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11
연록흔 – 111화
“어어, 기별도 안 가는 모양이지? 아무렴, 고매하신 분이니 이 정도로는 아무렇잖을 터!”
록흔은 일부러 배를 감싸지 않았다. 뉘라도 오길 바라며 시간을 끄는 수밖에. 신상궁이 되돌아오면 낌새를 챌지도 몰랐다. 그녀는 마상여를 똑바로 응시했다. 잔금 없이 곧게 보았다.
“하나 묻자.”
“오호, 뭐냐?”
마상여가 시퍼렇게 웃었다. 그 눈에서 야만이 반득댔다.
“곽우안은…….”
무공 없이 하던 것, 스승께 배웠던 벽사였다. 록흔은 눈을 가늘이고 사방을 살폈다. 어딘가 벼리가 있을 터였다. 산호에서 봤던 것이 이 안에도 분명 존재했다.
“작생이라 불리던데.”
조급해하면 눈이 흐려진다. 록흔은 스승의 말을 떠올리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드맑고 또 맑져야 뵐 터. 그녀는 청정심을 지니려 애썼다.
“저 여인 또한 작생이 다듬었나?”
마상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비듬하긴 했었다. 똑같이 만든 건 작생이지만 말이지.”
“그런가, 정말 놀랍군.”
록흔은 귀를 바짝 세웠다. 먼 옛날 사령들에게 둘러싸였던 때처럼 온몸을 올올이 일으켰다. 작은 소리들이 오그르르 끓어 들리고, 빛점들이 파르르 반작였다.
“도사님, 저 계집 특이한 가락지를 끼고 있어요. 예 옮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묘매가 상합지환을 보고 눈을 칩떴다. 불눈이 녹색으로 번득여 꼭 구슬만 같았다.
슥.
록흔은 자진해서 가락지를 뺐다. 소천께서 함께 지니신 것이지만 저들의 눈을 덮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마상여가 한 발 가깝게 다가왔다. 그때였다. 묵(墨) 자가 그녀의 눈 곁으로 흐릿하게 지났다.
“상합이로군.”
마상여가 눈을 진지하게 빛냈다. 말로만 듣던 돌이었다.
“아직 묻고픈 게 남았다만.”
록흔은 수연도를 바투 쥐었다. 그 때 마상여가 지환에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생도 네 이마는 어쩌지 못했나?”
마상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화가 짙어질수록 록흔에게는 숨은 것이 뵀다.
“너, 뭐라!”
“파륜은 지울 수 없는 네 죄업이다. 되살아도 돋는 것을 의선이라서 고칠까?”
묵(墨), 견(犬). 전자는 가슴팍에 후자는 저기……. 록흔은 흐리마리 돋은 것을 향해 시선을 날파랍게 돌렸다. 그리고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죽어라, 북풍편!”
사아악!
챙!
수연도와 한풍이 부딪쳤다. 칼끝은 마상여의 가슴팍에, 바람 끝은 보꾹을 향해……. ‘묵’ 자가 물크러지고 ‘견’ 자는 바스러졌다. 아지랑이 일듯 시야가 흔들렸다. 찰나, 록흔은 어깨를 움켜쥐고 비척비척 물러났다. 마상여 역시 가슴을 훔켜잡고 몇 걸음 물러섰다. 깊이 베어 핏물이 손가락 새로 진득하게 흘러 나왔다.
“이 계집이 겁이 없군!”
결계의 한 벼리는 놈에게 들었던 참, 단단히 폐쇄된 것이 사물사물 풀렸다. 여러 코를 꿰어 놓은 줄, 다른 하나는 천장에 있어 그 역시 다르르 울렸다. 마상여가 제정한 구역은 조금씩 발겨지고 조금씩 깨졌다.
“이제 곧 사람들이 온다. 은소현, 어떡할 텐가?”
황성 안에 좀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일찍 내칠 것을 인의를 들어 그러지를 못했다. 록흔이 좨쳐 보자, 소현이 입술을 앙등 물었다.
“여기까지다, 그 입 다물게 해주지. 빙동!”
