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10
연록흔 – 110화
“록흔을 무척 따랐는데…… 상심하여 숨은 건가?”
피하려던 것이 기어이 나돋아, 무진은 난감했다. 저 이름 부르는 것으로도 가슴 아프실 터. 위로 따위 얕게 올릴 수 없으니 곁에서 뵙기가 면구했다. 올지고 드맑아, 연록흔은 그 자신에게도 햇살같이 어여뻤었다.
“죽화가 피면 대나무가 죽는 이유, 이제 알 것도 같다.”
“폐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진과나 무진이나 가슴 먹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전자는 머뭇대고 후자는 술을 권하나, 둘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주군께서 가슴을 에는 아픔을 잊으시는 것, 그러나 쉬이 취하시지 않으니 그조차도 어려웠다.
“우는 것도 해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눈은 항시 뜨거운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독하게 강말라 뻑뻑하기만 했다. 가륜은 술잔을 갸울었다. 차라리 곯아떨어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쉽잖았다.
“무진,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는 기분을 아는가?”
“예, 폐하. 끔찍하지요.”
무진이 대답하매, 그 녹안이 짙었다.
“무뎌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요. 세월이 약이란 말, 늙은이들 헛소리는 아닐 겁니다.”
진과가 서글프게 한 마디 보탰다. 그리고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평생을 함께할 정인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폐하, 술 한 잔에 털고 술 두 잔에 잊고……. 그러다 보면 세상사 길지 않을 겁니다.”
“길지 않다라, 좋은 말이로군.”
가륜이 쓰게 웃으며 하는 말에 무진은 가슴이 무너졌다.
차륵.
탁.
술잔이 갸울어 밤은 이울었다. 누각 위의 인영은 시종일관 꼿꼿하여 치우침이 없었다. 꽃바람이 그 곁으로 스쳐 지났다. 달금한 화향 새로 침묵이 파르랗게 갈앉았다.
***
오월이나 변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찼다. 광세전에 모인 이마다 이마가 접히고 입귀가 굳은 참, 논전이 주된 곳이나 오늘만큼은 여러 의견이 없었다. 이익을 좇아 이합집산 하더라도 나라의 안위가 걸린 일에는 예외를 두니 작금에는 근심하는 바가 모두 같았다.
“어찌하여 남태후가 보이지 않는 거요?”
정전에 대장군 신간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제야 대신들은 그 자리가 빈 것을 알았다. 그에 평소 남대균을 따르던 무리들이 금세 자라목이 되었다.
“이럴 때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니, 원!”
“남태후께서는 와병중이십니다.”
무리 중 하나가 비굴하게 옹호해, 신간후가 픽 웃었다.
“기름진 몸이라 고장도 잦군.”
“대장군, 목소리 낮추시오.”
우승상 갈우휘가 핀잔하자, 신간후가 밤 송아리 수염을 다르르 떨었다.
“송괴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소서.”
격노에 휩쓸려 황상께서 용상에 계신 것을 잠시 잊었던 듯, 신간후는 얼굴이 벌게져 몸을 나부죽하게 조아렸다.
“예하와 서로, 남연이 연합했군.”
이 안에서 파문 없는 이는 오롯이 그 하나, 가륜은 격노하지도 경악하지도 않았다. 다만 칼빛으로 북면하고 늘어선 이들을 굽어볼 뿐이었다.
“예, 폐하.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문선왕 가조 또한 뇌희원을 비운 지가 꽤 여러 날 된다 하옵니다.”
병부시랑 삭호운이 파르란 얼굴로 사뢔 올렸다. 가륜은 고개만 까닥 움직였다.
“폐하, 석연치 않사옵니다. 문선왕은 서로의 부마가 아니온지요? 서로군이 변방을 치고 들어옴과 동시에 사라지다니요?”
간의대부 이한이 눈귀를 우그리며 하는 말에 대신들이 그러하다 입을 모았다. 대쪽 닮은 그로서는 이익 좇아 제 나라를 발기는 이들이 가장 역했다. 지금껏 그저 무난한 재실이라 여겼건만, 그야말로 등하불명이었다. 그는 두 손을 훔켜잡았다. 이러다 황룡에 조공을 바치는 위성국 스물일곱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설까 적잖이 두려웠다.
“삭시랑, 어디까지 파고들어 왔습니까?”
“예하가 천령관을 넘어 동북 지방 아홉 개의 성을 모두 점령했습니다. 도위들의 말에 의하면 월경한 탐족들이 뭐에 쓰인 것처럼 포악하고 피를 즐긴다 합니다.”
