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8
연록흔 – 18화
“명중이오!”
태강궁이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뿐,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록흔은 그저 곁눈으로 황제를 훑었다. 온주의 일을 보고하러 무세전에 들었다가 다짜고짜 사장으로 끌려온 길. 그때부터 황제는 일언도 없이 활시위만 당겼다. 이때껏 연속 일곱 발이 적중했다.
“받아라.”
크고 강한 활이 목전으로 불쑥 들어왔다. 록흔은 눈귀만 서늘히 들어 올렸다. 가륜의 갑작스런 행동에 하신도 진과도 깜짝 놀랐다. 혈룡검만치 황제의 상징인 명궁이었다. 지금껏 보필해 왔으나 황상께서 저걸 누군가에게 넘겨주신 일은 전무했다.
“왜, 버거운가?”
“아닙니다, 폐하.”
록흔은 몸피가 두꺼운 활을 잡았다. 삼 년 전에 만진 그 검마냥 이놈 역시 녹록찮았다. 드릉드릉, 각궁이 무디게 진동했다.
“활 배웁니다.”
보통 사장에서 그러하듯, 록흔은 겸허히 말하며 사대에 올랐다. 그의 곁에서 금빛 달이 아삭바삭 흔들렸다.
“많이 맞혀라.”
일개 궁사들도 남의 활은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 록흔은 제 활을 내준 황제의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혈룡검 한 번 만졌다가 마도굴로 떨어진 생각을 하면 이조차 꺼림칙하기만 했다. 그러나 얼굴만은 담담하여 그는 아무 일 없는 듯 활시위를 깊이 당겼다. 각지(깍지)를 끼지 않아 엄지가 깊이 팼다.
“괴창은 잦았다지?”
일순, 과녁을 향한 눈이 떨렸다. 록흔은 입귀를 야무지게 우그렸다. 바로 곁에서 황제가 웃기에 절로 그리 되었다.
“예. 종창으로 인한 사망자는 백스물여섯. 사건 종료 후 앓던 이들이 씻은 듯 나아 더 이상의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
록흔은 입과 손과 눈을 따로 놀렸다. 대답하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과녁을 보고 활을 다뤘다.
쉬잉!
활이 사행했다.
터엉!
“명중이오!”
만작 직후, 또 다른 살 한 대가 록흔에게 넘어왔다. 그는 말없이 오늬를 어루만졌다.
“원인은?”
“온주 호족 여수민, 휘영빈주의 수석 섬공 단용조, 단용조의 처 해미, 해미의 권속인 해진. 혈주와 괴창은 이들이 얽힌 겁략(위협이나 폭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음)과 탈회(관계를 끊고 빠져나옴)의 결과였습니다.”
살 한 대가 또 내달았다. 뾰족한 주둥이는 또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약육강식이군.”
“예. 더불어 인간의 욕심이 불러일으킨 재앙이기도 합니다, 폐하.”
록흔은 물처럼 대답하며 우아하게 팔을 틀었다. 만작 직후, 살은 공기를 매섭게 찢었다.
“자세히 고하라.”
하명은 서릿발처럼 내리꽂혔다. 진과도 하신도 숨을 죽이고 그 대답을 기다렸다. 록흔만이 두려움 없이 황룡의 주봉을 마주 보았다.
“단해미는 해인 중에서도 주항족입니다. 주항은 자개 닮은 날개를 가진 무척 아름다운 이들로 깊은 바다에 깃들어 사는데,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진주가 되고 그 타액엔 상처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진과는 내심 ‘저걸 다 어찌 아는가?’ 하는 눈으로 록흔을 할긋 보았다.
“혈주는 단해미가 만든 것인가?”
“예, 이것을…….”
록흔은 소매에서 용조 곁에서 주운 것을 꺼내 들었다. 굵직한 진주는 몹시도 보얗게 빛났다. 가륜이 받자마자 두 손가락으로 단단한 그것을 가분하게 바숴 버렸다. 역시나 붉은 살이 톡 터져 나왔다.
