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08
연록흔 – 108화
산의가 또 한 벌, 야드르르한 것이 앙증맞기도 했다. 예서제서 올라온 것들 중에 유난스레 눈에 띄었다. 어린 아기니 갈음하게 두세 벌이면 족할 터. 록흔은 신상궁이 이 보자기 저 보자기 푸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참으로 많기도 했다.
“이설이라는 분, 솜씨가 참 고우시네요.”
“응, 마음도 곱다랗고 생김도 곱다하지.”
원이 백일날 범산이 찾았다던가? 서찰로 전해들은 바, 이설도 아기도 진양후를 따라 현국으로 돌아갔다 했다. 록흔은 아미를 찌푸렸다. 좀 더 보살펴 주지 못한 게 내내 마음이 쓰이던 차, 배냇저고리 받고도 썩 기쁘지만은 않았다.
“폐하, 그래도 제 보기엔 이게 제일 귀하옵니다.”
신상궁이 펼친 것은 록흔이 만든 것이었다. 율이란 글자가 잗다랗게 새겨져 제법 고왔다.
“아무리…….”
“황자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터이고요.”
“황자?”
“예, 틀림없이 황자님이셔요.”
록흔은 볼우물 깊게 패도록 웃어 버렸다. 무엇으로 저리 굳게 믿는 것인지, 실랑이해서 무엇하랴? 신상궁이 우직스레 착한 사람이라 록흔으로서는 눈귀가 절로 휘었다.
“저, 그런데…….”
신상궁이 주저하며 함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폐하, 이건 올리고 싶지 않사온데, 제멋대로 하기도 그렇고 해서…….”
“무어냐, 그게?”
“은미랑 처소에서 온 것입니다. 반 시진 전에 장월한이 두고 갔다 하옵니다.”
“그러고 보니 삼칠일이 벌써 지났는데, 잊고 있었다.”
“미운 물건이라 태우려다…….”
신상궁이 말을 흐려, 록흔이 눈을 반긋 들었다.
“밉다니?”
“열흘 전에 황제 폐하께서 가시올 때…….”
무슨 말인지 대강 어림짐작이 되었다. 그러나 록흔은 끊지 않고 가만 듣기만 했다.
“은미랑이 아일 강보에 싸안고 행차를 막아섰다 하온데……. 아랫것들이 이래저래 말이 많았습니다. 알락달락 해사하게 꾸미고 마치 황후 폐하라도 되는 양…….”
“그래.”
“그 작태가 괘씸하니 되돌리려 했다가……. 송괴하옵니다, 폐하.”
“아니야, 잘했다.”
록흔은 턱을 괴고 눈을 가늘였다. 은소현을 어찌해야 하는가? 놔두자니 거슬리고, 내보내자니 인의가 아니고……. 접때 태후께서 하신 말씀으로, 그니가 태화성 안에서 늙어 죽으련다 말씀 올렸다 했다. 믿고자 했던 게 거짓이면 얼마나 참담할까? 맑진 눈에 생각이 얼기설기 어렸다.
“어찌하올까요?”
“한곳에 둬라, 어차피 예 있는 것 다 쓰지 못하겠으니.”
“예, 폐하.”
록흔이 담담히 말해, 신상궁이 함을 제 치마폭에 싸다시피 해서 감췄다.
“폐하, 저녁도 뜨는 둥 마는 둥 하셨는데 젓수실 거라도 좀 가져오겠나이다.”
“아니, 별로…….”
“건반청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곤하시니 잠시 그냥 쉬셔요.”
“신상궁, 잘 자리에 무슨…….”
말리는 소리는 아예 안 들리는 모양, 신상궁이 바로 방을 나갔다. 가륜이 신신당부하여 그러는 듯했다. 록흔이 문께를 번히 보는데 호류무가 들어섰다. 가륜이 떠난 후로 신상궁 아니면 호류무, 둘이 번갈아가며 록흔 곁을 지켰다. 황명이기에 앞서 소천의 살핌이라 그녀는 그저 기껍게 받아들였다.
“밤일랑 찬데 예 있지 그래?”
신상궁이 침방 안에 있으면 밖에 서 있으니 고생스러울 터였다. 록흔이 연한 눈으로 올려 보자 호류무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폐하.”
어린것이 훌쩍 커서 의젓하게 말했다. 록흔에게는 마냥 고물대던 기억이 많아 저런 모습 또한 귀애스러웠다.
“어때, 장기라도 둘까?”
“저, 폐하…….”
“둘 줄 몰라도 괜찮다. 내가 가르쳐 주마.”
“예.”
청홍의 장기짝이 반지르르한 오동나무 판 위에 열여섯 개씩 늘어섰다. 록흔이 붉은 것을 호류무가 푸른 것을 쥐어, 행마규칙을 가르치고 배웠다.
