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802)
헌터클럽 797화
220. 에필로그
노구덕은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가칠가칠한 질감으로 덮여 있는 녹색의 손.
솥뚜껑만 한 크기에 마디가 뭉툭한 손가락,두꺼운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인 손은 고된 세월의 잔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남들의 배는 되어 보이는 손바닥을 가만히 응시하는 노구덕의 눈빛이 아련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굳건한 손아귀는 여느 때와 다를게 없었지만,그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손의 외양이 아니라 그 표피 세포 하나하나에 남아 있는 감촉이었다.
검신 김정인.
그의 목을 손수 부러뜨렸을 때의 감촉이 불과 몇 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생생했다.
‘보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군.’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하다.
살아 있을 때는 그토록 없애 버리고 싶었는데,막상 그가 죽어 사라지니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이 느껴진다. 앓던 이가 빠진 시원함도 잠시뿐,요즘엔 이따금 김정인 같은 상대가 그리웠다.
모든 걸 다 바쳐 싸울 수 있는 숙적의 존재란 그런 것이다.
최고 난이도의 게임을 마침내 클리어하고 더 이상 이룰 업적이 없을 때의 기분이 이러할까?
‘너무 쉽게 끝났지.’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마지막 싸움을 복기한 노구덕의 입가에 고소가 떠올랐다.
그만한 상대와 싸우고서 ‘쉬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입에 담는 자신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 탓이다.
물론 김정인의 무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중간에 끼어들어 그의 육체를 차지한 욘의 힘도 무시무시했다.
특히,마지막 제네시스 상공을 뒤 덮은 신벌(神罰)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제네시스 일대가 통째로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수십만이 넘는 목숨과 함께.
하지만 그뿐이다. 그의 무력은 결국 노구덕에게 미치지 못했다.
검신은 욘의 화신체가 되어 절대적 인 힘을 손에 넣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즉 토끼들이 보기엔 그것만으로도 항거불능의 존재였을테지만,노구덕이란 호랑이를 긴장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강함이란 이토록 상대적인 척도다.
‘내가 강해진 건가,그놈이 약했던 건가? 뭐,둘 다였던 거겠지.’
발레기우스의 힘을 흡수한 노구덕이 하나의 자아를 바탕으로 안정기 에 접어들었던 것과는 달리,김정인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불안한 상태였다. 안쪽에선 욘이라는 존재 가 끊임없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 기 회를 노렸고,바깥쪽에선 생명력이 다하여 쇠잔할 대로 쇠잔한 육체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중이었으니까.
욘의 권능을 이용해 나름대로 붕괴 하는 육체를 다잡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발레기우스는 제대로 된 숙주를 손에 넣는데 수백 년이 걸렸고,노구덕은 카름과 융합하여 인간을 초월했다.
그러나 하루빨리 서부의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던 김정인에겐 그 정도의 그릇을 만들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조급함이 패배로 직결된 셈이다.
‘적이 없어서 심심하다니. 내가 이 런 팔자 좋은 푸념이나 늘어놓을 줄이야.,껄껄 실소를 터뜨린 노구덕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손바닥을 훑었다.
“흠……. 그래도 여흥거리는 남겨 두었으니까. 그렇지?”
주변엔 아무도 없다. 하나 노구덕의 말투는 마치 누군가와 얘기하는 듯했다.
부르르르.
대답 대신 들려온 것은 미미한,아주 미미한 진동음이다. 파리가 날개를 떠는 듯한 그 소리는 노구덕의 펼쳐진 손바닥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가만 보니,노구덕의 차가운 시선 또한 줄곧 손바닥 위를 향하고 있었다.
빨간 구슬.
어느새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가련히 몸을 떠는 그것은 좁쌀만 한 크기의 작은 구슬이었다. 노구덕은 바로 그 구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럭저럭 지낼 만한지 모르겠구나. 익숙한 거처는 아닐 텐데.”
부르르.
입도,성대도 없으니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을리 없다. 아니,애초에 저 쌀알만 한 것이 생물체이긴 한 것인가?
하지만 구슬은 틀림없이 그의 말에 반응하고 있었다. 놀림조의 그의 말에 필사적으로 몸을 틀면서,벼룩처럼 튀어오를 듯한 기세로. 그 무의미한 떨림을 굳이 감정으로 정의하자면,‘분노’에 가까워 보였다.