“탐족이 달리 견족이라 불리겠소?”
“아닙니다, 좌승상. 이번만큼은 다릅니다. 그 도가 지나쳐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 닥치는 대로 짓밟고 겁탈한다 합니다. 지난 자리마다 혈무 일어 앞이 뵈지 않으니, 노인도 아이도 그들 앞에서는 가차 없습니다.”
삭호운이 말을 맺자, 좌승상이 눈을 칩떴다. 그 안에 끓는 것은 분노, 황룡인이라면 뉘나 마음이 같을 터였다.
“그렇다면 아군은 무엇…….”
“지금 군이 허술하다 하는 거요?”
이한이 채 묻기도 전에 성질 급한 신간후가 부르르 나섰다.
“더 듣고 나서…….”
“군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 아니오?”
“대장군, 그리 언성을 높여 무엇에 쓰겠소?”
“간의대부, 붓대와 창검이 같은 줄 아오?”
신간후가 일갈을 토하는데, 가륜이 눈귀를 얄풋이 찢었다. 날캄한 시선이 맵차게 비틀려 정전이 일시에 고요해졌다.
“무뜯고 싸울 힘 있거든, 각자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라.”
“폐하, 괴란하여 얼굴을 못 들겠나이다.”
대신들이 고개를 수그리자, 가륜이 용상에서 표한하게 일어섰다. 마음이 비었다 해서 머리까지 비지는 않았으니 그에게는 소임이 하많았다. 율이 자라면 떨칠지언정 지금은 아니었다. 바특하게 움켜쥐고 단단히 지탱해야 할 터. 황룡의 극존이어니, 그 위상 드높아 황금으로 빚은 되와 해시계가 좌우에서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대장군 신간후!”
“예, 폐하.”
“표기장군 천수건과 함께 천령관으로 가라. 군사 이백만을 주겠다.”
“폐하, 신 신간후, 지엄하신 명 받들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거기장군 안민!”
“예, 폐하.”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섰던 이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 동작 하나에도 충심은 올올이 배 있었다.
“전후좌우, 네 장군들과 함께 서로국과 접경한 한토로 가라. 군사 백만이다.”
“폐하, 황명 좇아 분투하겠나이다.”
백만 대군을 이끄는 명패가 안민의 손아귀 안에서 금빛으로 찬연했다.
“폐하!”
거기장군이 물러나자마자, 태사가 급히 앞서 나왔다. 늙은 눈에 수심이 짙어 입귀의 주름 또한 깊었다.
“무슨 일인가?”
“폐하, 재고하소서!”
가륜이 눈을 조프리매, 태사가 용상을 한껏 우러렀다.
“친정(임금이 몸소 나아가 정벌함)하시려는 뜻, 다 아옵니다.”
“이미 아는 바면 그저 따르라.”
“옥체를 보존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재고하소서!”
황후께서 사몰하신 후에 황상께서는 전과 같지 않으셨다. 그 강함이야 익히 아나, 태사는 그예 부러지실까 두려웠다. 보드라이 감싸 주던 이가 곁에 없어 더 그러했다.
“태사.”
가륜이 손짓해, 태사가 단 위로 올라섰다.
“걱정 마시오.”
태사가 세 번째 놓인 것을 밟았을 때, 나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오롯이 그에게만 닿으니 그야말로 흉금을 토로하는 것, 늙은 눈귀가 잗다랗게 떨렸다.
“하오나, 소신 너무 걱정이 되와…….”
“누가 죽으러 간다 했나?”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보체 돌보심이 소홀하실까 신은 심히 저어되옵니다.”
“태사, 뭐든 깨부수지 않으면.”
태사는 눈을 급히 들었다. 바로 위에서 뒤끓는 것이 뵈매, 그는 가슴이 무지근히 아팠다.
“더는 못 견디겠다. 경이 있어 떠날 수 있거늘, 이래도 두렵다 할 텐가?”
“폐하, 그예…….”
태사는 눈이 젖었다. 동궁이실 때 배움 드렸고, 황위 오르신 후로는 죽 보필해 왔다. 그런즉슨 온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알았다. 황상께서 보시는 곳, 그는 얼마만큼은 읽었다.
“좌우승상이 있잖나, 믿고 가겠다.”
“예, 폐하. 소신, 이 목을 걸고 지키겠나이다.”
가륜이 실긋 미소 지으매, 태사가 세 단 아래로 내려갔다. 대신들이야 그저 바라보니 정전은 음음적막했다.
“모두 들으라. 짐은.”
용음 떨어져 모두 깊다랗게 읍했다.