“여수민이 단용조를 죽지 않을 만큼만 험히 다뤄 그 처가 닦아 내고 핥은 것이 혈주로 화한 것입니다.”
“그자가 분명 단해미를 유린했겠지.”
“그러하옵니다.”
대답하는 이나 듣는 이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가륜은 칼금 같은 빛으로 어린 중랑장을 응시했다.
“괴창 건도 보고하라.”
“지항의 원인 모를 종창은 패각에서 기인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간 껍데기가 혈을 탁하게 하고 살을 곪게 해 환부를 무서운 속도로 늘렸사온데, 지항 어역사의 병부일지를 보건대.”
록흔은 말을 잠시 끊었다. 어역청의 참혹한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연했다.
“종기의 뿌리는 일관된 곳에 있었습니다. 위와 장이 위치한 복부, 그리고 고환……. 이것은 진주 모패 시술시 핵을 박는 부위, 즉 소화맹낭, 장관, 생식소와 일치합니다.”
진과는 귀를 바짝 세웠다. 사건의 전모는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해인의 짓인가?”
“예. 범인은 단해미의 사촌인 해진입니다.”
과연 영명하신 황상. 하신은 속으로 감탄을 거듭했다.
“그는 태내에서부터 해미의 반려로, 괴창은 진주조개의 참상에 여수민에 대한 원념이 겹쳐 생긴 일입니다.”
“참상이라 하면?”
진과는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빈장의 조개는 마구 살이 잘리고 이물이 인위적으로 삽입되며, 그 후에는 아픔 삭이려 끊임없이 진주액을 분비합니다. 우리네야 어여쁜 구슬이지만 놈들에겐 아린 살일 뿐이지요.”
록흔이 야무지게 말하자 진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진주를 키운다 하여 조개를 해치듯, 그 해인 역시 같은 방법으로 되갚은 것이었다.
“여수민의 집은 탄부용이라 하여…….”
이제 사장엔 활이 나는 소리는 없었다. 록흔의 맑은 목소리만 똑똑 돋았다. 가륜은 눈귀를 가늘게 접고 가만 듣기만 했다. 성긋성긋 날리는 눈발 아래, 남향의 신비로운 이야기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탄부용, 유기체인 주렴, 감금된 가희, 신묘한 기관술, 큰 바람을 내는 부채, 단용조의 복수, 여수민의 죽음……. 그 모든 사연이 마치 물처럼 흘렀다.
“……하여, 단용조는 온주의 정평부에 인도하고 해미는 바다로 되돌렸습니다. 이미 몸이 많이 상해 뭍에 둘 수가 없기에…….”
휘영빈주는 여수민의 처가 맡았다. 해미의 말로는 그녀가 가끔 용조를 만날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 했다. 그 남편과는 품이 다르니 이젠 탄부용엔 어두운 구석은 없을 터였다.
록흔이 떠나올 때, 물에 뜬 거택에는 새로운 구조물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사람이든 조개든 숱하게 진 목숨들을 기리는 위령비였다.
“비역하는 이들이라……. 그래, 해진이란 자는 어찌 처리했나?”
해진도 해미도 모두 양이었다. 단용조와 여수민 또한 그들과 같았다. 록흔은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에, 목숨 건 신언에 스러진 사내 하나를 떠올렸다.
“그자는…… 자결했습니다.”
록흔은 침울하게 말을 맺었다. 빚 갚음은 꼭 하겠다더니 해진은 제 목숨으로 대신했다. 이 목숨이나 저 목숨이나 기울고 처짐이 없으니 마음만 답답할 뿐이었다.
“납득은 되나, 만족할 만한 귀결은 못 되는군.”
가륜은 그답게 냉량하게 결론 내렸다.
“사람 상한 것은 잊지 않을 것이나, 조개가 겪는 일들은 곧 묻힐 겁니다.”
말랑한 주제에 딱딱한 체하는 놈. 가륜은 그런 것도 어여뻐 싱긋 웃었다.