득.
“장 궁이라고 하는데, 궁성 밖으로 나가진 못한다. 이 안에서 한 발짝씩 다닐 수 있고…….”
“이렇게 말씀이십니까?”
“응. 그리고 차는 걸리는 것만 없으면 가로 세로 직선으로 몇 밭이라도 갈 수가 있단다, 그렇지.”
따악.
“포는…….”
백령백리한 호류무라 금세 배웠다.
“이제 대국하련?”
“예, 폐하.”
딱!
따악!
장기에 빠져 둘은 모르나, 창밖에서 꽃이 졌다. 바람 없이 지노니 하수상한데, 태화성의 그 뉘도 알지 못했다. 그늘은 뵈지 않아도 충분히 짙어 예서제서 야금야금 기어왔다.
***
주융은 전서를 잡아 구겼다. 이미 그자가 실행에 옮긴 바, 발맘발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은빛 시선이 날카로우매, 상허는 뒷목이 뻣뻣했다. 긍지라 하면 드높은 분이라 곁에서 뵙기가 몹시 면구스러웠다.
“이런 식으로는.”
“전하, 아옵니다. 허나, 질러가는 것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정정당당 겨뤄 취하려 했다. 주융은 이를 으득 물었다. 어연번듯하지 못한 일이라 마뜩찮았다. 곁에 있다면 드잡이라도 할 터. 가조란 놈 참으로 사내답잖게 다랍기도 했다.
“시일이 짧게 걸린다 생각하십시오.”
상허가 쭈뼛이 서서 하는 말에 주융은 더욱 눈을 치떴다.
“상허.”
“예!”
작금이라도 태화성에 가자 하실까 하여 상허는 소마소마했다. 왕방울 눈을 지릅뜨니 쭉 째진 흉이 톡 볼가졌다.
“가조, 묵비에게 사람을 더 붙여라.”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한풀 접으신 게 감읍할 지경이라 상허는 허리를 소리 나게 푸욱 꺾었다.
“그리고.”
“……?”
“신천산 알아보란 건, 어찌 됐나?”
“예, 전하. 그 산 명산이라 전에는 찾는 사람도 많았다 하온데, 그게 상림관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답니다. 헌데 지금은 거의 폐관된 듯싶습니다.”
“묵비의 도관인가?”
“아니랍니다. 본디는 상림진인이라 하여 산자락 아래 사람들이 죄 우러러 보는 도사가 있었는데……. 솔가지 위고 너럭바위 위고 평좌하며 있던 그 모습 뵈지 않은 이후로는 고양이 양냥거리는 소리만 음산하여 뉘도 두려워 그 산에는 오르려 하지 않는다 하옵니다.”
상허가 하는 소리에 주융은 고개만 갸울었다. 묵비란 요사한 도사가 하볐을 터. 일시에 은안이 좁다랗게 빛났다.
“본국에서 연락 온 건?”
“국왕께서 나날이 쇠하시다 합니다.”
“그래, 바람직한 속도다.”
황마묵이 갈릴수록 명이 줄 터이나 주휼은 몰랐다. 병석에서도 그 먹물 찍어 글을 쓴다 하니 문약한 군주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전하, 곧 예하에서 사람이 온다 했습니다.”
“스가 말인가?”
“예.”
스씨 가진 놈들은 모두 잡놈이니 죽는 모습도 엇비슷했다. 주융은 반년 전에 본 주검 하나를 떠올렸다. 개보다도 못한 몰골이라 쉬이 잊히지 않았다.
“전하, 곧 여월루로 가셔야 합니다.”
“알았다.”
주융은 옷자락을 걷고 일어섰다. 어깨 넓은 그림자가 햇발을 뚫고 지나매, 상허가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이내 그들 뒤로 두터운 문이 무겁게 닫혔다.
“폐하께서 잘 젓수어야 할 터인데요.”
“달이 찰수록 속이 더부룩하다 하시니 한번 올려 보려고. 지이야, 쉬잖고 이리 도와주어 고맙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께 올릴 것인데, 제가 당연히 해야지요.”
지이에게 그분은 항시 같았다. 올곧으신 분, 연심만 조금 더 넓어졌을 뿐이다.
“다음부턴 여해들 시켜 말 전해 주셔요. 그럼 제가 만들어 가져갈 테니…….”
“아니다. 뭐든 해서 올리고픈 게 내 맘이란다. 안팎으로 고우신 분이라 곁에서 뫼시니 매양 즐겁구나.”
“예…….”
지이가 상긋 웃었다. 저도 안다 하는 빛이라 신상궁은 고개만 끄덕였다.
“살펴 가셔요.”
“또 보자꾸나.”
