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800)
헌터클럽 795화
멈추었던 전쟁의 수레바퀴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노구덕의 등장으로 주춤했던 리베르타 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수만의 대군은 부사령관 김상목 을 필두로 하여 야산을 향해 진격했다.
눈앞의 야산 하나만 넘으면 레그나토르의 수도 제네시스가 코앞이다. 하지만,독단적으로 진격 명령을 내 린 김상목의 진정한 목적은 제네시스가 아니었다.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것은 빈껍데기만 남은 제네시스의 함락 여부가 아니다.
무신이 죽느냐,검신이 죽느냐. 그 것이야말로 이 싸움의 유일한 관건 이었다.
물론 무패의 검신이 진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 또한 한 때 검신의 유일한 대항마라 불렸던 사내. 만전을 기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 시점에서 군을 전진 배치시킨다면,철혈의 무신이라 할지라도 필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자기 사람을 끔찍이 아끼는 그의 성정은 유명하니까. 야산에 진을 친 레그나토르의 잔당들부터 시작해서,제네시스에 있다는 가족과 부하들까지…… 사람인 이상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으리라.
찰나가 승부를 판가름하는 초인들 간의 대결에서,한순간의 방심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되곤 한다. 김 상목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드높은 자긍심과 대쪽 같은 성정으로 ‘로열나이트’라 불리는 사내가 택한 수단치곤 굉장히 치졸한 방법이다.
그러나 김상목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방법으로나마 검신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면,한낱 자신의 명성 따위야 똥밭으로 곤두박질쳐도 상관없었다.
그 저의를 간파한 노구덕은 진득한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개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로열나이트의 명성도 옛말이군. 그렇지 않냐?”
대답 대신, 살을 저미는 살기가 그의 심장부를 사납게 노리며 파고들었다. 홀연히 신기루처럼 나타나 가슴팍을 길게 할퀴고 지나간 궤적은 다시 부메랑처럼 방향을 바꾸어 돌아왔다.
이글거리는 검기를 두른 칼날이 가슴팍을 갈라오자,노구덕의 부릅뜬 눈에서 흉맹한 붉은 기운이 일어났 다.
“우랴아아압!”
벌레교단의 충왕각인,플랑기스의 스펠실드가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 되어 다시 태어났다. 철근처럼 딱딱 하게 굳은 근육 위에 덧씌워진 붉은 아지랑이는 살모사의 송곳니처럼 독랄하게 치고 들어온 칼끝을 막아섰다.
예리한 빛의 검과 녹색의 피부가 까드드득 마찰하며 요란한 불똥을 튀겼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검과 방패의 대결은 머지않아 결착이 났다.
우지지지직!
그 승자는 놀랍게도 방패 쪽이었다. 칼을 이루는 빛의 입자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지는 것 을 본 김정인은 급히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노구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김정인과의 거리를 바 짝 좁혔다.
“도망치게 둘 줄 아느냐!”
“크윽!”
또다시 얼굴이다.
안면으로 짓쳐드는 그림자를 본 김정인의 안색이 크게 일변했다. 방금 전,무참히 코뼈가 내려앉았을 때의 더러운 기억이 스멀스멀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콰아앙!
노구덕과 주먹과 부딪친 검신의 몸뚱이가 사정없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아득한 속도로 튕겨진 김정인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낭패감이 깃들었다. 다행히도 얼굴은 지켜냈으나,대신 오른팔을 내주고 말았다. 주먹에 실린 무지막지한 괴력이 안면부를 가드하는 그의 팔을 검과 함께 부숴 버린 것이다.
타격점에서 일어난 칠흑의 소용돌이가 허공을 난폭하게 찢어발기며 시커먼 구멍을 만들어냈다. 심연의 악마처럼 아가리를 벌린 공백(空白)은 후드득 튀어 오른 자갈과 먼지들을 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그 광경을 본 욘은 크게 경악하며 혀를 내둘렀다.
‘저럴 수가 있나! 주먹질로 차원의 공백을 일으키다니……. 실로 무서 운 위력이다.’
