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09
연록흔 – 109화
“록흔!”
“…….”
“대답해, 이런 장난 따위…….”
가륜은 이를 윽물었다. 금방이라도 록흔이 ‘오셨어요?’ 하며 나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우둔우둔 뛰어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찰나, 짓찧고 짓이기는 듯 심통이 그악스레 죄어 들어왔다. 어언간, 파르란 시선이 침상께에서 멈췄다.
사랏.
야울야울 타는 촛불 끝, 하얀 깁이 하르르 날았다.
“아니다!”
가륜은 부정부터 했다. 심장이 뒤집혀 그 소리밖에는 안 나왔다.
“…….”
침상 위에 누운 게 아내일 리 없었다. 성깃한 설라가 전신을 뒤덮어 얼굴은 뵈지 않았다. 가륜은 고개를 저었다. 들춰 보지 않아도 분명 아내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저 혼자만 그리 믿는 모양, 다른 이는 그렇지 않다 여기는 듯했다. 잡아 뜯기는 양 울어 젖히는 궁녀들, 벙어리가 된 대신들, 눈을 피하는 서조모……. 모두 한빛이었다. 가슴을 되게 채인 듯 극심한 통증이 일시에 돋았다.
“폐하,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가륜은 숨이 막혔다. 심장이 생으로 발겨져도 이렇지는 않을 터. 가슴이 호독호독 아려 숨쉬기도 괴롭고 말하기도 괴로웠다.
“황후 폐하를 지켜드리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
아내가 죽었단다, 동그랗게 배불러 잘 다녀오시라 햇솜처럼 미소 짓더니……. 아내가, 내 아내가, 록흔이……. 몽사인 양 실감 나지 않았다. 또한 믿을 수도 없었다. 가륜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여자가 록흔일 리 없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황후 폐하께옵서 그리 가셔서 하릴없이……. 폐하, 제발 이 몸을…….”
신상궁이 우느라 가락거리는데, 가륜이 입귀를 비긋 틀었다. 칼금빛이 그 눈 안에서 맵게 일었다.
“닥쳐라.”
사늘하고 나직한 어조였다. 그에 예서제서 울음소리가 얕게 잘게 잦았다.
“곡하지 마라, 목을 벨 터.”
“폐하, 소인들을 죽여 주소서!”
궁녀 백여 명이 읍소하는데, 가륜에게는 그 뉘도 제대로 뵈지 않았다. 눈은 그저 열리고 귀는 그저 뚫렸으니, 뇌리에서 빙빙 도는 것은 단 하나였다.
[폐하,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좋은 일과…….] [나쁜 일이…….]가륜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깊게 팬 눈시울이 잘게 떨렸다.
‘나쁜 일이라고? 그저 나쁘다 뱉으면? 그리하면? 양전, 다였나?’
탁.
사악!
하얀 깁이 조금 끌렸다. 함치르르한 머리칼이 조금 드러났다.
‘이리되었는데…….’
심장이 발작하듯 떨었다. 간장이 바특하게 오그라진 듯했다.
‘아니다.’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냥 없었다 치부할 수 있는, 상처 입지 않았다 말하면서 잊을 수 있는, 내 의지로 이겨 낼 수 있다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그런 얕음이 결코 아니었다.
펄럭!
깁이 수수러졌다.
‘……!’
가슴 위로 모은 손, 그중 하나 네 번째 손가락. 비록 빛을 잃었으나, 상합지환은 아내의 것이었다. 떼어놓지 말라 신신당부했던 그 가락지였다. 가륜은 눈을 조프렸다. 뉜가 심장을 바투 쥐고 비트는 듯했다.
‘록…….’
깁 치워져 촛불 아래로 하얗게 누운 이가 드러났다. 그 얼굴 본 순간, 가륜은 그대로 굳었다. 폐도 심장도 여타 그 무엇도 그예 딱 멈춰 버렸다.
“황상!”
태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방으로 들어섰다. 난가를 타고 바로 쫓아온 차, 그 눈에 황후의 시신이 바로 담겼다.
“그…….”
분향할 적마다 태후는 가슴이 먹먹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찌 그리 허망히 갔을까 생각하고, 혹여 살릴 방도는 따로 없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빙상 위에 놓여 생전 그대로인 시신을 바라보았다. ‘할머님’이라 부르며 미소 짓던 모습도, 봄볕같이 다사하여 곱다웠던 모습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작금에도 저렇게 고우니 그냥 잠든 것만 같았다. 애참하고 애운하여 그녀는 목이 메었다.
“황상, 이미 가신 분이니…… 편히 보내 드려야…….”