신상궁은 산사자 화채를 자개술반에 받쳐 들고 건반청을 나섰다. 제 밑으로 아랫것이 하많으나, 그녀는 일일이 부리지 않았다. 담박하신 황후를 모시다 보니 더 그리 되는 듯싶었다.
사랏.
꽃잎 하나가 바람결에 날아왔다. 유리 안에 투명하게 담긴 선홍빛 물 위로 얄밉게도 똑 떨어졌다.
‘……!’
신상궁은 우뚝 서 버렸다. 왠지 머리끝이 쭈뼛 서고, 등이 서느랬다. 팔에도 소름이 올올이 일어섰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느냐?”
전 아래 어두운 그늘에서 검은 것이 표한하게 나지매, 신상궁은 되게 소스쳤다. 하마터면 옴팍하게 팬 그릇이 쏟아질 뻔했다. 그녀가 놀란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다름 아닌 월한이었다.
“아, 황후가 목이 타는가 보군.”
“그 무슨 무례…….”
신상궁이 제 목을 잡았다. 무언가 뾰족한 것이 극렬히 찔러, 그녀는 혀가 굳었다.
“곧 죽을 게 물은 뭐에 쓰랴?”
창그랑!
유리 깨지고, 산사자물이 하얀 대리석 바닥에 맵게 튀었다. 그 위로 신상궁이 쓰러져 유달리 보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혈고 하나가 그 살을 고물고물 파고들었다. 옴죽옴죽 비비대며 제 몸을 잘도 박았다.
“피맛이 새로우니, 좋을 것이다.”
“아악!”
월한이 소매 아래로 손을 감추더니 그늘 새로 스며들었다. 검은 너울 끝이 사리어져 비릿한 바람이 건듯 불었다. 혈고가 온전히 박힐 때까지 신상궁은 바르작대며 바닥을 굴렀다. 그 곁을 지나는 이는 바이없었다.
“흐윽!”
흰자위가 벌떡 뒤집히더니 신상궁이 맵차게 일어섰다.
타닥타닥!
탁탁탁!
산사자 화채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신상궁은 어느 한곳을 향해 휘적휘적 걸었다. 뵈지 않는 실이 당기는 양, 그녀는 마치 뉘에게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피의 부름이라 그저 절실해, 뛰다 걷다 하며 재게 몸을 놀렸다.
“신상궁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홍인전에 무슨 일이라도…….”
어언간에 태의국 앞이었다. 태의령 하나가 신상궁을 막아섰다.
“태의감을 봬야 합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서 산기를 보이십니다.”
“예엣? 바로 전하겠습니다.”
태의령은 아직 젊어 턱이 새파랬다. 그가 안으로 허겁지겁 든 후, 신상궁은 흐리마리하게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멍멍한 뇌리에서 빙빙 도는 것은 하나, 그녀는 계속해서 뇌까렸다. 황후께서 갑작스레 배가 아프다 하셨노라, 그리하여……. 되뇌고 또 되놰 입에 붙을 무렵, 태의감이 태의령 서넛과 여의들을 거느리고 급히 뛰어나왔다. 채비를 온전히 갖춘 참, 그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했다.
“하혈은 없으신가, 포의수는?”
“갑작스럽게 배가 아프다고 하셨어요.”
“그게 언제부터신가?”
“배가 아프다고…….”
“신상궁, 이보게?”
“배가…….”
태의감이 눈살을 꼿꼿이 세우더니 가장 가깝게 선 여의에게 고갯짓을 했다. 큰방상궁 이름값을 못한다 생각하는 듯, 예리한 눈이 야멸치게 번득였다.
“가세.”
“예, 영감.”
여의 하나가 뒤처져 신상궁을 부축했다. 다소 느리기는 하나, 그들도 태의감 일행을 따랐다.
“아아아악!”
홍인전의 정문인 인화문을 막 넘는데 비명 소리가 들렸다. 황상께서 안 계시는데 아기씨께서 태나시려는 모양, 태의감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황상께서 애참해 하실 터. 지금껏 곁에서 보아 잘 알았다.
탁탁탁!
탁탁!
태의감도 그 수하들도 걸음이 급했다.
텅!
침방 문이 활짝 열렸다.
“황후 폐하!”
황후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산통에 몹시 흐트러진 참, 단아한 모습은 간데없었다. 태의감을 보고 궁녀들이 입술을 물었다. 저마다 눈이 흐려 금세라도 울 듯했다.
“물러서게.”
징후는 좋잖았다. 태의감이 바라보니, 대수삼 아랫자락이 축축이 젖어 암자색이었다. 포의수는 이미 터졌다. 아무래도 아기씨께서 달수를 못 채우고 나오시려는 듯했다.