“개미알이란 거다.”
담담히 말하는 노구덕. 개미알에 머문 그의 눈초리는 베일 듯이 날카로웠다.
“쉽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김정인,너 정도 되는 놈들은 죽었다고 안심할 수가 없거든. 이 정도 보험은 당연한 거지.”
무서운 이야기였다. 이미 보름 전에 죽어 제네시스 성문 앞에 효수되었던 검신 김정인. 그의 영혼이 저 좁디좁은 쌀알 안에 갇혀 있었던 것 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노구덕은 단지 그를 희롱하기 위해 개미알에 가둔 것이 아 니었다.
“네겐 아직 빼낼 것이 많이 남았다. 한 번 욘과 일체화했으니,어느 정도 그 잔념이 남아 있겠지.”
부르르르르!
개미알이 재차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그래봐야 위에서 내려다보면 미미하게 움찔대는 정도였지만.
“맘껏 원망해라. 그리고 거기서 지 켜봐라. 네가 일군 기반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네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하유라,플랑기스,이정한,발레기우스…….
앞서 그에게 패배하여 영혼을 저당잡힌 수많은 선례들과 똑같다. 한때 신격을 얻었던 김정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노구덕은 김정인의 영혼을 타락시켜 그의 모든 것을 빼낼 계획이었다. 김정인의 영혼뿐 아니라,어딘가로 도망친 욘의 잔념까지도.
그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었다.
시스템이 무너진 현재,그만의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하기 위해선 전 임자였던 욘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 했으니까. 파괴만을 일삼았던 발레기우스와 상반되는 욘의 지식은 그의 군림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줄 수단이었다.
똑똑.
“주인님, 조인식(調印式) 준비가 끝났다고 하네요.”
고른 노크 소리와 함께,소피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구덕은 펼쳐진 손아귀를 와락 움켜쥐었다. 그러자 연방 들썩이던 김정인의 개미알이 스르르 눈 녹듯이 그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혼을 다스리는 심령차력술이 지고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증거였다.
“그래,곧 나가마.”
짧게 대꾸한 노구덕은 탁탁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음험한 꿍꿍이는 혼자서 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제부터는 행복한 일상을 마음껏 만끽할 차례였다.
어두침침한 집무실을 나서니 유독 바깥의 빛이 환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피아 와 소냐의 반짝이는 미모 탓인지도.
“벌써 준비가 끝났구나. 빠르기도 하지.”
“……네. 미리미리 준비한 덕이죠. 이만 가실까요? 다들 밖에서 기다리 고 계세요.”
재촉하는 소피아의 안색은 살짝 침체되어 있었다. 평소의 활달함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얼굴이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한 번 레그나토르를 저버렸던 몸이었니까.
어쩔 수 없었고,노구덕이 개의치 않고 용서했다고는 하지만,그녀가 한때 적국으로 전향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처벌로 행정부 수반에서 노구덕의 개인비서로 지위가 심히 강등되었으나,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멍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쯔쯔.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 없는데 혼자 꽁해서는…… 차차 시간 이 해결해 주겠지.’
소피아가 스스로에게 지운 짐은 노구덕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걸 내려놓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 그로선 소피 아가 빨리 부담을 털고 본모습을 찾길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소피아만이 아니었다.
“……!”
소피아에게서 눈을 땐 노구덕의 시 선이 힐끔 그 옆의 소냐를 스쳤다. 잠깐 그와 눈이 마주친 소냐는 황망히 목을 수그렸다. 가늘고 긴 목을 자라처럼 움츠린 그녀는 어깨조차 펴지 못한 채 잔뜩 풀이 죽은 모습 이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노구덕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피아에 이은 골칫덩이 2호다.
누가 이모 조카 사이 아니랄까 봐, 이런 문제에 한해서 소심하기는 두 사람이 똑같았다.
나이답지 않게 늘 의젓하던 소냐가 저런 꼴이 된 건,다름 아닌 노구덕 자신 때문이었다.
그 시발점은 전쟁이 마무리되고 소피아와 소냐,유메르바인 등 포로로 잡혀 있던 레그나토르의 요인들과 재회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서,노구덕은 반갑게 다가오는 소냐에게 벌컥 화를 냈다. 장난식의 성화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꾸짖었다.