이승에 남은 이가 미련두면 저승에 편히 못 든다, 극락으로 가실 터이니 그라도 위로 삼으시라…… 그러한 말이 차마 아니 나왔다. 태후는 짓무른 눈을 또 찍어 냈다. 요 며칠이 계속 눈물바람인 듯, 늙은 눈이 마를 날이 없었다.
“…….”
“황상…….”
“……게…….”
반은 입속에서 씹히어 반은 목에서 잠기어, 몇 음 들리지 않았건만 태후는 바로 알아들었다.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어렸으면 보듬어 안아 주련만, 작금에는 불가했다. 황룡의 극존이어니 슬픔을 치유하는 것마저도 오롯이 그 혼자의 몫, 그녀는 그예 줄기줄기 울었다.
“왜…….”
태의감조차 어찌 그리될 수 있는지 모른다 했다. 태후가 보기에도 난산은 아니었다. 외려 순조로웠던 듯, 황후는 급작스레 실혈하여 절명했었다. 생전 그리 많은 피는 처음 보았으니 몸 안에 든 것을 대부분 다 쏟은 것 같았었다.
“찰나였어요. 조산이었지만 산통도 길지 않았는데……, 그리하여 무탈하니 장하다 하였소. 한번 안아 보시려마 물었는데, 그예…….”
“태의감은…….”
“탯줄 자르고, 이 품에 안고, 그리고 바로……. 요치할 시간 자체가 없었어요.”
“…….”
“황상, 이리 슬퍼하시면…… 황후께서 가슴 아파하십니다. 그 험한 길을 한 맺혀 가시면 아니 되오.”
가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인 양 굳어서 아내의 시신만 한없이 응시했다. 그는 눈동자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속눈썹 한 번 떨지 않았다. 태후는 입술을 꽉 물었다. 차라리 오열이라도 하시면 나으련만……. 핏발 선 눈이 예리하고 날캄했다. 그 모습이 위태롭고 위태로워 그녀는 가슴이 졸아들었다. 저 아픔 이해한다 누가 삿된 입을 놀리랴?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황상께서는 이미 눈도 마음도 닫아 버리신 듯했다.
“모두 물러가라.”
“예, 태후마마.”
홍인전이 바로 비워졌다. 적막이 밀물인 양 밀려와 가륜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지지 마세요.] [폐하.] [예 있어도 항상 기도하고…….] [제 걱정은 마시고, 폐하 부디 강건하셔야…….]그때 들었던 것, 그때 보았던 것, 작금도 잔인할 만치 선명했다.
밤은 이울고 사위는 고즈넉했다.
‘록흔, 너 어찌해서…….’
항시 곁에 있겠노라, 아내는 연삽하게 약언했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가륜은 헤집어진 속을 어찌하지 못했다. 뉘가 칼탕을 치는지 아리고 또 아렸다. 흉강이 찌부러질 듯이 아파, 그는 야멸치게 잡아 비틀었다.
쿵!
가륜이 효한하게 일어서 의자가 널브러졌다. 그 서슬이 퍼래 침상의 휘장이 창백히 나울댔다. 그는 시신 곁으로 다가가 그 손목을 잡았다. 섬뜩하게 차나, 만든 살갗은 분명 아니었다. 너는 누구관데 내 아내라 불리나? 되지 않는 억지나 그저 절실했다.
치이익!
수의가 희게 찢겼다. 파르란 어깨 드러나자, 가륜은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가련히 뵈는 것은 쇄골께에 붉게 팬 신월이었다.
시이잇!
그때였다. 칼빛 하나가 바람칼처럼 다가왔다.
스극!
단도는 가륜에게 바로 스몄다. 그가 주인이므로 망설임이 없었다.
“크윽.”
봉안이 몹시 붉었다. 강마르고 메말라, 슬픔마저도 뚝뚝 갈라지는 듯했다. 눈물 따위 나오지 않았다.
타삭!
빙상 한 모서리가 되게 깨졌다. 만년설이 가륜의 손에서 바스러져 날렸다.
팍!
홀로 남아 어쩌랴, 그런 원망도 아니 나왔다. 하많은 시간 너 없이 어찌 지내랴, 그런 하소연 또한 알 바 아니었다. 그저 먹먹하니 가슴에서 머리까지 허옇게 빈 듯했다. 가륜은 서서히 갈앉았다. 의식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닌 세계……. 그러나 그곳에도 그가 그리는 바는 존재치 않았다.
***
“일엽아.”
“예, 큰스님.”
“행장 갖추고, 아니 될 수 있으면 빨리…….”