‘……’
‘고작 잔재밖에 남지 않은 발레기우스의 힘으로 이 정도의 위력을 내는게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지금 까지 저자를 잘못 본 것 같군. 인정 하긴 싫지만…… 사도로서의 기량은 저쪽이 위인 모양이야.’
김정인의 짙은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지금 팔자 좋게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란 말인가?
바짝 날이 선 그의 감정이 전해진 것인지,혼자서 중얼대던 욘의 말투가 극히 조심스러워졌다.
‘놈이 생각보다 너무 강하군. 이러면 우리도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눈썹에 이어 입매가 틀어졌다. 말 을 꺼낸 욘의 의도가 뻔히 보였던 탓이다.
‘통제권을 전부 넘기란 말인가?’
말투가 곱지 않은 게 당연하다. 욘에게 통제권이 전부 넘어가면 그 순간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발레기우스에게 잠식당해 이름까지 빼앗겨버린 그 숙주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 구실을 잡은 욘도 만만치 않았다.
‘달리 방법이 있나? 저쪽은 전력이다. 이쪽도 백 퍼센트를 다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너……!’
막 사납게 입술을 들썩이려던 김정인의 낯이 크게 출렁였다. 어느새 짓쳐 든 가공할 풍압이 살갗을 따끔 따끔 저미며 숨통을 죄여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크헉!”
길게 피화살을 흩뿌리며 날아간 김정인은 그 뒤로 서너 번을 꼴사납게 구르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약에 취한 듯 아찔아찔한 시야도 문제였지만,당장 가슴에 뭐가 얹힌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폐부 쪽의 늑골이 부러진 듯했다.
물론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죽 기는커녕 잠깐 시간을 두고 기다리 면 금방 나을 상처다. 현재 그의 육체는 인간이 아니라 완전무결한 신의 그릇이었으니까.
그러나 노구덕은 그 잠깐의 틈을 주지 않았다. 거센 폭풍우가 되어 숨 돌릴 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노구덕의 공세는 그렇잖아도 창백하게 질린 김정인의 낯빛을 파랗다 못 해 거무죽죽하게 만들었다.
‘고민이 길수록 여력은 줄어든다. 어서 선택해라!’
‘크으으으으!’
김정인은 이를 악물었다. 터진 입술로부터 배어난 핏물이 입안을 쌉쌀하게 물들였다. 고개를 드니,시들 시들해진 빛의 검 너머로 달려오는 남자의 냉랭한 얼굴이 보였다.
문득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뒤덮는다. 자잘한 뇌세포들을 올올이 곤두서게 만드는 분노가 머릿속을 그득하게 채웠다.
보이지 않는 사이에 점점 누적되어 왔던 열등감.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불쾌한 감정 이 마침내 지저를 뚫고 간헐천처럼 내뿜어졌다.
‘내가 저자보다 기량이 못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럴 리 없어!’
‘김정인! 통제권을 넘겨라! 이대로 죽을 셈인가!’
욘의 다그침은 용암처럼 달아오른 분노를 터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닥쳐!”
뿌득! 억척스레 맞물린 어금니 일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새빨갛게 달궈진 안광을 드러낸 김정인은 야수처럼 광포하게 포효했다.
“죽이겠다! 죽여 버리고 말겠어!”
“뒈질 놈은 내가 아니라 네 녀석이겠지!”
아수라처럼 돌변한 김정인의 기세도 맹호처럼 몰아치는 노구덕의 공격을 늦추진 못했다. 오히려 그에 못지않은 고함을 터뜨린 노구덕은 일도양단의 기세로 휘둘러지는 칼날과 정면으로 주먹을 마주쳤다.
쩌어어영—!
백색의 검과 녹색의 주먹.
인지를 뛰어넘은 두 흉기의 격돌은 굽이치며 돌아가던 전장의 흐름을 한순간에 깨부수어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저 아득한 구름 너머의 무언가도 함께 부서져버렸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변화. 그 시발점은 광기 어린 외침을 토하며 병사 들을 독려하던 김상목이었다.
