대륙을 호령하던 막강한 무력도…….
모두가 덧없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 졌다.
그리고 이젠,마지막 남은 하나마 저 빼앗길 차례였다.
“이제 그만 끝내자.”
“……”
김정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또,또 핑계 댄다!’
최후의 순간,그 이름 모를 깡패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니,실은 알고 있다. 한심한 스스로에게 전하는 누군가의 호통이라는 것을.
그는 더 이상 핑계대지 않기로 했다.
‘졌다.’
원죄(原罪)라 여기며 노구덕을 적대시했지만,실은 그게 아니었다. 진짜 원죄는 그 전부터 이미 ‘부모’라는 이름하에 지고 있었다. 단지 그 에 대한 열등감을 원죄라는 핑계 하 에 덮어두고 싶었을 뿐이다.
이번 패배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발레기우스의 하수인이니 뭐니 하며 비하하다,마지막엔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인복 타령을 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구차할 정도의 변명들이다.
결국,패배의 원인은 그 자신이었다. 따질 것도 없는 순수한 기량의 차이. 그 차이가 승부를 가른 거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희지 씨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피식. 노구덕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어렸다.
“싫다. 이제까지의 과오를 겨우 그 한마디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그게 아니라……
노구덕은 답지 않게 더듬거리는 김정인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무정하던 사내가, 마지막에 와서야 감정에 휩쓸려 허둥대고 있다.
윤희지가 이걸 알면 기뻐할까? 그래도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줘서?
그건 알 수 없다.
왜냐면,그녀는 아마도 평생 그의 마지막 모습을 알 일이 없을 테니까.
“괜한 미련을 남겨서 여생을 찝찝하게 보낼 필요는 없지.”
“잠깐……!”
“이만 갈 때가 됐다.”
다급히 눈을 부릅뜬 김정인의 입이 무어라 열리려는 찰나,그의 목줄을 틀어쥔 노구덕의 손에 거대한 압력이 실렸다.
우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