“곧 주남으로 갈 것이다.”
황상께서 친정 하신다는 말씀이라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황차 평주 가셨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여 우승상이 그리 마옵시길 청하려는데 맵찬 시선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위장군 백효기, 짐을 따르라.”
“예, 폐하.”
서릿발 같은 안광이 파르라니 저분이야말로 타고난 만승지군이셨다. 우승상은 하려던 말을 사리고 두 손을 맞잡았다. 예서 든든히 지킬 터, 그게 신하된 자의 도리였다.
“장성의 방위는 무위장군 육관걸이 맡도록.”
하명 떨어지자 무관들은 담담한데, 문관들은 예서제서 술렁댔다. 황상께서 굳이 나서실 필요가 있으랴? 태화성에서 황권이 멀어지면 변고 없으랴? 비록 소리는 크게 일지 않으나, 그 동요함이 벌집을 쑤신 듯했다.
“폐하, 차라리 위장군 홀로 내보내시고 친정은 마옵소서. 옥체 상하실까 두렵사옵니다.”
좌승상이 곧은 눈으로 사뢰자, 그 뒤를 따르는 입들이 많았다.
“친정하려는 바.”
용음 떨어지자, 드넓은 전에는 얕은 숨소리조차 없었다.
“백성이 국가의 으뜸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짐은.”
나라의 근본은 민초다. 그 말 한 마디에 정아(정전)가 숙연했다.
“그대들을 믿소.”
짧은 말이나 드레 있어, 저마다 마음이 묵직해졌다. 황상께 이리 신뢰 받으니 뭐든 못하랴 싶었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졌다. 북의 한토, 남의 주루, 서의 천령, 모두 군사상 요지로 그곳을 앗기면 황룡의 다른 곳도 쉬이 무너졌다. 현재 세 곳 모두 적지가 된 터, 하여 한시가 급했다.
“폐하, 하오면 언제 출정하시옵니까?”
우승상 갈우휘가 조심스럽게 묻자, 다른 이들도 귀를 높이 세웠다.
“곧. 군장 마치면 바로 갈 터.”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작금에도 민초들의 피가 마르는 참, 지인하여 득 될 게 바이없었다.
“폐하, 저도 따르겠나이다. 부디 윤허해 주옵소서!”
간의대부 이한이 나섰다. 적은 비록 문반에 두고 있으나, 그는 무에 능하고 수백여 종이 넘는 각종 병서를 두루 섭렵했다. 곁에 두면 보탬이 될 이였다.
“윤가한다.”
돌무지 속에 옥석이 있듯이 이한은 옥에 들었다.
“폐하, 망극하옵니다.”
가륜은 대신들을 휘둘러보았다. 검남빛 눈이 무되게 갈앉아 심해인 양 깊었다.
지난해 이맘때였던가? 가륜은 다복다복 다보록하게 자란 율의 머리칼을 쓸었다. 이제 호중설은 없으나, 작금 오월천은 부옜다. 양류(버드나무)가 떨군 솜 같은 씨들이 예서제서 흩날려 마치 늦은 춘설인 듯했다. 젖살 올라 보얘질수록 아기는 제 어미를 닮아, 아비 속 긁는지도 모르고 마냥 귀애스럽게 웃었다. 그때 은상에서 록흔과…… 속말조차 잇기가 어려웠다. 가륜은 맵차게 월영에 올랐다. 일순, 봄바람에 닳아 도홍으로 익은 아기의 뺨 위로 솜꽃 하나가 살폿 얹혔다.
“아아앙.”
태후는 염주를 꽉 쥐었다. 황상께서 저리 가늠할 수 없게 갈앉은 눈을 하시면 가슴이 서느래지곤 했다.
“황상, 부디…….”
어린것이 머루 같은 눈으로 가륜을 보았다. 갑주로 휘감아 커다라니 그 눈에 온전히 담기지도 않으련만, 조그만 입을 오물대며 고사리 손을 바동대며 열심이었다. 월영이 머리를 틀자, 조그만 머리통이 약간 갸울었다. 햇발 아래 갑옷미늘은 찬란하고, 애어린 눈동자는 드맑았다.
“할머님, 강녕하십시오.”
“황상, 이 늙은이 걱정하지 마시고 보체 보중하세요. 예 일은 걱정 마시고…….”
오문 앞이었다. 태후가 무운을 빌어주기에 가륜은 입귀만 어그러뜨렸다. 눈앞으로 좌우중랑장과 위장군이 이끄는 군사 삼백만이 벌여진 참, 앙천로를 따라 용위군이 대오를 맞춰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집금위와 태호위 또한 그 곁에서 위용이 드높았다.