소냐가 그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마도왕 티렐은 스승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애초에 그가 발레기우스와 되도 않는 싸움을 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행한 일이었다. 당연히 제자인 소냐에게 남긴 유지에도 그 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소냐는 자신이 시한부라는 것을 노구덕에게 밝히지 않았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수명이 줄어든다는 사 실도 말하지 않았다.
왜? 노구덕이 그 사실을 아는 순간,자신은 전력에서 제외될 게 뻔했으니까. 그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던 소냐는 정보를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일이 아무리 잘 풀렸다고 해도 속인 건 속인 거다. 게다가 무리해서 대규모의 워프게이트를 발동시키고,일행을 탈출시키기 위해 김정인과 맞섰던 소냐의 수명은 고운 머리칼 사이로 내비치는 새치들이 말해 주듯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하여튼 크게 혼이 난 그날 이후로, 소냐는 예전의 당당함을 잃어버렸 다. 그토록 혼이 난 건 생전 처음이기도 하거니와,스스로도 노구덕을 대할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 이었다.
‘제일 비서와 제이 비서가 이 모양 이 꼴이니……. 나까지 기운이 빠지는군’
나란히 서서 침울해하는 두 사람을 일별한 노구덕은 또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휴우우우우……
움찔!
진득한 한숨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두 여인의 고개가 땅에 닿을 듯이 늘어졌다.
실수다. 아차 싶은 노구덕은 내심 혀를 찼다. 속으로 조용히 내쉬려던 한숨이 그만 입 밖으로 새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가자.”
“네에……”
“예……”
맥 빠진 지시에,맥 빠진 대답. 침울하게 늘어진 두 여인을 짐덩이처럼 주렁주렁 매단 노구덕은 질질 끌리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나아갔다.
그때 였다.
“여보,여보,여보오오오–!”
깍깍 째지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복도 저편에서 쪼그만 그림자가 두두다다 뛰어오는 게 아닌가.
“어이쿠!”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와 나비처럼 품속으로 날아든 그림자는 찰랑 이는 생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꼬맹이였다.
엉겁결에 소녀를 안아 든 노구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날을 맞이해 곱상하게 차려 입은 옷차림이 덕지덕지 묻은 밀가루로 엉 망이 된 건 둘째 치고, 동글동글하게 치뜬 비취빛 눈동자에 그렁그렁 한 눈물이 가득 괴여 있었기 때문이 다.
금덩이보다 애지중지하는 소녀의 눈물에,노구덕은 크게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흐윽…… 흐끄윽……. 여보오……”
“누구야? 누가 우리 유진이 울렸어?”
“그게,그게……. 우으윽……!”
“이럴 때가 아니지,우선 코부터 풀자. 자,흥 해봐! 흥!”
“크흥!”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딸기코를 훌쩍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진과 그런 그녀를 살살 달래는 노구덕.
“……”
가만히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소피아와 소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익숙해지려 해도,저건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 정숙한 임유진이 코찔찔이 철부지가 되어 앙앙대는 모습이나,그녀의 온갖 응석을 다 받아주며 챙겨주는 노구덕이나. 저토록 척척 장단이 잘 맞으니,그 아내에 그 남편이라는 말이 제격이었다.
“핵,핵! 왜 이렇게 빨라? 하여튼 엄마도 참! 아,아빠도 있네?”
뒤늦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이는 임가희였다.
“..나빠!”
삐죽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본 임유진은 갑자기 팩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잔뜩 토라진 모습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몰라! 말 안 할래요!”
어려졌더라도 그 고집이 어딜 가는 게 아니다. 앙중맞은 입술을 꾹 다문 임유진이 도무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자,노구덕은 임가희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뭔 일이라도 난 거냐?”
“아이 참,그게 말이죠……!”
한숨을 포옥 내쉰 임가희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말문을 열었다.
“아빠도 알다시피 왕뱀 언니가 요새 통 식욕이 없었잖아요. 에,그, 그 뭐냐…… 이상한 걸 먹고 난 뒤 부터요. 그때 기억나죠?”
“……당연히 기억나지.”
잠깐 떨떠름한 얼굴이 된 노구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있었던 사단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 난 탓이다.