“어떠냐? 녹을 올려줄까?”
“예?”
의외로운 말이었다. 록흔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아!’ 하고 말았다. 즉시 귀밑이 도홧빛으로 붉어졌다. ‘지금 받는 녹으론 어림없으니 후일을 도모할 생각입니다’, 마영에게 보낸 전서가 불현듯 떠오른 탓이다.
“갔던 일도 잘 마무리 졌고, 그래 줄까?”
“주시면, 손이 작아 받지 못하진 않습니다.”
탁!
가륜은 록흔의 손을 잡아끌었다. 태강궁을 어찌 쥐었을까? 몹시도 작은 손이었다. 한 손으로 담뿍 쥐니 여기저기 빈 곳이 많았다. 빈장 일로 생채기가 늘었는지 보드란 와중에도 거침이 잡혔다.
“작군. 이래서야 쏟아준들 얼마나 거머쥐겠나?”
창졸간의 일, 악력이 억세 잡아 빼지도 못했다. 록흔은 마뜩찮게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하, 하지만…… 여러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과히 좋지 않으니 남들과 비슷하게 지내렵니다.”
예전에 본 빛과 같았다. 록흔은 저도 모르게 그 언젠가의 대숲에서 보았던 웃음을 떠올렸다.
“그래, 알았다. 호분중랑장.”
록흔의 귓가, 금색의 반달 옆. 조그맣게 돋은 진주가 보얗게 반득댔다. 가륜은 그것에 손을 가져다댔다.
“곱군.”
귓불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록흔은 부러 모른 체했다.
“단해미가 주고 간 것입니다. 몹시도 울어서…….”
“아마도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해인의 심장은 이미 뭍에 있지 않은가?”
록흔만큼 진과와 하신도 놀랐다. 얼음으로 도신 분인 줄만 알았더니 저런 감상도 계셨던가? 그런 속 아는지 모르는지 가륜은 벌써 몇 발치 앞서 나가고 그들 곁에 없었다.
타랏!
눈꽃이 송이송이 내려앉았다. 뒤쳐진 그림자 셋이 앞서는 이를 서둘러 따라나섰다.
***
‘제길…… 이리 감기는 걸 어떻게 입고 다니는 건가?’
록흔은 온몸 여기저기에 휘적휘적 달라붙는 비단 옷자락을 떼어 냈다. 얇은 것이 거미줄처럼 느껴져 불쾌감마저 들었다.
‘정말 여자들은 용하군. 이런 옷을 입고 춤을 추기도 하고 일도 하니 말이다.’
라라라라란…….
진세전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록흔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발각되어 좋을 일은 하나도 없으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정말이지…….’
록흔은 여장을 한 자신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기변검술도 걷은 터라 강건한 무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휘록전 앞에 놓인 커다란 정심경에 비춰 보니 영락없는 여인네였다. 봉긋한 가슴도 붉은 입술도 낯설었다. 너무 유약해 보여서 짜증이 솟았다.
오늘은 정월 열엿새, 황룡대에서 천제 지낸 뒤로 보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새 록흔은 황명을 수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나 사부의 유지는 항시 깊이 새기고 있었다.
‘태저 형님께 한 약속도 있고…….’
록흔은 맘 다지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모르게 진세전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다.
‘날이 날인만큼.’
편전에선 연회가 한창이었다. 공식적인 명세제의 탄신은 나흘 전인 정월 열이틀이나, 진탄일은 금일이었다.
‘황제가 자리를 뜰 일은 없을 터.’
록흔은 조금은 큰 숨을 내쉬었다. 황궁에서 가장 고강한 이는 황제, 그 손만 묶어둔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물론 어느 누가 눈치채도록 허술히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잘될 거다.”
록흔은 스스로 위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은반에 놓인 향로를 옷소매로 한 번 더 쓸어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누구냐?”
휘록전으로 막 한 발 다가섰을 때였다. 문 지키던 거한이 송충이 눈썹을 불뚝 들며 록흔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차앙!