타각.
월영이 한 발 내밀자, 오문 양옆에 늘어선 만정제신들이 극진하게 몸을 낮췄다. 구름처럼 몰린 백성들도 그들을 따라 납작 엎드렸다.
타각타각.
눈 위로 뵈는 분, 바로 황룡의 극존이셨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한 마음으로 사뢨다. 그저 무탈하시길 바라니 아버지를 우러르는 자식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무운을 비옵니다.”
“부디, 강녕하소서.”
황제군이라 갑주는 주톳빛, 드높이 쳐들린 퇴창 끝에서 햇빛이 날캄하게 깨졌다. 정면을 응시한 눈마다 예리해 그 기상이 믿음직스러웠다. 포병, 기병, 병참이 속해 그들의 말머리는 모두 주남으로 향해 있었다. 북소리 둔중하게 퍼지매, 인마가 곧게 나아갔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성제라 칭하여도 부족하니 백성들의 외침은 끝이 없었다. 용위군이 장성을 벗어날 때까지 함성은 그치지 않았다. 푸른 황룡기가 그들 머리 위로 파도처럼 휘날렸다. 천지진동하매, 그 떨림은 태화성의 한궁까지 닿았다.
‘은아…….’
소현의 품 안에서 아기가 까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들어라, 저분이 네 아버님이시다.’
아기가 제 어미 속도 모르고 방긋 웃었다.
‘그리고 이 어미는…….’
소현은 눈을 지르감았다.
‘네 아버님, 저 긍지 높은 날개를…… 꺾으련다. 그러니…….’
내쳐진 후궁이라 소현은 배웅 길도 나서지 못했다. 이리 찬 궁에서 어린것만 붙잡고 하소연하니 가슴이 호독호독 아렸다. 갖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에, 사랑하므로 가져야 했다. 그것이 용의 보주를 뺏고 용의 눈을 에는 일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망가뜨려서라도 가질 터, 그 뉘에게도 앗길 수 없으므로.
‘네가 빌어주렴. 무사하시라, 덜 다치시라……. 이 어미가 품어 드릴 테니…….’
뒤틀리게 사랑할지언정, 그것조차 소현에게는 순수했다. 세상 많은 일이 그런 착각 하에 벌어지나, 뉘든 저는 다르다 여겼다. 제게 중한 사랑이어니 지켜야 할 뿐. 그녀는 딸을 아스러지게 안고 줄기줄기 울었다. 눈귀 젖어 붉은 입술이 섧게 일그러졌다.
***
“전하, 상헙니다.”
“들어와라.”
남연과 인접한 황룡의 최남단 주루, 한차례 몰아닥친 황충의 변에 전쟁까지 겹쳐 거의 폐허가 됐다. 장정들은 거의 죽어나가고 남은 것은 여인, 어린아이, 힘 못 쓰는 늙은이뿐. 성이 함락된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여전히 버티나?”
“예, 사내 중에 사냅니다.”
상허가 얼굴을 찡그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주융이 보기에도 그 거한은 아까운 인재였다. 마음을 돌렸으면 좋겠는데 우직이 한곳만 바라보니 더 탐이 났다.
“주진문, 제법 부호라 했던가?”
“예, 전하. 커다란 염전도 여럿이고 예서 알아주는 재력갑니다.”
“그 아내 또한 제법이더군.”
묵비가 일으킨 황충 떼가 휩쓸어 주루는 전쟁 직전에도 폐허였었다. 황룡 정부의 지원으로 기아로 무너진 성을 막 재건하던 차, 성을 앗은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그때 관도 아닌 민간의 몸으로 맞서 싸운 이가 주진문이었다. 차마 죽이기 아까워 형옥에 가둔 참, 그 아내 또한 여걸이라 부를 만했다.
“그리고, 어찌 됐나?”
“아직은 그곳에 있다 합니다.”
“상허, 그자가 제대로 할 것 같나?”
“전하, 불안하신지요?”
“연 생각하면……. 그래, 그렇다. 곁에 두기 전까진 죽 이럴 것 같다.”
주융이 알기로 연은 지금 태화성 내 은소현의 거처에 있었다. 가조의 말인즉슨 등하불명이니 태화성 내 한궁에 뒀다는데, 그니 생각하면 가슴이 홧홧한 게 과히 좋지 않았다.
“그 여자 뉘보다 황후를 미워하니, 허술히 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인다.”