혜덕이 발우 그릇 헹구다 말고 하는 말에 일엽은 두 눈이 얄팍해졌다.
“큰스님, 어디인지요?”
“록이가…….”
“예?”
“잡히지 않는다.”
“그게 무슨…….”
“게 없는 듯.”
일엽이 두 눈을 지릅떴다. 스승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저 두려웠다. 선방에 단둘이 있는 참, 그는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했다. 스승께서 까무룩 주무시는 것처럼 뵐 때, 그때마다 어김없이 예견하셨다. 애기중일 적에는 몰랐으나 철 좀 들면서부터는 그게 다 사실임을 알았다.
“록이한테 변고라도 생겼는지요?”
“검어 뵈지 않으나, 큰일이 있지 싶다. 하니 태화성에 가 봐라.”
“예에?”
청숫물이 바리때에서 찰싹 튀어나왔다.
“큰스님…….”
“무한이 때보다 더 감이 좋잖다.”
“지, 지금…… 바로 가 보겠습니다, 큰스님.”
일엽이 발우를 주섬주섬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맥이 탁 풀린 양, 걸음새 또한 허위허위 힘이 없었다. 그가 멀찍이 멀어지자, 혜덕이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보내긴 했으되, 노승은 이번만큼은 자신이 틀리기만을 바랐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음이 어두워 눈빛 또한 어스레했다.
‘늙은이 눈 흐림이기를…….’
혜덕은 염주를 돌렸다.
‘무탈하기를…….’
두견화 휘늘어진 산자락마다 그늘이 짙었다. 해는 높건만 저 어둠일랑 두렵기조차 했다. 혜덕은 입귀를 일그러뜨렸다. 허연 눈썹 아래로 뵈는 눈이 명명했다.
타랑!
처마에서 풍경소리가 맑게 깨졌다.
황제가 칩거한 지 정확히 닷새 만에 홍인전이 열렸다. 태후가 수라 젓수시라 권하러 갔다가 차게 내쳐진 이후로는 뉘도 감히 그 곁에 얼씬거리지 못했었다. 문 넘으면 목을 베겠다는 말, 뉘든 걱정 보태면 들었던 말이다. 이래저래 대신들은 좌불안석이었다. 황후께서 저 안에 계시니 국장도 가하지 않고, 상심하신 분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없었다. 그런즉슨, 하많은 시간이 그저 지났다.
“황상…….”
인녕전에서 부랴사랴 달려온 참, 태후는 빛발 속에 앉은 황제를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보았다. 벼려낸 검보다, 바위산 꼭대기보다, 황상께서 더 날캄하셨다. 봄빛이 사위고 없어 예전보다 더 맵차게 강마르신듯, 바라보매 가슴이 아팠다. 이 문이 영영 열리지 않을까 몇 날을 걱정했으니 그래도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용안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국장부터 치러야겠습니다, 할머님.”
그동안 식음을 전폐하였으나, 가륜은 그 음성이 카랑카랑했다. 낯빛 또한 표표해 어느 정도는 추스른 듯싶었다. 태후는 적잖이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산 사람에게는 나름의 삶이 있어, 죽은 이를 마냥 그리워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야지요.”
“아이는…….”
태후가 눈을 반짝 떴다. 어미 잡은 아이라 저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였다. 그나마 한시름은 덜은 듯해 그녀는 서둘러 말을 받아쳤다.
“국저(태자)는 건강합니다. 황상, 데려오라 할까요? 여봐라…….”
말 떨어지자마자 어린것이 유모에게 안겨 왔다. 배냇짓을 하는지 아기가 자면서도 입을 쫑긋거렸다.
“꿈을 꾸시나 보옵니다. 국저 아기씨께서 이렇게 주무시다 잘 웃으시나이다.”
유모가 감히 눈을 못 들며 하는 말에 가륜은 입귀를 실긋 틀었다.
“젖도 잘 드시고 잠도 잘 주무시니…….”
가륜은 어린것을 내려 보았다. 턱도 없이 작은 녀석, 잘못 들면 바스러질 것 같은……. 그때 아기가 눈을 찡긋댔다. 활짝 웃으니 그 아비는 속이 뒤집혔다. 어미는 멀리 보내고 무엇이 좋아 그리 웃느냐? 꿈에서 네 어머니라도 보는 것이냐? 그는 이를 지르물었다.
“황상, 한번 안아 보세요.”
태후가 안겨 주어 아기는 가륜에게 넘어왔다. 세상에 난 지 이제 열하루, 황달기가 있어 연한 살갗이 노르스름했다. 안았으나 무게가 거의 없으니 그저 공허하기만 했다.