둔중한 창날이 록흔 바로 앞에서 멈췄다.
“허튼소리하면 가만히 안 둘 터.”
왕방울만 한 눈에 경계심이 번쩍였다.
“향아님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대신 향로를 갈러 왔습니다. 전 여록이라 하옵고, 황궁에 들어온 지 석 달이 채 되질 않았으니 잘 모르실 테지요.”
향아와 지이는 알음알음 아는 사이였다. 얼마 전에 록흔이 휘록전 일을 넌지시 묻자, 지이가 서슴없이 다리를 놓아 줘 향지기 궁녀와 서로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래, 많이 안 좋으냐?”
지이의 동무는 뽀얀 낯빛이 꽤 고운 궁녀로, 누가 빤히 보기만 해도 금세 낯꽃이 발개졌다. 연정이라도 일었을까? 향아는 준수하게 생긴 젊은 호분중랑장이 물으면 아무 의심 없이 제 주위의 사소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어언간, 록흔은 참으로 가소롭게도 사내 행세를 제대로 하고 말았다.
“예, 나리.”
닫다시피 출입이 어려운 휘록전이었다. 그 문이 열리는 것은 향을 담당하는 궁녀가 오갈 때뿐. 하여 록흔은 향아 대신 향로를 들고 왔다. 지금 낯빛 하얀 궁인은 건반청(황궁의 주방)에서 귀한 설삼주 몇 잔에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흠흠, 그러냐?”
문지기의 눈에서 의심이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나리께서 한데서 고생이 참으로 많으시다 걱정하더이다. 하여 이걸 갖다드리라…….”
그나마 남았던 것도 록흔이 내민 술병 덕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크막한 눈이 번해졌다.
“하긴 이런 맛이라도 있으니 이런 한직도 참을 만한 거라고.”
향아 역시 이리 술을 가져다준다 했다.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모양, 술도 들어가기 전에 사내의 낯이 불그레해졌다.
“어여 들어가 보시게.”
술 한 병에 건방진 혀까지 풀어졌다.
“예, 나리.”
록흔은 무릎을 약간 굽혀 예를 갖췄다. 그리고 여록이라는 궁녀의 신분으로 휘세제 가광의 위패가 안치된 사당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사락사락.
타박타박.
복도엔 무거운 공기가 하나 가득했다. 록흔은 기다란 통로를 따라 한참 동안 걸었다. 이 전의 주인은 높은 사람이나, 높이 쳐주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살아 있는 것의 기척은 하나도 없고, 어둑한 등불이 전부였다.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만 괴괴하게 떠돌았다.
‘응?’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다. 싸한 한기가 일어 다른 곳과 유난스레 구별됐다. 록흔의 눈이 한쪽으로 절로 향했다. 귀기서린 바람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발걸음이 급히 꺾였다.
끼이이익!
오랫동안 여닫지 않아 문은 뻑뻑했다. 순간, 록흔은 눈이 부셔 소매를 펼쳤다. 영롱한 빛이 사방으로 현란하게 뻗어났다.
“옥안선녀 류안, 여기 계셨군요.”
인구에 회자되던 것보다도, 문사들의 상세한 묘사보다도, 어떤 상상보다도…… 곱다시 어여뻤다. 록흔은 감탄을 거듭하며 스무 해도 더 전에 유명을 달리한 미희를 올려다보았다.
[내 아내, 류안은…… 변변치 못한 사내를 만나,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인생을 접어야 했다.]피 끓는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록흔은 어제런듯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벽에 매달린 사부의 눈은 포한이 가득해서, 보는 것만으로 절절이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죽었으나 썩지 못한 정인의 주검, 그건 누구에게라도 단장의 아픔일 것이다.
“대단하군.”