그 발단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은퇴를 선언한 안개여왕 아가레스트였다.
요즈음 아가레스트는 요리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많은 취미 가운데 굳이 요리를 고른 것은,좀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이제라도 아이들 에게 충실하겠다는 그녀만의 각오였다.
문제라면,문무와 잡기까지 두루 능한 십전(十全)의 안개여왕이 아쉽게도 요리 재능까지는 갖추지 못했다는 거다.
아니,그녀의 요리 솜씨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웠다. 분명히 멀쩡한 식 자재가 그녀의 손만 거치고 나면 열흘 굶은 거지마저 토악질을 일으킬 정도로 끔찍한 물건이 되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아가레스트는 굴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던 그녀는 그 고고한 자존심마저 굽혀가며 요리 스승을 초빙했다.
천하의 안개여왕을 혹독하게 단련시켜 줄 스승은 누구였을까. 그 이름을 처음 알았을 땐,어지간한 노구덕조차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하유라를 스승으로 삼다니…… 그 고집불통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건지,원.’
두 여인 간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는 몰라도,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건,삼고초려 끝에 초빙한 그 하유라마저도 천형에 가까운 아가레스트의 음식을 구제할 수 없었다는 거다.
그리고 주방 곳곳에 지뢰처럼 자리 한 그녀의 시험작은 끝내 사고를 야기하고 말았다.
멋모르고 주방을 뒤지던 식탐덩어리가 좋다고 그걸 삼켜 버린 것이다.
‘이상한 거’를 맛본 브리트라는 곧 바로 거품을 물고 기절했고,그 소식을 접한 아가레스트도 덩달아 그 자리에서 쓰러져 한나절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검이면 검,마법이면 마법. 뭐든지 승승장구하던 그녀로선 한 분야에서 그토록 처참한 실패를 맛본 적이 없었을 테니,솔직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터다.
어쨌든,해당 사건은 노구덕이 직접 아가레스트의 주방 출입을 금하며 일단락되기는 했으나…… 그 파장은 여전히 사용인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으로 남아 은밀하게 전해지 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그게,아가레스트…… 작은 엄마가 사과의 의미로 음식을 가져왔거든요. 쩝.”
새롭게 생긴 작은 엄마가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지,살짝 입맛을 다시는 임가희였다.
“아가레스트가 음식을 직접 만들었다고?”
“아뇨,그게 아니라…… 그 하유라…… 작은…… 에이잇!”
문란한 아버지를 둔 덕에 이래저래 호칭이 꼬여 버렸다. 팍 인상을 쓴 임가희는 투덜투덜 말을 이었다.
“……그 무서운 아줌마가 만든 요리라고요. 저도 한 입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던걸요. 예전 엄마 요리가 생각날 정도로요. 솔직히 동급…… 이려나? 아,물론 예전 엄마 기준으로요.”
그때,뾰로통하게 듣고 있던 임유진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아냐! 내 게 더 맛있어!”
“……이라고 왕뱀 언니가 말한 걸, 하필이면 본인이 직접 들어버려서 저렇게 된 거죠. 뭐,저는 왕뱀 언니 평가에 동의하지만요.”
임가희의 설명을 듣고,밀가루로 엉망이 된 임유진의 옷차림을 보니 대강 전후사정이 짐작이 갔다. 요리에 대한 프라이드가 남다른 그녀인 만큼,결코 그런 발언을 흘려들을 수 없었으리라.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여보! 여보는 내가 해준게 제일 맛있지? 그치?”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득달같이 물어오는 임유진.
“그러엄.”
저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서 어떻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겠나. 노구덕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팔불출 아빠 같으니라고……’작게 종알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노구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거짓말 한마디가 어디 대수 일까.
앙앙거리는 말투나 철없는 행동거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현재 임 유진의 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신체의 성장이 빠른데다 잃어버린 기억 또한 속속 돌아오고 있었지만,그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성격이 희한하게 변해 버렸다.
예컨대 노구덕이 남편이라는 건 기억해도 자신이 어떤 아내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해 내질 못했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막연히 잘한다는 자부심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그 레시피라든가 솜씨는 제대로 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박한 평가를 들을 수밖에.