“크어어억!”
우직한 황소처럼 내달리며 레그나토르의 병사들을 베어내던 그가 느닷없이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핏기 없이 파리하게 질린 그의 손은 학질에 걸린 양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끄으으으……!”
“허어억!”
난데없이 일어난 역병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전장을 휩쓸었다. 악착 같이 산을 오르던 리베르타의 병사 들은 물론이고,마지노선에서 결사의 항전을 벌이던 레그나토르의 병사들도 하나 같이 전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으으……! 이,이게 뭐야? 갑자 기 왜 이래?”
대가 꺾인 허수아비처럼 쓰러지고 만 신소율은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진 몸뚱이는 도저히 자력으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지친 상태였다.
“타,탈진? 나,지금 지쳐서 탈진 한 거야?”
비로소 자기 처지를 깨달은 그녀는 어처구니없이 입을 벌렸다.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듣길래 무슨 대단한 저주에라도 걸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를 무너뜨린 건 단순한 탈진. 한마디로 지쳐서 퍼져 버렸다는 거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없었다. 극도로 몸을 단련한 헌터가 전투 도중에 탈진해서 쓰러지다니. 페이스 조절도 못하는 햇병아리라면 모를까,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만 긁어모은 병사들이 전부 탈진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멍하니 주저앉은 신소율의 정신을 되돌린 건,옆에서 들려온 나직한 탄식이었다.
“..맙소사.”
“퀸젤 언니?”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착각이 아니다. 장탄식을 토해내는 퀸젤의 목소리는 늘어진 몸뚱이만큼이나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말투로 봐선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듯하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신소율은 소리 높여 그녀를 채근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세상이 무너졌어.”
또 이해 못할 소리. 와락 인상을 찌푸린 신소율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뭔 소리래요? 세상이 왜 무너져? 내가 보고 있는 건 세상이 아닌가?”
“농담할 일이 아냐! 시스템이 붕괴 했다고! 저 두 사람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단 말이야!”
도리어 가슴을 치며 소리친 퀸젤은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었다.
발레기우스의 반란 이후,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시스템이 마침내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결국 시 스템은 스퀘어 대륙을 지금까지 지탱해 온 근간이다. 헌터들은 시스템의 존재로 인해 힘을 얻었으며,보다 효율적으로 레귤러를 관리할 수 있었다. 또,위원회가 드래프트를 통해 헌터들을 영입할 수 있었던 것도 시스템의 있던 덕분이었다.
그런 시스템이 무너졌다.
발레기우스의 반란,대륙전쟁을 거치면서 국지적으로 시스템이 부재하거나 저널이 사라진 경우는 있었지만,이처럼 아예 맥이 끊어진 적은 없었다.
시스템의 부재.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될까? 매사 거침없이 판단하는 그녀도 이번만은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정말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또한 알 수도 없다.
헌터가 사라지고 힘을 잃어버린 대륙,대해 밖에 펼쳐진 세계,곧 만나게 될 미지의 존재들……. 단적으로 예상하기엔 셀 수 없이 많은 변수와 가능성이 있었다.
그 끝은 정말로 종말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와는 새로운 출발이 될 수 도 있다.
그토록 많은 불확실성 가운데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공전절후한 싸움의 주인공 중 하나가…….
“……휴우우우.”
거기까지 생각한 퀸젤은 갑자기 땅 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안 그래도 힘빠지는데.”
“뭔가 부질없어서. 어차피 아무것도 못하는 조연 주제에 대륙의 운명은 무슨. 그냥 맘 편하게 응원이나 해야지.”
“헤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신소율은 이내 머리를 끄덕끄덕 움직이며 수긍했다.
어차피 조연들끼리의 싸움은 이제 끝났다. 스퀘어를 외부와 격리시켰던 ‘막’이 무너진 여파는 모든 이들의 몸에서 힘을 앗아갔다. 적과 아 군이 모두 파김치가 되어 널브러진 지금,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만 멀거니 뜬 채 저쪽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그즈음,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신들의 싸움도 슬슬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