“신상궁, 태후마마를 모시고 오게.”
“예…….”
“어서, 서두르잖고!”
“예에!”
꿈에서 깨난 듯이 신상궁이 눈을 동그랗게 칩떴다. 그녀가 황망히 나간 후, 산실이 급하게 꾸려졌다. 산실청이 지척이나 작금에는 격식이야 그리 중요치 않았다. 태의령들도 여의들도 제 소임을 좇아 신속히 움직였다.
“아윽!”
태의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아악!”
비명 한 번 터질 때마다 태의감은 애가 졸았다.
“황후, 갑작스레 어인 일입니까?”
태후가 신상궁을 뒤세우고 들어왔다. 급히 온 모양, 그 숨이 몹시 거칠었다.
“아악!”
“아아아아악!”
비명 지르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황후께선 어떠시냐?”
“태후마마, 포궁문이 두 치 정도 열리셨사옵니다.”
여의감이 황후의 치맛자락을 내리고 태후를 향해 차분히 사뢔 올렸다.
“포의수는?”
“영감, 파열 또한 정상이옵니다.”
태의감은 속으로만 안도했다. 조산임을 고려하매, 천행으로 출산은 썩 순조로웠다. 비록 장막 너머에 있어 허리 아래는 보지 못하나, 그가 겪은 바로 황후께서는 여느 산모가 거치는 과정을 그대로 밟고 계셨다.
“아악!”
천장에 걸린 마비가 힘껏 당겨질 때마다 비명 소리가 드높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바투 잡아, 보얀 손등에 핏줄이 파르랗게 볼가졌다.
“황후, 조금만 참고 힘을 내세요.”
태후 역시 죽을상이었다. 그녀는 손부가 마냥 안쓰러워 눈귀를 바싹 비틀었다. 산모의 손을 잡아 주고 땀을 닦아 주느라, 노구는 잊은 듯했다.
“허어억!”
“황후, 조금 더…….”
보통 초산이라 하면 산통이 열 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 아기씨께서는 세상 보기를 몹시 바라시는 듯했다. 진행 속도가 괴이하게 빨랐다.
“영감, 아기씨께서 뵈옵니다.”
“뭐, 벌써? 얼마나?”
“동전만큼, 조금 더…….”
잗다랗게 비치던 것이 점점 커졌다. 여의감이 두 손을 내밀어 아기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흐읍!”
“황후 폐하, 다 됐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깨도 몸통도 온전히 나왔다. 여의감은 아기의 입과 코에 묻은 혈액을 닦아내며 조그만 몸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으애애애앵!”
아기가 세상을 향해 크게 울었다. 보배로운 아기씨였다. 명세제의 장자어니, 산실 밖에 있던 이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마마, 황자 아기씨이옵니다.”
태의감이 탯줄 자른 후에 태후에게 바로 고해 올렸다. 떨어지고 남은 것은 태의령 하나가 태의에 갈무리하니, 후에 태실에 묻힐 터였다.
“이런 경사가 있나? 황후, 정말 수고 많았소.”
신상궁이 산의를 내밀어 여의감이 바로 아기를 쌌다. 달수를 못 채웠으나, 갓난이는 야물고 어여뻤다. 율이란 글자가 하얀 깃저고리에서 붉게 빛났다.
“태후마마, 두 달 일찍 태나셨음에도 아기씨께서 아주 건강하십니다.”
“오오, 그렇소?”
태후가 활짝 웃으며 아기를 받아 안았다. 갓난쟁이치고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머리숱도 풍성했다. 걱정으로 몽쳤던 얼굴이 꽃인 양 벌어졌다.
“정말 잘된 일이오. 황후, 우리 황자를 좀 보아…….”
뭔가가 이상했다. 태후는 말을 맺지 못하고 손부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눈 하얗게 치뜨고, 입은 크게 벌리고……. 그것은 황후답잖게 퍼진 얼굴이었다.
“황후, 황후!”
“…….”
태후가 손 부여잡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마비 쥔 손이 힘없이 처지는가 싶더니 상합지환이 빛을 잃었다.
“태의감, 황후께서 왜 이러시오?”
구륵!
끈적끈적한 덩이가 침상 위로 몽클 쏟아졌다. 태반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참, 검붉은 피가 죽죽 흐르더니 콸콸 솟았다. 산자리가 흥건히 젖어 피못 하나가 그예 생겼다. 창졸간의 일이라 태의감도 여의감도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급사도 저런 급사가 없으니, 어느 징후도 없이 황후는 그예 숨이 끊겼다.
“황후 폐하, 폐하!”
“폐하, 폐하!”
여의들이 오열했다.
‘……!’
태의감은 그저 망연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으애애…….”