“가율.”
“아앙.”
제 이름을 알아들은 것처럼 아기가 눈을 떴다. 일시에 커다란 멍울이 가슴께에서 치올랐다. 가륜은 눈귀를 자그시 틀었다. 아이는 아내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으아아앙!”
가륜은 율을 그러안았다. 록흔이 품어, 그예 남기고 간, 하여 결코……. 잗다랗고 다사하니 언 가슴에 한 점 작은 온기로 남았다. 그러나 아직은 그게 다였다.
“울지 마라.”
아기의 맑진 눈에 가륜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살 만하니, 설움 따위야…….”
말로는 못하겠어서 가륜은 눈으로 품었다. 슬픔을 주절댈 만큼 여유롭지 않으니 그는 이미 황무지였다.
‘너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내겐 아내였다. 강해져라, 널 다독이지는 않을 테니. 못난 아비라 제 슬픔만 보는 까닭이다.’
가륜이 눈귀를 일그러뜨리는데, 그 곁에서 태후는 속이 삭삭 아렸다. 죽은 아내를 그대로 닮은 아들이니 그 속이 오죽하시련가? 통곡하는 슬픔보다 저리 건조한 것이 외려 더 애참하게 닿았다.
“황상, 이제 수라를 젓수셔야 합니다. 보체 보중하셔야…….”
“심려 마십시오. 산목숨이 죽기야 하겠습니까?”
“황상, 그리 말씀하시니 할미가 마음이 놓입니다.”
“아이의 양육은 할머님께서 맡아 주십시오.”
“그럼요. 걱정 마세요.”
율이란 이름이 있건만, 가륜은 그 이름을 부러 입에 담지 않았다.
[가율……, 빛날 ‘율’ 자로군요.]록흔의 음성이 바로 귓전에서 들리는 듯했다. 가륜은 맵차게 돌아서 아내가 있던 곳을 살피살피 보았다.
‘이제…….’
저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익숙지 않은 바늘에 손 다치던 아내도 없고,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서책을 읽던 아내도 없으며, 늦은 밤까지 훤히 불 밝히고 기다려 주는 아내 또한 없을 것이다. 가륜은 이를 사리물었다. 록흔은 없었다, 어디에도. 깊게 팬 눈가에 잔 경련이 희미하게 일었다.
***
늘 그렇듯 여월루에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은 사월 스무아흐레, 은록 황후의 인산일이었다. 바깥이야 애도의 흰빛 일색이나, 이 안은 달랐다. 흥청대고 난잡하니 그저 즐거울 뿐. 진파루는 높다랗게 올라서 주지육림을 내려 보았다. 원화가 탐족의 개한테 당한 후, 돈이 예전처럼 곱지 않아 조금은 심드렁했다. 그 해사하신 손이 무영랑이었을 터. 더는 이곳을 찾지 않으니 없던 한숨이 제법 늘었다.
“후우…….”
남초(담배) 연기가 짙었다. 진파루는 한 모금 야무지게 빨고, 그 흐림 새로 아래에 널린 군상을 보았다. 뿌리 없는 자, 두터운 뿌리로 다른 뿌릴랑 말리는 자, 뿌리 없는 체하며 물은 죄 빠는 자……. 개중 가장 역한 건 세상 모든 것을 빨려 눈 뒤집힌 거대 뿌리였다. 그녀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짙붉은 세사 치맛자락이 벌어져 그 새로 뵈는 허벅지가 비천하게 하얗다. 전 같으면 어차피 물장산데 무슨 상관이랴 하겠으나, 작금에는 썩 개운치 않았다.
“진파루님, 주객께서 찾으십니다.”
여월루 총관 각사였다. 진파루는 수하를 할긋 올려 보고는 입귀를 어그러뜨렸다.
“누구, 밀실에 있는 태근들 말이냐?”
“예에? 아……, 예.”
눈치 빠른 각사라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에 진파루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각사, 돈이 될 것 같나?”
분명 짜증 내는 빛이었다. 각사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울었다. 요즈음 주인께선 그리 좋아하던 돈이 시들하신 듯했다.
“예, 아마도 거하게 될 겁니다.”
“그래? 그럼, 진파루답게 가 봐야겠지?”
진파루가 일어서자 그 목에 매달린 색색의 보석 구슬이 드밝게 달랑였다. 기루의 주인이 어느 기녀보다 요염하니, 그니 걷는 양일랑 춤이라 봐도 좋았다. 탐스런 엉덩이가 얇은 천 아래서 좌로 우로 불거지매 사내들의 눈이 바로 좇아 따랐다. 는실난실 걸어, 삼단 같은 머리채가 보드라이 흔들렸다.