“……저,주인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아,너무 지체했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조인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여보,어디 가?”
“응,지금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지 마아.”
“금방 돌아올 테니까 가희랑 놀고 있어.”
“히잉……
시무룩하게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은 임유진을 살살 달랜 노구덕은 임가희에게 중임을 떠맡겼다.
“엄마 잘 보고 있거라.”
“나 참,애도 아니고……
“지금은 애 맞잖냐. 그리고 너도 곧 엄마가 될 텐데 뭘. 미리 경험한다 생각해라.”
불평하던 임가희의 낯빛이 별안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아빠! 그 얘기는 또 어디서……!”
“승우 녀석이 엊그제 찾아왔더라. 한 대 쥐어박아 주려다 참았다.”
“으그그그……
“나중에 얘기하자.”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종알종알 떠들던 딸아이의 입에 자물쇠를 채운 노구덕은 늦어진 걸음을 재촉하여 식장으로 향했다.
주인공이 느지막이 등장한 대전 내부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붐비는 가장자리에 서서 반짝거리는 영상수정을 들이대는 자들은 각지에서 몰려온 취재진이고,그보다 안쪽에서 점잖게 제복을 빼입은 남녀들은 이번 행사에 초청받은 유력자들이었다. 그중엔 소드챈트리의 육지백과 그 사형제들,그리고 강옥교와 여위량 등의 얼굴도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납시었습니다!”
복작거리던 인파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아름다운 엘프 여인 두 명을 시종처럼 거느리며,멋들어진 망토를 질질 끈채 나타난 노구덕은 황금 수실로 장식된 카펫을 성큼성큼 밟으며 옥좌를 향해 걸어갔다.
제단처럼 드높은 단상. 비어있는 황좌의 양 옆에는 선녀처럼 아리따운 세 명의 여인이 자리해 있었다.
모종의 사정으로 나서지 못하는 임유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아내들. 데모나와 신소율,안세희였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소피아와 아가레스트도 그녀들과 나란히 착석할 계획이었으나,소피아는 스스로 지은 죄가 있다며 고사했고,아가레스트도 현재에 만족한다며 역시 사양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런저런 일이 있다 보니……. 오늘따라 더 예쁜걸?”
“말 돌리지 마.”
“흐흐. 사실인 걸 어쩌냐.”
습관처럼 타박하는 데모나와 잠시 어울려주는 사이,신소율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여튼…… 어떻게 아저씨는 황제 가 되고서도 체통이 없어요?”
“우리 귀염둥이가 또 왜 이렇게 뿔이 났을까?”
“됐어요. 늘 나는 뒷전이죠. 데모나 언니랑 실컷 재미 보세요.”
“요요요,앙큼한 녀석.”
“아얏!”
부풀어 오른 신소율의 볼을 살짝 꼬집은 노구덕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안세희에게 머물렀다.
만삭의 배를 끌어안은 안세희는 이런 자리가 영 부담스러운지, 가시방 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 미미한 초조함도 잠시 뿐,노구덕의 두터운 손길이 팽만한 복부를 쓰다듬자,붕 떠 있던 표정이 금세 편안하게 변했다. 어루만지는 그 손길에 담뿍 담긴 애정을 느낀 것이다.
“세희야,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줘라. 금방 끝낼 테니까.”
“……아니에요. 제가 오고 싶어서 나온 걸요. 저는 걱정 마세요.”
“녀석.”
아내들과 얘기를 끝내고 돌아선 노구덕의 얼굴이 백팔십도 돌변했다. 시시덕거릴 때의 능청스러움은 사라지고,대륙에 군림하는 제왕의 기개 가 일어났다.
사자 같은 기도에 제압당한 좌중은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그건 나름 한가락 한다고 알려진 육지백이나 여위량 같은 실력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어붙은 좌중을 오시한 노구덕은 곧바로 명령했다.
“허례허식은 필요 없다. 바로 시작 하자. 근위대장!”
“예! 사절단은 앞으로 나서라!”
허리를 편 이두식이 우렁차게 소리치자,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줄곧 대기하던 사절단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옹성옹성.