맵차게 인 바람에 수연도가 도망(칼날)부터 도병(칼자루)까지 얼어 들어갔다. 트득트득 쩍쩍 얼어 바닥에 되게 떨어졌다.
“죽어랏!”
미처 피할 새가 없어 록흔은 마상여의 빙수공을 정통으로 맞았다. 동풍에 제대로 받혀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 한복판이 얼음 칼에 깊게 찔린 듯했다. 밭은기침 끝에 핏물 섞인 얼음덩이가 싸라기처럼 흩뿌려졌다.
“너!”
마상여가 비명인 양 외마디 소리를 냈다. 록흔이 푸릇한 입술로 달막대는 걸, 그는 지릅뜬 눈으로 보았다.
“도사님, 어찌하여 죽지 않지요? 살점 튀고 뼈 바숴져야 할 터인데요. 돌도 얼어 깨뜨리는 바람이…….”
록흔이 허연 숨결 내뱉으며 기침을 쿨럭쿨럭 했다. 잗다란 덩이들이 얼음꽃인 양 그녀의 입귀로 목으로 돋아 흘렀다. 이렇게 곱다우니 녹록하게 본 모양, 마상여는 제 오른손을 꽉 훔켜쥐었다.
“서둘러요. 뉘가 이쪽으로 옵니다!”
월한이 다급하게 외쳐, 마상여는 고개를 틀었다. 한쪽에서는 가조의 첩이 신음하고, 바로 앞에서는 황제의 아내가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도사님.”
묘매가 고개를 갸웃대더니 얄밉상스레 웃었다. 뭔가 사악한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
“촉박하니 버리고 가지요. 황성 아래 지하에는 재미로운 것들이 가득하다잖아요?”
“마굴……?”
마상여가 록흔을 내려 보았다. 동사 직전이라 그녀는 온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주왕야께 드릴 게 아니면, 사령에게 주시어요. 저년이나 뱃속에 든 것이나 서로 뜯으려 덤빌 거 아니겠어요?”
묘매가 방싯방싯 웃어, 마상여 역시 싱긋이 웃었다.
“묘야, 영특한 것. 좋다, 그리하자.”
그 뒤론 기억이 조각조각 깨어지고 갈라져, 록흔은 편린들만 떠올릴 수 있었다. 마상여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또 그 어깨에 얹혀져, 한참을 질질 끄셔진 채로……. 그다음은 어찌 버텼는지 어찌 지났는지 흐리마리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마도굴, 그녀는 다른 어느 곳보다 배가 그리고 허리가 아팠다. 추락의 여파로 산통이 시작된 것이다.
***
월한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 아이, 미울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외려 고우니 맑은 눈을 바라볼수록 속울음이 났다. 내 아이면 좋았을 걸, 내 아이였으면……. 속절없는 되뇜에 뵈지 않는 눈물만 짙어졌다.
“우리 은이, 참 어여쁘지?”
“예, 마마.”
“젖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지?”
“예, 유모가 그러더이다.”
“폐하를 닮아 총민하게 자랄 것이야, 그렇지?”
“그러믄요.”
“안아 보련?”
소현이 내밀어 월한이 아기를 받아 안았다. 가은이라 이름 지어 비록 궁주이나 황제의 장녀였다. 서로 어미인 듯 아이를 보는 눈이 각별했다. 소현은 그분과 닿을 접점이라 여기고, 월한은 그분의 혈육으로 보았다.
“아앙.”
배가 고픈지 잘 놀더니 아기가 칭얼댔다.
“유모에게 데려가라.”
“예, 마마.”
소현이 눈을 치뜨자, 여해가 바로 받아 안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매양 방긋 대고 웃기나 하면 좋으련만.”
“힘드십니까?”
“잠시 안아도 손목이 시큰하고, 질고 지린 건 곁에 가기도 싫으니……. 세상 어미들은 모두 상을 줘야 한다.”