사락.
옆트임이 깊은 치마 새로 보얀 속살이 감질나게 보였다.
사라락.
어느 사내놈은 턱이 주욱 빠졌다. 그러나 저런 수캐 따위 알 바 아니라 진파루는 어둑한 복도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찾아 계셨습니까?”
진파루는 문 밖에 섰고, 그들은 문 너머에 있었다. 화려한 밀실 안에 사려 앉은 여덟이 그녀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달뜬 얼굴들이 몇, 해석 불가한 얼굴이 또 몇……. 그녀는 기괴하게 하얀 얼굴로 상긋 웃어 버렸다.
“술을 올릴까요, 안주를 올릴까요? 아아, 안주로군요.”
“총민하구나. 어릴수록 좋다.”
잘생겼으나 짐승 닮은 사내였다. 진파루는 붉은 입술을 깊다랗게 늘렸다.
“저번 것들처럼 야리야리한 것으로요? 여월루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게 무에 있겠습니까?”
“열넷, 열다섯. 어릴수록 좋다. 처녀이어야 하고.”
“흠, 그건 꽤 값이 나가는걸요.”
“상관없다.”
“저분께 들여보내면 되겠습니까?”
진파루의 시선이 닿은 곳에 또 다른 짐승이 있었다. 수려하여 잘났으나 이마에 도드라진 글자가 몹시 다라웠다. 아마도 저 속 발기면 오물투성이일 터. 어연번듯한 겉피와 달리 사내에게선 역한 내가 풀풀 났다.
“어딜 보는 거냐?”
짐승이 사납게 외치매, 진파루는 나른히 웃어 버렸다.
“계집이라 별수 없이 보았으니, 용서하셔요.”
네가 잘나 그런다는 소리라 사내는 더는 성내지 않았다.
“엊그제 들어온 애가 하나 있긴 하죠. 농투성이들이 딸자식을 팔아도 처녀애는 비싸게 값을 부르니 은괴 한두 개로 때울 생각은 마세요. 중개비도 만만치 않고…….”
말 맺지도 않았는데 술상 위로 묵직한 게 올라앉았다.
“그거면 충분한가?”
벌어진 아가리 새로 금빛이 찬연하게 돋았다. 분명 금괴어니 진파루는 눈이 가늘어졌다.
“도사께 매일 한 명씩 들여보내, 할 수 있나?”
“물론이죠.”
“그만 나가 봐라.”
각사가 들어도 두 팔이 휘청할 지경, 자루는 몹시 커다랬다. 진파루는 상그레 웃으며 짐승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넘어 나갔다.
탁.
문 닫히자마자 두런대는 소리가 잘게 크게 돋아 들렸다. 진파루는 귀를 벽에 댔다. 그리고 숨을 가만 죽였다.
“명세제가 미치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늙은 목소리, 턱이 늘어진 자였다.
“우리가 너무 쉽게 보았던 거요.”
애젊은 목소리, 돈 냄새 풍기던 이였다.
“천만에요. 황상께서는 몹시 상하셨습니다. 겉에 난 상처야 약으로 낫는다지만, 속이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름다우나 새된 목소리, 깁 너머로 표표하던 여인이다.
“속에 든 멍, 안으련다?”
사내답게 아름다운 목소리, 은빛 눈 예리하던 사내가 분명했다.
“그건 당연히 내 몫이지요.”
가살스레 미운 소리였다.
‘보자, 그러니까…….’
저 안에서 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진파루는 고개를 반긋이 들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역란이로군.’
그저 심드렁했다. 그분이나 한 번 더 뵈었으면 좋으련만, 왠지 요원하지 싶었다. 진파루에게 대단한 충심 같은 건 애초부터 없어 나라가 뒤집히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황제는 속이 깎이고, 저들은 배가 차오를 터. 바로 이 밤에도 처녀애는 죽을 것이었다. 그녀는 비죽대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
‘…….’
습관이었다, 오래도록 밴 습관. 격무 후에 돌아왔듯이 가륜은 이 밤에도 주인 없는 빈방을 찾았다. 심장이란 게 원래 다치면 쉬이 낫지 않는 모양, 시일이 지나도 심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엉긴 피 채 굳지 않았는데 생딱지를 거듭 뜯어내는 꼴, 그러나 예 오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탁.
가륜은 록흔이 앉던 의자에 몸을 묻었다.
‘…….’