아기도 무얼 아는지 방금 전과는 우는 소리가 달랐다. 곡소리에 작은 소릴랑 바로 묻혔다. 태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꿈인 듯했다. 황후의 시신을 보다가 고개를 힘없이 내젓다, 그녀는 그예 고꾸라졌다.
남동풍이 불었다. 새론 날이려니 황충 썩는 내가 그리 역하지 않았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듯, 아침녘에 부서지는 햇발이 몹시 맑졌다. 성안 사람들은 망루에 높다랗게 올라선 사내를 고개 젖혀 보았다. 저 커다란 배에 든 것은 배포인 듯, 다부진 인상이 몹시 믿음직스러웠다.
“저 종이를 다 뭐에 쓰나?
“쉿, 조용히 해요.”
일광 아래라 홍안이 더욱 붉었다. 바람을 맞서 선 참, 황색 도복이 살랑살랑 날았다.
타랑타랑!
진여장이 눈 가늘게 뜨고 제종을 흔들었다. 그 곁에서 단음(징) 소리 또한 청상하게 돋아, 댕댕거리고 잘랑거리며 서로 뒤섞였다. 하늘은 간만에 푸르러 대광주리에 담긴 종이가 더욱 새뜻하게 뵀다.
“풍백이시여, 큰바람 일으켜 주소서! 더럽고 삿된 것들을 몰아낼 강한 바람 주소서!”
대앵…….
진여장이 한 바퀴 휘돌아 서니 단음 소리가 맑았다. 의식은 자못 엄숙해, 눈이란 눈은 모두 한곳으로 쏠렸다.
삭.
배는 커다래도 하는 양은 날파랬다.
사삭.
양발을 가지런히 모아, 왼발을 반보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을 그만큼 미끄러뜨려 다시 가지런히……. 거듭 그리 나아가 다시 되돌아오매, 일련의 동작이 춤사위인 양 유연했다. 북두인 양 걷는 걸음, 바로 우보였다. 진여장이 밟는 대로 일곱별이 지닌 힘이 땅으로 내려 스몄다.
파락파락!
“……!”
모두 가만 보기만 했다.
퍼럭퍼럭!
바람이 거세졌다.
후이익!
회오리바람이었다. 바람신의 영험인 듯, 그것은 대광주리 외에는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하많이 늘어선 바구니들이 들썩들썩 하더니, 하얗게 잘린 것이 눈보라처럼 일었다. 저마다 새를 닮아 높이 올라 파닥거렸다.
“운사시여, 상서로운 비 내려 주소서!”
제종이 울리고 단음이 울렸다. 그리고 마른하늘에서 비가 뚝뚝 들었다.
“숨탄것인 양 일어서서 황충을 삼키고 찢어라! 상합허도군응호원시천존의 이름을 빌려 명하노니, 급급여율령!”
해 아래로 내리는 비라 무지개가 연연히 돋았다. 물 닿자마자 종이들이 부피를 실하게 늘렸다. 산 것마다 깃은 하얗고 주둥이는 두툼했다. 날갯짓을 푸덕푸덕하니 사방천리가 설백으로 가득 찼다.
“아아, 오리로세!”
“오리야, 오리!”
사람들이 감탄했다. 타고 온 당나귀를 접어 품었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다. 영락없이 진짜 오리라 보는 눈마다 동그래졌다. 감탄도 잠시, 산 너머에서 짙은 그늘이 밀려왔다.
두두두두두!
츠츠츠츠!
“황충이닷!”
성 아래서 비명이 꿰져 나왔다.
“오살할 것들!”
땅은 그저 벌거니 이제는 앗길 것도 바이없었다. 황제께서 시육을 하사하신 탓에 굶주림은 면했으나, 사람들은 푸른 것 먹은 지가 까마득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악이 바친 터, 뉘인가 하늘을 향해 인골을 갉을 테냐 커다랗게 외쳤다. 누리들이 표한하게 몰려와 낯들이 희뜩하게 질렸다.
“안으로 피해!”
“어서 들어가!”
“가만…… 저길 보게!”
낮은 하늘에서 검은 무리와 흰 무리가 섭슬렸다. 이내 잿빛으로 바래 그 덩이가 커다랬다. 파닥파닥 하고 후두후둑 하니 부딪치는 소리가 몹시 듣그러웠다.
투두둑!
툭툭!
오리가 주둥이를 벌려 메뚜기를 집어 삼켰다. 메뚜기는 메뚜기대로 오리의 날갯죽지를 씹었다. 흰 깃 푸덕거리매, 두텁날개가 몽그라지고 어그러졌다. 겹눈 뒤룩거리매, 오리가 꽁지깃을 마구 떨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턱 사나운 메뚜기라고 해도 그 천적에게는 상대가 못 됐다. 오리란 놈, 한 번에 열댓 마리씩 집어 움푹한 부리 안으로 꾸륵꾸륵 잘도 넘겼다.