월한은 픽 웃어 버렸다. 젖 한 번 물려보고 연한 살 헌다 물리치더니, 소현은 작금 어미 사정은 다 아는 듯 말했다. 가즈럽기 한량없으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미 진 싸움이니 대강 하시면 좋으련만.”
“장부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월한이 잘라 말하자, 소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 낳고 다시 곡기를 물려 그녀는 예전처럼 세요설부였다. 바람만 건듯 불어도 날아갈 듯 생겼으나, 그 안은 모질고도 사나웠다.
“좀 거닐까?”
“예, 마마.”
월한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 못했다. 연록흔이 마굴로 떨어지고, 황상께서는 전장으로 가시고……. 은소현이야 그분 날개를 꺾어 가지련다 하지만, 제가 바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곁에서 모시고 싶으나 그런 것을 원치는 않았다. 황제로서 높으신 분을 왕야로 떨어뜨려, 그 모습을 어찌 뵈랴? 눈에 씐 것이 이제야 벗겨지는 듯, 파르란 눈에 후회가 일었다. 은사군이 주북에 왕궁 터를 잡았다는데 모두 다 하릴없다 여겨졌다.
“이리 귀를 대어 보면…….”
몇 발짝 앞서가던 소현이 잔디 위로 엎드렸다. 그녀는 치맛자락에 풀물 배는 것도 보얀 뺨에 풀내 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작이는 눈이, 붉게 휜 입술이 섬뜩하게 고왔다.
“그년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저이에게 온태를 달여 먹일 때 내 눈이 저랬을까? 월한은 비로소 맑은 눈이 되었다. 홍인전에서 마상여를 부추길 때 내 입이 저랬을까? 그녀는 새삼스레 소스쳤다.
“애새끼도 그년하고 함께 울겠지. 애앵애앵 이러면서…….”
월한은 차마 대꾸치 못했다. 파르란 눈이 점차 젖어 들었다. 무엇을 바랐던가, 무엇을 했던가? 회한이 짙어 낯빛만 어둡게 갈앉았다.
[록흔, 장모께서 안 계시니…….]산실청 세우고 출산달이 되면 지엄한 황성이래도 친정어미가 들어와 머물 수 있다 했다. 어미 없음을 안쓰러워하는 말이라 록흔은 부러 겁나지 않는다 씩씩하게 굴었었다.
[내가 곁에 있어 주마.]몸부림을 치며 신음을 깨물며 록흔은 가륜만을 생각했다.
[당월도도 차지부도 나만은 못할 것이다.]허리를 칼로 에는 듯, 파르라니 찬 몸이라 그러한 통증이 더욱 버거웠다.
[이게 무엇인지요?]눈앞이 흐린데 산실에 붙였던 그림 하나가 스쳐 보였다.
태의감에게 들은 것을 읊는 듯 가륜이 웃으며 봐주었었다. 그러나 정작 록흔 곁에 있는 것은 하많은 사령들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르물며 배를 하비는 아픔을 참아냈다.
[록흔, 저 꽃 피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라지고 또 까라지길 이틀, 록흔에게는 변변한 산자리도 없었다. 고석, 백문석, 양모전, 유둔, 백마, 세고석, 겹겹이 깐 것은 저 위의 산실에 있어 태의 또한 예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찢어 아이를 싸고 또 태를 갈무리했다.
[저 종은 아기가 태났음을 알리는데.] [폐하께서 울리셔요?] [음. 그래, 봄아씨.]소천이 곁에 없어 더욱 서러웠다. 그악스런 산고 끝에 율이 태어났을 때, 그 순간을 록흔은 결코 잊을 수 없을 듯했다. 핏물과 점액을 뒤집어썼으나, 세상없이 어여쁘고 소중한 아기였다. 목숨 걸어 낳은 아이, 모녀는 탯줄로 이어져 온전히 하나였다.
[그러니 걱정 말고…….]세 가닥의 핏줄, 연붉고 연푸르러 구불구불 꼬인 것. 록흔은 제 스스로 그 탯줄을 잘랐다. 어미가 되었음을 절실히 느껴 기진하여 혼절하면서도 가슴은 그저 부듯했었다.