낮에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해야 할 일이 지천하고 바라보는 사람 또한 하많아, 그럴듯하게 의연한 척하며 용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은 사정이 달랐다. 어둠이 내리덮이면 외피 따위 바삭 깨져 예 아니면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희미하게 남은 향이나마 아내의 것이라 다듬다듬 더듬을 뿐. 가륜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곱씹으며 자학을 거듭했다.
‘거기서…….’
어제 록흔을 능침(능)에 묻으면서 가륜은 산 심장을 그 곁에 두고 왔다. 마굴에서 험히 지낸 아내라 땅 아래에 두고 싶지 않았으나, 태울 수도 없었고 그 뉘처럼 얼음인 양 굳힐 수도 없었다. 그저 이다음에 곁에 와 누우련다, 몇 번이고 약언하고 돌아섰다.
‘록흔.’
가륜은 가슴께를 훔켜잡았다. 작금 이 안에 지닌 것은 죽은 심장이나, 그저 피요 살은 아닌 모양. 아내 생각하면 살천스레 뛰니 설죽은 듯했다.
‘연이란 것, 그리 짧았던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데 매양 그리 물었다. 삶이 강말라 무미하니, 해 뜨면 낮이고 해 지면 밤이었다.
‘참혹하잖나.’
가륜은 장인을 떠올리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제 어미 닮지 말라 그리 바랐건만, 어찌 이리 박복하여 아비 가슴을 파느냐……. 그 핏물 돋은 눈이 꼭 제 것만 같아 애참했었다.
‘보았나, 너로 인해 우는 이들…….’
록흔의 지인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대여 뒤를 따르니, 능묘까지 가는 길이 온통 설백빛이었다. 아내에게 청혼하고자 증광시를 쳤던 이는 천담복(관리의 상복) 속에서 울고, 피붙이인 양 거둬 키운 노사는 잿빛 장삼인 양 바래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었다. 부접들 또한 망연한 슬픔 속에서 숨죽여 곡하노니,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이 눈물에 갈앉았었다.
‘……부질없다. 너 없으니, 다…….’
일순, 심장이 그악스레 짓눌렸다. 가륜은 입귀를 실긋 비틀었다. 태의감은 이것이 마음의 병이라 했다. 몸은 강건하나 마음으로 인해 통증이 이니 해약일랑 바이없었다.
다랏.
상정화가 다소곳한 빛으로 맑은 향을 흩뿌렸다. 가륜이 록흔에게 천금(시신 위에 덮는 이불) 덮었을 때에 두 망울이 동시에 개화했었다. 열두 송이 모두 홍예 어려 지금껏 고우나, 그에게는 조금도 곱답지 않았다. 저 향도 언젠가는 바랠 터. 그러나 아내에 대한 기억은 언제고 온전할 듯했다.
‘아이가 잘 큰다 하는데, 네게는 뵈겠지?’
방 안 여기저기에서 아내가 쓰던 물건들이 뵀다. 가륜은 이를 사리물었다. 흘리지 못한 눈물이 하많은데 눈은 외려 뻑뻑했다. 그 안에서 몽친 듯, 터지지 않았다.
‘선황을 그리 경멸했는데, 아비 노릇이 쉬운 게 아니더군.’
주인 잃은 자수틀이 한구석에서 처량했다.
‘가엾은 아이란 건 알겠는데……. 네 생각에 그 얼굴 보는 게 싫으니, 못된 아비 아닌가?’
록흔이 유일하게 완성한 자수였다. 가륜은 보드란 깁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햇살 따스한 오후에 아내의 피를 머금어 눈이 붉어진 용, 보얀 손끝도 또한 붉어서……. 그때 아내가 했던 말, 하나도 잊히지가 않았다.
[신상궁한테 배우는데도 잘 늘지는 않고……. 곧잘 이리돼 버려서요.] [제가 이런 재주는 없다고 말씀 드렸…….] [그립고 또 그리운걸요.] [계신 자리 무겁고 번다함을 번히 아는데, 어찌 매양 입에 담겠어요. 그저 그립고 그리워서…….] [마음에선 노래가 된 듯…….]삶이 잔독하고 또 잔혹했다. 홧홧한 기운이 눈으로 가슴으로 왈칵 밀려 올라와 가륜은 비단을 아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우둔대며 뛰는 것, 쏟아지려 하는 것……. 그는 금빛 깁에 얼굴을 묻었다. 천에 보드라이 밴 것은 아내의 향기, 그는 그예 한없이 침잠했다.
“…….”
“……요.”
“……아요.”
“괜찮아…….”