“옳다구나!”
“메뚜기란 놈, 오리님 밥이지!”
“얼쑤, 잘한다!”
거무레한 빛이 점점 연해져 하늘은 눈빛으로 가득했다. 저 위에서 오리들은 배가 부르고, 이 아래서 사람들은 눈이 불렀다. 간만에 웃음 지으니 이이도 저이도 낯꽃이 썩 밝았다.
“누리가 모두 죽었다.”
“우와아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일어 석벽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야 비로소 살 길이 트였으니 뉘는 눈이 갈쌍갈쌍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가륜이 입귀를 실긋 틀었다. 이제 시육을 더 풀어야 할 터. 석연찮은 것은 구휼 뒤에 살펴야지 싶었다. 그때 진여장이 그 아래서 머리를 조아렸다.
“애 많이 썼소.”
“아니옵니다, 폐하. 황룡의 백성으로서 할 도리를 했을 뿐이옵니다.”
“예는 우선한데, 온전히 잡히겠나?”
“예, 폐하. 저 오리들이 주북을 돌아 주남까지 가올 것입니다.”
가륜이 칼빛 눈으로 진여장을 굽어보았다. 선인은 바람과 같아 잡아 두기 어려울 듯싶었다.
“술이나 거나하게 대접할까 하는데.”
“그것만큼 기꺼운 것도 없지요.”
술 소리에 진여장이 모란처럼 웃었다. 홍안이 낙낙해, 가륜 또한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지금 가자면 따르겠나?”
“폐하, 그러고 싶은 마음 하나 가득이나…… 데려온 이들이 있어서 쉬이 따를 수 없겠나이다.”
진여장에게는 동시 무리가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되돌려야 할 터. 그는 난감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 보았다. 선하고 곧던 그 호분중랑장을 보고 싶으나, 계곡 깊은 그늘에 숨겨둔 그것들이 적잖이 걱정되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쉽군.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망극하옵니다, 폐하.”
“잊지 말고 들르도록.”
태화성이 여염집이라도 되는 듯 참으로 호쾌한 말이었다. 그에 진여장이 벙긋 웃으며 고개를 깊다랗게 숙였다.
“예, 폐하. 잊지 않겠나이다.”
진여장이 인사 끝에 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납작한 것이 다시 통통해져 머리가 생기고 팔다리가 생기니, 그가 훌쩍 올라타도 끄떡없었다. 바람에 구름이 몰리듯이 도인은 성문을 통과하고 들판을 타고 넘었다. 너울너울 나울나울 가분가분 잘도 갔다.
“폐하, 태화성에서 급전이 왔습니다.”
전통은 인장으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전문(황제에게 올리는 축하문)이 들었을 터. 이 마당에 하례받을 일이 무엇인지 가륜은 알지 못했다. 어젯밤 상합이 잠시 서느래진 이후로 마음이 좋잖아 태화성으로 전서를 보냈었다. 이것이 오고 그것은 갔으니 중간 어디에선가 마주쳤을 터였다.
“무진.”
“예, 폐하.”
“가슴이…… 서느렇다.”
찰나, 창동이 가늘어졌다. 이때껏 주군께서 몸이 불편하다 말씀하신 적 바이없었다. 작야도 늦게까지 깨어 계셨던 듯, 세상에 무쇠로 만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무진은 어언간 고개를 저었다.
“폐하, 의관을 부르겠습니다.”
무진이 근심 보태자, 가륜이 입귀를 어그러뜨렸다.
“아니다. 그저 심화라고 할 테지.”
“혹, 폐하…… 홍인전에 사람 많으니 깊이 심려치 마십시오.”
가륜이 무진을 날캄하게 보더니, 전통의 이음매에 붙은 봉랍을 비틀어 뗐다. 전문 위에 정갈하게 올라앉은 글귀로 검남빛 눈동자가 날파랍게 오갔다.
“황후가…….”
“……?”
가륜이 비틀어 종이쪽이 아스러졌다.
“황후가 작야에 아들을 낳았다.”
“폐하, 감축 드리옵니다.”
전사관들이 서로 불빛을 읽고 다시 불빛으로 되비추어 글로 옮겨 쓴 것, 둘도 없는 경사이니 전문에 오를 만했다. 제 일인 듯 기뻐 무진은 입귀며 눈귀에 그만큼 태를 냈다. 취옥빛 눈이 가륜을 향해 드밝게 빛났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진과는 눈이 습했다. 곁에서 지켜온 바, 이리 기꺼울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런 낭보, 다시없을 것이옵니다. 폐하, 하례드리옵니다.”