“폐하, 물이라도 조금 더…….”
호류무가 불러 록흔이 눈을 조금 들었다. 섧게 되짚던 것이 그에 끊겼다.
“고맙다.”
흐리마리하던 빛이 제법 맑아진 참, 그만큼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록흔이 곧게 보자, 호류무가 입귀를 보드랍게 우그렸다.
“한풍 맞으신 곳은 어떠신지요?”
결계 너머는 아수라도, 율의 몸에 들어가고자 날뛰는 것들이 바글바글했다. 산통 시작되어 지금까지 푸르뎅뎅한 얼굴로 울부짖으니, 일각도 편하지 않았다. 록흔은 발광하는 청심들을 곁눈으로 보았다. 지신이 통째로 옮겨 끌어 그 밭이 지금은 사념천 곁에 함께 있었다.
“점점 나아진다. 아무래도…….”
동풍 맞은 곳이 공교롭게도 전중혈이었다. 바숴질듯 가격당해 웬만하면 죽었을 터나, 빛칼이 방패 노릇을 해 그 충격이 상쇄된 듯했다. 그리고 또한……. 록흔은 율의 가슴에 놓인 호부로 시선을 내렸다. 천묘에서 건네받았던 것, 신상궁이 안달하여 품에 지닌 게 우연찮게 도움이 됐다.
“록아, 네가 한증을 앓았던 게 외려 득이 된 듯싶다.”
지신이 끽끽대며 하는 소리에 소린이 눈을 반짝 떴다.
“독도 상복하면 듣는 독이 없듯이, 네 몸이 앓으면서 치유되면서 한사에 익숙해졌던 거지.”
“하긴 검도 얼릴 냉기면, 영감탱이 말이 일리가 있군.”
“그래서 내 생각이다만.”
지신이 찢긴 눈으로 호류무를 쳐다보았다.
“어떠냐, 호랑이 총각.”
“예……?”
호류무가 금안을 가늘였다. 지신이 이어하는 소리에 저마다 놀란 빛인데 인호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호류무, 불허한다.”
록흔이 맵차게 끊자, 호류무가 고개를 저었다.
“주군, 하게 해 주십시오.”
이 입 저 입 다 다물렸는데, 아기 율만 잔약하게 울었다.
***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나니, 그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이기나 지나 흉은 크게 남아 이러한 비극일랑 신들이 노는 투자(주사위)인지도 몰랐다. 더 선하거나, 더 악하거나, 승패와는 관계가 별반 없었다. 제비뽑기만큼이나 제멋대로니 위정자들은 어찌 보면 박도(노름꾼), 그 아랫사람만 아등바등하다 죽어 나갔다.
스윽, 슥.
벼루못의 묵즙이 마를 무렵, 종이도 다했다. 이한은 붓을 놓고 턱을 괬다. 황상께서 주남에 오신 지 벌써 두 달여, 임을 보필하며 써 내려간 것이 제법 두툼했다. 전기로 묶으면 한 권은 넘칠 터, 그새 전지(싸움터)는 주남 전체로 크게 번졌다. 예서는 삶과 죽음이 한 겹 차이라 붓놀림마저도 여유롭지 않았다.
바삭.
새로운 면이 펼쳐져 붓끝에 거칠게 긁혔다. 지천한 들꽃은 군마가 지르밟고 숱한 목숨은 칼날 아래 스러지나, 그래도 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즈윽.
종이 위 텁텁하게 스미는 것은 먹물이나, 붉은 피인 양 짙고 또 비릿했다. 이한은 이마를 깊게 접었다.
“오셨습니까?”
“예.”
“이리 오셔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그리 말씀 마십시오.”
산기슭에 회색 승복 위로 양당갑을 걸친 이들이 하많았다. 번 들고 섰던 이가 고개를 숙이자, 다른 이들도 차례로 합장했다. 주남에서 가장 가까운 민우성, 반긋하게 들린 얼굴마다 눈빛이 올졌다.
“작야에 유격전으로 입으신 부상이 크다 들었습니다만.”