분명 환청이 아니었다. 누군가 곁에 있어 보드레하고 따뜻한 것이 뺨에서 느껴졌다. 선잠이 들었던 모양, 가륜은 지르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폐하, 항시 곁에 있어 드릴게요.”
그때 들었던 말이라 커다란 멍울이 목으로 치밀었다.
“록…….”
온전히 벗은 여체였다. 그러나 아내는 아니었다. 가륜은 그 어깨를 훔켜잡고 뒤로 밀쳐 버렸다. 그저 야멸치매 무릎 위에 앉았던 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하얗게 널브러졌다. 일순, 검남빛 눈이 날카롭게 팼다.
“나가라.”
“폐하!”
“목을 자르랴?”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제발…….”
“은소현.”
가륜이 씹어 뱉듯 불러, 소현은 눈시울이 붉었다.
“누가 너더러 예 있으라 했나?”
“폐하께서 상심하셨으니, 소첩이 곁에서…….”
소현이 몸을 일으켜 가륜 앞에 섰다.
“보듬어 드릴게요.”
찰나, 가륜이 눈을 야멸치게 번득였다. 는실난실 닿는 말도 농염하게 흐무러져 사내를 바라는 저 몸도 그에겐 그저 역겨웠다. 아내의 침전을 더럽힌 것만으로 목 비틀기에는 충분하나, 예서 죽일 수는 없었다.
“망자는 명부에, 생자는 금세에……. 폐하, 이 은소현이 곁에 있으니…….”
“닥쳐라.”
“폐하, 황후는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가륜의 눈이 날캄하게 찢겼다. 지르문 입술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소현도 알았다. 분명 이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그다음이다?”
“저 아니면 뉘인지요? 죽은 이가 어찌 폐하의 침상을 덥힐 수 있을까요?”
“그 입 찢기 전에 다물라!”
“그니보다 제가…….”
“산 네가 열이라도 황후 곁에 미치지 못한다.”
“폐…… 폐하…….”
가륜이 살천스레 되받아쳐 소현은 그예 더듬대고 말았다. 저분께 곁이란 일절 없었다. 온통 연록흔뿐, 그녀는 이를 앙등 물었다.
“지킬 체면이 있다면, 예서 나가라.”
“어찌해서 절 이리 박대하십니까?”
“널 들인 이부터 목을 쳐야겠군.”
소현은 눈을 감았다. 황상께서 평주로 떠나시던 날에 아이 한번 안아 달라 소원했었다. 그러나 눈길 한번 주시지 않으셨다. 그때 굳힌 마음이 작금에 온전하게 굳었다. 미련 두고 여지 남겼더니 저 혼자의 설레발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었군요, 폐하.”
푸르스름한 눈귀에서 맑은 물이 똑똑 돋았다. 좀 더 달라질 수도 있었을 터. 소현이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상처 입고, 긍지 잃어, 스러지면……. 그녀는 눈시울을 좁혔다. 보얀 뺨 위로 눈물이 줄기줄기 흘렀다. 안아야 드린다지만 그 모습 애잔하여 어찌 뵈랴? 그러나 이미 늦어 그녀는 앞만 바라봐야 했다. 이 밤에 받아 주시면 역란을 엎으려 했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다신…….”
어쩔 수 없었다는 말, 하루에도 몇 번씩 되씹으니 가륜은 미칠 것만 같았다. 태의감도 태후도 다른 이들도 그리 위로하려 들었었다. 소현이 거듭 하매, 격노가 살천스레 치밀었다.
“내 앞에 나서지 마라.”
“폐하, 일단은 가겠어요. 하지만 사람 일을 뉘라서 장담할까요?”
소현의 뇌리에 그동안의 해바라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눈이 갈쌍이는데 가륜은 눈이 찼다.
“듣그럽다.”
타앙!
문이 활짝 열렸다. 여해들이 이내 들이닥쳐 소현을 덮었다.
“폐하, 무르와가옵니다.”
소현이 고개를 숙이매, 가륜이 눈살을 꼿꼿이 세웠다.
‘거짓도 사랑도 모두 붉지요.’
가질 수 없는 이를 사랑하니 참혹했다. 소현은 이를 악물었다. 제게 주신 마음이야 있었으려고? 번히 알면서도 찌근거리게 굴었었다. 그래도 변치 않는 것, 그니 사랑이 높았으면 제 사랑 또한 낮지 않았다.
‘어찌 되든 항시 짙붉을 테니, 폐하…….’
곱다란 눈귀에 방울방울 돋은 것은 연모였다. 소현은 대수삼 자락을 여미며 고개를 떨궜다. 투명한 것이 바닥으로 뚝뚝 들었다.