기민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내, 황자 생탄 소식이 저 아래까지 퍼져 나갔다. 구름처럼 몰린 백성들이 바닥에 엎드려 한마음으로 복된 말을 바쳤다. 기쁨 크매, 망루가 다르르 울렸다. 이이 저이 눈이 다 갈쌍했다.
“…….”
가륜은 먼 곳을 보았다. 록흔이 있을 하늘, 그쪽을 눈에 담으니 가슴이 지르르했다. 아들 얻어 기쁘나, 아내 걱정이 더 컸다. 홀로 아프고 홀로 힘들었을 터, 애잔하고 또 애잔하여 돌이라도 얹힌 듯 가슴이 묵직했다.
“폐하, 돌아갈 차비를 하올는지……?”
“아니다,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자.”
가륜이 잠시 말을 끊자, 무진이 눈귀를 날카롭게 들었다. 바로 그리하라 말씀하실 줄 알았던 터라 그로서는 의외롭기만 했다. 진과 역시 그 곁에서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시육을 걷어 들인 후에, 귀환은 아직 이르다.”
“하오나…….”
“저들 또한 귀하잖나.”
가륜이 칼빛으로 보아, 무진도 진과도 가슴이 턱 막혔다. 옛적 강호를 흐를 적에도 주군께서는 저리 곧으셨다. 그리하여 따라놓고 새삼 또 한 번 우러러 보았다.
“송괴하옵니다, 제가 생각이 얕았습니다.”
“아니, 바로 보았다. 속은 분명 그러니.”
“…….”
저런 것이 사랑이다. 무진은 주군을 뵐 적마다 알아갔다. 처음부터 홍인전에 마음은 두고 오셨을 터. 작금 또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픈 마음이실 터. 그리운 마음이란 저런 거다. 그는 연이란 걸, 시나브로 알아갔다.
“무진, 시육을.”
“예, 폐하.”
무진이 성큼 걷고, 진과도 바로 따라 붙었다. 가륜은 잠시 서서 수하를, 발아래로 운집한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저릿하매, 검남빛 눈이 짙게 갈앉았다.
***
‘…….’
가륜은 날파랍게 사위를 살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길게 늘어섰건만, 록흔이 보이지 않았다. 가지달린 촛대마다 불빛이 야울야울 타나,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정전은 괴괴하여 심해인 양 갈앉아 소리란 일절 없었다.
타앗!
매갑 잡아채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돋았다.
“짐 없는 동안.”
용음 떨어지자, 눈 떨구는 이가 하많았다.
“모두 과묵해졌잖소.”
상정화가 피기 전에 돌아오겠노라 했었다. 산후에 몸이 좋잖아 침전에 누웠거니 하는 생각은 잠시, 무언가 평시와 달랐다. 가륜은 눈을 조프렸다. 태후도 태사도 이 안에서는 그 뉘든 눈을 똑바로 들지 못했다. 그가 읽기로 두려움은 아니었다.
“우승상!”
“예, 폐하.”
가륜이 휘 둘러보자, 안 그래도 내리뜬 눈들이 더 낮아졌다.
“왜 이리 음울한가?”
“폐하, 소신…….”
“황상…….”
갈우휘 역시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태후가 입을 무겁게 열었다. 가륜은 날캄하게 좨쳐 보았다. 서조모는 그 눈귀가 이지러져 부어 있었다.
“황후께서…….”
입이 천근만근은 되는 양, 태후가 또 한마디 하고서 머뭇댔다. 황후라는 말에 저마다 낯빛이 시퍼레졌다. 눈귀마다 고인 것이 슬픔이라 가륜은 입귀를 실긋 틀었다.
“됐습니다, 할머님.”
가륜이 맵차게 쳐내자, 태후는 눈이 더 흐려졌다.
“직접 가서 보겠습니다.”
예나 제나 데꾼한 눈들뿐이었다. 가륜이 날파랍게 돌아서자, 모두 고개만 깊다랗게 숙였다. 태후 또한 고개를 떨구고 손수건으로 눈께를 찍어냈다.
휘이이잉!
월영이 크게 울었다. 그 소리 점점 멀어지매, 대신들은 사색이 되었다.
타닥타닥!
타다닥!
홍인전으로 향하는 길이 평소와는 달랐다. 이제 봄이어니 스치는 것마다 알슘달슘 고와야 하건만, 나뭇가지마다 눈 내린 듯이 허옇기만 했다. 겨울 벌판이래도 이리 차지는 않을 터. 가륜은 이를 사리물고 고삐를 바투 잡아챘다. 이내, 월영이 크게 울며 앞발을 높다랗게 들어 올렸다.
‘……!’