“대수롭잖습니다. 예서…….”
낯빛 파르래 눈빛은 드맑아, 사내는 승복을 입었어도 삭발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속가제자인 듯싶었다. 범상이 아니라 보는 눈이 절로 수그러들 지경, 승군 대장 법선은 손 보태러 온 이를 차분히 응시했다.
“곧 올라오실 겁니다. 조금 전에 기별이…… 아, 저기 오십니다.”
일군의 무리가 창검을 들고 산을 올랐다. 제각각 옷이 다르나 행동은 일사불란했다. 병부시랑을 지낸 유만이 이끄는 민우 의병들이었다.
“뵙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유만입니다.”
“유귀라 합니다.”
유만이 공수하자, 법선 곁에서 사내가 응대했다.
“아, 그러면 본이 어찌 되시는지요. 문내를 따지오면…….”
“버들 유가는 아닙니다.”
사내는 유귀로 알려져 있었다. 특정한 의군에 속한 바 아니나, 전선을 따라 남하하며 유격을 도왔다. 먹장삼 흩뿌리며 칼 쓰는 솜씨가 날파라 저들끼리 숙률이라 칭했다.
“족류 되오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터인데요.”
유만이 걸걸히 하는 말에 유귀는 입귀만 조금 치올렸다.
“유거사님!”
정탐 갔던 승려 하나가 내달아, 유귀 앞에 섰다.
“거의 다다랐습니다. 골짜기 어귀에 막 당도했습니다.”
“예, 그러면.”
유귀가 검푸른 바람인 양 말 위에 올랐다. 호운산 협곡은 지세가 험하나 주남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준봉이 양쪽으로 늘어서 매복 따위 꿈도 못 꾸는 곳, 그런즉슨 유격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철럭.
화살 한 대가 호록에서 나왔다. 유귀가 매겨 당기자마자, 창공으로 높다랗게 솟구쳤다.
“갑시다.”
“예!”
법선이 번을 휘두르며 휘하 승군을 독려했다. 유만 역시 검을 높다랗게 들었다. 건너편 협곡, 그곳에 유귀와 함께 온 승려들이 있었다. 신호가 닿으매 수풀 새에서 빛이 반짝반짝 돋았다.
투투투투!
두두둑!
나뭇가지가 크게 꺾이고 된바람이 일었다. 인마가 효한하게 쏟아지자 산자락이 다르르 울렸다.
“으헉! 복병이다!”
“군량미를 지켜라!”
의병들은 가파른 산비탈을 쾌속 질주했다. 저마다 천둥 치듯 벼락 치듯 내다르니, 남연의 병참로가 마구 끊겼다. 황룡의 기술로 만든 포, 황룡의 들에서 앗은 병량, 황룡의 울에서 끌어낸 마소……. 남연군은 혼비백산하여 나르던 것을 팽개치고 도검을 바투 잡았다.
핑!
피잉!
살이 야멸치게 내달렸다. 유귀가 연달아 내쏘니, 시우가 후둑후둑 내렸다. 정통으로 맞아 쓰러지고 고꾸라진 이는 숱하나, 그 뉘도 산멱은 뚫리지 않았다.
“와아아아!”
돌풍이 인 듯 의병들이 협곡 양쪽에서 남연 병참단을 우르르 휘몰아쳤다. 쓸어 담을 기세로 돌진하니 뉘는 말에 깔리고 뉘는 번에 크게 찔렸다. 칼에 베고 창에 뚫려, 남연은 옴쭉도 못하고 짓밟혔다.
“스님! 군량은 지켜야 합니다.”
유귀가 건너편에서 내달아 오는 승려를 향해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으나, 생명을 앗는 것은 기껍지 않았다. 불살생이어니 유만의 무리와 승병이 다른 점이었다.
턱!
커다란 칼이 휘둘러져 검기가 날캄하게 일었다. 점점이 뿌려지는 피, 그새로 뵈는 것은 얼굴에 흉이 크게 진 사내였다. 유귀가 그쪽을 보더니 고갯짓을 까닥했다. 그 둘을 선두로 올무 놓듯이 에워싸 들어가니, 남연군이 우수수 졌다.