***
‘아연…….’
향 사르며 되뇌는 것이라 뿌옜다.
‘당신이 지킨 핏덩인데.’
어머니의 곁, 아내의 옆, 그곳에 새로운 위패 하나가 더해졌다. 딸아이의 것이라 무한은 바로 보지 못했다.
‘못난 아비라 그예 보내고 말았어.’
밤 이슥하여 명부전은 고즈넉했다. 지장보살께서 굽어보실 뿐, 인기척은 바이없었다. 무한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어린 중생으로서 삶이 무언가 제대로 알까마는 딸애는 막 꽃봉오리 피우던 차에 지고 말았다.
‘당신 만나거든, 보듬어 주고…….’
무한은 눈이 젖어 한곳만을 보았다.
“저…… 큰스님께서…….”
일엽이었다. 그 역시 낯이 어두워 그다운 서글서글함이 없었다. 눈이 붉고 입매가 흐렸다.
“예, 스님. 곧…….”
무한은 향 하나를 더 태웠다. 공허한 연기만 마시고 먼 길 어찌 가려는지, 예리하게 깊은 눈이 물빛으로 잠겼다.
“무한아.”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무한은 고개를 조금 들었다. 스승 역시 슬픔에 상하신 터. 딸애가 가고 없음이 그 늙은 얼굴에서도 그대로 보였다. 혜덕이 손짓하여 무한은 그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귀엣말로 닿아 뇌리로 스몄다. 무한은 눈시울을 바투 좁혔다.
“……!”
칼자국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폐하…….”
무진도 진과도 말끝을 채 맺지 못했다. 깊은 밤이나 황상께서 찾으신다 하여 둘 다 우둔대며 달려온 참, 훤히 밝혀진 중화원에서 주군만이 찬 빛이었다. 지천한 봄꽃도 그 곁에서는 빛이 바래, 정원은 겨울 벌인 양 황량하게 뵀다. 달 아래 솟은 그림자가 고적하니 무딘 가슴들이 서느렇게 식었다.
“왔나?”
기척 안 내어도 그들은 서로를 그저 알았다. 옛적부터 부대끼며 지내 스스럼이 없어 단출히 있으면 그저 벗이었다.
“술을 마시면 좀 둔해질까 하고…….”
가륜이 말을 끊더니 가슴을 두드렸다.
“근자 들어 제멋대로다.”
“예, 폐하. 그럴 땐 술이 제격이지요.”
인공연못 한가운데 산이 동그랗게 솟아 누각 하나를 얹은 판, 셋은 그 위로 함께 올랐다. 술상은 미리 벌여져 주객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탁.
술잔이 탁자에 놓였다. 더운 김이 그 안에서 휘휘 돌아 솟았다.
“폐하, 아무리 좋은 술을 마셔도 예전 그 맛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무진이 진과를 쳐다보았다. 그들 곁에서 가륜은 말없이 술잔만 비워냈다.
“그게 말이다, 그땐 아무래도 뭐든 부족했으니까 더 달게 느껴졌을 거야.”
“춥고, 주리고 그랬던가?”
“아아, 그랬지.”
그들이 마혜의 마수를 피해 강호를 떠돌던 때 이야기였다.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옛적이 되고 말았다. 무진이 술잔을 비우고 한마디 하면, 진과가 한 잔 또 들이켜고 받아 이었다. 황상께서 돌아가신 황후를 떠올리시지 않도록 하는 얘기라 두 눈이 진정 즐겁지는 않았다. 술은 닳아도 정신은 평시처럼 맑졌다.
“가끔씩 그 강호의 찬바람이 그리워지기도 하니, 우습지 않나?”
“싫은 기억이 추억이 된다는 건…… 진과 네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다.”
“그렇게 되는 건가?”
진과가 빈 잔을 채우며 슬쩍 살피니, 황상께서는 눈 가늘여 달을 바라보고 계셨다. 보얗게 얽은 월구에 무엇을 덧그리시는지 그 시선이 필요 이상으로 짙었다.
“진과, 받아라.”
“아, 으응…….”
술병이 기우고, 술잔이 들리던 차였다. 가륜이 바라보아 무진도 진과도 바짝 굳어 버렸다.
“호류무는 소식이 없나?”
“종적을 알 수 없습니다.”
“녀석 됨됨이로 도타하였다 믿기 어렵습니다만.”
록흔이 그리 가고 호류무 또한 사라져, 황룡 어디에서도 인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생김이라 어딜 가든 눈에 띌 텐데 부접에도 동창에도 바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