“혹여, 핍박이라도 할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일순, 은안이 차게 굳었다. 말보다 확실한 답이라 상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에게도 그 성정이 잔독해 뵈긴 하더이다.”
“몸이 무거우니 더 힘들 터.”
한번 꺾고자 하는 것이면 저런 빛을 보일 수 없었다. 상허는 주군의 눈에서 깊은 사랑을 보았다. 저 역시 마음에 해아를 품은 터라 깊음의 정도를 알 성싶었다.
“그리하면 치도곤을 안길 터인데, 상식 있으면 감히 그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치도곤? 머리칼 하나라도 다치게 하였으면 목을 벨 것이다.”
은빛 눈에 담긴 빛이 많았다. 애염, 야욕, 그리고 읽기 어려운 그 무엇……. 상허는 주군을 높다랗게 우러렀다.
“명세제는?”
“예, 전하. 지금…….”
주융은 이날을 위해서 지난 십 년을 별러왔다. 수하들은 세자로 옹립코자 했으나, 그가 바란 것은 남연의 병권이었다. 드넓은 황룡이 저 위에 있으니 어릴 적부터 제가 난 땅은 눈에 차지도 않았었다. 눈 어두운 부왕이야 삼남이 야심 없이 충정이 두텁다 어여뻐했고, 결국 천하병마원수란 남연 군부의 제일 높은 자리가 그에게 넘어왔다. 그때부터 발판은 단단해졌다. 군대를 부단하게 담금질하며 군마를 강하게 키우고 군비를 예서제서 끌어 모았다. 군 재정의 반절 이상을 살상 무기 개발에 쏟아부었으니 작금에 거칠 것이 없었다. 바야흐로 때가 도래했으니 벼린 칼을 휘두르면 그것으로 됐다.
“명세제가 친정에 나섰다 합니다.”
“세 곳 중 어딘가?”
주융은 입귀를 어그러뜨리며 웃었다.
“주남으로, 벌써 판애에 닿았다 합니다.”
“재미롭군.”
상허는 사느랗게 빛나는 은안을 응시했다. 황룡의 황제와 주군께서는 호각일 터. 제게로 수은인 양 곧게 떨어지는 시선이 몹시 묵직했다.
“상우하여 더 날캄할 듯합니다.”
“그렇겠지.”
그리 어여쁜 아내가 죽어 없다면 환심장할 터. 연을 그리는 마음으로 돌아보매, 주융은 명세제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벗으로 묶지 못해 애석한 참, 적에게 그런 잘남이 있어 그는 더 어연번듯해졌다.
“가조는 성 둘을 무너뜨렸다고?”
“예, 전하.”
작야에 곧 태화성에서 만나자 전언이 왔었다. 주융은 그런 감언 따위 믿지 않았다. 그자가 황룡을 이분하자 했지만, 분명 혼자 삼키려 할 터. 그건 자신 역시 같아 전부 아니면 전무였다. 나라건 여인이건 동일했다.
“황제께서 친히 납신다니.”
주융은 검을 챙기고 일어섰다.
“병사들을 독려하고 철저히 대비해라.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주군.”
“부녀 겁탈죄 목으로써 갚는다, 군령으로 전해라.”
“종명!”
나라를 복속하매 민심도 함께 얻어야 했다. 원성은 원래 가장 꼭대기로 몰리는 법, 상허 또한 부하 장병들로 인해 주군께 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쯤이면…….”
“예?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계신지요?”
혼잣말이 샌 듯, 주융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쯤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를 일, 숨겨진 몸으로 그 고초가 얼마나 크랴 싶으니 눈귀가 절로 무름해졌다. 그저 무탈하기만을, 연의 아이면 나의 아이니……. 은빛 눈이 보드라이 바랬다.
***
지하에서는 시간이 더디 지났다. 일광 없으니 밤인지도 낮인지도 알 수 없어 매양 흐릿했다. 록흔은 눈을 조프렸다. 암석이 단단히 드러난 천장부터 축축한 바닥까지 사위는 온통 보랏빛 천지였다. 곱다시 발광하는 것은 버섯, 수년 전과 같았다. 그래도 전처럼 혼자는 아니라 호류무가 있고 율이 있었다.
“록흔아, 걱정 말래도. 내 너 하나 못 지키겠냐?”
지신초가 지천한 공간에 다른 이들도 있었다. 지신 당랑, 변검왕 소린, 기녀 해의, 록흔과 함께 갇힌 채였다.
“사부님, 매번 폐만 끼칩니다.”
“별말을 다 하누나.”