사문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침략을 대비해 튼튼하게 쌓은 것이 되레 장애가 된 참, 성곽에 벽와를 덮어 올려 물 샐 틈조차 없이 단단히 뵀다. 가륜은 날캄한 눈으로 수호를 응시했다. 건듯 분 바람에 물무늬가 동그랗게 깨졌다.
탁.
전화 번진 곳은 다름 아닌 황룡, 바로 자신의 산하였다. 날이 갈수록 황폐해지고 피폐해지니 볼 적마다 눈이 들끓었다. 두 달여 동안 이렇다 할 전진도 후퇴도 없어 심사가 사나웠다. 가륜은 고삐를 바투 당겼다. 그에 월영이 바로 몸을 틀어 마갑이 철럭철럭 부스댔다.
“간의대부.”
“예, 폐하!”
“적교가 올라갔군. 어찌할까?”
하문 떨어지매, 이한이 눈을 명명히 빛냈다. 적교는 본디 수호 위에 걸쳐진 다리로 평시에는 성안으로 드는 통로로 쓰였다. 그러나 작금엔 높이 들려 성벽에 바짝 붙어, 그 길이 끊겼다. 수호가 깊고 그 바닥이 점성 높은 펄이라 이대로는 건너기가 용의치 않았다. 더불어 저 아래에는 죽창이 수없이 꽂혀 있었다.
“폐하, 우선 수호를 메우는 수가 있사옵고.”
“음.”
“금랑천을 메워 홍수를 일으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수호를 급히 불리면 성벽이 쉬이 무너질 것이옵니다.”
가륜은 듣는 내내 칼빛이었다.
“또한 포를 쏘아 성벽을 부수는 수도 있사옵니다.”
단순히 땅을 되찾는 것이면 전자보다는 후자들이 나았다. 그러나 저 안에 깃든 것은 사람이었다. 가륜은 눈을 바짝 조프렸다.
“사문 백성들이 아사 직전이라 했던가?”
“예, 폐하. 밀정들에 의하면 남연군이 그야말로 목숨 끊기지 않을 정도만 식량을 푼다 합니다.”
가륜은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록흔을 묻은 후에 남연, 서로, 예하가 밀물인 양 들이닥쳐 발호했다. 그는 검을 틀어잡았다. 아내를 잃었으나, 백성들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위장군!”
“예, 폐하.”
“수호를 메워라.”
“존명!”
위장군 백효기의 지휘 하에 용위군이 엽렵히 움직였다. 곧 해자를 메우기 위해 전호차(장갑차)가 동원돼, 향군 수백이 그것을 밀었다.
트득.
트드득.
흙을 채우고 나르는 동작이 일사불란했다. 병사 각자가 전호차의 일부인 양 맡은 소임을 다하니, 사백 자가 넘는 그 폭에 토낭이 가득 실렸다.
드륵 드르륵!
전호차가 지축을 울리매, 양마성(수호 안쪽에 위치한 낮은 성벽) 너머로 남연군이 새카맣게 몰렸다.
팟, 파앗!
파, 파, 팍!
화살비가 살천스레 내렸다. 이름하야 상자노, 창만치 굵다란 살 세 대가 동시에 발시됐다. 병사 서른이 노 하나를 충당하매, 위력은 높아도 장전 시간이 길었다. 그러나 수백 대가 벌여져 있어 쏟아지는 속도가 빗줄과도 같았다.
퍽!
퍼벅!
쇠뇌가 토한 것은 수호 너머의 전호차에 직선으로 닿았다. 그러나 차의 높이가 성벽과 맞먹고, 쇠가죽을 덧대 그 겉피가 두터우므로 큰 타격은 없었다. 수호에 살비가 쏟아져 포말이 부옇게 올랐다.
“좌중랑장!”
“예, 하명하소서.”
“돌문(성벽 속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문)을 살피도록.”
“존명!”