천천히 장내로 들어서는 사절단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새삼 놀라며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세상일은 모른다더니……’
‘두 달 전에 대륙을 호령하던 리베르타가 저런 꼴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쉬잇! 들릴라!’ ‘들으면 어때?’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대전에 들어선 백여 명의 사절단은 수군대는 인파를 헤치며 걸어오는 내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펄럭이는 백기를 앞세운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망자처럼 죽어 있었다.
그 선두에서 힘없이 걷는 여인은 윤희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통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그녀의 얼굴은 밀랍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레그나토르에서 검신을 위한 상복을 입어? 제정신인가?’
‘못 들었나? 황제께서 아량으로 허락하셨다고 하던데.’
‘참 어지간한 놈들이야. 듣자하니 검신은 아군까지 죽이려고 했다던데,그런 패륜아를 위한답시고 상복 을 차려입다니.’
‘그래도 창업 시조란 거 아니겠나. 나름의 예우란 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저 여자,마지막에 검신에게 버림받았다며? 그쪽으로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저도 들었어요. 폐하와 몰래 통정했다는 소문 말이죠? 하긴,애가 딸렸어도 저만한 미모니……
‘어허! 조용히들 하라니깐! 경을 치고 싶어서 그래?’
가로로 다물린 입술이 바들바들 커다란 떨림을 보인다. 그대로 혼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간신히 간수한 윤희지는 겨우겨우 옥좌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멈춰라. 거기서부터는 무릎걸음이다.”
“……알겠습니다.”
지척에 멈춰선 윤희지는 이두식의 호령에 따라 천천히,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르던 간부 들 역시 굳은 얼굴로 땅에 무릎을 맞대었다.
윤희지를 뺀 나머지 간부들은 대다수가 리베르타 본국에서 새로이 임명된 신출내기들이었다. 그 전임자 들이 모조리 전쟁에서 전사했기 때 문이다.
김상목을 위시한 조용진,아리엔, 가라이 등.
리베르타를 떠받치던 쟁쟁한 강자들은 레그나토르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모조리 처형당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복귀한 윤희지가 순탄히 리베르타의 임시 군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애초에 정적이 될 만한 싹들이 전부 잘려 나간 덕분이었다.
암전히 무릎을 꿇은 윤희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두 걸음,세 걸음.
몇 초 되지도 않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무릎에 맞닿는 폭신한 카펫의 감촉이 대리석인 양 차가웠다. 아마도,그녀의 비통한 심정이 감각을 왜곡한 것이리라.
“……존귀하신 레그나토르의 황제 폐하께,삼가 감히 자비를 구하며 아뢸 말씀이 있나이다.”
“고하라.”
무릎걸음으로 다가선 윤희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조심스레 하나의 서신을 받쳐 올렸다.
“긴히 청합니다. 저희 리베르타는 폐하의 권고를 받아들이며,더 이상 적대하길 원치 않습니다. 따라서……
“허례허식은 필요치 않다고 했다. 짧게 말해라. 항복이냐?”
아래로 늘어진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몸을 말아 엎드린 윤희지는 공손히 들어 올린 양손만을 유지한 채 오체투지했다.
“……그렇습니다. 무조건 항복하겠습니다. 부대 국경의 군대를 물려주십시오.”
“흐음.”
이두식을 통해 윤희지의 항복선언 문을 건네받은 노구덕은 읽을 것도 없다는 듯 서신을 내던졌다.
“좋다,대신.”
대신이라니.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는데도 또 무슨 조건을 걸겠다는 것인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든 윤희지의 불안한 눈빛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윤희지,널 제외한 검신의 혈족들은 전부 제네시스로 보내야 한다.”
윤희지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말인즉 그 어린 것들을 볼모로 삼겠다는 뜻이잖은가.
“그,그건……!”
“싫다면 죽일 수밖에.”
거절할 수 없다. 뒤늦게 처지를 깨달은 윤희지는 황급히 소리쳤다.
“아,아닙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허락만 구한다면 만나게는 해주겠다.”
“예…”. 가,가,감읍하나이다.”
새삼 실감하는 패자의 말로다.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달구었다. 비로소 승낙을 받아낸 윤희지는 엉금엉금 기어와 단상 아래의 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나머지 간부들 또한 처연히 엎드린 미망인을 따라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울음을 쏟아 냈다.
망국(亡國). 이로써 검신이 세운 리베르타는 역사의 풍랑에 휩쓸려 사라지고,레그나토르의 동부 식민지만이 남게 되었다.