지신이 커다란 머리통을 갸웃대며 웃었다. 그에 억센 턱이 장끼 울듯 꺽꺽댔다. 작금에 그가 친 결계 밖에서는 아귀다툼이 한창이었다. 간만에 먹을 것이 생겨 사령들이 날뛰는 참, 갹갹대고 갈갈대는 소리가 듣그럽게 돋았다.
“록아, 저 영감탱이가 널 어찌 부렸는데…….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니 몸조리나 잘해라.”
소린과 지신은 묘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록흔이 있어 싫은 마음은 잠시 뒤로 치운 참이나 가끔 어긋나기는 했다.
“소린, 광대 주제에 감히 뉘에게 하대하는가?”
“광대라고? 흥! 사마귀가 사람 노릇을 하는 것보단 낫잖으냐!”
둘 다 록흔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만저만이 아닌데, 매양 아르렁댔다. 핀잔주고 퉁을 놓으니, 해의만 그 사이에서 못할 노릇이었다.
“제발 그만하세요! 저 밖이랑 예랑 다를 게 뭐예요?”
해의의 잔소리도 일상이라 록흔은 풀기 없이 웃어 버렸다. 좋잖은 일로 돌아왔으나 저들을 다시 만난 것만큼은 기꺼웠다.
“폐하…….”
호류무는 이마를 잔뜩 접었다. 바라보매 주군께서는 몹시 여위셨다. 뺨은 해쓱하게 바래, 입술은 하얗게 터, 눈은 데꾼했다. 그래도 한 달 전과 비하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았다. 그 밤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이 축축할 지경, 상황은 최악이었었다.
“괜찮아, 그러다 까라질라.”
“이리 험한 곳이라 더 상하실까…….”
“고비는 이미 넘겼는걸. 차차 좋아질 거다.”
마굴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록흔은 조산했다. 게다가 난산이라 곡절이 많았었다. 그녀는 한숨 끝에 율을 내려다보았다. 두어 달을 일찍 나온 데다 먹는 것도 변변찮아 아기는 약체였다. 하얗고 작아 깨질 듯 가냘프니 목으로만 잔약하게 울었다.
“우리 공주마마, 우실 기운도 없으셔서 어떡해요?”
해의가 투명한 손으로 율의 뺨을 다독였다. 산모가 몸이 좋잖아 젖이 잘 돌지 않아, 아기는 마냥 주리고 있었다.
“제가 나가서…….”
호류무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예 있어라. 저들은 산 것이라면 환심장을 한다. 이대로 있으면 내게도 기운이 돌 테고, 그때 봐서 도모해도…….”
“폐하!”
주종을 넘어 호류무에게 록흔은 부모와 같았다. 수척해진 저 모습이 평생 잊히지 않을 듯, 그예 금안이 드밝게 일렁였다. 주군께서 기력이 크게 쇠하셨으나, 무능하여 이 결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바이없었다.
“폐하께서 걱정하실 텐데……. 가슴앓이 하시는 건 아닌지……. 마음이 편찮다.”
마른 입술로 잔약하게 하는 말에 호류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밤은 모든 게 찰나고 일순이었다. 날파랍게 스치는 기억에 준미한 입술이 크게 비틀렸다.
“아마도 돌아가셨다 여기실 겁니다. 폐하께서도 보셨듯이, 닮았다기보다 똑같았습니다.”
“그렇긴 한데. 왜 날 죽이지 않았을까?”
“그건 그 노매가…….”
“천천히 죽으랬던가?”
록흔은 씁쓸히 웃었다. 무공을 잃은 터라 너무 쉽게 당했다. 귀나 요괴보다 잔독한 것은 사람이어니, 그 염에 녹아 죽기 마련. 마치 그 밤인 듯 그녀는 장기짝이 미끄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하루였는데 끝이 그리 참혹했었다.
딱.
따악.
호류무는 귀를 세웠다. 장기짝 때깍거리는 소리 외에 다른 게 더 있었다. 반은 범인지라 뉘든 못 듣는 게 그에게는 들렸다. 몸을 곧추세우니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닿았다. 발끝을 세운 것은 짐승, 가분히 움직이는 두 몫은 여인의 것, 좀 더 묵직한 것은 사내에게서…… 더불어 앓는 소리가 있었다.
“……!”
어찌 저런 속도인가 싶었다. 시간을 뚝 잘라내어 온 듯, 위험하다 외칠 틈도 없이 침방 문이 열렸다. 호류무는 눈을 지릅떴다. 온전한 적막, 그러나 침입자는 적잖았다.
“무엄하다, 물러서라!”