치정에 실패하여 역사에는 폭군으로 남았으나, 가광의 힘은 실로 놀라웠다. 죽어 이미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의 공력이 이러하다면 살아 있는 현 황제의 위력이 얼마만한 것인지 록흔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가광이 남긴 힘에 둘러싸여 류안은 조금도 썩지 않았다. 그저 고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백옥 같은 손목을 가로지른 가느다란 실핏줄도 여전히 푸른빛, 결 고운 머리칼도 생전과 같은 흑단빛……. 피가 돌지 않아 파리한 입술만 제외하면 살아 있을 때와 진배없었다.
“가엾게도…….”
류안은 영원불멸의 미희였다. 생전엔 뭇 사내들의 구애를 받았고, 사후엔 문객들의 시흥을 자극하는 원천으로 남았다. 별호는 옥안선녀, 색목인인 숙신의 피가 흘러 그 눈동자가 아름다운 비취라 했다. 얄팍한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었으나, 록흔은 볼 수 있었다. 극치의 미는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금은보화라…….”
휘록전엔 고인의 유품이 위패와 함께 봉안되어 있었다. 천자의 것답게 온갖 진기한 물건들이 등불 받고 휘황하게 빛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휘 넘치는 것은 미인의 주검이었다. 높은 단 위, 높은 의자 위, 류안은 비스듬히 앉아 록흔을 굽어보았다.
탁!
록흔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지이잉…….
과연 설타견의 말 그대로였다. 절대위력! 가광이 남긴 사악한 기가 접근 자체를 막았다. 록흔은 주검 주위를 감싸고도는 강한 저항에 손을 뒤로 물렸다.
‘날 어서 꺼내 줘요.’
물소리, 아니면 바람 소리? 어떠한 정령이 있어 흐느끼는지 희미한 음파가 록흔의 귀를 스치고 지났다.
“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록흔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잘못 들었겠지. 긴장한 탓이다.’
록흔은 쓴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고개를 저었다.
두우우우웅.
한시라도 빨리 자연법칙대로 회귀시켜야 할 터, 록흔은 망설임 없이 손을 펼쳤다. 그리고 그 끝에 지니고 있는 모든 기운을 모았다.
‘제발 꺼내 주세요.’
한숨 같은 목소리. 마치 미약한 바람처럼 귓가를 간질였다.
“뭐야? 설마……?”
결단코 환청이 아니었다.
‘날 내보내 줘요. 이 안은 너무 갑갑해요.’
참혹했다. 록흔은 이를 악물었다.
‘제발…….’
죽어버린 육체, 그와 함께 갇힌 영혼, 또 다른 흑영……. 록흔은 똑똑히 보았다. 옥빛 눈매 처연한 영은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어두운 그림자에 싸여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것은…….”
아마도 가광의 사념인 듯, 아니면 불귀의 객이 된 뒤에도 미련 버리지 못해 이승에 남은 백인지도 모른다.
‘어림도 없다. 류안을 놓아줄 수 없어. 돌아가라.’
묵영은 커다란 동공을 일그러뜨리며 포효했다.
“천만에!”
록흔은 거추장스런 옷소매를 걷었다. 곧 보얗고 가는 손목이 드러났다.
“죽은 자는 명부로 돌아가야지, 어째서 미련 두어 여러 사람 괴롭게 하는 건가?”
‘건방진 것! 내가 누군 줄 아느냐?’
경혈로부터 솟은 기운이 손가락 끝의 구슬만 한 점에 모였다. 빛의 구슬은 영롱했다. 록흔이 정신을 집중할수록, 그것은 점점 밝아지고 선명해졌다.
“가광이 흘리고 간 부스러기일 터, 하지만 산 자의 세상이다. 그만 돌아가라!”
치치치칙, 쩌저적!
록흔이 투명한 강막에 손을 대자마자, 힘의 균형은 큰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쉬이익!
신선한 공기가 빠른 속도로 류안을 감쌌다.
그르르…….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무너져 녹았다.
풀썩!
류안은 순식간에 먼지로 변해 풀썩 내려앉았다.