부르르르르!
손아귀 안의 거친 발버둥을 억지로 제압한 노구덕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바로 할 일을 알려주지. 군사를 차출해라.”
“군사…… 라니요?”
“북부원정군을 조직하겠다. 멍청한 청룡 아무개와 전쟁교단 놈들이 남았잖나. 네가 책임지고 그놈들을 소탕해라.”
“하…… 하지만 저희들만으로는……!”
“못하겠나?”
가느다랗게 좁혀진 눈길이 심장을 후벼파는 듯하다. 헉! 숨을 삼킨 윤희지는 망연히 머리를 주억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힘없이 답하는 윤희지를 일별한 노구덕은 잡음이 잦아든 좌중을 돌아보며 행사를 파했다.
“이만 마치겠다. 다들 물러나라.”
모든 게 끝났다.
여력이 없어진 리베르타는 항복을 선언했고,끈질기게 버티는 청룡왕과 전쟁교단이 제압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물론 실력자들이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리베르타가 홀로 그들을 제압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윤희지는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빚을 지우면 그만이었다.
혹자는 너무 냉혹무비한 처사가 아니냐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자비로운 현자도 아니고,달관한 부처도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거기에 좀 더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는 것이야 말로 나의 방식이다.
게다가…… 사실,아직 모든게 끝난 건 아니다.
청룡왕,전쟁교단,각지에 남아있는 반란군의 잔당들. 그런 잔챙이들 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요리 할 수 있다.
방심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따위 송사리들의 미비한 움직임은 이 옥좌에 앉아서도 훤히 알 수 있다. 내겐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정작 대어는 따로 있다.
관리자 욘.
미꾸라지처럼 도망친 그놈이다.
김정인의 혼과 함께 남은 건 놈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놈은 내가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고 여기는 것 같지만…….
천만에.
“남부 대사막의 사해 속이란 말이 지. 그 박쥐 놈이 어울리지도 않는 두더지 흉내를 내고 있군.”
“……네?”
“아니,아무것도 아니다.”
풀이 죽은 눈동자 한가운데 의아한 빛이 감돈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소냐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손길에 놀라 흠칫 목을 빼는 기척이 느껴졌지만,녀석은 이내 살며시 눈을 감으며 볼에 홍조를 띠었다.
내가 왜 독대를 하자고 했는지 궁금할 법도 하건만,이 녀석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내가 말하기만을 기다린다. 언제 봐도 나이답지 않게 사려가 깊었다.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아이다.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욘의 영향력이 사라진 지금,굳이 내게 매달릴 이유가 없을 텐데도…….
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이 아이의 감정이 어디까지 진심인지.
“얘야.”
“네,대부님.”
“가끔 말이다,그때 여행하던 일이 그리울 때가 있다. 넌 어떠냐?”
어리둥절한 얼굴이 이번엔 다소 아련하게 변했다. 자기와,나,하유라 셋이서 여행하던 때를 떠올리는 모양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한 번 더 갈까?”
“예?”
“여행 말이다. 갑자기 남쪽에 볼일이 생겼거든. 동반자를 구하고 싶은데,마땅히 너 말고는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더구나.”
겸사겸사다. 수명이 줄어든 저 아이의 치료 목적도 있고,땅 속에 숨어든 두더지를 잡는 목적도 있고.
“아……!”
바짝 굳어 있던 얼굴이 갑자기 눈부시게 환해진다. 나직한 탄성을 발한 녀석은 내가 말을 물리기라도 할까봐 다급히 끄덕끄덕 머리를 흔들었다. 가끔 느끼지만,소냐는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어딜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그래,뱃멀미 약도 꼭 준비하고.”
“대,대부님!”
깍 외마디 소리를 내지른 녀석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개진다. 귀여운 녀석.
찰랑찰랑 흔들리는 머리칼을 어루 만진 나는 끙차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내일 바로 출발할까?”
“네!”
아마도 길지 않은 여행이 될 거다. 세희의 산달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하니깐. 게다가 볼 것도 없는 사막 지대니 눈요기 거리도 없을 테고.
그래도…… 이렇게 어여쁜 종달새와 함께라면,두더지잡이 여행도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