호류무가 대성질호하였으나, 뉘도 끄덕하지 않았다. 가장 앞에 선 것은 은소현과 장월한, 일순에 금빛 눈이 살천스레 들끓었다.
“훗.”
픽 웃는 소리, 그리고 너울이 검게 날았다. 맵찬 바람만 같아 호류무는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청정히 핀 꽃일랑 그 깁 새로 숨었으니 맑진 것은 덮이고 탁한 기운이 급작스레 커졌다.
“장월한, 네가 감히!”
“인간도 아닌 것이 큰소리는, 저리 비켜라!”
그리 외치는 것은 묘매였다. 오래 묵은 듯해 요기가 엄청났다.
“도사님, 듭시지요.”
제일 뒤서 든 이는 도사였다. 이마 위에 도드라진 글자는 둘, 그리고 출산이 임박한 여인을 어깨에 둘러멨다. 록흔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익히 알던 것들이 사내 안에 섭슬려 있었다.
“하상효!”
록흔이 부르는 소리에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어마, 묵비 도사님. 저 계집이 꽤나 영리하네요?”
묘매가 실긋 웃으며 하는 소리에 록흔은 눈을 가늘였다. 분명 최근에 들은 이름, 귀에 설지 않았다.
“묵비……? 그럼 산호의 쟁들 또한.”
“이런, 너무 박식하시잖소, 호분중랑장 나리.”
마상여가 분명했다. 그러나 겉피만큼은 은무하가 그리 찾던 하상효였다. 그 초상대로 생겼으나 선기는 일호도 뵈지 않았다. 록흔은 천천히 일어섰다.
“너, 몇이나 삼킨 건가?”
록흔이 느끼기에 그저 한둘이 아니었다. 하많아 셀 수조차 없을 듯했다.
“글쎄, 몇이던가?”
마상여는 친국 도중에 잔독하게 시푸른 손을 씹어 삼켰다 했다. 그 자리서 바로 죽어 검은 피가 한 말은 족히 꿰져 나왔다던가? 록흔은 입귀를 비틀었다. 겉이야 어찌 바뀌었든 파륜이란 글자는 놈의 이맛전에 선명했다. 비틀린 표정 또한 준미한 얼굴로도 가리지 못해 그대로였다.
“고문이 잔학하니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염이란 놈이 참 끈덕지지 뭔가? 이루지 못한 것도 많고, 몽림에서 당한 것도 그렇고 해서…….”
“그래서, 뉘를 발랐나?”
“우선, 도력 높은 이를 하나 삼키고…….”
마상여가 비죽이 웃었다. 그의 어깨에서 배부른 여인은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동남동녀를 수백 빨았지. 그리고 하상효란 놈 겉피가 쓸 만하여 슬쩍 주웠고, 뭐 사연이랄 것도 없지?”
“허면, 그 임부는?”
돼도 오래된 일이었다. 록흔은 턱을 으득 당겼다. 나릿나릿 잘도 꼬아 놓은 참, 은소현은 날실이고 장월한은 씨실일 터. 거기에 무상피든 동시든 리갈이든 잡다하게 끼었으니, 뉘든 간에 작정을 해도 단단히 한 것이다.
“아, 궁금하시군그래.”
마상여가 해죽 웃더니 임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 뵈는 순간, 록흔도 호류무도 우뚝 굳어 버렸다. 산고에 시달려 잔뜩 일그러졌으나, 그녀도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황룡의 황후를 그대로 빼닮았지. 고명하신 의원께서 손을 보태 주셔서 말이야.”
“곽우안도 한패로군!”
록흔이 날파랍게 좨치자, 마상여가 눈을 번득였다. 계집의 옷을 입었다 해서 영 계집이 된 건 아닌 모양, 원수는 여전히 만만찮았다.
“하하하! 호분중랑장살이를 아무나 못한다더니, 대단하다.”
마상여가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묘매가 장단 맞추듯이 깔깔대는데, 그 곁에서 소현도 월한도 낯빛이 어두웠다. 오직 록흔만을 표독스럽게 할기니 그 눈에 검은자보다 흰자가 더 많았다.
“아무튼, 조용히 사라져 줘야겠다.”
“물러서라! 감히 황후 폐하께 이 무슨 패악이냐!”
호류무가 록흔을 막아섰다. 그에 마상여가 비죽비죽 웃었다. 서슬 퍼렇게 하는 말이나 놈은 마냥 귀여운 듯했다.
“설치지 마라, 인호야. 새끼 고양이는 가르랑가르랑 목이나 울려야지, 어디서 호통질인고.”