진과가 수천 기를 이끌고 수호를 타고 돌았다. 사문성 지세야 작전 회의 시 숙지한 것이라 일호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우중랑장!”
“예, 폐하.”
“전군을 맡아라.”
“존명!”
수호가 메워질수록 화살은 더 촘촘히 쏟아졌다. 본디 공성전의 주체는 기필코 열려 하고, 수성전의 주체는 기필코 닫으려 하니……. 황룡과 남연, 두 군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크그그그긍!
가륜이 내그어 혈룡이 포효했다. 창천이 길게 찢겨 붉은빛이 선연하니 황룡의 사기 또한 드높이 치솟았다.
“총공격!”
“와아아아아!”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커다랬다.
트륵트륵!
보군이 용맹하게 나서매, 그 뒤에서 소차가 둔중하게 움직였다. 여덟 바퀴 굴러, 도르래 커다랗게 돌아, 굵다란 밧줄 따라 망대가 높이 올랐다.
콰콰쾅!
성벽 위에서 파천뢰가 크게 터졌다. 천지가 흔들려 망대가 다르르 울렸으나, 정찰병은 노련하여 눈도 꿈쩍 안 했다.
시, 시, 식!
콰쾅!
여장(사격을 위한 구멍이 뚫린 성의 담장) 너머에서 포병은 탄환을 만지느라 궁전수는 노를 다루느라 눈 뜰 겨를도 없었다. 적루마다 걸린 것은 붉은 주작기, 푸른 황룡기는 이미 내려져 뵈지 않았다. 남연군 또한 사기가 드높으매 함성소리가 커다랬다. 성가퀴 가까운 곳에 주융이 있을 터, 그러나 아직 나지지는 않았다.
“운제를 가져와라!”
백효기가 명하자, 그 울림이 성벽을 타고 올랐다. 이미 수호가 메워져 그 위를 운제(긴 사다리가 장착된 차)가 지르밟고 지났다. 그 위로 불화살이 후드득후드득 듣는데, 사다리는 양마성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만개하라!”
끼긱, 끽!
도르래가 듣그럽게 돌아, 세 겹으로 접힌 운제가 기다랗게 펴졌다. 이 끝에서 저 끝이 백 자는 족히 되니 웬만한 성벽과 비듬했다. 굵다랗고 짱짱해 저것이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싶었다.
퍼걱!
사다리 맨 위의 갈고리가 성벽에 걸쳐졌다. 그 즉시, 보병들이 질려창을 꼬나 쥐고 평지를 걷듯 올랐다. 그 움직임이 효한해 마치 지네와도 같았다.
끼기기긱!
할활거(도르래) 휘휘 돌아 야차뢰가 떨어졌다. 지름이 여섯 자가 넘는 차바퀴는 다섯 치 장못을 빡빡하게 박아 이름대로 야멸쳤다. 한 번 올랐다 내리면 운제를 오르던 이들이 추풍낙엽인 양 떨어지니, 피눈물을 흘리거나 골수가 터지거나 척추가 부러졌다.
트트트트!
쇠못마다 살점 묻어 선혈이 낭자했다. 예서제서 비명 돋은 후에 운제에 남은 이는 거의 없었다.
“전군 진격! 역퇴하면 목을 치겠다!”
백효기가 일갈하자, 용위군이 다시 전진했다. 송충이 눈썹이 불뚝 올라, 저마다 발이 빨라졌다.
둥! 둥! 둥!
북소리 퍼지매, 사기 또한 진작됐다. 쇳소리 또 쇳소리, 철성 또 철성……. 전장은 굉음 천지라 웬만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사!”
쾅!
쿠츠츠츠.
용위군 포대 쪽에서 진토포가 맵차게 터졌다. 화력이 그악스레 강해 지난 자리에 남는 것이 없다더니, 마면 한쪽을 옴팍 깎아 무너뜨렸다.
“장전, 조준, 발사!”
퍼엉!