“이럴 수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류안의 유해가 바람결에 날아가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록흔은 재빨리 향로 뚜껑을 열었다.
샤샤삭.
서글픈 가루는 향로 안으로 남김없이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류안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미약한 바람뿐이었다.
“부디, 사부님 곁으로.”
바람결에 스치듯 들은 것도 같았다, 고맙단 가냘픈 인사. 록흔은 눈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류안은 이미 가고 없는데 마음은 애잔했다. 세상엔 닮은 이가 이리 많은지, 겹쳐지는 부모 생각이 애젊은이의 심금을 울렸다.
‘도대체 어딜 간 건가?’
월한은 새치름한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이곳도 저곳도, 없었다. 호분중랑장의 흰 옷자락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수상한 내가 나는 아이…….’
연록흔으로 인해 사늘하기만 한 봉안에 웃음기 풀릴 때마다, 월한은 비린 냄새 맡고 오각을 곤두세웠다.
‘없다.’
월한은 각진 시선으로 주연이 한참인 진세전을 샅샅이 훑었다. 그래도 역시 보이지 않았다.
‘황상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호분중랑장의 소임. 헌데 폐하 계신 곳에서 자리를 떠 보이다니……. 발칙한 것!’
순간 월한과 가륜의 눈이 마주쳤다. 가슴 찔린 것 같아,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습관적인 예의라기보다는 사모하는 마음의 발로였다.
‘폐하…….’
봉안에 어린 빛, 일별임에도 월한에게 사모하는 마음과 더불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자리건만, 황제는 도무지 기쁜 것 같지 않았다. 웃더라도 차가운 눈에 싸늘한 빛을 더할 뿐. 그건 진정한 미소가 아니었다.
‘연록흔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아야겠다.’
월한은 주연에서 잠시 물러 나왔다. 왠지 그 아이를 꼭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성은 모르나 감성이 그리 명했다. 그녀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사박사박.
타박타박.
탁, 탁, 탁!
무엇에 홀린 듯 발이 점점 빨라졌다. 월한은 정신없이 내달았다. 한참을 달렸을까? 느닷없이 발동 걸린 것처럼 서는 것도 급작스러웠다. 우뚝 멈춰 선 곳, 놀랍게도 휘록전이었다.
‘여기는……?’
왜 이리 왔는지는 저도 몰랐다. 심장 저 밑바닥에서 올라온 소리에 따랐으나, 그걸 입 밖에 낼 만큼 어린 월한이 아니었다. 황제의 탄일 주연으로 들썩이는 진세전과는 달리 한궁인 휘록전은 고즈넉했다. 문지기 홀로 번을 서고 있을 뿐이었다.
‘저건…….’
월한의 눈이 사납게 올라갔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심경이 급히 뒤집혔다.
‘모든 게 끝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기척을 보냈으니, 널 음해하는 자가 곧 올 것이다.’
급속도로 부패한 육신과 함께 류안은 가고 없지만, 가광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음습한 공기를 음산한 음파가 긁어 댔다.
“좋으실 대로. 여기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나도 없거든.”
록흔은 향로를 추스르며 빈정거렸다. 더러운 마음 가진 자들이 누군가의 생을 바수는 걸 알기에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건방진 놈! 내가 널 곱게 보내 줄 성싶으냐?’
어쩌면 그것이 실수였다.
타앗!
마도굴에서의 이력이 죽은 영들을 두렵지 않게 만든 탓. 록흔은 망자의 염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간과하고 말았다.
튜우우욱!
탁한 기운이 빠른 속도로 몰아쳐 록흔을 뚫고 지나갔다.
“큭!”
찰나, 록흔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피가 타고 뼈가 바스러져도 이렇지는 않을 터. 극심한 통증은 임계점을 넘어갔다.
‘곱게 죽이지 않는다. 피가 졸아들 때까지, 뼈가 우그러질 때까지…… 괴롭혀 주마. 넌 이미 중독됐다.’