나슬나슬 묶여 나팔대니 다름 아닌 명주였다. 국상 시에 매는 것인데 작금에 나무마다 설백으로 휘날렸다.
‘뉘가…….’
뇌리라도 그다음 말을 하는 게 두려웠다. 심장이 험히 뛰어 머리까지 치대니, 가륜은 턱을 으득 당겼다. 눈 피하는 이들, 저마다 괴괴히 갈앉아, 하얀 깁은 애참하게 날려……. 마음속에 그늘이 점점 짙게 돋았다. 삿된 생각 따위, 담지 마라, 하지 마라……. 그는 눈귀를 야멸치게 비틀며 저를 을렀다. 그때 홍인전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그것 또한 소복인 양 검남빛 눈에 희게 담겼다.
탁.
하마하자마자, 가륜은 ‘춥다’라고 느꼈다. 아내 있으면 느껴지던 훈기가 바이없었다.
터엉!
돌쩌귀가 튀어 나가고, 문이 바숴졌다. 갑작스런 된서리에 궁녀들이 달려 나오는데 그들 모두 옷이 하얗다.
“폐하!”
가륜이 침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신상궁이 몸을 던지듯 엎드렸다. 그녀 또한 흰 띠로 머리를 묶고 소복을 걸친 참, 봉안이 일시에 사납게 패였다.
“이게 다 뭔가?”
“폐하…….”
신상궁이 퉁퉁 부은 얼굴로 가륜을 올려 보았다.
“요망하다, 예서 상복 따위를 걸치다니!”
“황후, 황후 폐하께옵서…….”
가륜이 살천스레 눈귀를 찢었다. 입매가 으득 비틀리니 신상궁은 말끝을 못 맺고 숨죽여 울었다.
“반벙어리만 모아 놨나?”
“흐으윽, 황후 폐…….”
“하나같이 어물대며 황후만을 찾는군, 반편들인가? 황후께서 어떠시다는 거냐, 응?”
“아기씨 생탄 직후에…….”
울먹대며 하는 말이라 잘 닿지 않았다. 하혈이 많았다, 급히 숨이 끊겼다, 그예 절명하셔서……. 가륜에게는 그저 먼뎃말이었다. 상궁 따위가 흑흑 흐느끼니 거슬릴 뿐, 그런 것일랑 눈 밑에도 닿지 않았다. 어서 록흔부터 봐야 할 터. 그는 휘둘러 살펴보다 멈칫 굳었다. 어느 구석, 향정에서 보얀 것이 아물아물 올랐다.
“젠장, 향은 뉘가 피웠나?”
분명 망자를 위한 것이었다. 가륜은 들끓는 눈으로 궁녀들을 훑어보았다. 세상 둘도 없이 향그러운 것도 부족한데, 저리 매캐한 것이라니……. 그 눈빛 살천스러우매, 궁녀들이 예서제서 옴쭉옴쭉했다. 그가 좨쳐 보니, 여해 하나가 비틀대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떨어뜨렸다. 소름끼치게 하얀 등피, 그것 또한 설촉이 분명했다. 검남빛 눈이 일시에 가늘어졌다.
‘……!’
침상 곁이 소등 천지였다.
“신상궁!”
“예, 폐하…….”
신상궁이 울어 잠긴 목으로 대답하자, 가륜이 매섭게 쏘아 보았다. 울고불고해야 슬픔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눈에 보았다. 저 빛은 극렬한 슬픔이었다.
“저것들을 다 치워라!”
짙은 향냄새에 묻혀, 록흔이 맡아지지 않았다. 아내 자체가 옥향이었던 듯, 저것이 더욱 역했다. 가륜은 이를 사리물었다. 물기 없는 눈이 형형히 빛났다. 분명 살기어니 이도저도 짓눌려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폐하…….”
“두말 않는다.”
신상궁은 그저 망연했다. 황후께서 어둡고 습한 길 가시려면 이 향도 젓수시고, 저 등도 드셔야 할 터. 상전 생각에 눈물이 또 주르륵 흘렀다. 이 모든 것이 꼭 나쁜 꿈인 것만 같았다.
창그랑!
옥향로가 산산이 깨졌다. 파편이 이리저리 튀어, 재는 검게 날리고 불씨는 붉게 올랐다. 토막토막 끊긴 향만큼 뉘의 숨 또한 딱딱 끊어졌다.
“록흔!”
“…….”
“어디 있나?”
“…….”
침묵은 짙고 무거웠다. 자고 일어나 어미 찾는 아이처럼 가륜은 그저 막막했다. 어린것이면 펑펑 울기라도 하겠으나, 그는 뻑뻑한 눈으로 방 안만 살피살피 훑었다. 아내를 찾으나 어디서도 뵈지 않았다. 닿는 것이라고는 듣기 듣그러운 곡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