화약을 다져 넣으면 포는 아가리로 희부옇게 뿜었다. 천지진동하매 포탄은 하늘로 솟구치고, 땅에 반쯤 묻힌 포신은 뜨겁게 달았다. 군교마다 그 그을음과 볕에 절어 얼굴이 검었다. 눈시울을 바투 좁혀 각을 가늠하니, 거듭 쏜 포에 저 위 성벽이 떡인 양 바슬바슬 떨어져 내렸다.
“궁전수, 앞으로!”
저마다 신비궁을 장전한 참, 궁수들이 보무당당하게 대오를 갖췄다.
“일렬, 발시!”
타, 타, 타, 닥!
여장 안에서 상자노를 다루던 이들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일선이 장전을 위해 허리를 굽혀 앉자, 그다음 줄에 선 궁전수들이 활을 높이 들어 산 과녁을 향해 겨눴다.
“이열, 발시!”
“삼열, 발시!”
“사열, 발시!”
발사 후에 숙이면, 그 뒷줄이 나서기를 반복했다. 두 자가 훨씬 넘는 현이 한 번씩 울 때마다 살은 응룡(날개 지닌 용)인 양 날아올랐다. 바람칼 스치길 수만 여, 양마성 너머에 매복한 남연군이 전멸했다. 핏물이 질펀하여 땅에 스미고 또 그 위로 흘렀다.
파아아앗!
화살 한 대가 살별인 양 날파랍게 솟구쳤다. 창천을 발기더니 성벽을 넘었다.
찌이익!
각루(성의 네 모서리에 위치한 대형 망루) 위에서 교만스레 나풀거리던 적기가 단번에 두 조각으로 찢겼다. 그야말로 신기라 궁수가 누군지 저마다 두리번대며 보았다.
파아앗!
살이 살천스레 일어 동쪽 각루에 매달린 것을 짓찢었다. 주작기가 연달아 발겨지니, 남연군은 잠시 주춤대고 황룡군은 기뻐 부르짖었다. 사수가 뉜지 알려지매, 성 아래 이들은 더욱 환호작약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가륜의 손아귀 안, 신비궁은 아직 현을 잘게 떨고 있었다. 햇발은 검은 갑주에 부서지고 검남빛 동공에 어렸다. 사람들은 모두 기쁜 빛이나, 그들이 밟고 선 땅은 참담했다. 깊게 갈앉은 시선이 붉게 해진 이들을 향해 떨어졌다.
“사문성을 탈환하자!”
“금일 안에 되찾자!”
“황제 폐하, 만세!”
“대황룡 만세!”
그때 돌문이 열려 남연군이 표한하게 쏟아져 나왔다. 후위를 치려함, 그러나 집금위가 매복하고 있어 녹록찮았다. 두 무리가 서로 맞닥뜨리니, 바야흐로 사문 탈환전이었다.
데꾼한 눈마다 깊이 없는 수렁 같았다. 주리고 앗겨 저럴 터. 가륜은 창 아래를 굽어보다 돌아섰다. 더는 아플 줄 몰랐거니, 그러나 무딘 가슴에도 살점은 남았다. 예서제서 백성들이 숱하게 상해, 깊이 든 것이 저릿하게 당겼다. 제왕이 뉜지 몰라야 태평성대라 했던가? 무위에 가까운 통치는 요원하니 봉안이 깊다랗게 팼다.
“폐하, 신 이한이옵니다.”
“들라.”
태수 관저는 본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깨지고 뜯겼으니 전투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떠한가?”
황명으로 성안을 살핀 바, 이한은 낯빛이 썩 좋잖았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옵니다.”
“기사한 이는?”
“이만이 넘습니다.”
“역병은 어떠한가?”
“물을 통해 빠른 속도로 퍼져 감염자와 사망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예서 더 갉을 것이 있던가? 간의대부, 시육을 풀어라.”
“예, 폐하. 지엄하신 명 받들겠나이다.”
이한이 되나가고, 가륜은 홀로 남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보고에 의하면 사문에서는 남연 휘하에 든 후 식인을 행했다. 꽤 여러 날 지속된 것, 사람이 사람을 씹는 막다름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