승냥이가 짐승 뼈를 갉아 댄다. 여우가 해골을 빨아 댄다. 록흔의 귀에는 사념의 표독스러움이 그리 들렸다. 하지만 갈무리한 것은 놓치지 않았다. 유해가 들은 향로는 아직 안전했다.
‘이자가…….’
사념이 지껄인 대로 중독된 모양이었다. 장독과도 같은 원리일 터.
‘젠장…….’
이치인즉슨 이렇다. 오랜 세월, 외부와 차단된 강막 안에서 시체는 썩지 않았다. 그것이 갑작스레 부패하니 정제를 거듭한 어느 독보다 강했다. 밀폐된 공간이 터지매 농축된 극독이 쏟아지고, 곧 사념이 휘몰아 들이붓는 대로 효한하게 뿌려졌다.
‘어서 이곳을 나가야 한다.’
어지러움 속에서 록흔은 그리 중얼거렸다.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허예진 입술에 그대로 실렸다.
“너 무엇을 하는 게냐!”
그때였다. 월한의 음성이 휘록전 밖에서 들렸다. 분노가 가득 담긴 것이 음주 중인 문지기를 닦달하는 듯했다.
‘월한한테 발각되면…….’
일이 크게 불리해진다. 록흔은 혼미한 의식을 떨어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몇 갑절은 무거워 버겁기만 했다.
휙!
록흔은 몸을 날렸다. 들끓어 오르는 열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죽더라도 유해는 무사히…….’
사부의 유지가 록흔을 간신히 지탱했다.
‘죽을 것 같으냐? 괴로우냐? 눈 허옇게 뒤집다 죽으려무나. 으하하하!’
록흔은 눈을 감았다. 되받아칠 기운이 없었다. 향로를 움켜쥔 손이 발발 떨렸다. 그는 비치적거리며 겨우 몸을 옮겼다.
“네 이놈!”
쨍그랑!
사납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병 하나가 깨졌다.
“번서는 중에 술이라니! 목숨이 몇이더냐?”
월한이 표독스레 다그치자 문지기는 머리만 연신 주억거렸다. 그에게서 진동하는 술내가 역했다. 일순, 너울 아래 숨은 얼굴이 크게 구겨졌다. 더 호되게 나무라려고 막 입을 열던 차, 그녀는 월장하는 이를 보았다.
“누구냐!”
하늘거리는 옷자락! 분명 여인이었다.
“거기 서라!”
월한은 재빨리 반월침을 꺼냈다.
핑!
인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을 닮은 암기가 날았다.
팟!
잇따라 쏟아지는 반달의 비라서, 검은 하늘에 황금빛 궤적이 그어졌다.
타닥!
월한은 재빠르게 월담했다. 휘록전 밖은 드넓은 정원이었다. 휘 둘러보니 살아 움직이는 것은 전무했다.
“빗나갔나? 맞았다면 멀리 못 갔을 터인데.”
반월침은 극악의 암기였다. 반달의 양날 끝에 인두사의 맹독이 묻어 있어 닿기만 해도 치명적이었다. 혈관에 스미는 경우에는 목숨 보존이 어려웠다.
“제깟 게 가 봤자…….”
검은 너울이 칼바람을 먹고 부풀었다. 팔락팔락, 새하얀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
탁, 탁, 탁!
가는 몸이 어두운 정원을 맵차게 뚫고 사라졌다. 날쌍한 하늘에 눈발이 성글게 일었다. 사락사락, 눈꽃이 한 송이 두 송이 날리기 시작했다.
열이 높았다. 피가 끓어올랐다. 숨이 가빴다.
‘젠장…….’
맥이 팔딱팔딱 뛰었다. 하도 급히 뛰놀아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디지?’
록흔은 부연 시야로 현재 있는 곳을 살폈다. 열 오른 눈이라 주위의 모든 사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락사락.
작은 것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릿나릿 움직였다. 그러나 안개 속인 양, 록흔이 잘 보려 애써도 어룽어룽 뭉뚱그려져 갑갑하기만 했다.