“입 닥쳐라!”
호류무가 발검하는 순간, 마상여가 호부 하나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찰나라 그 움직임이 뵈지 않았다.
“여석위부동!”
노란 부적 위에 짙붉게 씐 것은 피였다. 주문 읊자마자 주서는 지렁이처럼 스멀거려 물뱀인 양 살천스레 솟구쳤다. 그 즉시, 호류무의 이마에 앙칼지게 들러붙었다.
“크헉!”
호류무는 눈이 가려지고 입이 막혔다. 어깨가 빳빳이 굳더니 이내 정수리부터 발부리까지 돌인 양 단단해졌다.
“자, 기르시던 고양이 새끼는 석상이 되었고. 이제 황후께서도 조용히…….”
발경할 수 있다면, 이 가슴에 빛칼만 꽂히지 않았다면. 록흔은 눈귀를 야멸치게 찢었다. 우선은 윤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사앗!
수연도가 맑진 기를 흩뿌리며 나왔다.
“하긴 전대 호분중랑장께서 그리 쉽게 가진 않겠지.”
“뭐 하는 거요? 시간이 많잖소!”
소현이 어서 죽이라 외치자, 월한도 흰 눈으로 마상여를 보았다. 어전시위들이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듯싶어 소마소마한 참이라 저런 여유가 마뜩찮을 뿐이었다.
“뉘 올까 조마거리나? 내가 친 결계를 우습게 아는군.”
“그보다 후환 없이 마무리 지어야…….”
“이래라저래라 나불댈 양이면, 한구석에서 곱답게 서 있든지!”
마상여가 을러, 소현은 혀끝만 깨물었다. 칼자루 쥔 건 저쪽이니 분하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쉬익!
마상여가 우수를 펼쳤다. 더 이상 파르랗지 않으나, 쏟아져 나오는 냉기는 전보다 더 그악했다. 그것은 삭풍인 양 뺨을 할퀴고, 머리칼을 차게 굳혔다.
“영화도 누려 봤겠다, 지금 가도 여한은 없겠지. 안 그래?”
“가란다고 갈까?”
록흔이 서늘히 웃자, 마상여가 이마를 접었다. 오목새김, 또 돋을새김, 파륜이란 글자는 거듭 손을 댔는지 울퉁불퉁했다. 일순, 맑진 눈이 날캄하게 빛났다. 저것이 놈의 약점, 예전에도 그랬었다.
“곧 죽어도 허세는 대단하군. 여자로 태어난 게 아깝다, 철석간장 아닌가?”
“짐승이 인간 탈을 쓴 바에야, 놀랄 일도 아니다.”
“무어!”
마상여가 할씨근댔다. 그러나 록흔은 미동조차 없었다. 목숨을 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려고? 힘 잃은 지금 아이를 살리는 게 그 수 하나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저들 모두 짐승이니 가하지 않았다. 약한 구석 뵈면 짓밟을 터, 의연히 맞서는 것 외에 할 일이란 바이없었다.
“좋다. 용감무쌍한 황후께서 결정하시지. 너냐, 아이냐? 뉘 먼저 엘까?”
마상여가 빙수를 들이대며 씨익 웃었다. 그 시선 향한 곳은 커다랗게 부푼 배, 격노 일어 연빛 눈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사방이 적이나 두렵지 않았다. 록흔은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도를 바특하게 잡았다.
“입부터 나불대지 마라. 어림없으니.”
“나 묵비, 은원은 확실히 갚는다. 천묘에서 내 손을 잡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연이었겠지만, 아쉽군그래.”
“천만에.”
침방만이 이계일 터. 저 밖에 전을 겹겹이 에워싼 시위들이 있으나 작금엔 소용없었다. 어서 죽으란 시선들은 차가운데, 목숨 구할 길은 바이 보이지 않았다. 록흔은 눈귀를 자그시 비틀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뇌리로 되뇄다.
“도사님, 주왕야께서 진노하실 터인데요.”
묘매가 가르랑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초록빛 눈이 반작반작했다.
“까짓, 수가 틀려 그랬다면 어쩌겠느냐?”
“그분 칠왕야랑 같이 보시면 아니 되어요.”
“그래 봤자!”
일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가조의 첩과 바꿔치기 하면 되었던 것이 점점 그 목숨을 앗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투억!
언 바람이 록흔을 후려쳤다. 두세 걸음 물러서면서도 그녀는 금인(칼)을 놓지 않았다. 뼈가 바스러진 듯 독하게 아렸다. 그러나 신음 따위 입술 비틀어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